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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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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00년 바이에른 기병대에 입대하여 참모 장교, 사단장, 군단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3년 원수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폴란드 침공, 프랑스 공방전, 동부 전선, 발칸 전역 등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45년 미군에 포로로 잡혔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불기소 처분되었으며, 195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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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바이흐스, Generalfeldmarschall 시절 (1943-45년경)
바이흐스, Generalfeldmarschall 시절 (1943-45년경)
출생일1881년 11월 12일
출생지데사우, 독일 제국
사망일1954년 9월 27일
사망지본, 서독
서명
소속
국가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군대육군
복무 기간1900년–1945년
최종 계급육군원수
지휘
주요 지휘제1 기갑 사단
제13 군단
제2군
B 집단군
F 집단군
남동부 전선 사령부
참전
주요 전투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전투
바르바로사 작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베오그라드 공세
훈장
주요 훈장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
기타 정보
독일어 이름Maximilian Maria Joseph Karl Gabriel Lamoral Reichsfreiherr von Weichs zu Glon

2. 초기 생애 및 경력

데사우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란츠후트에 있는 제2 중기병 연대에 입대하여 거기서 중위로 진급했다. 1905년-1908년에는 연대장 부관을 역임했다. 뮌헨의 기병학교와 육군대학에서 배운 후, 바이에른 참모 본부 소속이 되었다. 1914년에 대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참모 장교로 바이에른 기병 사단에 배속되었다. 10월, 제4 바이에른 기병 여단의 부관으로 전속되었다. 1915년에는 제5 보병 사단 차석 참모, 종전 시기인 1918년에는 바이에른 제II 군단 참모가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제23 여단 참모로 전임했다. 1923년부터 3년간 제3 기병 사단 참모를 지냈다. 소령으로 진급한 후, 1923년에 제18 기병 연대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했다. 이어서 1928년까지 보병 학교의 전술 교관을 맡았다. 1928년 2월, 중령으로 진급하여 제18 기병 연대장으로 보임되었다. 1930년, 제1 기병 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같은 해 대령으로 진급하고, 1933년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3 군관구 보병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 제3 기병 사단장으로 보임되었다. 1935년, 바이크스의 지휘하에 있던 제3 기병 사단은 제1 기갑 사단으로 개편되었다. 같은 해 4월, 중장으로 진급했다. 1936년, 기병대장으로 진급했고, 이듬해 제XIII 군단장으로 보임되었다. 1939년 3월, 바이크스의 군단은 체코슬로바키아로 진주했다.

1938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밀히, 카이텔, 브라우히치, 레더 제독과 바이흐스 장군

2. 1. 제1차 세계 대전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1881년 데사우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900년 바이에른 기병대에 입대하여 란츠후트에 있는 제2 중기병 연대에서 중위로 진급했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는 연대장 부관을 역임했다. 뮌헨의 기병학교와 육군대학에서 배운 후, 바이에른 참모 본부 소속이 되었다. 1914년에 대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참모 장교로 바이에른 기병 사단에 배속되었다. 10월, 제4 바이에른 기병 여단의 부관으로 전속되었다. 1915년에는 제5 보병 사단 차석 참모, 종전 시기인 1918년에는 바이에른 제II 군단 참모가 되었다. 전쟁 후 그는 새로 창설된 ''국방군''에 남아 여러 참모 본부에서 근무했다.

