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야타로
1. 개요
미시마 야타로는 1867년 가고시마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농정학을, 코넬 대학교에서 해충학을 연구했다. 1913년 일본은행 총재로 취임하여 러일 전쟁 이후 재정 적자를 극복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경제 호황기에 일본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일본은행 총재 재임 중이던 1919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이름 | 미시마 야타로 |
|---|---|
| 원어 이름 | 三島 彌太郎 |
| 로마자 표기 | Mishima Yatarō |
| 출생 | 1867년 5월 4일 |
| 출생지 | 일본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가고시마성 아래 고마에초 가미노소노 (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가미노소노정) |
| 사망 | 1919년 3월 7일 (향년 51세) |
| 국적 | 일본 |
| 학력 | 고마바 농학교 매사추세츠 농과대학 코넬 대학교 (중퇴) |
| 직업 | 정치인 |
| 정당 | 연구회 |
| 신분 | 자작 |
| 칭호 | 정3위 훈1등 욱일대수장 |
| 가족 | 아버지: 미시마 미치쓰네 (도치기 현령) 장인: 오야마 이와오 (내대신) 장인: 시조 다카우타 (귀족원 의원) 사위: 사카타니 기이치 (귀족원 의원) |
| 배우자 | 오야마 노부코 시조 가네코 |
| 자녀 | 미시마 미치하루 (장남) |
| 직책 | 귀족원 의원 |
|---|---|
| 선거구 | 자작 의원 |
| 임기 시작 | 1897년 7월 10일 |
| 임기 종료 | 1919년 3월 7일 |
| 대수 | 5대 |
|---|---|
| 임기 시작 | 1913년 2월 28일 |
| 임기 종료 | 1919년 3월 7일 |
| 천황 | 다이쇼 천황 |
| 내각총리대신 | 야마모토 곤노효에 오쿠마 시게노부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다카시 |
| 차관 | 해당 정보 없음 |
| 전임 | 다카하시 고레키요 |
| 후임 | 이노우에 준노스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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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가 -
미시마 야히코
미시마 야히코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 일본 육상 대표로 참가하고 개막식 기수를 맡았으며, 가쿠슈인과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은행원으로 근무한 인물이다. -
미시마가 -
미시마 미치쓰네
미시마 미치쓰네는 사쓰마 번 출신으로 메이지 시대에 여러 현령을 역임하며 토목 사업에 힘써 "토목 현령"으로 불렸고, 경시총감과 임시 건축국 부총재를 지내며 중앙 정치에서도 활동한 일본의 무사이자 정치인이다. -
일본은행 총재 -
다카하시 고레키요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 초기의 일본 정치가이자 금융가로, 일본은행 총재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러일 전쟁 외채 조달 성공, 쇼와 금융 공황 극복 등 일본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2·26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
일본은행 총재 -
이노우에 준노스케
이노우에 준노스케는 메이지 시대 후반부터 쇼와 초기까지 활동한 일본의 금융가이자 정치인으로, 일본은행 총재를 두 차례 역임하며 쇼와 금융공황 수습과 간토 대지진 이후 경제 회복에 기여했으나, 재무대신으로서 추진한 정책이 쇼와 공황을 심화시켜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이했으며 일본경제연맹회 설립과 도쿄 최초의 골프장 설립에도 기여하는 등 경제적 공헌과 정치적 책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
막말 사쓰마번 사람 -
오쿠보 도시미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쓰마 번 출신의 일본 정치가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막부 타도를 이끌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강력한 권력과 정책 추진 방식으로 비판받았으며 사족에게 암살당했다. -
막말 사쓰마번 사람 -
가바야마 스케노리
가바야마 스케노리는 사무라이 출신으로 영국-사쓰마 전쟁과 보신 전쟁에 참전, 일본 제국 육군과 해군에서 활약한 장성으로, 사쓰마 반란 진압, 해군대신 역임, 청일 전쟁 지휘, 초대 타이완 총독 등을 지냈으며 군인과 정치가로서 성공했지만 제국주의 일본의 잔혹한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미시마 야타로는 1867년 5월 사쓰마국 가고시마군(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에서 태어났다. 1872년 어머니 와카코, 두 여동생과 함께 도쿄로 이주했다. 다음 해에 간다오가와마치 학교에 입학했다가 그 후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운영하던 사숙 도진샤 분교에 다니며 보통학과 영어를 배웠다. 1875년 2월에는 곤도 마코토의 사숙에서도 수학했다.
1877년 아버지의 근무지 때문에 야마가타로 이사를 갔으며 1879년 9월 야마가타현 사범학교 소학사범과에 입학했다. 1881년 10월에 졸업한 뒤 부속 소학교에서 조교원으로 근무를 시작했지만 2개월 뒤에 사직하고 특별위로금을 받았다.
