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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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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타 전투는 1283년 몰타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아라곤 왕국과 앙주 나폴리-시칠리아 왕국 간의 시칠리아 만종 전쟁의 일부였다. 몰타 섬은 전략적 요충지로, 앙주 왕가의 지배에 반발한 몰타인들의 봉기를 아라곤 군대가 지원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 제독이 이끄는 아라곤 함대는 앙주-프로방스 연합 함대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앙주 왕가의 시칠리아 침공 계획을 좌절시키고 아라곤의 해상 패권을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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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시칠리아 만종 전쟁
전투명몰타 전투
날짜1283년 7월 8일
장소몰타섬 그랜드하버
결과아라곤의 승리
그랜드하버에 위치한 산탕글루 요새. 이 해역에서 벌어진 전투가 몰타 전투다.
그랜드하버에 위치한 산탕글루 요새. 이 해역에서 벌어진 전투가 몰타 전투다.
교전 세력
교전국 1아라곤 왕국
교전국 2나폴리 왕국
지휘관
아라곤 왕국 지휘관페로 3세
나폴리 왕국 지휘관카를로 1세
전력
아라곤 왕국 전력갤리선 18–21척, 병력 5,500명
나폴리 왕국 전력갤리선 19–22척, 병력 7,800명
피해 규모
아라곤 왕국 피해전사 300명, 부상 200명
나폴리 왕국 피해전사 3,500명, 포로 860명, 갤리선 10척 나포, 갤리선 2척 자침

2. 역사적 배경

13세기 중반, 몰타 섬은 앙주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의 샤를 1세 드 앙주의 지배를 받았다. 몰타 섬은 앙주 왕국과 경쟁 관계에 있던 아라곤 왕국 모두에게 전략적, 상업적으로 중요했으며, 두 왕국 모두 섬에 대한 지배권을 원했다.[6]

1282년 4월, 시칠리아 주민들은 앙주 왕가의 지배에 반대하여 시칠리아 만종 봉기를 일으켰다. 시칠리아 반군은 아라곤의 페드로 3세에게 시칠리아 왕관을 받도록 요청했고, 페드로는 시칠리아에 군대를 상륙시켜 10월까지 아라곤-시칠리아군은 시칠리아에 남아있던 앙주군을 몰아냈다.[7]

몰타에서는 1282년 가을, 시칠리아 봉기에 영향을 받아 아라곤 해군 제독 라우리아의 로제르의 처남 만프레드 데 란차와 칼타니세타 백작 코라도 1세 란차가 이끄는 아라곤 군대의 지원을 받아 봉기가 일어났다. 앙주 수비대는 카스텔로 델 마레와 비르구 교외에 포위되었다.[8]

2. 1. 몰타 섬의 전략적 중요성

1282년 몰타인들은 섬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의 처남이었던 만프레드 디 란시아가 이끄는 아라곤 파견대에 의해 촉발되었다. 만프레드의 형제였던 칼타시네타의 첫 백작 코라도 1세 란시아도 아라곤 포위자들과 함께 가담했다.[20] 프로방스 병사들은 그랜드하버의 산탕글루 요새가 군사 이동에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탕글루 요새는 항구를 지키는 여러 중 한 곳에 위치한 고대 성채로, 성채 바깥은 비르구의 교외지역이었다. 몰타섬은 양측 모두 차지하고 싶을 정도로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21]

13세기 중반, 전략적으로 중요한 몰타 섬은 앙주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의 샤를 1세 드 앙주의 지배를 받았다. 몰타 섬은 앙주 왕국과 경쟁 관계에 있던 아라곤 왕국 모두에게 전략적, 상업적으로 중요했으며, 두 왕국 모두 섬에 대한 지배권을 원했다.[6]

1282년 4월, 시칠리아 주민들은 앙주 왕가의 지배에 반대하여 시칠리아 만종 봉기를 일으켰다. 시칠리아 반군은 아라곤의 페드로 3세에게 시칠리아 왕관을 받도록 요청했고, 페드로는 시칠리아에 군대를 상륙시켜 10월까지 아라곤-시칠리아군은 시칠리아에 남아있던 앙주군을 몰아냈다.[7]

시칠리아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아라곤과 앙주 나폴리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몰타 주민들은 1282년 가을에 섬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 반란은 아라곤 해군의 주요 제독인 라우리아의 로제르의 처남인 만프레드 데 란차가 이끄는 아라곤 군대에 의해 강화되었다. 또한 아라곤 군대는 칼타니세타의 초대 백작이자 만프레드의 형제인 코라도 1세 란차가 이끌었다.[8] 아라곤 군대와 민간인에 직면한 앙주 수비대는 항구를 표시하는 곶 중 하나를 차지하는 고대 요새인 카스텔로 델 마레와 비르구 교외에서 포위되었다.[8]

