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타이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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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로타이섬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4년 9월 15일, 연합군이 필리핀 진격을 위한 거점 확보를 위해 인도네시아 모로타이섬을 공격하여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할마헤라섬에 방어의 중점을 두어 모로타이섬에는 소규모 병력만 배치했다. 연합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공군 및 해군 지원을 통해 섬을 점령하고, 비행장 건설을 통해 주요 군사 기지로 개발했다. 이후 모로타이섬은 레이테섬 전투 등에서 공습 거점 및 후방 기지 역할을 수행했으며, 일본 제2군의 항복식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전투 이후에도 일본군 잔류병이 발견되었으며, 모로타이섬은 연합군과 네덜란드 식민 정부에 의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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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타이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전투명 | 모로타이섬 전투 |
| 분쟁 | 필리핀 전역(1944년~1945년) |
| 시기 | 1944년 9월 15일 - 1944년 10월 4일 (초기), 종전까지 간헐적인 전투 지속 |
| 장소 |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 북할마헤라 해안의 모로타이섬 |
| 결과 | 연합군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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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
| 지휘관 | |
| 연합군 지휘관 | 존 C. 퍼슨스(육상, 9월 23일까지) 클라렌스 A. 마틴(육상) 대니얼 E. 바비(해군) |
| 일본군 지휘관 | 가와시마 다케노부 (초기 지휘관) 오우치 기소우 (10월 12일부터, 포로)33rd Infantry Division Historical Committee (1948), p. 73. |
| 전력 | |
| 연합군 전력 | 57,020명 (초기 투입 병력) |
| 일본군 전력 | 연합군 침공 당시 약 500명, 이후 증원 |
| 사상자 | |
| 연합군 사상자 (초기 침공 기간) | 사망 30명 부상 85명 실종 1명 |
| 일본군 사상자 (초기 침공 기간) | 사망 300명 이상 포로 13명 |
| 관련 전투 | |
2. 배경
태평양 전쟁 중 뉴기니 방면에서 진공 작전을 실시해 온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미 육군 주체의 연합군 남서 태평양 방면군은 1944년 후반 마침내 필리핀을 진공하기로 결정했다. 그 첫 단계로 필리핀 방면의 전략 거점의 확보가 필요하였으며, 뉴기니 서쪽에 위치한 말루쿠 제도의 모로타이섬을 공격 목표로 정했다. 또한 동시에 팔라우 제도의 펠렐리우섬과 앙가우르섬에도 미국 해군 주도의 연합국 중부 태평양 방면군이 공략을 맡았다.(''이때의 전략 결정의 경위에 대해서는 필리핀 전투 (1944-1945년)#미국을 참조.'')
1942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부였던 모로타이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후 강력한 수비대를 배치하지 않았다. 1944년 말루쿠 제도 방면의 방비 강화를 도모하고자 파견된 제32사단은 평야가 많은 비행장 건설에 적합한 주변의 할마헤라섬을 방어의 중심으로 여겼다. 따라서 모로타이섬에는 제32사단의 2개 대대가 비행장 건설을 추진했지만, 배수가 좋지 않아 건설을 포기했다. 이 2개 대대가 할마헤라섬으로 철수한 이후에는 카와시마 타케노부 중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제2유격대 소속의 2개 중대(주로 다카사고의용대)만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마쓰오 히로시소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모로타이섬 해군 감시소도 있어, 전탐(레이더) 2기를 배치했다.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섬에는 9,000명의 현지인이 살고 있었다. 도민에 대한 선무 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연합군의 상륙 부대에는 네덜란드 군 민정반이 추가 되었다.
