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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병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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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기병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이 프랑스 남부에 상륙한 군사 작전이다. 이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지원하고, 마르세유와 툴롱 항구를 확보하여 연합군의 보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1944년 8월 15일에 시작되었으며, 앤빌 작전으로 시작했으나 드라군 작전으로 변경되었다. 연합군은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프랑스 남부를 해방했으나, 독일군의 주력 부대 섬멸에는 실패했다. 이 작전으로 프랑스 남부의 항구를 확보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고, 비시 프랑스 정권이 붕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연합군의 자원 분산으로 인해 이탈리아 전선 강화나 라인강 진격에 투입될 수 있었던 병력과 물자를 낭비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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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병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드라군 작전 상륙 함대, 1944년
남부 프랑스 해안에서 드라군 작전 상륙 함대
명칭드라군 작전
시기1944년 8월 15일 – 1944년 9월 14일
장소남부 프랑스, 코트다쥐르
좌표43° 13′ N, 6° 35′ E
결과연합군 승리, 독일군 대부분 남부 프랑스에서 보주 지역으로 철수
교전 세력
연합군
프랑스
프랑스령 알제리


공군 지원:


해군 지원:

지휘관
연합군제이콥 L. 디버스
알렉산더 패치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에드가르 드 라르미나
조제프 드 고이슬라르 드 몽사베르
헨리 켄트 휴이트
존 K. 캐넌
추축군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프리드리히 비제
병력 규모
연합군최초 상륙
151,000명
전체 침공 병력
576,833명
프랑스 레지스탕스
75,000명
추축군최초 상륙
85,000–100,000명
1,481문 야포
남부 프랑스
285,000–300,000명
부대
연합군제6 군집단
제7군
B 군
FFI
제8 함대
[[파일:Mediterranean Allied Air Forces.png|25px]] MAAF
추축군G 집단군
제19군
사상자 규모
연합군15,574명
사망: 7,301명
10,000명 이상
총합: ~25,574명
추축군7,000명 사망
~21,000명 부상
131,250명 포로
1,316문 야포
총합: ~159,000명

2. 배경

1942년 미국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이 처음 제안하고,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지를 받은 남프랑스 침공 계획은 '앤빌'이라는 암호명으로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발칸반도 상륙 대신 서유럽에서의 상륙을 주장하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의 동시 수행을 원했다.[1]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역시 이 작전의 취소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2]

윈스턴 처칠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될 병력과 물자가 분산되는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그는 독일의 석유 생산을 막고 소련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는 발칸 반도 침공을 선호했으며, 이것이 전후 협상에서 연합군에게 유리한 위치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3][4]

초기 계획은 노르망디와 남프랑스에서 동시에 상륙을 진행하는 것이었지만, 병력과 상륙함 부족으로 인해 불가능했다. 싱글 작전의 난항 또한 앤빌 작전 연기의 원인이 되었다.[5]

노르망디 상륙 이후, 노르망디 항구의 보급 능력 부족과 샤를 드 골의 프랑스군 투입 요구 등으로 인해 앤빌 작전은 다시 주목받았다. 결국 1944년 7월 14일, 연합군 합동참모본부는 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전을 승인하고 작전명을 '드라군'으로 변경했다. 상륙 날짜는 8월 15일로 결정되었다.[6]

2. 1. 서막

1942년, 미국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이 남프랑스 침공 계획을 처음 제안했다.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 계획을 지지하며, 발칸반도 대신 서유럽에서의 상륙을 주장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함께 이 작전이 수행되기를 원했다.[1]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역시 이 작전의 취소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2]

그러나 윈스턴 처칠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될 병력과 물자가 분산되는 것을 우려하여 이 작전에 반대했다. 그는 대신 독일의 석유 생산을 막고 소련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는 발칸 반도 침공을 선호했다.[3] 그는 발칸반도 침공이 전후 협상에서 연합군에게 유리한 위치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4]

처음 계획 당시, 남프랑스 상륙은 노르망디 상륙과 동시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병력과 상륙함 부족으로 인해 두 작전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싱글 작전의 난항 또한 앤빌 작전(남프랑스 상륙 작전의 초기 암호명) 연기의 원인이 되었다.[5]