3. 전투 전개 과정

카를로 1세 디 나폴리는 마르세유 출신의 용병 기욤 코르뉘를 파견하여 갤리선 25척의 인원을 모집, 시칠리아로 가서 몰타 성을 구원하려 했다.[16] 1283년 5월, 산탕글루 요새에 있던 앙주군은 거의 6개월 동안 포위당했고, 카를로 1세는 코르뉘에게 프로방스인들로만 병사들을 징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6] 몰타 장악이 시칠리아 지배력 재확립에 매우 중요했기에, 앙주 백작 샤를은 몰타 수비대를 구원하고 아라곤군을 몰아내기 위한 해군을 프로방스, 나르본, 마르세유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재건하고, 기욤 코르누와 바르톨로메 봉뱅에게 지휘를 맡겼다.[1][9]

앙주군은 코르뉘에게 18대 이하의 갤리선을 보유한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당시 아라곤의 국왕 페로 3세가 22개 이상의 갤리선은 장비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고, 이 중 4대가 카탈루냐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앙주군의 계획은 이 함선들을 나포하거나 격침시켜 해상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16]

1283년 5월, 코르뉘가 지휘하는 25대의 앙주-프로방스 갤리선이 무장되었고, 바르톨로메 봉뱅이 나폴리에서 마르세유에 도착해 그의 병력을 쉬게 했다. 두 제독은 18대의 갤리선과[16] 8대 또는 9대의 바크선, 그리고 1대의 판필루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앙주군은 에올리에 제도와 우스티카섬을 거쳐 트라파니에 입항해 시칠리아섬 서쪽 끝으로 도착했다. 함대는 당시 아라곤 왕국의 통제 하에 있던 메시나 해협을 피했다. 라몬 문타너에 따르면 앙주 군은 3대의 경순찰 갤리선을 메시나 등대 앞의 작은 마을인 보카 델 파로로 보냈다.[22] 함대는 나폴리로 가서 더 많은 배를 모은 다음 몰타를 구원하러 출항할 예정이었다.[9] 세 척의 배는 아라곤 함대를 감시한 후 몰타에서 앙주 주력 부대와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아라곤군에 의해 요격되어 나포되었고, 앙주 제독들은 아라곤 함대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9]

아라곤의 페르난도 3세가 트라파니에 상륙하는 모습, 바티칸 도서관 소장 필사본. 왕은 상륙을 지휘하며, 윗배의 왼쪽에서 두 번째, 왕관과 붉은 튜닉을 입고 있다.


페로 3세의 지시에 따라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는 25척의 갤리선을 무장시켰다. 이 중 4척과 소규모 함선은 트라파니와 아라곤 국왕에게 파견되었고, 나머지 21척의 갤리선과 2척의 경함선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루체리오는 소형 함선을 이끌고 칼라브리아 해안을 급습, 이솔라 디 카포 리주토까지 진격하여 내륙의 마을과 농가를 공격했다.[23] 칼라브리아를 정리한 후, 루체리오는 메시나의 본함대로 복귀했다. 메시나 해협을 동쪽에서 통과한 아라곤 순찰대는 코르뉘가 해협 정찰을 위해 파견한 3척의 프로방스 갤리선과 조우했다. 루체리오는 즉시 갤리선을 집결시켜 앙주 정찰선을 포위하고 도주로를 차단했다.[16]

메시나와 니코테라에서의 승리로 시칠리아의 아라곤 함대는 전쟁 초기 우위를 점했다. 주로 카탈루냐와 시칠리아 출신으로 구성된 선원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아라곤으로 떠나는 페르난도 3세는 라우리아의 로제르 제독의 지휘 아래 상당한 규모의 갤리선을 남겨두었다. 이 함대는 칼라브리아 해안을 습격하여 여러 지점에서 앙주군에게 타격을 입혔다.[9][11]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는 앙주군의 계획이 몰타에 있음을 간파하고, 3척의 앙주군 함선을 포획하여 메시나로 귀환했다. 병력을 상륙시켜 휴식을 취하게 한 후, 메시나를 떠나 몰타로 향했다. 항해 첫 날 시라쿠사에 도착하여 앙주-프로방스 함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고조섬에서 온 바지선은 적 함대가 이미 몰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음 날 아라곤 함대는 시라쿠사를 떠나 남쪽으로 카포 파세로에 도착했다. 하룻밤을 보낸 후, 몰타섬으로 직항하지 않고 시칠리아 남동해안으로 이동했다. 돈나루카타(폰테 디 시클리)에 기항한 후, 라우리아는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여 모든 병력을 시클리에 상륙시켜 휴식을 취하게 했다.[9][11][16]

