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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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장공산당은 1930년 일본공산당이 경찰의 탄압에 맞서기 위해 채택한 무장 투쟁 방침과 그에 따른 활동을 의미한다. 4.16 사건 이후 당 재건 과정에서, 코민테른과의 연락이 실패하고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자, 당은 무장화를 결정하고 행동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경찰관 살상 사건을 일으키며 무력 투쟁을 벌였으나,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내부 분열을 겪었다. 1930년 7월 타나카 세이겐 위원장의 검거와 코민테른의 비판으로 무장공산당은 붕괴되었고, 일본공산당은 비상시공산당 시대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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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공산당의 역사 - 일본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
일본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는 극좌 노선에서 선진국형 평화혁명 노선으로의 전환을 결정하고, 노사카 산조를 제1서기로 선출하며, 51년 강령을 사실상 폐기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종결시켰으며, 이토 릿슈의 제명을 결정한 중요한 분기점이다. - 일본공산당의 역사 - 노사카 산조
노사카 산조는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가로, 영국 유학 중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하여 일본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제2차 중일 전쟁 기간에는 중국에서 활동했고, 전후 일본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과거 동료 살해 연루 의혹으로 제명되었다.
무장공산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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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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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 부쿄산토 |
지도 이념 |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신좌파 |
결성 | 1969년 |
해산 | 1975년 |
활동 영역 | 일본 |
관련 단체 | 일본 신좌파 적군파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일본 공산당 (혁명좌파) |
상세 정보 | |
주요 활동 | 일본 자위대 기지 습격 계획 기업가 납치 계획 아사마 산장 사건 연루 |
관련 사건 | 총포도검류소지단속법 위반 사건 아사마 산장 사건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시이나 노부오 타키야 류 카와시마 키요시 무타 키미오 요시노 마사시 |
참고 자료 | |
관련 서적 | 무장공산당사건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정보 |
2. 내력
1929년 4·16 사건으로 제2차 일본공산당의 주요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당 조직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같은 해 7월, 학생 운동가 출신의 젊은 다나카 세이겐이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사노 히로시, 마에노 젠시로 등과 함께 당 재건을 이끌게 되었다.
다나카 세이겐이 이끌던 시기의 공산당은 모스크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당원들에게 무장하고 공개적으로 활동할 것을 지시했으며, 경우에 따라 경찰관 살상도 불사하도록 독려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공산당은 무장공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무장 노선은 경찰과의 잦은 충돌을 야기했으며, 1930년 5월에는 가와사키 무장 메이데이 사건과 같은 폭력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극좌 모험주의적 노선은 당내외의 비판에 직면했고,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결국 1930년 7월 다나카 위원장의 체포(7.15 사건)를 기점으로 무장공산당 중앙 조직은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이후 일본공산당은 비상시 공산당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2. 1. 4.16 사건 이후의 당 재건
3·15 사건에서 검거를 피했던 제2차 일본공산당 지하 당원들은 1929년 4·16 사건으로 인해 대거 검거·기소되었다. 특히 사노 마나부, 나베야마 사다치카, 미타무라 시로, 이치카와 쇼이치 등 1926년 제3회 당대회 이후 당 재건 과정에서 경험을 쌓은 간부 대부분이 탄압으로 투옥되었다.간부 공백 상황에서 1929년 7월, 학생(신인회) 출신의 타나카 세이겐이 23세의 나이로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사노 히로시, 젠노 젠시로(마에노 젠시로) 등과 함께 당 조직 재건에 나섰다. 다나카 등은 일본공산당 기술부(테크)를 창설하기로 결정하고, 코민테른과의 연락을 시급히 복구하고자 했다. 사노 히로시가 기억하던 상하이 주소로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을 받고 이를 의심스럽게 여겼다. 실제로 이 답장은 경시청 특고가 보낸 위장 편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코민테른과의 연락선을 복구하지 못한 채 활동을 이어가야 했으며, 이는 활동 자금을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함을 의미했다. 기술부(테크)는 활동을 시작하며 우선 문화인과 학생들로부터 반년 동안 1만엔 이상의 투쟁 기금을 모금했다. 당시 공산당을 좌파의 대표로 보고 기부한 문화인 중에는 야마다 모리타로, 미키 키요시, 카와카미 하지메, 하야시 후사오, 오오야 소이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 중앙은 당국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도, 마침내 소련 대사관을 통해 코민테른과의 연락선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1930년에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쿠트베)에 파견했던 유학생들이 귀국하고, 일본 측에서도 프로핀테른 제5차 대회에 콘노 요지로 등을 파견할 수 있었다.
