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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리스본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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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55년 리스본 지진은 1755년 11월 1일 만성절 아침,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발생한 강력한 지진이다. 지진으로 리스본의 85%가 파괴되었고, 쓰나미가 도시를 덮쳐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다. 지진은 유럽 전역과 북아프리카, 카리브해까지 감지되었으며, 포르투갈뿐 아니라 알가르브 등 국가 남부 지역에도 광범위한 피해를 입혔다. 이 지진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종교적, 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정치 및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폼발 후작의 재건 노력과 지진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통해 현대 지진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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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리스본 지진
지도 정보
1755년 리스본 지진 위치
위치
지진 개요
명칭1755년 리스본 지진
현지 날짜1755년 11월 1일
현지 시간09시 40분
규모7.7–9.0 Mw (추정)
진원 깊이불명
진앙 위치36° N, 11° W
진앙 설명상비센트 곶 서남서쪽 약 200km, 리스본 서남쪽 약 290km 해상
최대 진도MMI XI
피해 국가포르투갈, 스페인, 모로코. 쓰나미는 영국 남부와 아일랜드에 영향을 줌.
사망자40,000–50,000명
관련 단층아조레스-지브롤터 변환 단층
발생 원인
지진 유형해구형 지진 (아조레스-지브롤터 단층대를 진원으로 함)
기타 정보
관련 사건화재, 쓰나미, 산사태
지속 시간불명

2. 지진 발생과 쓰나미

1755년 11월 1일 만성절 아침, 리스본에 지진이 발생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지진은 3분 30초에서 6분 동안 지속되었으며, 도시 중심부에는 폭 5m의 균열이 생겼다. 생존자들은 안전을 찾아 부둣가로 이동했지만, 바닷물이 빠져나가면서 갯벌이 드러나는 현상을 목격했다. 지진 발생 약 40분 후, 쓰나미가 항구와 도심을 덮쳤고, 테주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60] 이후 두 번의 파도가 더 밀려왔다.

지진의 충격은 유럽 전역에서 느껴졌으며,[61] 베네치아 감옥에 있던 카사노바도 이를 느꼈다.[62] 충격파는 북쪽으로 핀란드, 남쪽으로 북아프리카까지 도달했고, 그린란드[63]카리브해[64]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도 있다. 20m 높이의 쓰나미가 북아프리카 해안을 휩쓸었고, 대서양 건너 마르티니크바베이도스를 강타했다. 잉글랜드 남부 콘월에는 3m 높이의 쓰나미가, 아일랜드 골웨이에는 도시 성곽 일부를 파괴할 정도의 쓰나미가 발생했다.[64]

리스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해일의 진행을 계산한 도표


지진학자와 지질학자들은 진앙이 이베리아 반도 서쪽 대서양에 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논쟁 중이다. 1992년 아조레스-지브롤터 변환 단층을 조사한 결과, 상비센트 곶 남서쪽 50km 지점에서 1km 이상 이동한 역단층이 발견되었다. 이 구조가 주요 지진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14]

쓰나미가 닥치기 전, 동물들이 높은 곳으로 피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지진 관련 동물의 이상 행동 사례이다.

2. 1. 지진의 발생

1755년 11월 1일 아침, 만성절 축일에 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3분 30초에서 6분가량 지진이 지속되었으며, 도시 중심부에 폭 5m의 균열이 발생했다.[60] 생존자들은 안전을 위해 부둣가의 탁 트인 공간으로 달려갔지만, 바닷물이 빠져나가면서 갯벌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지진 발생 약 40분 후, 해일이 항구와 도심 지역을 덮쳤고, 테주 강(탕구스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5] "말을 탄 몇몇 사람들이 ... 휩쓸려 갈 것을 두려워하여 가능한 한 빨리 언덕 위로 질주해야 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 뒤를 두 개의 파도가 더 따라왔다.