모로타이 섬은 인도네시아 동부 말루쿠 제도에 속하는 할마헤라 군도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섬 내부 대부분은 험준하고 울창한 정글로 덮여 있다. 모로타이 섬 남서쪽 코너에 있는 도로에바 평원은 섬에 몇 안 되는 저지대 지역 중 가장 넓다. 전쟁 발발 전 모로타이 섬의 인구는 9,000명이었으며 상업적으로 개발되지 않았다. 이곳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부였으며 테르나테 술탄국을 통해 네덜란드에 의해 통치되었다. 일본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캠페인 기간인 1942년 초 모로타이 섬을 점령했지만 주둔하거나 개발하지는 않았다.[2]
1944년 초, 모로타이 섬은 일본군에게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일본군이 필리핀 남쪽으로의 접근을 방어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더 큰 섬인 인접한 할마헤라를 개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3] 1944년 5월, 일본 제국 육군의 제32사단이 섬과 9개의 활주로를 방어하기 위해 할마헤라에 도착했다.[3] 이 사단은 중국에서 이들을 수송하던 다케 이치 호송대가 미국의 잠수함 공격을 받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4] 제32사단의 제211보병연대 소속 2개 대대가 도로에바 평원에 활주로를 건설하기 위해 처음에는 모로타이 섬에 배치되었다. 7월 중순에 두 대대 모두 할마헤라로 철수했지만, 배수 문제로 인해 활주로는 버려졌다.[5] 연합군의 암호 해독 요원들은 할마헤라에서 일본군의 증강과 모로타이 섬의 취약한 방어 태세를 감지하고 관련 계획 담당자들에게 이 정보를 전달했다.[6]
1944년 7월, 남서태평양 지역 사령부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1월 15일로 계획된 필리핀 민다나오 섬 해방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공군 기지와 해군 시설의 위치로 모로타이 섬을 선택했다. 모로타이 섬은 개발되지 않았지만, 더 크고 방어가 훨씬 잘 되어 있는 할마헤라 섬은 점령하고 확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판단하여 할마헤라 섬보다 선호되었다.[7] 모로타이 섬 점령은 작전명 트레이드윈드로 지정되었다. 상륙은 미국 태평양 함대의 주력이 잠재적인 일본군의 반격으로부터 두 작전을 동시에 보호할 수 있도록 제1해병사단의 펠렐리우 전투 상륙과 같은 날인 1944년 9월 15일로 예정되었다.[8]
모로타이 섬에서 적은 저항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연합군 계획자들은 도로에바 평원의 비행장 부지 근처에 침공 부대를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섬 남서 해안에 있는 두 개의 해변이 적합한 상륙 지점으로 선택되었으며, 각각 레드 해변과 화이트 해변으로 지정되었다. 연합군 계획은 제31사단의 세 보병 연대 모두 9월 15일에 이 해변을 통해 상륙하여 평원을 확보하기 위해 신속하게 내륙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모로타이 섬의 내륙은 군사적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비행장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경계선을 넘어 진격할 의도가 없었다.[9] 비행장 및 기타 기지 시설 건설 계획 또한 상륙 전에 진행되었으며, 이러한 시설의 잠정적인 위치는 9월 15일까지 선택되었다.[10]
2. 1. 지정학적 중요성
태평양 전쟁 중, 뉴기니섬 방면에서 반격 작전을 펼쳐온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미국 육군 주체의 연합군 남서 태평양 방면군은 1944년 후반, 드디어 필리핀 침공에 착수하기로 했다. 그 첫걸음으로 필리핀 방면으로의 항공 작전 거점 확보가 필요하게 되어, 뉴기니 서쪽에 위치한 몰루카 제도의 모로타이섬이 공격 목표로 선정되었다.동시에 팔라우 제도의 펠렐리우섬과 앙가우르섬도 미국 해군 주체의 연합군 중부 태평양 방면군이 담당하여 공략하게 되었다. (''이때의 전략 결정 경위에 대해서는 필리핀 전투 (1944-1945년)#미국을 참조.'' )
한편, 1942년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부였던 모로타이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후 그다지 강력한 수비대를 배치하지 않았다. 1944년에 몰루카 제도 방면의 방비 강화가 도모되어, 제32사단이 파견되었지만, 수비의 중점은 평야가 많고 비행장에 적합한 옆의 할마헤라섬에 두어졌다. 모로타이섬에는 일단 제32사단의 2개 대대가 파견되어 비행장 건설을 진행했지만, 배수가 좋지 않아 건설은 포기되었다. 이 2개 대대는 할마헤라섬으로 철수했고, 후에는 가와시마 다케노부중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제2유격대 소속의 2개 중대 (주로 고사고 의용병)가 배치되었을 뿐이었다. 또한 마쓰오 히로시소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모로타이섬 해군 감시소도 있어, 전탐(레이더) 2기를 배치했다.
연합군의 상륙 시, 섬에는 9,000명의 현지인이 살고 있었다. 섬 주민에 대한 선무 공작을 실시하기 위해, 연합군의 상륙 부대에는 네덜란드군의 민정반이 더해졌다.