1883년 2월부터 도쿄 제국대학(현 도쿄 대학) 교사 콕스로부터 영어를 배웠고 9월엔 고마바 농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당시 성적은 차석이었으며 학교 시험 때 수석도 몇 차례 경험했다. 9월에 정부 유학생으로 선발돼 미국에 갔다. 1885년 9월 매사추세츠 대학교 애머스트에 2학년으로 편입해 농정학을 배웠으며 1888년 6월에 졸업했다. 이후 9월에 뉴욕을 출발하여 10월에 귀국했는데 그 달에 아버지가 사망했다.
12월부터 홋카이도청에서 기사보로 근무하다가 1889년에 사임한 뒤 4월에 다시 미국으로 갔다. 6월에 코넬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해충학을 배웠으며 1890년 6월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학원 연구생이 되어 해충 연구를 이어갔지만 12월 신경통이 발병해 자퇴했다.
이후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1892년 2월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농상무성과 체신성의 촉탁을 받고 조사 연구에 종사했다. 1893년 결혼을 한 뒤 체신성 비서관실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1895년 아내가 결핵 증세를 보이자 이혼했다. 첫 번째 아내와는 금방 이별했지만 미시마는 죽을 때까지 그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같은 해 11월 두 번째 결혼을 했으며 1897년 1월 장남 미시마 미치하루가 태어났다. 7월에 제2회 백자남작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1월에 귀족원 내 최대 회파인 연구회에 가입했으며 의원 생활을 하면서 금융업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가쓰라 다로의 후원을 받아 1901년 4월 연구회 상무위원이 되었고 1902년 1월엔 귀족원 예산위원이 되었다. 1907년 아버지가 만든 별장을 황실에 헌상했다. 이는 시오바라 어용저가 되어 황족들의 피서 장소로 애용되었으며 전후에는 후생성에 하사돼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되었다.
1908년 요코하마 쇼킨 은행의 이사가 되었고 1911년엔 행장이 되었다. 1913년에 출범한 제1차 야마모토 내각에 대장상으로 입각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다. 그 대신 2월에 일본은행 총재로 취임했다. 미시마는 처음엔 이사 기무라 세이시로 등에게 업무를 일임했지만 러일 전쟁 이후 심화된 재정 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부총재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함께 활약을 펼쳤다. 콜카타, 하얼빈시, 샌프란시스코 등에 출장소나 분점을 개설하고 일불은행 창설을 기획한 뒤 호혜적 업무제휴관계를 맺었다.
1918년 2월 임기 5년을 끝낸 뒤 재임하여 2차 임기를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수출이 증가해 경기가 활황을 띠자 국고잉여금과 특별국채공모자금을 운용해 정부가 일본은행이 보유한 외화를 구입해줄 것을 요청해 실현시켰다. 또한 세계 각국이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금태환을 정지하자 이에 대응하고 급등하는 물가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시중은행의 예금금리 협정을 성립시키는 데 진력했다.
이렇게 총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연구회 상무위원으로서 총리대신 하라 다카시와 회담하여 오키 엔키치의 입각을 요청해 실현시키는 등 정치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그리고 1919년 3월 현역 일은 총재인 채로 급서했다. 향년 51세.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
2.1. 초기 생애 (1867년 ~ 1883년)
미시마 야타로는 1867년 5월 사쓰마국 가고시마군(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에서 태어났다. 1872년 어머니, 두 여동생과 함께 도쿄로 이주하여,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운영하는 사숙 도진샤 분교 등에서 교육을 받았다. 1875년에는 곤도 마코토의 사숙에서도 수학했다.
1877년 아버지의 근무지인 야마가타로 이사, 1879년 야마가타현 사범학교 소학사범과에 입학했다. 1881년 졸업 후 부속 소학교 조교원으로 근무했으나 2개월 만에 사직했다.
1883년 도쿄 제국대학(현 도쿄 대학) 교사 콕스로부터 영어를 배웠고, 같은 해 9월 고마바 농학교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1884년에는 학교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정부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1885년 매사추세츠 대학교 애머스트 2학년으로 편입, 농정학을 전공하여 1888년 졸업했다. 졸업 후 1889년에는 코넬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해충학을 전공, 1890년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원 연구생으로 연구를 이어갔으나, 신경통으로 인해 자퇴했다.
1891년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1892년 귀국, 농상무성과 체신성에서 조사 연구에 종사했다. 1893년 오야마 이와오의 딸과 결혼했으나, 아내가 결핵에 걸리자 이혼했다. 1895년 재혼하여 1897년 장남 미시마 미치하루가 태어났다.
2.2. 유학 시절 (1883년 ~ 1892년)
미시마 야타로는 1883년 2월부터 도쿄 제국 대학 교사 콕스로부터 영어를 배웠고, 9월에 고마바 농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당시 성적은 차석이었으며, 재학 중 성적 우수자로 여러 차례 선발되었다. 1884년 9월에는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885년 9월, 매사추세츠 대학교 애머스트에 2학년으로 편입하여 농정학을 전공했고, 1888년 6월에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뉴욕을 거쳐 10월에 귀국했다. 1889년 4월 다시 도미하여 코넬 대학교 대학원에서 해충학을 전공, 1890년 6월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원 연구생으로 해충 연구를 계속했지만, 1890년 12월 신경통 발병으로 자퇴했다.