3. 1. 앙주-프로방스 연합 함대의 몰타 파견

카를로 1세 디 나폴리는 마르세유에 있을 때 고대 마르세유 가문 출신의 용병인 기욤 코르뉘를 파견하여 갤리선 25대의 인원을 모집하게 했다. 이 함선은 시칠리아로 가서 몰타 성을 구원할 예정이었다.[16] 1283년 5월, 산탕글루 요새에 있던 앙주군은 거의 6개월 동안 포위당했다. 카를로 1세는 코르뉘에게 "마르세유와 프로방스 해안에 있는 우수한 태생의 남자들을 뽑되, 다른 국가들의 남자를 제외하고 오직 프로방스인들로만 병사들을 징집할 것"과 그들에게 갑판장과 키잡이 역할을 주고 뱃머리에는 무기를 두 배로 늘리라는 명령을 내렸다.[16]

몰타에 포위된 앙주 병사들에게 원군을 보내기 전, 카를로 1세는 코르뉘에게 18대 이하의 갤리선을 보유한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당시 아라곤의 국왕 페로 3세가 22개 이상의 갤리선은 장비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고, 이 중 4대가 카탈루냐로 이동했기 때문에 총 전함이 18대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앙주군의 계획은 이 함선들을 나포하거나 격침시켜 해상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16]

1283년 5월, 코르뉘가 지휘하는 25대의 앙주-프로방스 갤리선이 무장되었고, 바르톨로메 봉뱅이 나폴리에서 마르세유에 도착해 그의 병력을 쉬게 했다. 두 제독은 18대의 갤리선과[16] 8대 또는 9대의 바크선, 그리고 1대의 판필루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앙주군은 에올리에 제도와 우스티카섬을 거쳐 트라파니에 입항해 시칠리아섬 서쪽 끝으로 도착했다. 함대는 당시 아라곤 왕국의 통제 하에 있던 메시나 해협을 피했다. 라몬 문타너에 따르면 앙주 군은 3대의 경순찰 갤리선을 메시나 등대 앞의 작은 마을인 보카 델 파로로 보냈다.[22]

몰타 장악이 시칠리아 지배력 재확립에 매우 중요했기에, 앙주 백작 샤를은 몰타 수비대를 구원하고 아라곤군을 몰아내기 위한 해군을 준비했다. 그러나 앙주 함대는 전쟁 초기 메시나 철수와 니코테라 해전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어 보충이 필요했다. 샤를은 프로방스, 나르본, 마르세유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함대를 재건하고, 기욤 코르누와 바르톨로메 봉뱅에게 지휘를 맡겼다.[1][9] 함대는 나폴리로 가서 더 많은 배를 모은 다음 몰타를 구원하러 출항할 예정이었다.[9]

1283년 5월, 25척의 앙주 갤리선이 마르세유에서 나폴리에 도착하여 병력을 재정비했다. 두 제독은 약 18척의 갤리선, 8~9척의 바르크, 그리고 한 척의 ''판필루스''를 이끌고 나폴리에서 출항했다.[9] 앙주 함대는 리파리 제도와 우스티카를 거쳐 트라파니와 시칠리아 서쪽 끝을 돌며 시칠리아를 항해했다. 함대는 아라곤군의 수중에 있던 메시나 해협을 피했다. 라몬 문타네르는 앙주군이 세 척의 경정찰 갤리선을 메시나 등대 작은 탑 앞의 ''보카 델 파로'' 방향으로 보냈다고 기록했다.[10] 이 세 척의 배는 아라곤 함대를 감시한 후 몰타에서 앙주 주력 부대와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아라곤군에 의해 요격되어 나포되었고, 앙주 제독들은 아라곤 함대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9]