2. 2. 일본군의 방어 태세
연합군의 상륙 당시 모로타이섬은 약 500명의 일본군이 방어하고 있었다.[11] 주력 부대는 1944년 7월 12일부터 19일까지 섬에 도착하여 철수하는 제32사단의 대대를 대체한 제2임시 습격대였다.[11] 제2임시 습격대는 4개의 중대로 구성되었으며, 일본 장교와 포르모사 병사들로 구성되었다.[11] 그 외 보병, 군사 경찰 및 지원 부대 소규모 병력도 섬에 주둔했다.[11] 제2임시 습격대 사령관 가와시마 다케노부 소령은 부대를 섬 남서부에 배치하고, 소규모 부대로 모로타이 해안을 따라 감시 초소와 파견대를 설치했다.[11]이들 전초 기지 중 가장 큰 곳은 섬 북동쪽 끝의 소피 곶에 있었으며, 약 1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12]일본군은 효과적인 방어를 하기에는 너무 소규모로 널리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32사단은 연합군이 모로타이가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속이기 위해 가짜 캠프를 건설하고 다른 기만 전술을 사용했다.[5] 1942년 모로타이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후 강력한 수비대를 배치하지 않았다. 1944년 제32사단이 파견되었지만, 수비의 중점은 할마헤라섬에 두어졌다. 모로타이섬에는 제32사단의 2개 대대가 파견되어 비행장 건설을 진행했지만, 배수가 좋지 않아 포기되었다. 2개 대대는 할마헤라섬으로 철수했고, 가와시마 다케노부 중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제2유격대 소속의 2개 중대 (주로 고사고 의용병)가 배치되었다.[11] 마쓰오 히로시 소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모로타이섬 해군 감시소도 있었으며, 전탐(레이더) 2기를 배치했다.
2. 3. 연합군의 계획
1944년 후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국 육군 중심의 연합군 남서 태평양 방면군은 필리핀 침공을 위한 항공 작전 거점 확보를 위해 뉴기니섬 서쪽 몰루카 제도의 모로타이섬을 공격 목표로 설정했다.1942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부였던 모로타이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제32사단을 할마헤라섬에 집중 배치하고, 모로타이섬에는 가와시마 다케노부 중위가 지휘하는 제2유격대 소속 2개 중대(주로 포르모사 병사)와 모로타이섬 해군 감시소를 배치했다.
연합군 상륙 당시 모로타이섬에는 약 500명의 일본군이 방어하고 있었다.[11] 주력 부대는 1944년 7월 섬에 도착하여 철수하는 제32사단의 대대를 대체한 제2임시 습격대였다.[11] 제2임시 습격대는 일본 장교와 포르모사 병사들로 구성된 4개의 중대로 구성되었으며, 가와시마 다케노부 소령은 부대를 섬 남서부에 배치하고, 소규모 부대를 사용하여 모로타이 해안을 따라 감시 초소와 파견대를 설치했다.[11] 이들 전초 기지 중 가장 큰 곳은 섬 북동쪽 끝의 소피 곶에 있었으며, 약 1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12] 일본군은 효과적인 방어를 펼치기에는 너무 소규모로 널리 분산되어 있었으므로, 제32사단은 연합군이 모로타이가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속이기 위해 가짜 캠프를 건설하고 다른 기만 전술을 사용했다.[5]
모로타이에 배치된 연합군은 섬의 방어군보다 100배 이상 많았다.[13] 찰스 P. 홀 소장의 지휘 하에 8월 20일에 창설된 트레이드윈드 기동 부대는 40,105명의 미국 육군 병력과 16,915명의 미국 육군 항공대(USAAF) 및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공군(RAAF) 인원으로 구성되었다.[13] 미국 육군 제6군의 지휘를 받은 트레이드윈드 기동 부대의 주요 전투 부대는 제11군단 사령부, 제31보병사단과 제126 연대 전투단(RCT)이었으며, 공병대와 대규모 대공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13] 트레이드윈드 기동 부대는 섬을 주요 기지로 신속하게 개발하는 역할을 하는 대규모 건설 및 기타 통신 부대를 포함했으며, 제6보병사단은 예비대로 지정되었지만 뉴기니 본토에 남아 있었다.[13]
상륙 부대는 강력한 공군 및 해군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15] 미국 제5공군은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했으며, 제13공군과 제10작전단 RAAF는 NEI와 필리핀에서 전략적 임무를 수행했다.[15] 해군 부대는 제77기동부대로 지정되었으며, 2개의 공격 그룹, 4개의 증원 그룹, 지원 그룹 및 호위 항공모함 그룹으로 구성되었다.[16] 공격 및 증원 그룹은 상륙 부대와 후속 지원 부대를 수송하는 역할을 했으며, 24척의 구축함, 4척의 프리깃함, 2척의 호주 LSI, 5척의 APD, 1척의 LSD, 24척의 LCI, 45척의 LST, 20척의 LCT 및 로켓으로 무장한 11척의 LCI로 구성되었다.[16] 지원 그룹은 2척의 호주 중순양함, 3척의 미국 경순양함과 8척의 미국 및 2척의 호주 구축함으로 구성되었다.[16] 호위 항공모함 그룹은 6척의 호위 항공모함과 10척의 구축함 호위함으로 구성되었으며, 대잠전 및 공중 전투 초계를 제공했다. 제38.4기동부대는 2척의 항공모함, 2척의 경항공모함, 1척의 중순양함, 1척의 경순양함 및 13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되어 필요시 제77기동부대를 지원할 수 있었다.[16]