노르망디 상륙 이후, 노르망디 항구의 보급 능력 부족과 샤를 드 골의 프랑스군 투입 요구 등으로 인해 앤빌 작전은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결국 1944년 7월 14일, 연합군 합동참모본부는 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을 승인하고 작전명을 '드라군'으로 변경했다. 상륙 날짜는 8월 15일로 결정되었다.[6]

2. 2. 작전 계획

마르세유툴롱 항구 확보는 프랑스에서 증강되는 연합군에게 보급을 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연합군 계획자들은 안치오 전투와 노르망디 상륙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독일 국방군이 통제하는 고지대가 없는 툴롱 동부의 바르주 해안 지역을 상륙 지점으로 선정했다. 이는 노르망디의 오마하 해변 상륙 때 고지로 인해 연합군에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연합군은 주요 교량을 파괴하여 전장을 고립시키고 독일군의 병력 강화를 막기 위해 우선적으로 공중전을 계획했다. 해변가를 볼 수 있는 고지를 재빠르게 포위하기 위해 상륙 지역 중앙에 대규모 강하부대 투입 또한 계획되었다. 침공과 맞춰 몇몇 특공대 부대가 해안가에 떨어진 섬들을 점령할 예정이었다.

루시안 트러스콧 소장이 이끄는 미군 3개 사단이 첫날 상륙을 맡아 교두보를 확보하고, 프랑스, 미국, 캐나다 특공대가 측면을 보호하기로 했다. 24시간 이내에 5만 명에서 6만 명의 병력과 6,500대의 차량이 상륙할 예정이었다. 공수 부대는 드라기냥과 르모이 부근에 집중 투입되어 해안가에서 독일군의 반격을 막기 위해 두 마을을 점령하기로 했다. 미군은 론강을 따라 북쪽으로 신속히 진격해 리옹디종을 점령하고 북부 프랑스의 연합군과 만나야 했다. 초기 상륙이 성공한 후, 프랑스 B 군이 상륙하여 툴롱과 마르세유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독일군은 지중해에서 연합군이 또 다른 상륙을 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소련군의 진격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으로 인해 물자가 부족하여 남부 프랑스를 맡은 G 집단군의 상황은 거의 개선되지 못했다. 북부 프랑스에서 연합군이 진격하자, 독일군은 남부 프랑스에서의 현실적인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의 G 집단군 수뇌부는 7월과 8월에 독일 최고 사령부와 남부 프랑스에서 철수할 것을 논의했으나 7월 20일 음모로 인해 어떠한 철수도 용인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블라스코비츠는 분산된 병력으로는 연합군의 상륙을 막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비밀리에 항구를 파괴한 이후 제11기갑사단이 엄호하는 질서정연한 철수를 계획했다. 그는 새로운 방어선이 프랑스 중부의 디종을 중심으로 설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일군 정보부는 연합군의 상륙이 임박했음을 인지했고, 8월 13일 블라스코비츠는 제11기갑사단에게 연합군의 상륙이 예상되는 론 강 동쪽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연합군의 프랑스 남부 상륙 및 진격, 독일 방어선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2. 3. 전투 서열

미국 제6집단군은 코르시카에서 창설되어 1944년 8월 1일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남부 프랑스를 침공할 예정인 프랑스군과 미군을 통합한 부대였다. 헨리 켄트 휴잇 부제독은 작전에서 해상 지원을 담당했는데, 네바다, 텍사스, 아칸소와 같은 미국 전함과 영국 전함 라밀리에, 프랑스 전함 로렌을 포함하여 20척의 순양함과 9척의 호위함으로 구성된 제88기동대가 해상 지원을 맡았다.[3]

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알렉산더 패치가 지휘하는 미국 제7군이었다. 루시안 트러스콧이 이끄는 제6군단이 초기 상륙을 수행하고,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가 이끄는 프랑스 B군이 뒤를 따를 예정이었다. "버틀러 기동대"라 불리는 기동보병 독립 부대가 작전에 동반되었는데, 이 부대는 연합군의 전차, 구축전차, 기계화보병으로 구성되었다.