3. 2. 아라곤 함대의 대응과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의 전략

페로 3세의 지시에 따라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는 25척의 갤리선을 무장시켰다. 이 중 4척과 소규모 함선은 트라파니와 아라곤 국왕에게 파견되었고, 나머지 21척의 갤리선과 2척의 경함선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루체리오는 소형 함선을 이끌고 칼라브리아 해안을 급습, 이솔라 디 카포 리주토까지 진격하여 내륙의 마을과 농가를 공격했다.[23] 칼라브리아를 정리한 후, 루체리오는 메시나의 본함대로 복귀했다. 메시나 해협을 동쪽에서 통과한 아라곤 순찰대는 코르뉘가 해협 정찰을 위해 파견한 3척의 프로방스 갤리선과 조우했다. 루체리오는 즉시 갤리선을 집결시켜 앙주 정찰선을 포위하고 도주로를 차단했다.[16]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는 앙주군의 계획이 몰타에 있음을 간파하고, 3척의 앙주군 함선을 포획하여 메시나로 귀환했다. 병력을 상륙시켜 휴식을 취하게 한 후, 메시나를 떠나 몰타로 향했다. 항해 첫 날 시라쿠사에 도착하여 앙주-프로방스 함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고조섬에서 온 바지선은 적 함대가 이미 몰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음 날 아라곤 함대는 시라쿠사를 떠나 남쪽으로 카포 라세로에 도착했다. 하룻밤을 보낸 후, 몰타섬으로 직항하지 않고 시칠리아 남동해안으로 이동했다. 도날루차타에 도착한 후 루체리오는 시클리에 상륙하여 다가올 전투에 대비해 병사들에게 휴식을 제공했다.[16]

메시나와 니코테라에서의 승리로 시칠리아의 아라곤 함대는 전쟁 초기 우위를 점했다. 주로 카탈루냐와 시칠리아 출신으로 구성된 선원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아라곤으로 떠나는 페르난도 3세는 라우리아의 로제르 제독의 지휘 아래 상당한 규모의 갤리선을 남겨두었다. 이 함대는 칼라브리아 해안을 습격하여 여러 지점에서 앙주군에게 타격을 입혔다.[9][11]

아라곤 함대는 메시나에 기지를 두고, 라우리아는 앙주군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앙주 함대가 나폴리에서 출항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신병을 모집하고 20척의 갤리선으로 요격할 준비를 했다. 첫 항해 날 시라쿠사로 향하여 앙주 함대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고조에서 온 바지선은 적 함대가 이미 몰타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음 날, 아라곤 함대는 시라쿠사를 떠나 카포 파세로에 도착하여 몰타를 향해 남쪽으로 항해했다. 하룻밤을 묵은 후 아라곤 함대는 몰타로 직행하는 대신 시칠리아 남동부 해안으로 항해했다. 돈나루카타(폰테 디 시클리)에 기항한 후, 라우리아는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여 모든 병력을 시클리에 상륙시켜 휴식을 취하게 했다.[9][11]

4. 몰타 해전

14세기 갤리 그림, 아테네의 비잔틴 및 기독교 박물관에 있는 아이콘에서 발췌.


앙주의 구원 함대가 몰타에 접근하자, 아라곤군은 카스텔로 포위를 풀고 옛 도시 치타 노타빌레(현재의 므디나)로 물러났다. 코르누와 봉뱅이 이끄는 앙주 함대는 대항구에 닻을 내리고, 독야드 크릭을 따라 갤리선을 해변에 정박시켰으며, 항구 입구에 경계 함선을 배치했다.[9]

아라곤군은 앙주 함대가 도착한 직후에 도착했다. 라우리아는 앙주 함대의 배치 상황을 파악했는데, 당시의 몬타네르 연대기에 따르면 소리를 죽인 아라곤 배가 대항구로 몰래 들어가 앙주군을 관찰했다고 한다.[12] 다른 소식통들은 육지에 있는 아라곤 정찰병으로부터 정보를 받았을 수도 있다고 언급한다.[9]

7월 8일 아침, 라우리아는 아라곤 함대를 대항구로 이동시켰다. 아라곤 제독은 배들에게 무거운 쇠사슬로 서로 연결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제노바 해군에서 개발된 전술이었다. 이 전술은 적 갤리선이 라우리아의 위치를 돌파하는 것을 막고, 아라곤군이 쇠뇌 사격을 퍼붓게 했다. 또한 라우리아는 배들이 노를 배치할 공간을 확보하여 서로 떨어져 있도록 대형을 수정하여 함대가 부대 단위로 전진할 수 있게 했다.[9] 그는 앙주군에게 도착을 알리기 위해 트럼펫을 불도록 명령하여 기습 공격을 포기했는데, 몬타네르 연대기는 라우리아가 공개적이고 기사도적인 전투에서 제독으로서의 능력을 주장하고 싶어했다고 추측한다. 현대 소식통들은 트럼펫 소리가 적을 보호된 닻에서 끌어내기 위한 책략이었다고 추측한다.[9]