1944년 8월, 모로타이섬 인근 일본군 항공 전력을 제압하기 위한 예비 공습이 시작되었다.[17] 당시 연합군 정보국은 모로타이섬 643.7376km 이내에 582대의 일본군 항공기가 있으며, 이 중 400대가 목표 지역에 있다고 추정했다.[17] 연합군 항공기는 할마헤라, 셀레베스, 세람, 암본, 부루 및 기타 지역의 비행장을 대상으로 대규모 공습을 실시했다. 미국 해군 항공모함 탑재 항공기도 민다나오에 주둔한 일본군 항공 부대를 공격했으며, 할마헤라와 셀레베스에 추가 공격을 가했다.[17] 이러한 공격은 성공적이었으며, 9월 14일에는 모로타이섬 인근에 60대만 남은 것으로 추정되었다.[17]
기습 작전을 유지하기 위해 연합군은 상륙 작전 전 모로타이섬을 포격하지 않았으며, 섬 상공에 몇 차례의 사진 정찰 비행만 실시했다.[18] 6월에 연합군 정보국 정찰대가 섬에 상륙했지만, 그들이 수집한 정보는 제6군에 전달되지 않았다.[19] 트레이드윈드 기동 부대는 상륙 해변이나 일본군 위치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지만, 제6군은 자체 정찰대를 모로타이섬에 상륙시키지 않았다. 이는 정찰대가 섬의 방어군에게 공격이 임박했음을 경고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19]
트레이드윈드 기동 부대는 뉴기니 북서부의 여러 기지에서 상륙 호송대에 탑승하여 9월 초 아이타페와 와크데 섬에서 상륙 훈련을 실시했다.[20] 호송대는 9월 11일 마핀 만에 집결하여 다음 날 모로타이섬으로 출발했다. 항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호송대는 9월 15일 아침 일본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모로타이섬 해안에 도착했다.[20]
3. 전투 경과
3. 1. 연합군의 상륙 (1944년 9월 15일)
연합군은 미국 육군 지상군 4만 명, 미국 육군 항공군 1만 7천 명의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여 모로타이 섬 공략에 착수했다. 1944년 8월부터 9월에 걸쳐, 모로타이 섬 및 펠릴리우 섬 상륙 지원을 위해 필리핀 각지와 할마헤라섬, 술라웨시섬 등 주변 지역에서 기동 부대 탑재기 등에 의한 항공 격멸전이 벌어졌다. 다바오 오보 사건도 겹친 결과, 일본 측의 항공 전력은 괴멸되었다. 일본군에게 상륙 의도를 간파당하지 않도록, 모로타이 섬 자체에 대한 공습이나 항공 정찰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72]9월 15일 이른 아침, 미국 해군 제77기동 부대는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함정 2척을 포함한 순양함 5척과 호위 항공모함 6척 등으로 약 2시간의 사전 포격으로 상륙 지점을 공격했다.[21] 8시 30분, LST 45척 등의 수송 선단으로 미국 육군 제31사단의 3개 연대 전투단을 동원하여 모로타이 섬으로의 상륙 작전을 시작했다. 일본군 지상 부대의 저항은 없었지만, 진흙과 산호초가 상륙을 방해했다.[22] 이로 인해 작전이 지연되고 다량의 장비가 손상되었다.[25] 맥아더 장군도 상륙할 때 가슴 높이의 파도를 헤쳐야 했다.[26] D-데이 아침, 측량반은 모로타이 남쪽 해안의 해변이 LST에 훨씬 더 적합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블루 해변으로 지정하여 9월 16일부터 주요 연합군 상륙 지점이 되었다.[27]
9월 16일에 제31사단은 내륙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그날 오후 비행장 주변의 계획된 경계선을 확보했다.[28] 9월 17일부터 제126보병연대는 레이더 기지와 관측소를 설치하기 위해 모로타이 해안선과 인근 섬의 여러 지점에 상륙했지만, 일반적으로 저항을 받지 않았다.[28] 9월 18일경부터 일본군의 지상 반격이 있었지만, 모두 격퇴되었다.[23] 네덜란드령 동인도 민정청(NICA) 소속 부대가 상륙하여 모로타이의 민간인에 대한 네덜란드의 주권을 재확립하고, 많은 지역 민간인이 일본군의 배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미국 정찰대의 안내인 역할을 했다.[29]
10월 4일까지 미군은 섬 내 제압을 완료했다. 미군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 104명이 전사하고 13명이 포로가 되었다. 미군의 손실은 전사·실종 31명, 부상 85명이었다.[73] DDT 살포가 효과를 거두어 말라리아 등으로 인한 미군의 전상자는 소수로 억제되었다.