2. 2. 전간기

데사우에서 태어난 바이흐스는 19세 때 란츠후트에 있는 제2 중기병 연대에 입대하여 중위로 진급했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 연대장 부관을 역임했다. 뮌헨의 기병학교와 육군대학에서 배운 후, 바이에른 참모 본부 소속이 되었고, 1914년에 대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참모 장교로 바이에른 기병 사단에 배속되었고, 10월에는 제4 바이에른 기병 여단의 부관으로 전속되었다. 1915년에는 제5 보병 사단 차석 참모, 1918년에는 바이에른 제II 군단 참모가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제23 여단 참모로 전임했다. 1923년부터 3년간 제3 기병 사단 참모를 지냈고, 소령으로 진급한 후 1923년에 제18 기병 연대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했다. 1928년까지 보병 학교의 전술 교관을 맡았고, 1928년 2월, 중령으로 진급하여 제18 기병 연대장으로 보임되었다. 1930년, 제1 기병 사단 참모장이 되었고, 같은 해 대령으로 진급했다. 1933년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3 군관구 보병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제3 기병 사단장으로 보임되었다.

1935년, 바이흐스의 지휘하에 있던 제3 기병 사단은 제1 기갑 사단으로 개편되었다. 같은 해 4월, 중장으로 진급했다. 1936년, 기병대장으로 진급했고, 이듬해 제XIII 군단장으로 보임되었다. 바이흐스의 귀족적이고 기병 출신이라는 이력은 독일의 현대화된 군대에서 이러한 군사 엘리트들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37년 10월, 그는 제13 군단을 지휘하게 되었고, 이 부대는 1938년 수데텐란트를 병합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1939년 3월, 바이크스의 군단은 체코슬로바키아로 진주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바이흐스(왼쪽에서 세 번째)와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오른쪽, 지도를 들고)는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바르샤바에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바이흐스는 자신의 군단 "바이흐스"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폴란드의 항복 이후, 그는 서부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A 집단군의 일부인 제2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프랑스 공방전 이후 그는 철십자 기사 십자장을 수여받고 ''대장''으로 진급했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바이흐스는 1940년 6월 프랑스에 있었다


그의 군대를 이끌면서 바이흐스는 나중에 발칸 전역에 참여했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즉 독일의 소련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제2군을 페도르 폰 보크의 중앙 집단군의 일부로 이끌도록 배정받았다. 그는 1941년 키예프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를 거쳐 뱌지마와 브랸스크 전투까지 제2군을 이끌었다.

바이흐스(오른쪽)는 1942년 9월 청색 작전 중 러시아에 있었다


1942년 청색 작전을 위해 바이흐스는 새로 창설된 B 집단군을 지휘하도록 배정되었다.[1] B 집단군은 잘무트의 제2군, 호트의 제4 기갑군, 파울루스의 제6군으로 구성되었다.[1] 독일군 외에도 B 집단군에는 제2 헝가리군, 제8 이탈리아군, 제3군 및 제4 루마니아군이 포함되었다.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고 약 800km의 전선을 담당하도록 배정되었다.[1]

소련의 천왕성 작전으로 그의 측면에 있던 루마니아군이 돌파당하면서 스탈린그라드 내의 제6군이 포위되었다. 후퇴를 제안한 바이흐스는 히틀러의 호의를 잃었다. 그 결과, B 집단군의 일부는 바이흐스의 지휘에서 벗어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새로운 "도네 강 집단군"에 통합되었다. 나중에 2월에는 나머지 부분이 돈 집단군과 합쳐져 만슈타인이 다시 지휘하는 새로 부활한 남부 집단군이 되었다. 바이흐스는 지휘권을 해임당했다.

바이흐스는 1943년 2월 1일 ''원수''로 진급했다. 1943년 8월, 바이흐스는 발칸 반도의 F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현지 유격대 집단을 상대로 작전을 지휘했다. 1943년 8월부터 바이흐스는 또한 독일이 점령한 그리스와 발칸 반도(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트라키아)의 최고 사령관인 OB 쥐트오스트였다. 그의 본부는 처음에는 베오그라드에 있었고, 1944년 10월 5일부터는 부코바르에 있었다. 1944년 4월, 바이흐스는 헝가리에 주둔한 모든 독일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말, 그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대부분 지역에서 독일군의 철수를 감독했다.