그 후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1892년 2월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농상무성과 체신성에서 촉탁으로 조사 연구에 종사했다.
2.3. 관료 및 금융인 생활 (1892년 ~ 1919년)
1913년 제1차 야마모토 내각에 대장대신으로 입각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다. 그 대신 2월에 일본은행 총재로 취임했다. 미시마는 처음엔 이사 기무라 세이시로 등에게 업무를 일임했지만, 러일 전쟁 이후 심화된 재정 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부총재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함께 활약을 펼쳤다. 콜카타, 하얼빈시, 샌프란시스코 등에 출장소나 분점을 개설하고 일불은행 창설을 기획한 뒤 호혜적 업무제휴관계를 맺었다. 또한 일본 최초의 시중 은행의 예금 금리 협정의 성립에도 힘썼다.
1918년 2월 임기 5년을 끝낸 뒤 재임하여 2차 임기를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수출 증가로 경기가 좋아지자, 국고 잉여금 및 특별 국채 공모 자금을 운용해 정부가 일본은행이 보유한 외화를 매입하도록 요청하여 실현시켰다. 또한 세계 각국이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금 태환을 정지하자 이에 대응하고 급등하는 물가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시중은행의 예금 금리 협정을 성립시키는 데 진력했다.
총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연구회 상무위원으로서 총리대신 하라 다카시와 회담하여 오키 엔키치의 입각을 요청해 실현시키는 등 정치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1919년 3월 현직 총재인 채로 급서했다.
2.3.1. 일본은행 총재 시절 (1913년 ~ 1919년)
1913년 제1차 야마모토 내각에 대장대신으로 입각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다. 그 대신 2월에 일본은행 총재로 취임했다. 미시마는 처음엔 이사 기무라 세이시로 등에게 업무를 일임했지만, 러일 전쟁 이후 심화된 재정 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부총재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함께 활약을 펼쳤다. 콜카타, 하얼빈시, 샌프란시스코 등에 출장소나 분점을 개설하고 일불은행 창설을 기획한 뒤 호혜적 업무제휴관계를 맺었다. 또한 일본 최초의 시중 은행의 예금 금리 협정의 성립에도 힘썼다.
1918년 2월 임기 5년을 끝낸 뒤 재임하여 2차 임기를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수출이 증가해 경기가 활황을 띠자 국고잉여금과 특별국채공모자금을 운용해 정부가 일본은행이 보유한 외화를 구입해줄 것을 요청해 실현시켰다. 또한 세계 각국이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금태환을 정지하자 이에 대응하고 급등하는 물가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시중은행의 예금금리 협정을 성립시키는 데 진력했다.
이렇게 총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연구회 상무위원으로서 총리대신 하라 다카시와 회담하여 오키 엔키치의 입각을 요청해 실현시키는 등 정치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1919년 3월 현역 일은 총재인 채로 급서했다.
2.4. 사망 (1919년)
미시마 야타로는 1919년 3월, 현직 일본은행 총재로 재임 중 급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51세였다. 그의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경제 호황기에 국고 잉여금 및 특별 국채 공모 자금을 운용하여 일본은행 보유 외화를 정부가 구입하도록 하였고, 금 태환 정지에 대한 대응 및 시중 은행의 예금 금리 협정 성립에 기여했다.
3. 정치 활동
4. 가족 관계
미시마 야타로는 사쓰마 번 무사 시바야마 곤스케의 차녀 와카코와 미시마 미치쓰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시마 미치쓰네는 혼외자 3명을 포함해 12명의 자녀를 낳았다. 이복 동생으로는 미시마 야히코가 있다. 의붓 동생으로는 아키즈키 사토오, 백작 마키노 노부아키 등이 있다.
오야마 이와오의 딸 노부코와 결혼했으나, 노부코가 결핵에 걸려 2년 후에 이혼했다. 이들의 관계는 도쿠토미 켄지로의 소설 『뻐꾸기』의 기반이 되었다. 야타로의 유품 정리 중 평소 주머니에 넣어 다니던 가죽 수첩에 노부코의 사진을 숨겨두었던 것이 발견되었다.
전처와 이혼한 지 2개월 후, 후작 시조 타카우타의 삼녀 카네코와 재혼했다. 카네코의 어머니는 기온의 전 마이코였다. 장남은 미시마 미치하루이며, 차남 미시마 미치타카는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모형 항공 연맹 제2대 회장을 지냈다. 장녀 스미코는 자작 반가이 키이치와 결혼했고, 차녀 우메코는 백작 히지카타 요시와 결혼하여 『히지카타 우메코 자전』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