1755년 화염에 휩싸인 리스본과 항구의 배들을 덮치는 쓰나미를 보여주는 구리 조각


당대 감사 기도는 무너진 벽돌 아래에서 세 살짜리 아이가 별의 성모 마리아의 자애로운 시선 아래 구조되는 모습을 묘사한다


지진의 충격은 핀란드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느껴졌으며,[9][10]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린란드[11]카리브해에서도 감지되었다.[12] 높이가 20m에 달하는 쓰나미가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휩쓸고 대서양 건너 마르티니크바베이도스를 강타했다. 3m의 쓰나미가 영국 남부 해안의 콘월을 강타했다. 아일랜드 서부 해안의 골웨이도 타격을 받아 도시 성벽의 "스페인 아치" 부분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지진학자와 지질학자들은 진앙이 이베리아 반도 서쪽 대서양에 있었다는 데 동의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논쟁의 대상이었다. 1992년 아조레스-지브롤터 변환 단층을 따라 해저에 대한 지진 반사 조사는 상비센트 곶 남서쪽에서 50km 길이의 역단층을 발견했는데, 이는 1km 이상의 주향 이동을 보였다. 이 구조는 주요 지진 사건을 일으켰을 수 있다.[14]

2. 2. 쓰나미의 발생과 피해



1755년 11월 1일 아침, 만성절에 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3분 30초에서 6분가량 지진이 지속되었고, 도시 한복판에 너비 5m의 균열이 발생하였다. 건물 붕괴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건물이 없는 탁 트인 곳이 안전할 것이라 판단하고 부둣가로 몰려갔으나, 바닷물이 후퇴하여 해저가 드러나고 배들이 좌초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지진 발생 약 40분 뒤, 해일이 항구와 도심지로 쇄도했고, 테주 강으로 역류했다.[60] 몇몇 사람들은 말을 타고 높은 곳으로 도망쳤다. 그 뒤 해일이 두 번 더 왔고, 해일이 덮치지 않은 곳에서는 화재가 발생해 5일 동안 이어졌다.

지진의 충격파는 유럽 전역에서 느낄 수 있었다.[61] 베네치아의 감옥에 갇혀 있던 카사노바도 충격파를 느꼈다.[62] 충격파는 북쪽으로는 핀란드,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에 이르렀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린란드[63]카리브해[64]까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높이 20m의 해일이 북아프리카 해안을 휩쓸었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마르티니크바베이도스에 이르렀다. 잉글랜드 남부 콘월에는 높이 3m의 해일이 찾아왔고, 아일랜드 서해안의 골웨이 역시 해일로 인해 도시 성곽 일부가 파괴되었다. 아일랜드 남해안 킨세일에서는 선박 여러 척이 항구 안으로 굴러들어오고 시내의 장터에 물이 들어찼다.[64]

NOAA의 2016년 애니메이션


2015년에는 쓰나미 파가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 해안에 도달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진 당시 브라질 당국이 보낸 편지에는 거대한 파도에 의한 피해와 파괴가 묘사되어 있다.[13]

쓰나미가 닥치기 전, 동물들이 높은 지대로 피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지진에 따른 동물의 이상 행동이 유럽에서 처음 기록된 사례이다.

3. 대재앙의 참상

1755년 리스본 지진은 11월 1일, 가톨릭 축일인 만성절에 발생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지진은 3분 30초에서 6분 동안 지속되었으며,[40] 리스본 중심부에는 폭 5m의 균열이 생기고 건물 85%가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겪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천부지나 항구의 독 등 탁 트인 곳으로 대피했지만, 지진 발생 약 40분 후 쓰나미가 닥쳤다.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바다에 떨어진 화물과 침몰한 난파선이 드러났다가, 곧이어 15m 높이의 쓰나미가 두 차례 밀려와 항구와 시가지를 덮쳤다.[41] 이로 인해 피난해 있던 약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화재가 발생했다. 건물들이 밀집해 있고 광장이 없어 좁은 골목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던 리스본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불길은 빠르게 번져나갔으며, 화염 선풍까지 발생하여 5일 동안 도시를 불태웠다.

타구스강 쪽에서 바라본 리스본 지진을 묘사한 그림.


포르투갈의 다른 도시들도 리스본과 비슷한 참상을 겪었다. 특히 국토 남쪽 절반, 알가르브 지방의 피해가 컸다. 남서쪽 끝 사그레스는 30m 높이의 쓰나미에 휩쓸렸다. 지진의 흔들림은 멀리 핀란드에서 아프리카 북부, 그린란드[42], 카리브해[43]까지 감지되었다. 모로코북아프리카 해안은 최대 20m 높이의 쓰나미에 휩쓸렸고, 잉글랜드 남부와 아일랜드 서부에도 3m 높이의 쓰나미가 발생하여 건물을 파괴했다. 골웨이의 스페니쉬 아치에는 쓰나미로 파괴된 흔적이 남아 있다. 대서양 건너 바베이도스마르티니크에도 쓰나미가 도달했다.