3. 1. 폴란드 침공 및 프랑스 침공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바이흐스는 자신의 군단 "바이흐스"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폴란드 항복 이후, 그는 서부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A 집단군의 일부인 제2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프랑스 공방전 이후 그는 철십자 기사 십자장을 수여받고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의 군대를 이끌면서 바이흐스는 나중에 발칸 전역에 참여했으며,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제2군을 페도르 폰 보크의 중앙 집단군의 일부로 이끌도록 배정받았다. 그는 1941년 키예프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를 거쳐 뱌지마와 브랸스크 전투까지 제2군을 이끌었다.

3. 2. 발칸 전역 및 독소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바이흐스는 자신의 군단 "바이흐스"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폴란드 항복 이후, 그는 서부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A 집단군의 일부인 제2군 사령관이 되었다. 프랑스 공방전 이후 그는 철십자 기사 십자장을 수여받고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의 군대를 이끌면서 바이흐스는 발칸 전역에 참여했으며,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제2군을 페도르 폰 보크의 중앙 집단군의 일부로 이끌도록 배정받았다. 그는 1941년 키예프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를 거쳐 뱌지마와 브랸스크 전투까지 제2군을 이끌었다.

1942년 청색 작전을 위해 바이흐스는 새로 창설된 B 집단군을 지휘하도록 배정되었다.[1] B 집단군은 잘무트의 제2군, 호트의 제4 기갑군, 파울루스의 제6군으로 구성되었다.[1] 독일군 외에도 B 집단군에는 제2 헝가리군, 제8 이탈리아군, 제3군 및 제4 루마니아군이 포함되었다.[1]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고 약 800km의 전선을 담당하도록 배정되었다.[1]

천왕성 작전으로 그의 측면에 있던 루마니아군이 돌파당하면서 스탈린그라드 내의 제6군이 포위되었다. 후퇴를 제안한 바이흐스는 히틀러의 호의를 잃었다. 그 결과, B 집단군의 일부는 바이흐스의 지휘에서 벗어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새로운 "도네 강 집단군"에 통합되었다. 나중에 2월에는 나머지 부분이 돈 집단군과 합쳐져 만슈타인이 다시 지휘하는 새로 부활한 남부 집단군이 되었다. 바이흐스는 지휘권을 해임당했다.

바이흐스는 1943년 2월 1일 ''원수''로 진급했다. 1943년 8월, 바이흐스는 발칸 반도의 F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현지 유격대 집단을 상대로 작전을 지휘했다. 1943년 8월부터 바이흐스는 또한 독일이 점령한 그리스와 발칸 반도(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트라키아)의 최고 사령관인 OB 쥐트오스트였다. 그의 본부는 처음에는 베오그라드에 있었고, 1944년 10월 5일부터는 부코바르에 있었다. 1944년 4월, 바이흐스는 헝가리에 주둔한 모든 독일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말, 그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대부분 지역에서 독일군의 철수를 감독했다.

3. 3. 발칸 전선 및 종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독일의 폴란드 침공 준비를 위해 바이흐스는 자신의 군단 "바이흐스"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폴란드 항복 이후, 그는 서부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A 집단군의 일부인 제2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프랑스 공방전 이후 그는 철십자 기사 십자장을 수여받고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의 군대를 이끌면서 바이흐스는 나중에 발칸 전역에 참여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제2군을 페도르 폰 보크의 중앙 집단군의 일부로 이끌도록 배정받았다. 그는 1941년 키예프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를 거쳐 뱌지마와 브랸스크 전투까지 제2군을 이끌었다.

1942년 청색 작전을 위해 바이흐스는 새로 창설된 B 집단군을 지휘하도록 배정되었다.[1] B 집단군은 잘무트의 제2군, 호트의 제4 기갑군, 파울루스의 제6군으로 구성되었다. 독일군 외에도 B 집단군에는 제2 헝가리군, 제8 이탈리아군, 제3군 및 제4 루마니아군이 포함되었다.[1]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고 약 800km의 전선을 담당하도록 배정되었다.