레지스탕스는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에서 연합군의 진격이 이어지자 레지스탕스는 게릴라에서 프랑스 국내군이라 불리는 체계화된 군으로 발전했다. FFI는 다리와 통신선을 파괴하고 교통 허브를 포위하거나 고립된 독일군을 공격하여 수많은 독일군의 발을 묶었다. 그들은 연합군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전략정보국의 특수 부대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연합군 병력은 3,470대의 비행기로부터 항공 지원을 받았다. 이들 대부분은 코르시카와 사르데냐 섬에 위치했다. 전략폭격기와 전투기는 상륙을 직접 지원해야 했고, 전략적 부대는 프랑스 내륙 깊숙이에 있는 독일군 목표를 폭격해야 했다. 전략적 폭격은 상륙 이전에 잘 수행되었고, 대부분 공항, 교통 허브, 철도, 해안 방어선, 통신선을 목표로 삼았다.

연합군에 맞서는 독일 병력은 G 집단군이었다. 집단군이었음에도 G 집단군은 침공 당시 프리드리히 비제가 이끄는 제19군 1개 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남부 프랑스가 독일군의 계획에서 중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들의 정예병이나 쓸 만한 장비는 전쟁 과정에서 대부분 빼앗겼다.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의 압박으로 G 집단군의 부대는 용기병 작전 때까지 북쪽으로 파병되었고, 남아있는 11개의 사단은 인원이 부족하였으며 제11기갑사단 1개 만이 남아 있었다. 제11기갑사단도 2개의 기갑대대를 용기병 작전 직전에 노르망디 지역으로 보냈다.

독일군 병력은 프랑스 해안을 따라 얇게 배치되었는데, 평균적으로 1개 사단당 90km에 배치된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독일군 사단들의 부대들은 2급 또는 3급 부대인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전쟁 기간 동안 사단이 솎아졌고, 병사들은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온 민족독일인이나 부상을 입은 옛 참전 용사들로 대체되었음을 의미했다. 대다수의 부대는 동방대대나 동방지역군으로 대체되었고, 이들은 주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에서 온 의용군이 대부분이었으며 사기가 저하되었다. 장비 또한 열악했는데, 이들의 무기는 프랑스, 폴란드, 소련, 이탈리아, 체코에서 온 포대나 총, 박격포 등이었다. 독일 사단 중 4개가 이동 불가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 중 잠재력이 있는 부대는 벤트 폰 비에테르스하임이 이끄는 제11기갑사단이었다.

독일군의 사령부는 점령군, 육군, 45척의 소선으로 구성된 전쟁해군과 2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루프트바페로 구성되어 너무 복잡했다. 각각의 부대는 작전에서 무시해도 될 정도의 역할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방어는 상륙 이전부터 건설되고 있던 해안 포대에 중점되어 있었다. 프랑스 공방전 이후 비시 프랑스 정권은 독일군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해안 방어시설을 더욱 개선시켰다. 해안을 따라 75개의 해안포와 중구경포가 배치되었다. 툴롱은 340mm 포가 비치된 포대로 보호받고 있었다. 안톤 작전 이후 독일군은 오래된 포대를 최신화시키고 망가진 포대를 수리하여 해안 방어를 더욱 강화했다.

3. 작전

1944년 8월 15일 아침, 연합군은 용기병 작전의 일환으로 프랑스 남부 해안에 상륙을 개시했다.[1] 연합군 함선들은 어둠을 틈타 해안으로 접근했고, 새벽에 상륙 지점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 코르시카에서 온 1,300대의 연합군 폭격기가 오전 6시 직전에 공중 폭격을 시작해 오전 7시 30분까지 이어졌다. 오전 8시에 상륙 주정이 해안가로 접근하면서 해안 포격은 중단되었다. 해안에는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지만, 상륙 주정들은 로켓을 발사해 지뢰를 파괴했다.[2]

주요 상륙 부대는 미군 제6군단의 3개 사단이었다. 미국 제3사단은 카바라레쉬르메르 인근 알파 해변, 미국 제45사단은 생트로페 인근 델타 해변, 미국 제36사단은 생라파엘 인근 카멜 해변에 상륙했다.[3] 델타 해변과 알파 해변에서는 독일군의 저항이 미약했고, 연합군은 빠르게 교두보를 확보하고 생트로페와 르모이를 점령한 강하부대와 연결했다.

