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노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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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노와성은 무로마치 시대에 나가노 씨족이 축조한 일본의 성으로, 현재는 석벽, 토루, 해자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1512년경에 축조되었으며, 전국 시대에는 다케다 신겐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기도 했다. 이후 오다, 호조 씨족의 지배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주어졌으나, 1598년 다카사키 성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폐성되었다. 현재는 군마현에서 가장 큰 성터 중 하나로, 일본의 100대 명성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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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와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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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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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평산성 |
위치 | 다카사키시, 군마현, 일본 |
좌표 | 36°24′17.82″N 138°57′3.45″E |
상태 | 유적 |
지정 | 국가 지정 사적 |
역사 | |
축성 | 1512년 |
축성자 | 나가노 나리마사 |
주요 변경 | 다케다 씨, 호조 씨, 이이 씨 |
폐성 | 1598년 |
소유 및 통제 | |
주요 세력 | 나가노 씨 다케다 씨 이이 씨 |
주요 인물 | 나가노 나리마사 나가노 나리모리 사나다 유키타카 다키가와 가즈마스 호조 우지쿠니 이이 나오마사 |
건축 및 구조 | |
건축 양식 | 제곽식 평산성 |
주요 구조물 | 석벽 토루 공호 망루 우물 복원된 문 |
2. 역사
무로마치 시대 나가노 씨족은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데, 나리히라는 헤이안 시대의 유명한 귀족이자 시인이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나가노 씨족은 서부 고즈케 국을 통제하는 작은 무장 세력이었고 1512년에 미노와성을 거처로 지었다. 1545년, 간토 간레이이자 나가노 씨족의 명목상 주군인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1546년 가와고에 전투에서 호조 우지야스의 군대에 크게 패했고, 이듬해 다케다 신겐에게도 패배했다. 우에스기 겐신의 지도 아래 우에스기 씨족이 고즈케를 되찾으려 시도하자, 나가노 씨족은 다시 우에스기로 충성을 바꿨다. 다케다 신겐은 호조를 지원하기 위해 우에스기를 공격했고, 미노와 성의 나가노 씨족이 주요 목표가 되었다. 나가노 나리마사(1491-1561)가 1561년에 사망했을 때, 그는 아들 나가노 나리모리에게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케다 신겐과의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고 유언했다.[2] 나리모리는 다음 5년 동안 다케다에 저항했지만, 점차 주변 이웃과 동맹의 지원을 잃었다.
1566년 미노와 성 포위전에서[3] 가미이즈미 노부쓰나가 성 밖으로 출격했지만, 신겐 군대의 반격으로 성이 함락되었다. 필사적인 싸움 끝에 나가노 나리모리는 미노와 성 내곽에서 자결했다. 신겐은 노부쓰나에게 감명받아 그를 해치지 않고 떠나도록 허락하고, 심지어 합류를 요청했지만 노부쓰나는 거절했다.
다케다 신겐은 미노와 성을 고즈케 지역 본부로 사용했으며, 사나다 유키타카와 나이토 마사토요 등을 성주로 임명했다. 다케다 통치하에 성은 북동쪽 가장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마루 우마다시"(초승달 모양의 마른 해자가 있는 반원형 완충 구역)를 건설하여 확장되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다케다 씨족이 멸망한 후, 성은 다키가와 가즈마사에게 주어졌으나, 3개월 후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에서 암살당했다. 호조 우지야스는 즉시 미노와 성을 점령하고 당시 요새 기술에 맞춰 성의 방어를 수정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조 씨족에 대한 공세 때, 나카센도를 따라 미노와 성으로 대규모 군대가 파견되었으나 성의 수비대는 싸움 없이 항복했다. 간토 지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주어졌고, 그는 이이 나오마사를 성주로 임명했다. 이이 나오마사는 성을 크게 확장하고 깊고 넓은 마른 해자를 팠으며, 흙제방을 석벽으로 대체했다. 1598년 다카사키 성을 건설하고 거처를 옮기면서 미노와 성은 버려졌다.[4]
2. 1. 초기 역사 및 나가노 씨족 시대
무로마치 시대 나가노 씨족은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데, 나리히라는 헤이안 시대의 유명한 귀족이자 시인이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나가노 씨족은 서부 고즈케 국을 통제하는 작은 무장 세력이었고 1512년에 미노와성을 거처로 지었다.[2]에이쇼 9년(1512년) 전국 시대 중기, 이 지역을 지배하던 나가노씨의 나가노 노리나오에 의해 축조되었다. 다이에이 6년(1526년) 노리나오의 아들 노부나리에 의해 축조되었다는 설도 있다. 노부나리 대에는 수호대이며 산내 가재인 시라이·소자 나가오씨를 능가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국 시대 우에노에는 간토 관령야마우치 우에스기 가문이 존재했지만, 에이로쿠 원년(1558년)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에치고로 망명한 후에는 사가미를 본거지로 하는 호조 우지야스, 가이의 다케다 신겐, 에치고의 우에스기 마사토라(우에스기 노리마사의 명맥을 이었다)가 침공을 반복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부나리의 아들 나가노 노리마사는 우에스기씨의 후원을 얻어 미노와중으로 불리는 재향 무사단을 잘 통솔하여 명군으로 칭송받으며 나가노씨 전성 시대를 구축하여 최대 판도를 가지게 되었다. 노리마사 대에는 다케다 신겐의 침략이 여러 번 반복되었지만, 이를 잘 물리쳐 안정된 지위를 유지했다.
