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무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무염은 신라 말의 승려로, 9세에 해동신동으로 불렸으며 12세에 출가하여 당나라에서 선종을 배우고 돌아와 성주산문을 개창했다. 그는 845년 귀국하여 성주사를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았으며, 2,000여 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그의 사상은 불교와 선종 조도의 차이를 구분한 〈무설토론〉에 나타나 있으며, 888년에 88세로 입적했다. 시호는 대낭혜이며, 승탑은 국보 제8호로 지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800년 출생 - 니타르두스
    9세기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니타르두스는 샤를마뉴 대제의 외손자이자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며, 퐁트누아 전투 참여와 스트라스부르크 서약 기록 참여, 그리고 《루트비히 경건왕의 아들들의 역사》 저술을 통해 프랑크 왕국의 분열 과정과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 800년 출생 - 다풀라 3세
  • 신라의 입당승 - 의상 (신라)
    의상은 신라의 승려이자 화엄종의 시조로, 당나라 유학 후 화엄 사상을 배워 귀국하여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교학을 강술하며 해동 화엄종을 개창, 세계의 연결성과 공감을 강조하는 무애사상으로 신라 불교 사상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신라의 입당승 - 김교각
    김교각은 신라 왕족 출신으로 당나라 구화산에서 수행하며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숭배받는 인물이지만,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는 설화적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 신라의 선승 - 도선
    신라 말기의 승려이자 풍수지리 사상가인 도선은 음양지리설과 풍수상지법을 바탕으로 한국 풍수지리 사상의 시조로 여겨지며, 그의 사상은 지리소왕설, 산천순역설, 비보사상 등으로 요약된다.
  • 신라의 선승 - 도의 (승려)
무염
무염 (無染)
무염의 초상화
무염의 초상화
기본 정보
이름무염 (無染)
속성김 (金)
연희 (衍熙)
시호혜철 (慧徹)
출생801년
사망888년 (87세)
생애 및 활동
주요 활동선종 승려, 가지산문 개창
행적801년: 출생
815년: 숭복사에서 출가
821년: 당나라 유학
845년: 귀국 후 보림사에 머무름
888년: 입적
가계
속성경주 김씨
아버지김헌정 (金憲貞)
사상과 영향
사상적 기반선종, 특히 가지산문
주요 저서《무염탑비》
제자여엄 (麗嚴)
관련 문화재
무염탑보림사 소재
무염탑비보림사 소재

2. 생애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다. 그 뒤 부석사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왕 13) 당나라로 가서 성남산(城南山)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곡산(麻谷山) 보철(寶徹)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845년(문성왕 7년) 귀국하여 보령 성주사(聖住寺)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주석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하여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888년 88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光)이다. 승탑은 성주산(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최인연(崔仁渷)이 썼다. 이 승탑은 대한민국의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출가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다. 그 뒤 부석사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왕 13) 당나라로 가서 성남산(城南山)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곡산(麻谷山) 보철(寶徹)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2. 2. 당나라 유학과 선종 수용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다. 그 뒤 무염은 부석사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가서 성남산(城南山)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곡산(麻谷山) 보철(寶徹)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845년(문성왕 7년) 귀국하여 보령 성주사(聖住寺)를 선문구산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주석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하여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2. 3. 귀국과 성주산문 개창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다. 그 뒤 무염은 부석사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가서 성남산(城南山)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우고, 마곡산(麻谷山) 보철(寶徹)에게서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845년(문성왕 7년) 귀국하여 보령 성주사(聖住寺)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주석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하여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888년 88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光)이다. 승탑은 성주산(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최인연(崔仁渷)이 썼다. 이 승탑은 대한민국의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2. 4. 입적

888년 88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光)이다. 승탑은 성주산 성주사에 세웠으며, 최치원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최인연(崔仁渷)이 썼다. 이 승탑은 대한민국의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3. 사상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등 여섯 왕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법을 물었고, 제자는 2,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원장(圓藏), 영원(靈源), 현영(玄影),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이 그의 선풍을 선양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세웠다.

1293년(충렬왕 19) 천책이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그의 〈무설토론〉(無舌土論)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부처의 교설을 뜻하는 불교(佛敎)와 선종 조사들의 도인 조도(祖道)를 구별하였는데, 이와 같은 구분은 무염이 처음 한 것이다. 조도는 말을 매개로 하거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이심전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여 이것이 청정이나 부정 등의 상대적인 구별을 넘어서는 길이라고 하였다. 한편 말을 빌려서 깨끗함과 더러움을 분별하는 불교는 낮은 근기의 중생들을 위해서 쓴 부처의 방편이라고 구분했다.

3. 1. 제자 양성과 성주산문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등 여섯 왕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법을 물었고, 제자는 2,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원장(圓藏), 영원(靈源), 현영(玄影), 승량(僧亮), 여엄(麗嚴), 자인(慈忍) 등이 그의 선풍을 선양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세웠다.

1293년(충렬왕 19) 천책이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그의 〈무설토론〉(無舌土論)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부처의 교설을 뜻하는 불교(佛敎)와 선종 조사들의 도인 조도(祖道)를 구별하였는데, 이와 같은 구분은 무염이 처음 한 것이다. 조도는 말을 매개로 하거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이심전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여 이것이 청정이나 부정 등의 상대적인 구별을 넘어서는 길이라고 하였다. 한편 말을 빌려서 깨끗함과 더러움을 분별하는 불교는 낮은 근기의 중생들을 위해서 쓴 부처의 방편이라고 구분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