일본군의 역상륙을 경계한 미군은 곧바로 섬에 PT 보트 41척을 배치했다. 이들은 모로타이 섬 근해에서 200척 이상의 일본군 선박을 격침했다고 보고하고 있다.[73]
3. 2. 일본군의 반격
일본군은 제7비행사단 등의 육해군 항공 부대와 잠수함을 이용해 반격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연합군의 피해는 호위 구축함 셸턴이 뤼41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한 정도였다.[77] 할마헤라섬에서는 선박공병 제18연대의 주정을 이용해 제32사단의 역상륙 부대가 '돌입대'[74]로 파견되어 연합군 비행장에 방해 활동을 벌였다. 9월 26일 밤, 보병 제211연대와 제212연대에서 차출된 3개 중대 중 2개 중대가 상륙에 성공했다. 10월 초에는 보병 제210연대의 주력 550명이 대발동정 10척에 나눠 타고 역상륙을 시도했으나, 2척이 공습으로 격침되었다. 11월 16일, 보병 제211연대 주력 부대(모리타 요시테루 연대장 이하 500명)가 군기와 함께 상륙했다. 모리타 대좌는 제10파견대의 1개 대대(180명) 등 1,500명을 지휘하며 전투를 이어갔지만, 12월 중순에 전사했다.[75] 1945년 1월 10일, 보병 제210연대장 오우치 쿄 대좌가 모로타이섬에 진출하여 새로운 현지 지휘관이 되었다.항공기를 이용한 비행장 방해 공격과 소규모 역상륙은 필리핀 각지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지속되었다. 레이테섬에서는 의호작전의 일환으로 공수부대 강하도 검토되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76] 할마헤라섬에서 마지막 보급정이 도착한 것은 1945년 5월 하순이었고, 일본군의 마지막 공습은 1945년 6월 23일에 이루어졌다.[77]
3. 3. 연합군의 기지 건설
모로타이를 주요 군사 기지인 '''모로타이 해군 기지'''로 빠르게 개발하는 것은 작전의 핵심 목표였다. 침공 전 계획에서는 9월 15일부터 45일 이내에 3개의 대형 활주로를 건설하고, 첫 번째 활주로는 상륙 직후부터 가동할 계획이었다. 또한 60,000명의 공군 및 육군 병력, 1,900 병상 규모의 병원, 대량 연료 저장 및 처리 시설, 선박 접안 시설을 갖추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39] 이러한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트레이드윈드 기동 부대는 7,000명의 공병대 병력을 포함했으며, 이 중 84%는 미국인, 나머지는 호주인이었다.[10]모로타이가 확보되기 전에 기지 시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측량 부대는 9월 16일에 비행장 부지에 대한 통과 측량을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계획된 정렬이 실행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10] 일본 비행장을 완공하는 대신, 이곳은 정지되고 비상 "충돌 활주로"로 사용되었다. 첫 번째 신규 활주로(와마 비행장) 공사는 부지가 정지된 후 9월 23일에 시작되었다. 10월 4일까지 와마 비행장의 활주로는 1,524m를 운용할 수 있었으며, 보르네오의 발릭파판에 대한 중폭격기 공습을 지원했다. 와마 비행장과 평행하게 두 개의 활주로를 가질 피투 비행장의 건설은 9월 말에 시작되었고, 10월 17일까지 2,134m의 사용 가능한 활주로를 갖추었다.[40] 미국 제3함대가 계획된 레이테 상륙에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에서 철수함에 따라 10월 18일부터 건설 작업이 가속화되었다.[41] 11월에 3개의 대형 활주로와 174대의 중폭격기를 포함하여 253대의 항공기를 위한 계류장을 갖추었다.[42] 비록 공군 기지 건설에 마을 파괴가 필요했지만, 10월 1일부터 미국 및 호주 비행장 기술자들은 NICA 분견대에 의해 현지에서 모집된 약 350명의 노동자들의 지원을 받았다.[29]