지진, 쓰나미, 화재로 인해 리스본은 도시 기능이 마비되고,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입었으며,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간직한 역사적 기록과 문화재들이 소실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3. 1. 인명 피해

경제사학자 알바루 페레이라(Álvaro Pereira)는 당시 리스본의 인구를 약 200,000 명으로 추산했는데, 그 중 30,000 ~ 40,000 명이 이 지진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했다. 모로코 해안에서도 10,000 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2009년에 이루어진 당시 기록 조사에 따르면, 11월 1일의 지진과 11월 18일의 국소적 지진에 대한 보고가 뒤섞여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 밝혀졌다.[66] 페레이라는 지진, 지진으로 인한 해일 및 화재로 인해 포르투갈, 에스파냐, 모로코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를 총 40,000 명에서 50,000 명으로 추산한다.[67][68]

당시 리스본 인구는 275,000명 이었으나, 최대 9만 명이 사망했다. 모로코에서도 쓰나미 등으로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어진 11월 18일~19일에 발생한 일련의 지진 피해가 합쳐졌을 가능성이 존재한다.[44]

11월 1일은 가톨릭의 축일(만성절)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흔들림은 3분 30초 ~ 6분 동안 지속되었다.[40] 리스본 중심부에는 폭 5m의 균열이 생겼고, 많은 건물(85%)이 무너졌다. 즉사한 시민은 2만 명으로 추정된다. 살아남은 시민들은 하천부지나 항구의 독 등의 빈터로 몰려들었지만, 지진 발생 약 40분 후, 쓰나미가 밀려와 항구와 시가지를 집어삼키고 테주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41] 15m 높이의 쓰나미가 다시 두 번 시가지로 밀려와 피난해 있던 약 1만 명의 시민을 덮쳤다. 쓰나미에 휩쓸리지 않은 시가지에는 불길이 치솟아 화염 선풍으로 번져, 이후 5일 동안 리스본을 불태웠다.

동물들이 쓰나미가 닥치기 전 높은 지대로 피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는 유럽에서 지진에 따른 동물의 이상 행동이 처음 기록된 사례이다.

3. 2. 건물 및 시설 피해

리스본 건물의 85%가 파괴되었는데, 여기에는 16세기 마누엘 양식(포르투갈의 고딕 양식) 건물, 유명한 궁전과 도서관이 포함되었다. 지진을 견뎌낸 건물들도 곧이은 화재로 파괴되었다. 지진 발생 6개월 전에 개장한 오페라 하우스는 불에 타 완전히 무너졌다. 타구스강 바로 옆에 있던 리베이라 궁전도 해일에 휘말려 파괴되었는데, 오늘날 그 자리에는 코메르시우 광장이 있다. 궁전 안에 소장되어 있던 장서 70,000여 권과 티치아노, 루벤스, 코레지오 같은 거장들의 미술품 수백 점이 모두 소실되었다. 바스쿠 다 가마를 비롯한 대항해시대 초기 탐험가들의 항해 기록 등 소중한 사료들 대부분이 왕실문서보관소에서 소실되었다. 귀중한 장서 18,000여 권이 소장되어 있던 엔히크 드 메네제스, 제3대 로우리잘 후작의 궁전도 파괴되었다.[17]

지진은 리스본 대성당, 상파울루 바실리카, 산타 카타리나, 상비센테 데 포라, 노사 세뇨라 다 콘세이상 벨랴 교회 등 리스본의 이름난 교회 건물들도 파괴했다. 당시 리스본 최대 규모의 병원이던 호시우 광장의 만성병원이 불길에 휩싸여 입원 중이던 환자 수백 명이 타죽었다. 국가 영웅인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의 무덤도 떠내려가 시신이 유실되었다. 오늘날에도 리스본을 찾으면 카르무 수도원을 비롯해 당시 파괴된 폐허들 중 보존된 것들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카르무 수도원의 폐허

3. 3. 화재 발생

1755년 11월 1일 만성절, 리스본에서는 지진 발생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탁 트인 곳으로 대피했지만, 곧이어 쓰나미가 닥쳐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쓰나미가 물러간 후에는 도시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는 지진으로 넘어진 촛불 등에서 시작된 것으로, 건물 밀집도가 높고 광장이 부족했던 리스본 시가지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빠르게 번져나갔다.