항구에 봉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앙주 함대는 출항하여 전투를 준비했다. 앙주 제독들은 아라곤 함대를 정찰하기 위해 보낸 배로부터 잘못된 정보를 받아 11~12척의 적 갤리와 맞서고 있다고 믿었다.[13] 구원된 주둔지에서 온 수백 명의 병사들로 강화된 앙주군은 병력 측면에서 우위를 점했다.[9] 양측 함대는 비교적 동등하게 맞붙었고, 숙련된 승무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앙주군은 프랑스-프로방스 기사단과 함께 중보병에서 우위를 점했고, 아라곤 승무원의 엘리트 알모가바르와 쇠뇌병은 원거리에서 위협적이었다.[9] 아라곤 배의 설계는 뱃머리가 높아 쇠뇌 사격으로부터 더 많은 보호를 제공했다.[9]

함대는 대항구에서 서로를 향해 전진했고, 해가 뜨기 직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앙주군은 쇠뇌 볼트와 석회를 아라곤군에게 발사하는 지속적인 미사일 공격을 시작했고, 라우리아는 부대에게 배에 숨어 쇠뇌로만 반격하라고 명령했다. 정오가 되자 앙주군은 탄약을 다 써버렸고, 라우리아는 함대에게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근거리에서 아라곤군은 쇠뇌 볼트와 투창으로 앙주 갤리선을 공격하여 앙주 선원들을 많이 죽였다. 승무원이 부족해진 앙주 갤리선은 쉽게 점령되었고 10척이 포획되었으며, 보뱅 제독 휘하의 갤리선 7척 부대가 항구를 탈출했다. 전투는 해질녘에 끝났고, 앙주 함대는 흩어지거나 아라곤군에게 넘어갔다.[9][14]

앙주군의 사상자는 막대했다. 몬타네르 연대기에 따르면 3,500명의 앙주군이 사망했는데, 일부 현대 소식통들은 이 숫자가 과장되지 않았다고 추측한다.[9] 860명의 앙주군이 포로로 잡혔고,[14] 몬타네르는 코르누 제독이 라우리아와의 개인적인 전투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9] 앙주 갤리선 10척이 포획되었고, 13세기 소식통은 탈출한 갤리선 7척 중 2척은 자침해야 했다고 전했다.[14][13] 아라곤군 손실은 30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러한 불균형적인 사상자는 아라곤군의 원거리 전투 능력, 높은 사기, 우수한 선박 설계 때문이었다.[9]

4. 1. 전투의 시작과 전개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 제독'', 니콜라 루이츠 데 발디비아 作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 제독이 이끄는 아라곤 함대는 시칠리아를 떠나기 전, 노가 달린 바지선 8대를 준비했다. 이들은 바지선을 이용해 몰타의 그랜드하버를 몰래 정찰할 계획이었다. 아라곤 함대는 일찍 출발하여 오전에 그랜드하버 입구에 도착했다.[24] 정찰선 2척이 작은 바지선의 지휘 아래 항구로 들어갔다. 바지선은 항구 중간의 해협을 통해 곧바로 들어갔고, 다른 정찰선은 항구 입구 양 끝에서 호위를 맡았다. 바지선은 성에 접근하여 앙주 갤리선들이 노를 싣지 않은 채 해안에 정박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갤리선 22대와 소함선 2대를 확인한 아라곤 바지선은 루체리오에게 돌아가 상황을 보고했다.

루체리오는 병사들에게 무장하고 전투 준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아라곤 병사들은 빨리 입항하여 기습 공격을 원했고, "우리에게 공격하게 해달라. 그들은 모두 우리 것이다."라고 외쳤다.[16] 그러나 루체리오는 잠든 적을 공격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며, 트럼펫을 불어 항구에 도착했음을 알리라고 명령했다.[16] 트럼펫 소리와 함께 루체리오는 갤리선들의 열을 맞춘 후 그랜드하버로 진입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프로방스인들은 잠에서 깨어나 루체리오가 노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프랑스 귀족 100여 명이 성에서 내려와 갤리선 선원들을 지원했다. 코르뉘도 역시 트럼펫을 불어 갤리선들에게 루체리오 함대를 향해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함대는 그랜드하버 중간 지점에서 격돌했다. 공격은 격렬했고, 모든 갤리선의 뱃머리가 산산조각날 정도로 전투는 잔혹했다. 프로방스인들이 화살과 장포를 쏘자, 루체리오는 궁수를 제외한 모든 병력에게 갤리선의 선실과 함선 뒤쪽 방어벽을 공격하고 사격을 멈추라고 지시했다. 앙주인들의 포격이 멈출 때까지 아라곤 선원들은 어떤 무기도 발사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라곤 병사들은 프로방스 함선의 모든 방향에서 날아오는 돌과 창 공격을 견뎌냈다.[25] 그날 하루 동안 앙주군이 장포 탄약을 모두 소진하자, 루체리오는 공격을 개시했다.