그러나 생라파엘 인근 카멜 해변에서는 격전이 벌어졌다. 독일군의 강력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상륙을 시도했으나, 카멜 레드 상륙 구역은 상륙이 어려웠다. 결국 연합군은 카멜 레드 지역을 포기하고 카멜 블루 지역과 카멜 그린 지역으로만 상륙했다.[3]

상륙 당시 연합군의 피해는 95명 사망, 385명 부상으로 경미했다. 해안 상륙과 더불어 공수부대와 글라이더 부대가 르모이 일대로 투입되었으며, 이 임무 또한 성공적이었다.[3]

제517 공수 연대 전투단의 미군 공수부대원들이 상륙 준비를 하고 있다.

3. 1. 예비 작전

용기병 작전의 성공과 초기 상륙 지원을 위해 특공대 예비 작전이 수행되었다. 첫 목표는 이에르 제도의 포르크로와 레반트 섬이었다. 두 섬에 있는 독일군 주둔지의 포 사정거리는 연합군의 상륙 예정지와 군대가 추가될 항로에 닿을 수 있었다.[7] 시트카 작전의 일부로 섬을 점령하는 임무는 미국-캐나다 합동 특수부대인 제1특수부대군에게 주어졌다. 이들은 상륙 공격과 산악 등반 훈련을 받은 3개 여단으로 구성되었다.[7]

8월 14일, 포르크로와 레반트 섬 상륙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레반트 섬에서 제1특수부대군의 제2여단과 제3여단은 처음에는 간헐적인 저항에 부딪혔으나, 항구에 있는 독일군 주둔지에 가까워질수록 저항이 거세졌다. 그러나 제1특수부대군은 우위를 점했고, 연합군 해군이 우려했던 "해안 방어포"는 실제로는 잘 위장된 망가진 무기임을 발견했다.[7]

포르크로에서는 제1여단이 독일군 주둔지를 섬 서부에 있는 옛 항구로 밀어냈다. 전투는 8월 16일까지 이어졌고, 어둠을 틈타 프랑스 본토의 베나 곶에 있던 독일군 포가 포르크로를 공격했다. 영국 해군 HMS 라밀리에가 독일군이 주둔한 요새를 목표로 설정했고, 8월 17일 아침 독일군은 항복했다. 두 섬이 연합군 수중에 떨어지면서 제1특수부대군은 본토로 돌아와 제1공수기동대에 배속되었다.[7]

주요 침공 서쪽에 있던 네그레 곶에서는 프랑스 특공대가 로미오 작전의 일부로 독일군 포대를 파괴했다. 이들은 다른 특공대의 양동 상륙 작전으로 보호받았다. 주요 임무가 수행되는 동안 지뢰밭에 접근한 67명의 프랑스 특공대원들이 포로로 붙잡혔다.[7]

이 외에도 스팬 작전이라 명명된 기만 작전이 수행되었다. 연합군은 낙하산과 기만 상륙으로 독일군을 혼란시켜 실제 상륙 지역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이 목표였다.[7]

3. 2. 프랑스 본토 침공

1944년 8월 15일 아침, 연합군은 용기병 작전의 일환으로 프랑스 남부 해안에 상륙을 개시했다.[1] 연합군 함선들은 어둠을 틈타 해안으로 접근했고, 새벽에 상륙 지점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 코르시카에서 온 1,300대의 연합군 폭격기가 오전 6시 직전에 공중 폭격을 시작했고, 오전 7시 30분까지 폭격은 계속되었다. 오전 8시에 상륙 주정이 해안가로 접근하면서 해안 포격은 중단되었다. 해안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지만, 상륙 주정들은 지뢰를 파괴하기 위해 로켓을 발사했다.[2]

주요 상륙 부대는 미군 제6군단의 3개 사단이었다. 미국 제3사단은 카바라레쉬르메르 인근 알파 해변, 미국 제45사단은 생트로페 인근 델타 해변, 미국 제36사단은 생라파엘 인근 카멜 해변에 상륙했다.[3] 델타 해변과 알파 해변에서는 독일군의 저항이 미약했고, 연합군은 빠르게 교두보를 확보하고 생트로페와 르모이를 점령한 강하부대와 연결했다.[3]

그러나 생라파엘 인근 카멜 해변에서는 격전이 벌어졌다. 독일군의 강력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상륙을 시도했으나, 카멜 레드 상륙 구역은 상륙이 어려웠다. 결국 연합군은 카멜 레드 지역을 포기하고 카멜 블루 지역과 카멜 그린 지역으로만 상륙했다.[3]