지진으로 리스본 건물의 85%가 파괴되었고, 살아남은 건물들도 대부분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진 발생 6개월 전에 개장한 오페라 하우스는 완전히 불탔고, 호시우 광장의 만성병원도 화재로 수백 명의 환자가 사망했다. 리스본 대성당, 상파울루 바실리카 등 주요 교회 건물들도 큰 피해를 보았다.

화재는 5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화염 선풍으로 번져 피해를 더욱 키웠다. 이로 인해 리스본은 도시 기능이 마비되고, 수많은 문화재와 역사적 기록들이 소실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4. 도시의 재건

1755년 12월 4일, 왕국의 수석 기술자 마누엘 다 마이아는 리스본 재건 계획을 제시했다. 마이아는 리스본을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방안에서부터 이전 건물 잔해를 재활용하는 방안까지 총 다섯 가지 안을 제시했다. 왕과 그의 대신들은 이 중에서 네 번째 안에 해당하는 바이샤 지구 전체를 철거하고 "제한 없이 새로운 거리를 조성"하는 방안을 채택했다.[21]

1년도 채 안 되어 도시의 잔해는 치워졌다. 새롭고 완벽하게 정돈된 도시를 원했던 왕은 큰 광장, 직사각형의 넓은 대로와 넓어진 거리를 건설하도록 위임했는데, 이것이 리스본의 새로운 "모토"였다.

퐁발 양식 건물은 유럽에서 가장 초기의 지진학적으로 보호된 건축물 중 하나이다. 작은 나무 모형을 만들어 시험했고, 그 주위를 군대를 행진시켜 지진을 시뮬레이션했다. 오늘날 퐁발리나 하 타운(''바이샤 퐁발리나'')으로 알려진 리스본의 "새로운" 하 타운은 이 도시의 유명한 명소 중 하나이다. 알가르브의 빌라 레알 드 산투 안토니우와 같은 다른 포르투갈 도시의 일부도 퐁발리나 원칙에 따라 재건되었다.

카사 피아는 1780년 마리아 1세(''아 피아''로 알려짐, "경건한 마리아")에 의해 설립되고 경찰 감독관 피나 마니케에 의해 조직된 포르투갈 기관으로, 1755년 리스본 지진의 사회적 혼란 이후 설립되었다. 이 기관의 목적은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들에게 쉼터와 학교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1760년에 새로운 왕실 거주지로 캄푸 데 오리케에 새로운 왕궁을 건설하자는 계획이 제안되었지만, 리스본의 캄푸 데 오리케 지역에 궁전을 짓는 것에 대한 우선순위나 관심이 부족하여 나중에 포기되었다.

4. 1. 왕가의 피난과 대응

주제 1세와 왕가는 지진 당시 해돋이를 보기 위해 리스본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지진 이후 폐소공포증을 겪게 된 주제 1세는 리스본 교외의 아주다 언덕에 천막과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지냈다. 왕의 폐소공포증은 평생 낫지 않았고, 그가 죽은 뒤에야 그의 딸 마리아 1세가 아주다 궁전 건설을 시작했다.[69]

리스본 지진의 여파로 처형이 이루어졌다. 약탈을 경고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호세 1세는 도시 여러 곳에 교수대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왕과 수상은 즉시 리스본 재건에 착수했다. 지진 발생 한 달 후인 1755년 12월 4일, 공학자 마누엘 다 마이아가 리스본 재건 계획을 발표했다. 마이아는 다섯 가지 안을 제시했는데, 주제 1세는 네 번째 안(바이자(시내 지역)를 완전히 없애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선택했다.[70] 총리 폼발 후작(세바스티앙 데 멜루)은 “죽은 자를 묻고 산 자를 치유하자”라는 모토로 재건 사업에 매진하였다.[71][72]

소방관들은 불길을 잡기 위해 사투를 벌였고,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은 시체가 썩어 역병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천 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들은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지선에 실려 바다 한가운데 수장되었다. 도시의 혼란을 막기 위해 군대가 동원되었고, 건강한 사람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고 도시 재건 사업에 투입했다. 교수대가 설치되어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공개 처형했는데,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되었다.[69]

4. 2. 폼발 후작의 재건 노력

지진학적으로 보호되는 나무 구조인 "가이올라 퐁발리나"(퐁발리나 케이지)의 모형으로, 퐁발리나 하 타운 재건을 위해 개발되었다.