소련의 천왕성 작전으로 그의 측면에 있던 루마니아군이 돌파당하면서 스탈린그라드 내의 제6군이 포위되었다. 후퇴를 제안한 바이흐스는 히틀러의 호의를 잃었다. 그 결과, B 집단군의 일부는 바이흐스의 지휘에서 벗어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새로운 "도네 강 집단군"에 통합되었다. 나중에 2월에는 나머지 부분이 돈 집단군과 합쳐져 만슈타인이 다시 지휘하는 새로 부활한 남부 집단군이 되었다. 바이흐스는 지휘권을 해임당했다.

바이흐스는 1943년 2월 1일 ''원수''로 진급했다. 1943년 8월, 바이흐스는 발칸 반도의 F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현지 유격대 집단을 상대로 작전을 지휘했다. 1943년 8월부터 바이흐스는 또한 독일이 점령한 그리스와 발칸 반도(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트라키아)의 최고 사령관인 OB 쥐트오스트였다. 그의 본부는 처음에는 베오그라드에 있었고, 1944년 10월 5일부터는 부코바르에 있었다. 1944년 4월, 바이흐스는 헝가리에 주둔한 모든 독일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말, 그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대부분 지역에서 독일군의 철수를 감독했다.

1945년 5월 2일, 바이에른주에탈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발칸반도 점령 당시의 전쟁 범죄 혐의로 국제 군사 재판소에 기소되었지만, 건강 상태 악화를 이유로 석방되어 불기소 처분되었다. 은둔지인 본 근교 레스베르크 성에서 사망했다.

4. 전후

바이흐스는 1945년 3월 25일 군 경력에서 은퇴했으며, 5월에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2]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그는 전쟁 범죄와 관련되어 레지스탕스 진압 중 전쟁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았다.[2] 그러나 재판이나 판결 없이 건강상의 이유로 미 육군의 포로 재판에서 제외되었다.[2]

1947년 포로 재판 당시 바이흐스(오른쪽)


바이흐스는 1954년 9월 27일 서독 본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5. 진급 내역

바이흐스는 1900년 7월 15일 사관후보생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1902년 3월 12일에는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1911년 3월 3일 대위로 진급하였다. 이후 1914년에 다시 한번 대위로 진급하였고, 1921년 2월 1일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1928년 2월 1일에는 중령으로, 1930년 11월 1일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1933년 4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1935년 4월 1일 중장을 거쳐 1936년 10월 1일 기병대장으로 진급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 7월 19일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43년 2월 1일 원수 계급까지 진급하였다.

6. 서훈 내역


  • 1914년 철십자 훈장 2급 (1914년 9월 20일) 및 1급 (1915년 11월 12일)[4]
  • 1939년 철십자 훈장 약장 2급 (1939년 9월 18일) 및 1급 (1939년 9월 29일)[4]
  •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 *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1940년 6월 29일) 기병대장 및 제2군 사령관[5]
  • * 오크 잎 (1945년 2월 5일) 원수, F 집단군 및 OB Südost 사령관[5]

참조

[1] 서적 With Paulus at Stalingrad Pen and Sword Books Ltd.
[2] 웹사이트 Subsequent Nuremberg Proceedings, Case #7, The Hostage Case https://encyclopedia[...] 2023-09-24
[3] 뉴스 VON WEICHS IS DEAD; A NAZI COMMANDER https://www.nytimes.[...] 2023-09-24
[4] 문서
[5] 문서
[6] 웹사이트 Lexikon der Wehrmacht - Maximilian Freiherr von Weichs http://www.lexikon-d[...] 2017-07-23
[7] 웹사이트 Notice de personne "Weichs, Maximilian Freiherr von (1881-1954)" http://catalogue.bnf[...] BnF Catalogue général -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2017-07-23
[8] 문서 帝国男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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