상륙 당시 연합군의 피해는 95명 사망, 385명 부상으로 경미했다. 해안 상륙과 더불어 공수부대와 글라이더 부대가 르모이 일대로 투입되었으며, 이 임무 또한 성공적이었다.[3]

독일군은 연합군의 폭격과 프랑스 국내군의 통신 차단으로 혼란에 빠졌다. 8월 15일 독일군은 연합군 교두보에 반격을 가할 수 없었고, 8월 16일 아침 슈베린은 4개 보병대대 급의 병력을 모아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미 상당한 병력과 무기, 전차들을 교두보에 배치한 상태였다. 8월 17일 독일군의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생라파엘이 점령되어 해안가의 교두보가 연결되었다. 연합군 기동부대는 르모이의 공수 부대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4]

3. 3. 독일군 반격

독일군은 통신 두절과 병력 부족으로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8월 16일, 독일군은 소규모 병력으로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연합군의 상륙과 레지스탕스의 사보타주로 인해 독일군은 철도 운행 중단, 교량 파손, 통신망 마비 등 큰 피해를 입었다.[1]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군은 론 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미군 제45사단과 제3사단의 빠른 진격으로 인해 무산되었다.[2] 8월 18일, 디뉴레뱅이 연합군에게 탈환되었고, 그레노블에 주둔하던 제157산악사단은 알프스산맥 쪽으로 후퇴했다.[3] 이는 G 집단군의 동쪽 측면에 큰 틈을 만들었다. 블라스코비츠는 G 집단군이 론 강 계곡을 따라 철수할 시간을 벌기 위해 툴롱의 제242사단과 마르세유의 제244사단을 희생시키기로 결정하고, 제11기갑사단과 제198보병사단에게 철수를 엄호하라고 명령했다.[4]

3. 4. 독일군 철수

독일군은 연합군의 진격과 프랑스에서의 전황 악화로 인해 철수해야 했다. 8월 16일/17일 밤, G 집단군 본부는 연합군을 바다로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부 프랑스에서는 팔레즈 포위전으로 인해 많은 수의 독일군이 손실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말라"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G 집단군과 B 집단군의 완전 철수에 대한 OKW 계획에 동의했다. 이 계획은 남부 프랑스의 모든 독일군(고정 요새 병력 제외)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B 집단군과 연결하여 센스, 디종을 거쳐 스위스 국경까지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두 개의 독일 사단(제148, 제157)은 프랑스-이탈리아 알프스로 퇴각해야 했다. 연합군은 울트라 감청을 통해 독일군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독일 제19군은 론 강을 따라 북쪽으로 철수하면서 연합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북 프랑스팔레즈 포위전에서 전력이 소모된 탓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알자스 지방으로 후퇴했다.

3. 5. 마르세유 및 툴롱 해방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자켓 없이 어두운 바지와 셔츠 차림, 정장을 입은 앙드레 디에텔름 뒤)가 1944년 8월 29일 마르세유 해방 후 병력을 사열하고 있다.


연합군이 진격하면서, 프랑스군은 마르세유와 툴롱을 향해 진격했다. 초기 계획은 두 항구를 순차적으로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예상 밖으로 연합군이 빠르게 진격하면서 프랑스군 사령관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두 항구를 거의 동시에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조제프 드 고일라르 드 몽사베르는 툴롱을 동쪽에서 공격하고, 에드가르 드 라르미나는 북쪽에서 접근하여 도시를 포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독일군은 두 도시에 상당한 병력을 주둔시켰지만, 제대로 방어 태세를 갖추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에르 부근에서 격렬한 전투로 잠시 진격이 멈췄지만, 8월 19일 프랑스군은 툴롱 근처에 도달했다. 같은 시기, 몽사베르는 툴롱을 우회하여 포위하고 툴롱과 마르세유 사이의 도로를 차단했다.

8월 21일, 프랑스군은 툴롱 시내로 진입했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드 타시니가 작전 지휘를 직접 맡으면서 라르미나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8월 26일, 남은 독일군은 항복했다. 툴롱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7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지만, 18,000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잡았다.