왕과 수상은 리스본 재건에 즉시 착수했다. 지진 발생 1개월이 조금 지난 1755년 12월 4일, 공학자 마누엘 다 마이아의 계획안에 따른 리스본 재건안이 발표되었다. 마이아는 옛 리스본의 폐자재를 그대로 사용해 그 자리에 다시 도시를 짓는 것, 일부 거리들의 너비를 넓히는 것, 바이자(시내 지역)를 완전히 쓸어버리고 백지 상태에서 다시 도시를 짓는 것, 리스본을 아예 버리고 다른 곳에 새 도시를 짓는 것 등 다섯 가지 선택안을 제시했다. 주제 1세는 네 번째 안을 선택했으며,[70] 총리 폼발 후작(세바스티앙 데 멜루)은 “죽은자를 묻고 산 자를 치유하자”는 모토를 내세워 재건사업에 매진하였다.[71][72]

1년도 채 안 되어 도시의 잔해는 치워졌다. 새롭고 완벽하게 정돈된 도시를 원했던 왕은 큰 광장, 직사각형의 넓은 대로와 넓어진 거리를 건설하도록 위임했는데, 이것은 리스본의 새로운 "모토"였다.

퐁발 양식 건물은 유럽에서 가장 초기의 지진학적으로 보호된 건축물 중 하나이다. 작은 나무 모형을 만들어 시험했고, 그 주위를 군대를 행진시켜 지진을 시뮬레이션했다. 오늘날 퐁발리나 하 타운(''바이샤 퐁발리나'')으로 알려진 리스본의 "새로운" 하 타운은 이 도시의 유명한 명소 중 하나이다. 알가르브의 빌라 레알 드 산투 안토니우와 같은 다른 포르투갈 도시의 일부도 퐁발리나 원칙에 따라 재건되었다.

총리 세바스티앙 데 멜루(퐁발 후작)도 지진에서 살아남았다. 퐁발은 무슨 일을 해야 하냐는 질문에 "죽은 자를 묻고 산 자를 치료하라"[19]라고 답하고 구호 및 재건 노력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화재 진압대원들이 맹렬한 불길을 끄기 위해 파견되었고, 수천 구의 시신이 질병으로 퍼지기 전에 치우도록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팀이 명령을 받았다. 관습과 교회의 뜻에 반하여 많은 시신들이 바지선에 실려 바다에 묻혔다 타구스 강 어귀 너머로 수장되었다. 파괴된 도시의 혼란을 막기 위해 포르투갈 육군이 배치되었고, 약탈을 억제하기 위해 도시 주변의 높은 지점에 교수대가 건설되었으며, 30명 이상이 공개 처형되었다.[20] 군대는 많은 건장한 시민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고, 그들을 구호 및 재건 작업에 투입했다.

5. 역사에 미친 영향

대지진은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인텔리겐치아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국가였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중요한 종교적 축일인 만성절에 발생하여, 거의 모든 주요 교회가 파괴되면서 시민들 사이에 불안과 혼란을 야기했다. 신학자들은 이를 신의 심판으로 보았고, 철학자들은 종교적 원인과 메시지에 대해 추측했다.

이 지진은 포르투갈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쳐, 폼발 후작의 권력 강화와 귀족 세력 약화를 가져왔다. 경제적으로는 GDP의 32%에서 48%가 손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23] 국내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고 해외 식민지 확장 기세가 꺾였다.

폼발 후작은 지진 관련 자료 수집을 위해 전국 교구에 질문지를 배포했고,[76] 이 자료는 현대 과학자들이 지진을 재분석하는 데 사용되었다. 리스본 대지진은 현대 과학적 방식으로 조사된 최초의 지진으로 평가받는다.[77]

5. 1. 종교적, 철학적 논쟁

대지진은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많은 인텔리겐치아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리스본은 당대 유럽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도시였으며, 지진이 일어난 날은 만성절 축일이었다. 지진으로 리스본의 대형 교회들이 파괴되면서 기독교 교회와 국가의 권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신학자들은 지진을 천벌이라고 보았지만[73], 철학자들은 알파마 홍등가가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

《1755년 지진의 알레고리》. 왼쪽 위 구석에 천벌을 의인화한 천사가 불타는 검을 들고 있다.