2. 2. 다케다 신겐의 침공
에이로쿠 4년(1561년) 11월, 나가노 나리아키가 사망하자(전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14세(17세라는 설도 있다)의 아들 나가노 나리모리가 가독을 이었다.[2] 나가노 나리아키는 임종에 임하여 "나의 장례는 필요 없다. 보리사(菩提寺)인 조넨지에 매장해라. 조문에는 묘 앞에 적병의 목을 하나라도 더 많이 늘어놓아라. 절대로 항복하지 마라. 힘이 다하면 성을 베개 삼아 죽어라. 이것이 효도라고 생각하라"고 전했고, 그의 죽음은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그러나 나리아키의 죽음을 알게 된 다케다 신겐은 다시 서상주(西上野)로의 침공을 시작했다. 인근 성을 함락시키고, 이간질을 시켜 배신하게 만들었다.에이로쿠 9년(1566년), 다케다군은 미노와성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했다. 나가노 나리모리는 우에스기 겐신의 원군을 기다리지 못하고 9월 하순에 결국 함락되어 자결했다.[3]
2. 3. 다케다, 오다, 호조 씨족 시대
1566년, 20,000명의 다케다 병사들이 미노와 성 포위전을 벌이는 동안[3] 가미이즈미 노부쓰나가 성 밖으로 출격했지만, 이는 신겐 군대의 성공적인 반격을 초래했다. 성 전체가 함락되었고, 필사적인 싸움 끝에 나가노 나리모리는 미노와 성 내곽에서 자결했다. 가미이즈미 노부쓰나가 여전히 작은 부분을 지키고 있었는데, 노부쓰나에게 감명받은 신겐은 노부쓰나를 해치지 않고 떠나도록 하고 심지어 그에게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노부쓰나는 거절했다).다케다 신겐은 미노와 성을 고즈케 지역 본부로 사용했으며, 사나다 유키타카와 나이토 마사토요와 같은 장군을 성주로 임명했다. 다케다의 통치하에 성은 성의 취약한 북동쪽 가장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마루 우마다시"(초승달 모양의 마른 해자가 있는 반원형 완충 구역)라고 불리는 보루를 건설하여 확장되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다케다 씨족이 멸망한 후, 성은 다키가와 가즈마사에게 수여되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후, 노부나가는 혼노지의 변에서 암살당했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들은 호조 씨족은 즉시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미노와 성을 점령했다. 호조 씨족은 또한 당시의 요새 기술에 맞춰 성의 방어를 수정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호조 씨족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을 때, 그는 나카센도를 따라 미노와 성으로 대규모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성의 수비대는 싸움 없이 항복했다.
'''미노와성'''은 다케다씨의 고즈케 경영의 거점으로 여겨졌으며, 유력 가신인 아마리 마사토라, 사나다 유키타카(유키쓰나), 아사리 노부타네가 성대(城代)로 임명되었다. 겐키 원년(1570년)경에는 나이토 마사토요(마사히데)가 성대가 되었고, 덴쇼 3년(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나이토 마사토요가 전사하자, 그의 아들 나이토 마사즈키가 성대로 임명되었다.
1582년(덴쇼 10년) 3월의 덴모쿠 산 전투에서 다케다 씨가 멸망하자,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고즈케 국을 하사받아 미노와성을 접수하고, 이어서 야부키 성에 들어갔다. 나이토 마사쓰키는 인근 영주들과 함께 이에 따랐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일,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쓰러지자, 호조 우지마사와 그의 아들 호조 우지나오의 대군이 고즈케 국으로 침공했다. 같은 해 6월 18일, 19일, 호조 씨가 간나가와 전투에서 가즈마스를 격파하자, 나이토 마사쓰키는 이에 항복했고, 호조 우지마사의 동생인 우지쿠니가 미노와성에 입성했다.
2. 4. 도쿠가와 시대와 폐성
1590년 (덴쇼 1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때 미노와성은 마에다 도시이에·우에스기 가게카쓰 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같은 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면서 미노와성은 이이 나오마사에게 12만 석의 영지로 주어졌다.[4] 나오마사는 미노와성을 근대 성곽으로 개조했지만, 1598년 (게이초 3년) 다카사키성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미노와성은 폐성되었고, 80여 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4]3. 구조
미노와성은 군마현 다카사키시 북서부 옛 미사토정 방향으로 하루나 산에서 뻗어 나온 긴 능선의 끝자락, 높이 30m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은 서쪽 시나노 국으로 향하는 나카센도 가도와 북쪽 에치고 국으로 향하는 미쿠니 가이도의 요지였다. 성은 한쪽으로는 시라카와강이 만든 깊은 계곡으로, 길고 좁은 언덕으로는 두 전략적 도로를 관할했다.