활주로 건설과 동시에 다른 기지 시설도 건설되었다. 연료 저장 시설 공사는 상륙 직후 시작되었으며, 첫 번째 시설은 9월 20일에 준비되었다. 유조선용 부두와 더 큰 유류 저장소는 10월 초에 완공되었으며, 저장 시설은 11월까지 계속 확장되어 20,742m³의 연료를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리버티선을 수용할 수 있는 여러 부두가 모로타이 서해안에 건설되었으며, 첫 번째 부두는 10월 8일에 완공되었다. 또한, 이러한 선박의 적재 및 하역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블루 비치에 20개의 LST 상륙 시설이 건설되었다. 다른 주요 건설 프로젝트로는 광범위한 도로망, 해군 시설, 2,601m² 규모의 창고, 공급 기지 및 임시 숙영지를 위한 부지 정리가 포함되었다. 1,900 병상 규모의 시설에 대한 원래 계획이 수정된 후, 1,000 병상 규모의 병원도 건설되었다. 주요 어려움은 이례적으로 많은 비로 인한 진흙을 극복하고 충분한 물 공급을 찾는 것이었다.[43]
연합군의 계획 수정으로 인해 모로타이는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필리핀 해방에 훨씬 더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44년 9월, 민다나오 침공은 10월 말 필리핀 중부의 레이테 상륙을 위해 연기되었다. 모로타이의 비행장은 레이테에 가장 가까운 연합군 비행장이었고, 이 섬에 주둔한 전투기와 폭격기는 10월 25일 레이테 상륙을 지원하기 위해 필리핀 남부와 NEI의 목표물을 공격했다.[44] 레이테에 비행장이 완공된 후, 모로타이는 필리핀으로 이동하는 전투기와 폭격기의 중간 기착지로도 사용되었다.[45]
3. 4. 소탕 작전과 일본군 잔존 세력
일본 제7 항공 사단은 연합군 상륙 이후 몇 달 동안 모로타이를 계속 공격했다. 1944년 9월 15일부터 1945년 2월 1일까지 이 항공 사단은 179회의 출격으로 모로타이에 82차례의 공습을 감행했다.[55] 이러한 공습에 사용된 항공기는 세람과 셀레베스에서 이륙하여 할마헤라의 비행장에 착륙한 후 목표 지점으로 향했다. 54번의 공습은 피해를 입히지 못했지만, 나머지 공습으로 연합군 항공기 42대가 파괴되고 33대가 손상되었다. 공습으로 인한 연합군 사상자는 19명이 사망하고 99명이 부상을 입었다.[55] 가장 성공적인 공습은 11월 22일 밤에 이루어졌으며, 이 공습으로 연합군 항공기 15대가 파괴되고 8대가 손상되었다.[55] 1945년 1월 말에 정기적인 일본 공습은 중단되었지만, 3월 22일에 마지막 공격이 있었다. 미국 육군 항공대(USAAF)의 야간 전투기는 습격자를 대공포 방어 구역에 진입하기 직전에 탐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공은 제한적이었다; 이 대공포는 모로타이 상공에서 격추된 일본 항공기 26대 중 대부분을 격추했다.[55] USAAF 야간 전투 부대의 공식 역사는 모로타이가 습격자 탐지의 어려움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야간 전투기가 수행한 가장 어려운 임무였을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56]모로타이의 어뢰정 부대는 1945년 2월까지 단일 비행대로 축소되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활동했다.[57] 모로타이 주변을 순찰하는 것 외에도, 어뢰정은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고 호주 및 네덜란드 정찰대를 지원하기 위해 동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1945년 5월, 어뢰정과 호주 Z 특수 부대는 일본군에게 학대받은 테르나테 술탄과 그의 궁정, 하렘을 프로젝트 오포섬이라는 암호명으로 구출했다.[57][58] 전쟁이 끝날 무렵 어뢰정은 거의 1,300번의 순찰을 수행했으며, 모로타이와 할마헤라 해역에서 50척의 바지선과 150척의 소형 선박을 파괴했다.[59]