한편, 몽사베르는 마르세유 해방 작전을 개시했다. 오바뉴에서 독일군을 격파한 후, 프랑스군은 마르세유를 직접 공격했다. 툴롱과 달리 마르세유의 독일군 사령관은 민간인들을 대피시키지 않았고, 이는 시민들의 반감을 샀다. 프랑스 국내군(FFI)과의 전투는 게릴라전 양상으로 전개되어 독일군을 더욱 약화시켰다. 독일 국방군은 넓은 전선을 방어할 수 없었고, 방어선은 여러 개의 고립된 거점으로 붕괴되었다. 8월 27일, 도시 대부분이 해방되었고, 8월 28일 독일군은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마르세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1,825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11,000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잡았다.[1]

두 항구에서 독일 공병대는 연합군이 항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항만 시설을 파괴했다.[2][3]

3. 6. 몽텔리마르 전투

9월 중순 남부 프랑스에서 연합군의 진격


마르세유툴롱이 해방되었지만, 독일군의 철수는 계속되었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트러스콧은 독일군을 우측에서 포위하여 그의 3개 사단으로 독일군을 더욱 북쪽으로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연합군 본부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연합군은 독일군 제62군단을 섬멸할 몇몇 기회를 놓쳤다.[1]

독일군 무전 통신 해독으로 연합군 본부는 독일군의 철수 계획을 알아냈다. 버틀러 기동대는 기회를 포착하여 독일군의 철수와 동시에 진격, 이들을 북쪽에서 완전히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전투 동안 독일군의 분산적 저항이 나타났고, 서쪽으로 진격한 결과 론 강 동쪽에 위치한 소도시 몽텔리마르에 버틀러 기동대가 도착했다. 이 마을은 독일군 철수로에 있었다. 제36사단이 버틀러 기동대의 뒤를 이어 마을에 도착했다. 8월 20일 이들은 몽텔리마르의 독일군을 포위하고 그르노블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빠른 진격 이후 연합군의 선봉 부대는 물자와 연료 부족을 겪어 임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다.[2][3][4]

8월 21일 버틀러 기동대는 트러스콧의 명령에 따라 몽텔리마르 북쪽 고지를 점령했다. 트러스콧은 북쪽으로 철수하는 독일군 전체 병력을 막기에 연합군이 약하다고 판단했다. 버틀러 기동대는 철수하는 독일군 부대에 포격을 가하며 강화 병력을 기다렸다. 프랑스 국내군이 미군을 지원하며 전투 동안 독일군을 괴롭혔다. 제11기갑사단이 첫 대응으로 투입되었다. 이들은 같은 날 푸이 산을 공격했고, 독일군은 버틀러 기동대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연합군의 반격으로 짧게 지속되었다.[5][6]

다음 날 제36사단의 첫 부대가 도착해 버틀러 기동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여전히 보급품이 부족했고, 독일군의 철수로를 직접 공격하기에는 인원 또한 부족했다. 이후 며칠 동안 연합군의 병력과 보급품이 도착했다. 같은 시기에 제45사단은 그레노블의 여러 위치를 점령해 몽텔리마르 병력의 압박을 완화시켰다. 버틀러 기동대는 8월 23일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존 E. 다르퀴스가 새로운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간헐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그러는 동안 독일군은 제11기갑사단을 마을에 불러들이기 위해 애썼다. 8월 24일 제11기갑사단은 간신히 전투 지역에 도착했다.[6][7]

새로 조직된 부대로 다르퀴스는 몽텔리마르를 직접 공격하려고 시도했으나, 새로 도착한 독일군 전차 부대에 의해 실패했다. 독일군의 반격으로 연합군은 일부 영토를 잃었다. 이들의 목표는 몽텔리마르 북쪽 고지에서 연합군을 몰아내고 미군 포병을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4] 독일군이 다르퀴스의 작전 계획 사본을 입수하면서 연합군의 공격 계획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비제는 8월 25일 제11기갑사단이 이끄는 주공을 계획했고, 제198보병사단도 이 계획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이 공격은 실패했다. 연합군은 반격하여 몽텔리마르 북쪽 고지를 점령하고 독일군의 철수로를 일시적으로 차단했다. 연합군의 공세도 지속적이지 못했고, 비테르스하임이 새벽에 탈출로를 확보했다. [6][7]