아라곤 갤리선들은 대함 공격을 위해 한 척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앙주 갤리선들은 격투를 벌였고, 알모가바르가 적 함선에 탑승했다. 앙주 기사들은 아라곤 병사들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았다. 일출 때 시작된 전투는 만종까지 이어졌다.[16] 프로방스인들은 함선이 한 척 더 많고 병력을 충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라곤 함선에 맞서 방어할 수 없었다. 아라곤 함선들은 남아있는 앙주 갤리선들을 나포했다. 문타네르에 따르면, 앙주 경순찰선 한 대가 도주에 성공하여 나폴리를 거쳐 마르세유에 도착해 앙주군의 궤멸 소식을 전했다.[16][26] 바르톨로메 봉뱅은 갤리선 7척을 이끌고 아라곤 함선으로부터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나머지 함선은 격침되거나 나포되었다.[16]

앙주 구원 함대가 몰타에 접근하자, 아라곤군은 카스텔로 포위를 풀고 옛 도시 치타 노타빌레로 후퇴했다. 코르누와 봉뱅이 이끄는 앙주 함대는 대항구에 닻을 내리고, 독야드 크릭을 따라 갤리를 해변에 정박시켰으며, 항구 입구에 경계 함선을 배치했다.[9]

아라곤군은 앙주 함대가 도착한 직후에 도착했다. 라우리아는 앙주 함대의 배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의 몬타네르 연대기에 따르면, 소리를 죽인 아라곤 배가 대항구로 몰래 들어가 앙주군을 관찰했고,[12] 다른 소식통들은 그가 육지에 있는 아라곤 정찰병으로부터 정보를 받았을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9]

7월 8일 아침, 라우리아는 아라곤 함대를 대항구로 이동시켰다. 아라곤 제독은 그의 배들에게 무거운 쇠사슬로 서로 연결하라고 명령했다. 이 전술은 제노바 해군에서 개발된 것으로, 적 갤리가 라우리아의 위치를 돌파하는 것을 막고, 아라곤군이 치명적인 쇠뇌 사격을 퍼붓게 했다. 라우리아는 또한 대형을 수정하여 배들이 노를 배치할 공간을 확보하여 서로 떨어져 있도록 했고, 이를 통해 그의 함대가 부대 단위로 전진할 수 있도록 했다.[9] 그의 승무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앙주군에게 그들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트럼펫을 불도록 명령하여 기습 공격을 포기한 것이다. 몬타네르 연대기는 라우리아가 공개적이고 기사도적인 전투에서 제독으로서의 능력을 주장하고 싶어했다고 추측하고, 더 현대적인 소식통들은 트럼펫 소리가 적을 보호된 닻에서 끌어내기 위한 책략이었다고 추측한다.[9]

항구에 봉쇄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앙주 함대는 출항하여 전투를 준비했다. 나중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앙주 제독들은 아라곤 함대를 정찰하기 위해 보낸 배로부터 잘못된 정보를 받았고, 그래서 그들은 11~12척의 적 갤리와 맞서고 있다고 믿었다.[13] 구원된 주둔지에서 온 수백 명의 병사들로 강화된 앙주군은 이제 배는 아니지만 병력 측면에서 우위를 점했다.[9] 함대는 비교적 동등하게 맞붙었고, 양쪽 모두 숙련된 승무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앙주군은 프랑스-프로방스 기사단과 함께 중보병에서 우위를 점했고, 아라곤 승무원의 엘리트 알모가바스와 쇠뇌병은 원거리에서 그들을 위험하게 만들었다.[9] 한 소식통은 앙주군과 아라곤군 모두 쇠뇌에 큰 가치를 두었지만, 아라곤 배의 설계(평균보다 높은 뱃머리를 갖는 경향이 있음)는 아라곤 승무원에게 볼트 사격으로부터 더 많은 보호를 제공했다고 언급했다.[9]