제31 사단은 1945년 4월 12일까지 모로타이에 주둔하다가 민다나오 해방에 참여하기 위해 떠났고, 제93 보병 사단으로 교체되었다.[60] 제93 사단은 흑인으로 구성된 차별 부대였으며, 전쟁 중 주로 경비 및 노동 임무에 사용되었다.[61] 모로타이에 주둔한 후, 이 사단은 섬에 남아있는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해 집중적인 순찰을 수행했다. 당시 모로타이의 대부분의 일본군은 섬 서해안을 따라 위치해 있었고, 일반적으로 민간인 정원 근처에 머물렀다. 제93 사단은 4월부터 모로타이의 서해안과 북해안을 따라 순찰대를 상륙시켰고, 이들은 소규모 일본군과 산발적인 교전을 벌였다. 이 사단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오우치 대령을 생포하는 것이었고, 이는 8월 2일에 제25 보병 연대의 순찰대에 의해 달성되었다. 오우치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생포된 일본군 장교 중 최고위급 중 한 명이었다. 미군은 또한 선전 방송과 전단을 사용하여 모로타이의 일본군 병사들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62]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연합군은 모로타이섬을 점령한 후, 대규모 공병 부대를 투입하여 기지 건설을 시작했다. 이 작업에는 네덜란드 군 민정반에서 징용한 현지인도 참여했다. 일본군이 건설하던 비행장을 확장하려 했으나 지질 문제로 새로운 활주로를 건설했다. 1944년 10월 4일, 1500m 활주로가 완성되어 대형 폭격기 작전이 가능해졌고, 보르네오섬의 발릭파판 공격 등에 이용되었다. 이후 10월 17일에는 2,100m 규모의 두 번째 활주로가 완성되었고, 11월에는 약 250대의 항공기를 배치했다. 연료 탱크와 약 3000명 규모의 병상을 갖춘 병원도 정비되었다.
모로타이섬은 레이테섬 전투 등에서 공습 거점이나 후방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일본 육군 제2군의 항복식이 모로타이섬에서 진행되었다. 1945년 9월 9일, 호주군 토마스 블레이미 장군은 모로타이의 제1군단 스포츠 경기장에서 열린 의식에서 일본 제2군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8월 15일 항복 이후 약 660명의 일본군이 연합군에 항복했다.
모로타이는 레이테가 확보된 후에도 중요한 연합군 기지로 남았다. 제13공군과 호주 제1전술공군(구 호주 공군 제10작전단)의 항공기는 모로타이에 주둔하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 필리핀 남부의 목표물을 공격했다. 1945년 4월부터 이 섬은 호주 제1군단이 보르네오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했다. 호주 육군 공병은 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모로타이의 기지 시설을 확장했다.
종전 당시 660명의 일본군이 투항했으나, 일부는 일본군이 항복한 사실을 모르고 정글에서 숨어사는 생활을 했다. 1956년에는 9명의 전 일본 병사가 발견되어 일본으로 귀국했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일본군 잔류병인 다카사고의용대 소속 나카무라 테루오 일병은 1974년 12월 18일 인도네시아 공군 요원에게 체포되었다.
모로타이의 시설은 전쟁 후 몇 달 동안 연합군에 의해 계속 널리 사용되었다. 동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점령과 군정을 담당하는 호주군은 1946년 4월 네덜란드 식민 정부가 재건될 때까지 모로타이에 본부를 두었다. 이 섬은 또한 호주군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군이 일본군 인사에 대한 전쟁 범죄 재판을 실시한 장소 중 하나였다.