성은 남북 방향으로 길이 1200m, 폭 400m에 걸쳐 뻗어 있으며, 남쪽 끝에는 두 개의 작은 능선이 있다. 성은 대략 3개의 동심원 형태 구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문은 원래 언덕 남서쪽 가장자리에 있었으나, 나중에 강 옆에 거대한 '마스(masu)가타'식 문이 건설되었다.
하르나시라카와에 의해 깎인 하안 단구에 사다리꼴 성곽식으로 구루와가 배치된 평산성이다. 성 서쪽에는 하르나시라카와, 남쪽에는 하르나누마가 있어 천연 해자 역할을 했다. 성터는 동서 약 500미터, 남북 약 1,100미터, 면적 약 47ha에 달하는 광대한 규모였다. 현재 남아있는 유구로는 석축・토루・공호의 흔적이 있다.
이 부지는 군마현에서 가장 큰 성터 중 하나로, 2006년 일본성곽재단에 의해 일본의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4][5]
3. 1. 교통
역 | 이용 노선 및 승차장 | 하차 정류장 | 도보 소요 시간 |
---|---|---|---|
다카사키역 | |||
마에바시역 | 군마 버스 "미사토행" | "미사토 영업소" | 약 20분 |
시부카와역 | 4번 승강장, 군마 버스 "미사토행" | "도메이야" 또는 "조야마 입구" | 약 5분 |
3. 2. 주변 지역
미노와성은 군마현 다카사키시 북서부의 옛 미사토정 방향으로 하루나 산에서 뻗어 나온 긴 능선의 끝자락에 위치한 높이 30m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 시나노 국으로 향하는 나카센도 가도와 북쪽으로 에치고 국으로 향하는 미쿠니 가이도의 요지에 해당했다. 성은 한쪽으로는 시라카와강이 만든 깊은 계곡으로, 길고 좁은 언덕으로는 두 전략적 도로를 관할했다.성은 남북 방향으로 길이 1200m, 폭 400m에 걸쳐 뻗어 있으며, 남쪽 끝에는 두 개의 작은 능선이 있다. 성은 대략 3개의 동심원 형태의 구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정문은 원래 언덕의 남서쪽 가장자리에 있었으나, 나중에 강 옆에 거대한 '마스(masu)가타'식 문이 건설되었다.
- 니시아키야(西明屋): 폐성 후에 빈집이 눈에 띄게 많아지면서 아키야(明屋)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현재 지소, 은행 지점 등이 집중되어 옛 미사토정의 중심이 되고 있다.
- 혼마치(本町): 성 아래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데에서 유래. 현재 군마 은행 미노와 지점 주변을 가리킨다. 가장 가까운 정류소는 '미사토 혼마치(箕郷本町)'이다.
- 타마치(田町): 미노와성 시대부터 논밭이 많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데에서 유래. 가장 가까운 정류소는 '타마치(田町)'이다.
- 요츠야(四ツ谷): 현재 지소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 가장 가까운 정류소는 '요츠야(四ツ谷)'이다.
- 렌자쿠초(連雀町): 상인들의 마을이었던 데에서 유래. 가장 가까운 정류소는 '렌자쿠초(連雀町)'이다.
- 콘야마치(紺屋町): 염색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데에서 유래. 염색에 필요한 물이 근처에 있었고, 성 아래 마을의 동쪽 아래, 이노가와(井野川) 근처에 있었다. 가장 가까운 정류소는 '미노와 혼마치(箕郷本町)'이다.
- 나카주쿠(仲宿)
- 우라주쿠(裏宿)
- 카미마치(上町)
> ※ 니시아키야의 많은 지명은 미노와성 폐성 후에 이전한 사키 타카사키성 아래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 ※ 니시아키야의 성 아래에는 이야기꾼들에 의해 세워진 간판이 있다. 그곳에는 각 지명과 유래가 적혀 있다.
- 히가시아키야(東明屋): 니시아키야와 마찬가지로 폐성 후에 빈집이 눈에 띄게 많아지면서 아키야(明屋)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현재, 미노와성터 주차장과 화장실이 정비되어 있다.
- 야바라(矢原): 성 아래에서 1km 정도 동쪽에 있다. 전국 시대, '''화살'''이 많이 날아오는 '''벌판'''이었던 데에서 유래. 현재, 주택지가 펼쳐져 있다.
- 겐츄(原中): 화살이 내리는 벌판의 중심이었던 데에서 유래.
참조
[1]
웹사이트
箕輪城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16-12-25
[2]
웹사이트
Nabeshima-Numata
https://web.archive.[...]
2008-06-02
[3]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4]
웹사이트
日本吉 - Nippon-Kichi
http://nippon-kichi.[...]
[5]
웹사이트
Japan Castle Foundation
https://web.archive.[...]
[6]
웹사이트
"「箕輪城跡(高崎市の文化財)」"
https://www.city.tak[...]
高崎市公式HP
[7]
웹사이트
箕輪城の城門復元へ
http://www.takasakiw[...]
[8]
웹사이트
箕輪城の2門復元へ 木製橋と土塁も 群馬・高崎
http://www.asah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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