계몽주의가 발흥하던 당시, 유럽 지식인들은 지진에 대해 신학자들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 볼테르는 《캉디드》 및 《리스본 재앙에 관한 시》에서 라이프니츠의 “최선의 세계”를 비판했다. 장 자크 루소는 대도시의 파괴가 자신이 주장하는 농촌의 자연적 삶의 정당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아도르노는 리스본 대지진이 18세기 사회에 미친 영향이 20세기 홀로코스트에 비견된다고 진단했다. 가톨릭의 중심지인 리스본 시민들이 만성절에 대성당에서 기도하던 중 지진으로 희생되면서,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는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은 유럽 문화사와 철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74]

이마누엘 칸트는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세 개의 저서를 출판했다. 젊은 시절 칸트는 지진에 매혹되어 자료를 수집하고, 지진의 원인을 기계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는 뜨거운 기체로 채워진 지하 동굴의 이동으로 지진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틀렸지만 지진 원인을 초자연적인 것이 아닌 자연적인 것에서 찾은 최초의 시도였다. 발터 벤야민은 칸트의 책들이 독일 과학적 지리학과 지진학의 시작이라고 평가했다.[75]

볼테르


지진은 유럽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볼테르는 《캉디드》와 《리스본 재앙에 관한 시》에서 "최선의 세계"라는 개념을 비판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리스본 지진이 볼테르를 라이프니츠신정론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썼다. 장 자크 루소는 지진 피해가 도시의 좁은 구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믿고, 도시를 반대하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했다.[24]

이마누엘 칸트는 1756년에 리스본 지진에 관한 세 편의 텍스트를 출판했다.[25] 그는 지진의 원인에 대한 이론을 공식화했는데, 이는 초자연적인 용어가 아닌 자연적인 용어로 지진을 설명하려는 최초의 체계적인 시도 중 하나였다. 발터 벤야민은 칸트의 저서가 독일 과학적 지리학과 지진학의 시작이라고 평가했다.

베르너 하마허는 지진의 결과가 철학의 어휘로 확장되어, 철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기초"라는 은유가 흔들리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적 기초적 확실성이 리스본 지진 이후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26]

당시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지진은 자연 현상이라기보다는 천벌이었다. 그러나 많은 교회를 지원하고 해외 식민지에 기독교를 선교해 온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왜 천벌을 받아야 했는지, 왜 축일에 지진의 직격탄을 맞아 많은 성당과 함께 도시가 파괴되고, 선인도 악인도 죄 없는 아이들도 똑같이 죽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18세기 신학철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장 자크 루소는 이 지진을 신벌이 아니라 문명의 오만함이 일으킨 인재라고 생각하고, 도시에 반대하며, 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생활 양식을 요구하는 논의에 인용했다. 또한 신의 선의를 의심하는 볼테르의 논리에 대해 신의 섭리를 변호하며, 이 지진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불행해도 신에게는 전체의 행복을 위한 어떤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모든 것은 선"이 아니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반론했다.

5. 2. 정치적 영향

지진은 포르투갈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1대 폼발 후작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 이 멜루 총리는 국왕의 총애를 받았지만, 귀족들은 그를 시골 지주의 아들로 업신여겼다. 총리는 부패하고 실질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고 여겼던 옛 귀족들을 싫어했다. 1755년 11월 1일 이전에는 권력과 국왕의 총애를 얻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있었지만, 폼발 후작의 유능한 대응은 낡은 귀족 파벌의 권력을 효과적으로 약화시켰다.[45] 그러나 국왕 주제 1세의 침묵적인 반대와 분노가 커져 1758년 국왕 암살 미수 사건과 그에 따른 강력한 아베이루 공작과 타보라 가문의 제거로 이어졌다.