함대는 대항구에서 서로를 향해 전진했고, 해가 뜨기 직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앙주군은 주로 쇠뇌 볼트와 석회를 아라곤군에게 발사하는 지속적인 미사일 공격을 시작했고, 라우리아는 그의 부대에게 배에 숨어 쇠뇌로만 반격하라고 명령했다. 정오가 되자 앙주군은 탄약을 다 써버렸고, 라우리아는 그의 함대에게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근거리에서 아라곤군은 쇠뇌 볼트와 치명적인 투창으로 앙주 갤리를 긁어 앙주 선원들을 많이 죽였다. 승무원이 부족해진 앙주 갤리는 쉽게 점령되었고 10척이 포획되었으며, 보빈 제독 휘하의 갤리 7척 부대가 아라곤군을 피해 항구를 탈출할 수 있었다. 전투는 해질녘에 끝났고, 앙주 함대는 흩어지거나 아라곤군에게 넘어갔다.[9][14]

앙주군의 사상자는 막대했다. 몬타네르 연대기에 따르면 앙주군 3500명이 사망했는데, 일부 현대 소식통들은 이 숫자가 지나치게 과장되지 않았다고 추측한다.[9] 앙주군 860명이 포로로 잡혔고,[14] 몬타네르는 코르누 제독이 라우리아와의 개인적인 전투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9] 앙주 갤리 10척이 포획되었고, 13세기 소식통은 탈출한 갤리 7척 중 2척은 자침해야 했다고 말했다.[14][13] 아라곤군 손실은 30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아라곤군과 앙주군 간의 불균형적인 사상자는 아라곤군의 원거리 전투 능력, 높은 아라곤군의 사기, 우수한 선박 설계 때문이었다.[9]

4. 2. 아라곤 함대의 승리 요인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가 이끄는 아라곤 함대가 몰타 전투에서 승리한 주요 요인은 다음과 같다.

  • 기습 공격 포기 및 정면 대결: 루체리오는 기습 공격 대신 트럼펫을 불어 적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리고 정면 대결을 선택했다. 이는 적을 항구 밖으로 유인하여 전투를 벌이려는 전략이었다.
  • 원거리 전투 능력: 아라곤 함대는 알모가바르와 쇠뇌병을 활용한 원거리 전투에 능숙했다. 특히, 쇠뇌는 앙주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아라곤 배의 설계는 뱃머리가 높아 쇠뇌 사격으로부터 더 많은 보호를 제공했다.
  • 탄약 고갈 유도: 루체리오는 앙주 함대가 탄약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기다렸다. 앙주 함대가 탄약을 소진하자, 아라곤 함대는 적극적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승기를 잡았다.
  • 높은 사기: 아라곤 병사들은 전투에 대한 열의가 높았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 우수한 선박 설계: 아라곤 배들은 앙주군의 배보다 뱃머리가 높아 원거리 공격에 유리한 구조였다.

4. 3. 전투 결과

루체리오 디 라우리아가 이끄는 아라곤 함대는 시칠리아를 떠나기 전 8척의 노가 달린 바지선을 이용해 그랜드 하버를 비밀리에 정찰했다. 아라곤 함대는 기습 공격을 감행하려 했으나, 루체리오는 트럼펫을 불어 자신의 도착을 알리고 정정당당하게 전투를 벌이고자 했다.

그랜드 하버 중간 지점에서 양측 함대가 격돌했다. 아라곤 병사들은 앙주군의 포격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앙주군의 탄약이 떨어지자 공격을 개시했다. 아라곤 갤리선들은 앙주 갤리선에 접근하여 백병전을 벌였고, 알모가바르들이 적 함선에 올라타 큰 피해를 입혔다.

일출에 시작된 전투는 만종까지 이어졌다. 프로방스군은 병력 충원을 받았지만 아라곤 함대를 막을 수 없었다. 아라곤 함대는 앙주 갤리선 대부분을 나포했고, 앙주군의 경순찰선 한 척과 바르톨로메 봉뱅이 이끄는 7척의 갤리선만이 도주에 성공했다.[16]

앙주군은 3,500명이 사망하고 860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9][14] 코르뉘 제독은 루체리오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9] 반면 아라곤군은 30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했다. 이러한 압도적인 승리는 아라곤군의 뛰어난 원거리 전투 능력, 높은 사기, 우수한 선박 설계 덕분이었다.[9]

5. 전투의 영향 및 역사적 의의

몰타 전투에서 승리한 아라곤군은 무장한 바지선을 시라쿠사로 보내 승전보를 알리고, 포획한 앙주 함선 10척을 함대에 추가했다. 로제 드 라우리아는 시라쿠사의 국왕 관리들에게 메시나와 시칠리아 나머지 지역에도 전령을 보내도록 명령했다. 또한, 포획한 앙주 고속선을 마요르카와 바르셀로나를 거쳐 아라곤 국왕에게 소식을 전하도록 카탈로니아로 보냈다. 이 배는 아라곤 궁정에 기쁜 소식을 알렸다.[1]