독일군의 지속적인 반격으로 도로 차단이 방해받자, 트러스콧은 제45사단의 강화 병력이 몽텔리마르의 다르퀴스를 지원하는 것을 허용했다. 한편, 독일군 또한 전투 병력을 강화했다. 다음 날 교착전이 발발하여 연합군은 철수로를 차단할 수 없었고, 독일군은 연합군이 남아 있는 지역을 공격할 수 없었다. 양측 모두 공격, 반격, 분산 공격으로 인해 피로가 극에 달했다. 제36사단은 결정적인 공세가 어려웠고,[4] 제36사단에 포위당한 제19군 또한 혼돈 속의 전투로 동쪽으로의 조그마한 보급로만 확보한 상황이었고, 이는 독일군의 공격이 전방과 측면에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4] 36사단의 진격에 성과가 없자 화가 난 트러스콧은 8월 26일 다르퀴스의 본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상황의 어려움과 분산된 병력을 보고 좌절한 채 다시 본부를 떠났다. 8월 26일부터 8월 28일까지 독일군 정예병은 4,000대의 불타는 차량과 1,500마리의 죽은 말을 남긴 채 철수했다. 8월 29일 연합군은 몽텔리마르를 점령했고, 마지막 독일군은 항복을 거부했다. 독일군은 2,100명이 전사했고 8,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미군은 1,575명이 사망했다.[6] 제19군의 포로는 50,000명으로 증가했다.

3. 7. 독일군 완전 철수

독일군은 론 강을 따라 북쪽으로 철수하면서 연합군과 계속 전투를 벌였다. 9월 10일, 제6군단의 선봉 부대가 조지 S. 패튼의 제3군 부대와 디종 근처에서 만났다.[1] 트러스콧은 독일군을 벨포르 포위망으로 압박하기를 원했으나, 9월 14일 연합군 최고 사령부로부터 공세 중지 명령을 받았다.[1]

독일군은 보주산맥에 안정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여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했다.[1] 연합군은 북부 및 남부 프랑스 병력이 연결됨에 따라 사령부 구조를 재편해야 했고, 이로 인해 공세가 중단되었다.[1]

론 강을 따라 철수하는 동안, 독일군은 프랑스 남서부에 주둔한 나머지 병력도 철수시켰다.[2] 이들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동쪽의 루아르강을 따라 철수했고, 이후 부르고뉴에서 G 집단군의 잔여 병력과 합류했다.[2] 남서부 프랑스에서 철수하던 독일군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전투를 치러야 했다.[2] 북쪽으로 이동한 병력은 88,000명이었지만, 20,000명은 원래 위치에 남았다.[2] 철수 기간 동안 19,000명이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고, 60,000명이 G 집단군과 만나 보주산맥 방어를 위해 집단군에 배속되었다.[2]

4. 전쟁 범죄

나치 독일비시 프랑스의 점령에 맞선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용기병 작전을 계기로 급격하게 증가했다. 독일군 부대들은 봉기에 맞서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프랑스 시민들에게 수많은 잔혹 행위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6월 9일 튈에 위치한 독일군 주둔지에 공격이 가해지자 제2SS기갑사단은 튈 학살 기간에 북부 프랑스로 이동하는 동안 99명의 시민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다음 날 사단은 오라두르쉬르글란에서 642명의 시민들을 살해하고 마을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독일군 부대는 베르코르 반독 유격대와 상대할 때처럼 레지스탕스를 굴복시키기 위해 프랑스 협력자들과 같이 전투에 임하기도 했다.

독일군이 남부 프랑스에서 철수하는 동안 병사들이 마을에 불을 질렀기 때문에 잔혹 행위는 계속 이어졌다. 프랑스 시민들은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다는 논란적 이유로 군사 법정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잔혹 행위는 프랑스인들의 봉기를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독일군의 이러한 잔혹행위는 역효과를 불러와 프랑스 국민들이 레지스탕스에 참여하는 것을 더욱 북돋았다.[1]

5. 여파

드라군 작전은 연합군에게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받았다. 이 작전으로 연합군은 4주 만에 프랑스 남부 대부분을 해방하고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연합군은 독일 G 집단군의 주력 부대가 보주 산맥으로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6] G 집단군을 완전히 격멸하지 못한 주된 이유는 상륙 직후 시작된 연합군의 연료 부족 때문이었다. 연합군은 빠른 진격 속도를 예상하지 못해 보급에 차질을 빚었다.