재상 세바스티앙 데 카르발류 (후의 폼발 후작)는 지진 직후 "자, 죽은 자를 매장하고 생존자를 치료하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진다.[45] 그는 실용주의를 가지고 즉시 구명과 재건에 착수했다. 그는 소방대를 조직하여 시가지로 보내 화재를 진압하고, 또한 역병이 퍼지기 전에 수천 구의 시체를 처리하도록 군대에 명령했다. 교회의 의견과 당시 관습에 반하여, 시체는 바지선에 실려 테주 강 하구에서 수장되었다. 폐허의 도시에 무질서, 특히 약탈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 주변의 언덕 위에 교수대가 만들어져 30명 이상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46]

지진 이후, 재상과 왕은 건축가와 기술자를 고용하여 1년 이내에 리스본에서 폐허는 사라지고, 곳곳이 건축 현장이 되었다. 왕은 새로운 리스본을 완벽하게 질서 정연한 도시로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 큰 광장과 직선형의 넓은 도로가 새로운 리스본의 모토가 되었다. 당시, 이렇게 넓은 거리가 정말 필요한지 재상에게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재상은 "언젠가 이것도 좁아질 것"이라고 대답했다(현재 리스본의 교통 혼잡은 그의 선견지명을 보여준다).[47]

당시 재상의 지휘하에 세워진 퐁발 양식 건축은 유럽 최초의 내진 건축이기도 하다. 이렇게 리스본의 새로운 다운타운, 통칭 "바이샤 폼발리나"(퐁발의 구시가지)가 만들어져, 신흥 계급인 부르주아지가 도시 중심부로 진출해 갔다.

이 지진을 계기로 "잃어버린 250년"의 장기 쇠퇴의 길이 시작되었다.[48] 귀족층은 재상을 중용하는 국왕 주제 1세에 대한 반감과 원한을 키웠고, 1758년에는 국왕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재상은 귀족 숙청에 나섰다. 지진의 원인을 리스본 사람들의 "죄"에 있다고 한 예수회도 포르투갈 영토에서 추방되어 재산을 국고에 몰수당했다. 예수회의 지도자 가브리엘 말라그리다는 지하 감옥에 유폐된 후 이단 심문을 받고 처형되었다.[49] 이후, 적이 없어진 재상은 계몽 전제주의를 펼치며 포르투갈을 독재 지배했다.

5. 3. 경제적 영향

2009년 연구에 따르면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인해 포르투갈 GDP의 32%에서 48%가 손실된 것으로 추정되었다.[23] 또한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극 이후 수년간 물가와 임금은 불안정하게 유지되었다. 지진으로부터의 복구는 건설 노동자의 임금 프리미엄 상승으로 이어졌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진이 경제를 개혁하고 영국에 대한 경제적 반의존성을 줄이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이다."[23]

지진과 그 이후 발생한 쓰나미, 화재로 리스본의 대부분의 건물이 폐허가 되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해외 식민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또한, 국내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이전까지 활발했던 해외 식민지 확장 기세도 꺾이게 되었다.

5. 4. 지진학의 탄생

폼발 후작은 대지진에 대한 자료 수집을 위해 전국의 모든 교구에 지진과 그 결과에 관한 질문서를 배부했다. 질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76]

  • 지진이 언제 시작되어 얼마나 지속되었는가?
  • 충격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방향이 있었는가? 예컨대 남쪽인가 북쪽인가? 건물들이 더 잘 무너지는 방향이 있었는가?
  • 몇 명이나 죽었고 그 중 시체를 분간할 수 있는 이는 몇인가?
  • 바닷물이 처음에 솟아올랐는가 가라앉았는가? 또 평소에 비해 몇 핸드나 더 솟아올랐는가?
  • 만약 불이 났다면 불길이 얼마나 지속되었고 그 불길로 인해 입은 피해는 무엇인가?


질문지와 그에 돌아온 답변들은 오늘날에도 국립문서보관소인 토레 도 톰보에 보관되어 있다.[76] 이 자료들을 연구 및 교차검증한 결과,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리스본 대지진을 현대과학의 기준으로 재분석할 수 있었다. 지진 역사학자 찰스 데이비슨은 리스본 대지진을 현대의 과학적 방식으로 조사된 최초의 지진으로 평했다.[77]

이마누엘 칸트는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세 개의 저서를 출판했다. 지진에 매혹되었던 젊은 칸트는 관련된 모든 자료를 긁어모았고, 지진의 원인을 기계적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뜨거운 기체로 채워진 지하의 거대 동굴의 이동으로 인해 지진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결론적으로는 틀렸으나, 지진의 원인을 신의 천벌 따위 초자연적인 것이 아닌 자연적인 것에서 찾은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발터 벤야민은 칸트의 얇은 책들이 독일의 과학적 지리학의 태초이자 지진학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했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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