아라곤 제독은 국왕 몫과 군인들의 전리품 권리를 포기하고 함선과 앙주 포로로 충분하다고 선언했고, 군인들은 이에 감사하며 이틀간 휴식을 취했다. 문타네르는 몰타에서의 승리가 아라곤과 시칠리아인들 사이에 "'''우정의 유대'''...이는 훌륭한 통치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1]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5. 1. 앙주 왕가의 시칠리아 침공 계획 좌절

이 처참한 패배로 앙주 측의 시칠리아 침공 계획은 연기되었고, 아라곤의 해상 전술적 우위가 확립되었으며, 1284년 나폴리 만 해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5] 아라곤 함대는 계속 북쪽으로 항해하여 나폴리 인근에서 시위를 벌이고 인근 해안을 약탈한 후, 라우리아는 카프리이스키아 섬을 공격하고 주둔시켰다.[4]

5. 2. 아라곤 왕국의 해상 패권 확립

타라고나(스페인)에 있는 로제 드 라우리아의 동상


아라곤군은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무장한 바지선을 시라쿠사로 즉시 보냈고, 노획한 앙주 함선 10척을 함대에 추가했다. 라우리아는 시라쿠사에 있는 국왕 관리들에게 메시나와 시칠리아의 나머지 지역으로 전령을 보낼 것을 명령했다. 노획한 앙주 고속선은 신속하게 인원을 배치하여 마요르카와 바르셀로나를 거쳐 아라곤 국왕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카탈로니아로 보내졌다. 이 배는 아라곤 궁정에 기쁜 소식을 알리는 전령을 보냈다.[1]

아라곤 제독은 국왕의 몫과 자신의 군인들이 얻은 전리품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함선과 앙주 포로로 충분하다고 선언했다. 그의 군인들은 라우리아에게 감사를 표했고, 이틀 동안 휴식을 취했다. 문타네르는 몰타에서의 승리 이후 아라곤과 시칠리아인들이 "'''우정의 유대'''...이는 훌륭한 통치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라고 주장했다.[1]

이 참혹한 패배로 앙주 측의 시칠리아 침공 계획은 연기되었고, 아라곤의 해상 전술적 우위가 확립되었으며, 1284년 나폴리 만 해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5] 아라곤 함대는 계속 북쪽으로 항해하여 나폴리 인근에서 시위를 벌이고 인근 해안을 약탈한 후, 라우리아는 카프리이스키아 섬을 공격하고 주둔시켰다.[4]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Macmillan
[2] 서적 Battles of the Medieval World Barnes & Noble
[3] 서적 Merchant Crusaders in the Aegean, 1291–1352 Boydell & Brewer
[4] 서적 The Sicilian Vespers: A History of the Mediterranean World in the Later Thirteenth Cent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서적 Mercenaries and Paid Men: The Mercenary Identity in the Middle Ages : Proceedings of a Conference Held at University of Wales, Swansea, 7th–9th July 2005 Brill
[6] 웹사이트 The House of Aragon and Malta: 1282–1412 https://www.um.edu.m[...]
[7] 저널 Ending the War of the Sicilian Vespers 1969-12
[8] 서적 Història militar de Catalunya
[9] 서적 The Battle of Malta, 1283: Prelude to Disaster
[10] 서적 Crònica
[11] 서적 Crònica
[12] 서적 Crònica
[13] 서적 Battle of Malta (8 June 1283) Boydell & Brewer
[14] 서적 Crònica de Bernat Desclot
[15] 서적 Crònica
[16] 서적 Battles of the Medieval World https://archive.org/[...] Barnes & Noble
[17] 서적 Merchant Crusaders in the Aegean, 1291–1352 Boydell & Brewer
[18] 서적 The Sicilian Vespers: A History of the Mediterranean World in the Later Thirteenth Cent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 서적 Mercenaries and Paid Men: The Mercenary Identity in the Middle Ages : Proceedings of a Conference Held at University of Wales, Swansea, 7th–9th July 2005 BRILL
[20] 서적 Història militar de Catalunya
[21] 저널 The House of Aragon and Malta: 1282-1412 http://melitensiawth[...] 2018-02-28
[22] 서적 Crònica
[23] 서적 Crònica
[24] 서적 Crònica
[25] 서적 Crònica de Bernat Desclot
[26] 뉴스 The Battle of Malta 730 years ago http://www.timesofma[...] 2014-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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