4. 1. 전략적 승리
연합군은 모로타이섬을 점령한 후, 대규모 공병 부대를 투입하여 기지 건설을 시작했다. 이 작업에는 네덜란드 군 민정반에서 징용한 현지인도 참여했다.[78] 일본군이 건설하던 비행장을 확장하려 했으나 지질 문제로 새로운 활주로를 건설했다. 1944년 10월 4일, 1500m 활주로가 완성되어 대형 폭격기 작전이 가능해졌고, 보르네오섬의 발릭파판 공격 등에 이용되었다.[78] 이후 10월 17일에는 2,100m 규모의 두 번째 활주로가 완성되었고, 11월에는 약 250대의 항공기를 배치했다. 연료 탱크와 약 3000명 규모의 병상을 갖춘 병원도 정비되었다.모로타이섬은 레이테섬 전투 등에서 공습 거점이나 후방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일본 제2군의 항복식이 모로타이섬에서 진행되었다.[66] 8월 15일 항복 이후 약 660명의 일본군이 연합군에 항복했다.[64]
모로타이는 레이테가 확보된 후에도 중요한 연합군 기지로 남았다. 제13공군과 호주 제1전술공군의 항공기는 모로타이에 주둔하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 필리핀 남부의 목표물을 공격했다.[45] 1945년 4월부터 이 섬은 호주 제1군단이 보르네오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했다.[45] 호주 육군 공병은 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모로타이의 기지 시설을 확장했다.[63]
일본의 항복 이후 여러 항복식의 현장이였다. 1945년 9월 9일, 호주군 토마스 블레이미 장군은 모로타이의 제1군단 스포츠 경기장에서 열린 의식에서 일본 제2군의 항복을 받아들였다.[66]
종전 당시 일본군이 항복한 사실을 모르고 정글에서 숨어사는 일본군도 있었다. 1956년에는 9명의 전 일본 병사가 발견되어 일본으로 귀국했다.[67][68] 1974년 말에는 다카사고의용대 소속의 나카무라 테루오가 발견되어 대만을 통해 귀국했다.
4. 2. 전후 처리
섬을 점령한 연합군은 예정대로 대규모의 공병 부대를 투입하여 기지 건설을 시작했다. 건설 작업에는 네덜란드 군 민정반에서 징용한 현지인도 참여했다. 일본군이 건설하던 비행장을 확장할 계획이었지만, 지질상 어렵다고 판단되어 새로운 활주로를 건설했다. 10월 4일에는 1500m 활주로가 대형 폭격기의 작전 가능 상태로 정비되어 보르네오섬의 발릭파판 공격 등에 이용되었다.[78] 그 후에도 기지 확장은 진행되어 10월 17일에는 2,100m 규모의 두 번째 활주로가 완성되었고, 11월에는 약 250대의 항공기를 전개하게 되었다. 연료 탱크와 약 3000명 규모의 병상을 갖춘 병원 등도 정비되었다.이후 이곳은 레이테섬의 전투 등에서도 모로타이섬 공습 거점이나 후방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시 일본 육군 제2군의 항복식도 모로타이섬에서 진행되었다. 1945년 9월 9일, 호주군 토마스 블레이미 장군은 모로타이의 제1군단 스포츠 경기장에서 열린 의식에서 일본 제2군의 항복을 받아들였다.[66]
모로타이는 레이테가 확보된 후에도 중요한 연합군 기지로 남았다. 제13공군과 호주 제1전술공군(구 호주 공군 제10작전단)의 항공기는 모로타이에 주둔하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와 필리핀 남부의 목표물을 공격했다. 1945년 4월부터 이 섬은 호주 제1군단이 보르네오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했다.[45] 호주 육군 공병은 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모로타이의 기지 시설을 확장했다. 과밀로 인해 일부 호주 캠프 부지는 미국 경계선 밖에 위치했다.[63]
일본의 항복 이후 여러 항복식의 현장이었다. 8월 15일 이후 모로타이의 약 660명의 일본군이 연합군에게 항복했다.[64] 제93사단은 또한 8월 26일 일본 지휘관이 미 해군 PT 보트를 타고 모로타이로 이송된 후 할마헤라의 4만 명의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들였다.[65]
종전 시에 660명의 일본군이 투항했으나 일부는 일본군이 항복한 사실을 모르고 여전히 정글에서 숨어사는 생활을 했다. 1956년에는 9명의 전 일본 병사가 발견되어 일본으로 귀국했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일본군 잔류병인 나카무라 테루오 일병은 1974년 12월 18일 인도네시아 공군 요원에게 체포되었다.[67][68]
모로타이의 시설은 전쟁 후 몇 달 동안 연합군에 의해 계속 널리 사용되었다. 동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점령과 군정을 담당하는 호주군은 1946년 4월 네덜란드 식민 정부가 재건될 때까지 모로타이에 본부를 두었다.[69][70] 이 섬은 또한 호주군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군이 일본군 인사에 대한 전쟁 범죄 재판을 실시한 장소 중 하나였다.[71]
4. 3. 한국과의 연관성
5. 전후 재평가
5. 1. 전략적 가치 재평가
5. 2. 인도적 측면의 문제점
6. 전투 관련 인물
6. 1. 더글러스 맥아더
6. 2. 가와시마 다케노부
6. 3. 나카무라 테루오 (이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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