다나카 세이겐이 1930년 5월 체포될 때까지 그가 이끌었던 시기의 공산당은 '무장공산당'이라고 불린다. 이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지시에 따라 당원들에게 무장하고 공개적으로 활동하며, 경우에 따라 경찰관 살상도 불사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경찰과의 충돌이 잦았고, 1930년 5월에는 가와사키 무장 메이데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 2. "당의 무장화 방침"
1930년 1월, 사노 등은 와카우라 근교의 별장에서 확대중앙위원회를 열고, 경찰 당국의 “백색테러”에 맞서기 위해 당을 무장시켜 자위하면서 대중 앞에서 활동한다는 이른바 "당의 무장화" 방침을 채택했다. 이 결정은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제시된 “합법 무산정당 유해론”과 “사회파시즘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특히 "혁명이 임박했다"는 잘못된 정세 판단에 기초하여 채택된 것으로, 대중 운동을 경시하는 극좌적 모험 전술이라는 비판을 받는다.이 방침에 따라 합법적인 좌익 조직들은 그 존재가 부정되어, 비합법 조직인 공산당과 그 산하 단체로 흡수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최대 규모의 학생 운동 단체였던 신인회는 "전투적 해체"라는 명목 아래 비합법 조직인 일본공산청년동맹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확대중앙위원회는 거리 선전 활동 시 경찰의 단속을 막기 위해 일본공산당 행동대(日本共産党行動隊)를 조직했다. 이들은 3인 1조로 움직이며, 경찰관 등에게 발각될 경우 살상도 불사한다는 지침 아래 피스톨, 단도, 나이프, 쇠파이프, 죽창, 줄톱, 재(눈에 뿌리는 용도) 등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다. 이러한 무기들은 당내 기술부에서 조달하거나 코민테른 극동 뷰로를 통해 밀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2회 보통선거를 앞두고 전단 살포 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기 사용으로 인한 경찰관 사상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930년 2월에는 간사이 지역 조직이 적발되었으나, 사노와 타나카는 도쿄로 도피하여 나카모토 타카코, 카타오카 텟페이, 히로츠 카즈오, 이쿠타 슌게츠, 요코미츠 리이치, 콘 토코, 오오야 소이치, 우츠노미야 토쿠마 등 동조자들의 도움으로 은신했다. 그러나 4월, 사노가 피스톨을 발사한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타나카만이 간부로 남게 되었다.
공산당의 무장화 방침은 산하 노동조합 조직인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에도 적용되었다. 전협은 1930년 4월 동경시전 쟁의에서 "무장 행동"을 감행하고, 같은 해 5월 1일에는 카와사키 무장메이데이 사건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대중의 반감을 샀다. 이러한 극좌 노선에 대한 우려 속에서 카미야마 시게오, 사토 슈이치 등 전협 활동가들은 1930년 6월 "전협쇄신동맹"을 결성하고 공산당의 방침을 거부하며 내부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비상시공산당 시기 당내 갈등의 심화로 이어졌다.
2. 3. 노동자파의 분열
3.15 사건과 4.16 사건으로 옥중에 있던 피고들 가운데 일부는 코민테른의 일방적인 방침 강요와 그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일본공산당을 일단 해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즈노 시게오가 1929년 5월 옥중에서 발표한 「일본공산당 탈당에 부쳐 당의 제군에게」라는 글을 계기로 구체화되었다.이 그룹에는 제2차 일본공산당 시절 후쿠모토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간부들이 주로 참여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카도야 히로시, 아사노 아키라, 카와이 에츠조, 미나미 키이치, 무라오 사츠오, 코레에다 쿄지 등이 있었다.
1930년 보석으로 풀려난 이들은 같은 해 6월경 일본공산당 노동자파를 결성했다. 이들은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끊고, 군주제 폐지 같은 기존의 구호를 포기하며 좀 더 현실적인 노선을 추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타나카 등을 중심으로 한 기존 무장공산당 세력은 이들을 “해당파”(解党派, 당을 해체하려는 파)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노동자파의 결성을 당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관련자들을 당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2. 4. 무장공산당 당 중앙의 붕괴와 비상시공산당으로의 이행
1929년 4·16 사건으로 제2차 공산당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자, 같은 해 7월 다나카 세이겐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공산당 중앙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사노 히로시, 마에노 젠시로 등과 함께 당 재건 운동에 나섰다. 모스크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당원들에게 무장하고 공공연하게 활동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관 살상도 불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시기 공산당은 무장공산당으로 불리며, 여러 차례 경찰과 충돌했고 1930년 5월에는 무장 메이데이 사건을 일으켰다.그러나 이러한 모험적인 활동 방침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0년 7월 15일, 다나카 위원장이 검거(7.15 사건)되면서 당 중앙은 다시 붕괴되었다. 또한 같은 해 8월에 열린 프로핀테른 제5차 대회에서는 일본공산당의 무장 방침이 엄중하게 비판받았다. (이 결정으로 전협쇄신동맹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판단하여 자진 해산하고 전협으로 복귀했다.)
이후 일본공산당은 비상시 공산당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당 중앙과 조직의 재건은 모스크바의 쿠트베에서 유학을 마치고 새로 귀국한 활동가들에게 맡겨졌다.
3. 행동대
일본공산당 행동대는 공산당이 가두 선전을 할 때 당국의 단속을 저지하기 위해 편성한 방위 조직이다. 1930년 1월, 사노 등이 와카우라 근교에서 연 확대중앙위원회에서 경찰 당국의 “백색테러”에 대항하기 위한 “당의 무장화” 방침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는 코민테른 제6차 대회의 “합법무산정당 유해론”과 “사회파시즘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행동대는 3인 1조로 구성되어, 2명이 실제 행동을 하고 1명은 주변을 살피며 망을 보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경찰관 등에게 발각될 경우 살상하라는 지침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각지에서 경찰관 살상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제2회 보통선거를 앞두고 전단 살포 활동을 벌일 때도 피스톨 등 무기를 사용하여 경찰관 사망 및 상해 사건이 일어났다.
행동대가 사용한 무기는 일본공산당 기술부에서 조달했으며,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다나카 세이겐에 따르면, 코민테른 극동 뷰로를 통해 밀수한 콜트, 로열, 마우저 등 100정 이상의 권총과 기관총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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