드라군 작전의 가장 큰 성과는 마르세유툴롱 등 남부 프랑스 항구 시설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코브라 작전과 드라군 작전 이후, 연합군의 진격은 9월에 보급 부족으로 거의 멈췄지만, 남부 프랑스의 항구와 철도가 복구되면서 대량의 보급품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보급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다. 10월에는 524,894톤의 보급품이 프랑스 남부 항구에서 하역되었는데, 이는 서부 전선 전체 연합군 물량의 3분의 1 이상이었다.

드라군 작전은 정치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상륙 이틀 후, 독일은 비시 프랑스 정권을 해체하고 필리프 페탱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을 벨포르를 거쳐 독일 지크마링겐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비시 정권의 붕괴 이후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앤토니 비버는 "프랑스 남부의 상륙은 독일군의 신속한 철수를 촉발하여 프랑스에 가해지는 피해와 고통을 줄였다"고 언급했다.[6]

버나드 몽고메리, 아서 R. 윌슨, 체스터 윌모트와 같은 일부 연합군 장군들과 당시 논평가들은 드라군 작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이들은 드라군 작전에 투입된 병력과 물자를 이탈리아 전선 강화나 오버로드 작전 부대의 라인 강 진격에 사용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드라군 작전으로 인해 서부 전선의 전력이 약화되어 동부 전선에서 스탈린소련군이 베를린 점령과 발칸반도 장악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냉전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6. 평가

드래군 작전은 연합군에게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받았다. 이 작전을 통해 연합군은 불과 4주 만에 프랑스 남부 대부분을 해방시켰고,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연합군은 독일 G 집단군 주력 부대의 퇴각을 저지하지 못했다. G 집단군은 800km를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여 보주 산맥으로 이동했고, 전투 능력을 유지했다. G 집단군을 포획하거나 파괴하지 못한 주된 이유는 연합군의 연료 부족이었다. 연합군은 빠른 진격 속도를 예상하지 못해 선두 부대에 충분한 보급을 하지 못했다.[6]

드래군 작전의 주요 성과는 마르세유툴롱 같은 프랑스 남부 항만 시설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코브라 작전과 드래군 작전 이후, 연합군의 진격은 9월에 보급 부족으로 거의 멈췄지만, 남부 프랑스의 항구와 철도가 복구되면서 대량의 보급품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보급 상황이 개선되었다. 10월에는 524,894톤의 보급품이 프랑스 남부 항구에서 하역되었는데, 이는 서부 전선 전체 연합군 물동량의 3분의 1 이상이었다.[6]

드래군 작전은 정치적인 영향도 미쳤다. 상륙 이틀 후, 독일은 비시 프랑스 정권을 해체했다. 보안국 요원들이 프랑스 정부 기관을 습격하여 필리프 페탱을 비롯한 비시 프랑스 지도자들을 벨포르로 이동시켰고, 이들은 다시 독일 지그마린겐으로 옮겨져 망명 정부 역할을 했다. 비시 정권이 붕괴되자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 군대가 지역을 점령하고 프랑스 행정 기관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 앤토니 비버는 "프랑스 남부 상륙은 독일군의 신속한 철수를 촉발하여 프랑스에 가해지는 피해와 고통을 줄였다"고 평가했다.[6]

하지만 버나드 몽고메리, 아서 R. 윌슨, 체스터 윌모트 같은 일부 연합군 장군들과 당시 해설자들은 드래군 작전을 비판했다. 이들은 드래군 작전에 투입된 병력과 물자를 이탈리아 전선 강화나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라인 강 진격 가속화에 사용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스탈린이 공세를 강화하여 베를린 점령과 발칸 반도 장악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냉전으로 이어졌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6]

참조

[1] 문서 Statistical and accounting branch office of the adjutant general
[2] 서적 Eisenhower in War and Peace Random House 2012
[3] 웹사이트 USS Texas and Operation Dragoon https://www.youtube.[...] 2021-06-18
[4] 문서 Vast pebble beach at formed by the cobbles left over from sixty years of quarrying of Esterellite#World War II. It was dubbed the "quarry beach".
[5] 서적 Afropean: Notes from Black Europe Penguin Books 2019-06-06
[6] 서적 The Second World War Weidenfeld & Nicolson 2012
[7] 문서 これによりイタリアでの戦いは翌年までゴシック線で停滞してしまうこと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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