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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주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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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족자주연맹은 1947년 12월 20일 결성된 정치 단체로,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산된 후 김규식을 총재로 하여 15개 정당 및 25개 사회단체가 통합하여 출범했다. 이들은 조선의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 사회 건설과 남북통일 중앙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며,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미소 양군 철수를 주장하는 등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김규식은 1948년 5.10 총선거에 불참하고 당원들의 선거 참여를 허용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원 출마를 허용하여 1석을 얻었으나 6.25 전쟁으로 소멸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은 중도 노선을 통해 민족 통합을 시도하고 남북 협상을 추진하는 등 긍정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한국 전쟁으로 인해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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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주연맹 - [정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민족자주연맹
로마자 표기Minjokjajuyeonmaeng
한자 표기民族自主聯盟
약칭민련, 민자련 (비공식), NIF (영문)
창립1947년 10월 1일
해산1950년
본부서울특별시 종로구
이념 및 성향
이념보수주의
한국 민족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좌우합작
정치적 위치중도우파
주요 파벌국민보수주의
사회민주주의
주요 인물
초대 대표김규식
관련 항목

2. 창립 배경 및 과정

1947년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자주연맹(약칭 민자련)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원칙적으로 미소 양군의 철수를 지지하여 미국 측 입장과는 차이를 보였다.[10] 또한 민족자주연맹은 자주국가 건설 방안으로 남북 요인 회의를 개최할 것을 주장하였다.[10]

김규식은 남북협상 참여 이후 1948년 5.10 단독 총선거에 불참하였으나 당원들에게는 참가해도 좋다고 선언하였다. 1950년 5월 10일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도 김규식 자신은 불참하였으나, 당원들의 출마는 허락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석을 확보하였으나, 6.25 전쟁 와중에 소멸되었다.[4]

2. 1. 좌우합작위원회 해산

1947년 12월 15일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산되었다.[8] 이후 12월 20일 서울특별자유시 천도교당에서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이 있었다. 민족자주연맹은 15개 정당과 25개 사회단체가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은 "금일의 조선에는 독점자본주의사회도 무산계급사회도 건립될 수 없고, 오직 조선의 현실이 지시하는 조선적인 민주주의 사회의 건립만이 가능"하다고 선언하였다.[9] 이어 남북통일 중앙정부의 조속 수립을 위하여 남북정치단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할 것을 주장하였다.[9]

미군정 수뇌들은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함으로써, 이승만에게 보낸 반응과 대조적으로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측이 남북지도자회의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개인 김규식에 대해서 보인 호의와는 무관하게, 민족자주연맹은 미군정, 미국과 대립되지 않을 수 없었다.[9]

2. 2. 창립 발기회 (1947년 10월)

1947년 10월 1일 민족자주연맹은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창립발기회[8][5]를 개최하고 공식 출범하였다.

2. 3. 결성식 (1947년 12월)

1947년 12월 20일, 서울특별시 천도교당에서 민족자주연맹(민자련) 결성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15개 정당과 25개 사회단체가 통합하여 참여했다.[9] 민자련은 "금일의 조선에는 독점자본주의사회도 무산계급사회도 건립될 수 없고, 오직 조선의 현실이 지시하는 조선적인 민주주의 사회의 건립만이 가능"하다고 선언했다.[9] 이는 당시 한국 사회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서구식 자본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닌 한국만의 독자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민자련은 남북통일 중앙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정치단체 대표자 회의 개최를 주장했다.[9]

결성식에는 김규식이 총재로 선출되었고, 홍명희, 원세훈, 이극로, 손두환, 윤기섭, 김성규, 김순애 등이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다.[9]

이날 결성식에는 미군정의 핵심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하지 미국 육군 중장, 윌리언 딘 군정장관, 브라운 미육군 소장, 헬믹 미육군소장 등이 축사를 했다. 장건상을 제외하면 모두 미군정의 핵심 인사들이었다.[9] 남조선로동당박헌영과 민족주의독립전선의 조봉암도 사람을 보내 축사를 낭독했다.[9]

미군정 수뇌부의 이러한 행보는 당시 이승만에게 보였던 냉담한 반응과는 대조적으로, 김규식을 지지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9] 그러나 미군정이 남북지도자회의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민자련은 미군정 및 미국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9] 이는 민족자주와 통일을 추구했던 민자련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 주요 강령 및 활동

1947년 12월 20일 서울특별자유시 천도교당에서 15개 정당과 25개 사회단체가 통합하여 결성된 민족자주연맹은 다음과 같은 주요 강령 및 활동을 전개했다.


  • 조선 민주주의 사회 건설: 독점자본주의와 무산계급 사회를 모두 배격하고 조선의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 사회 건설을 추구했다.
  • 남북 통일 정부 수립: 남북 정치 단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남북 통일 중앙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 미군정과의 관계: 미군정의 지원을 받았으나, 미소 양군 철수와 남북 요인 회의 개최를 주장하는 등 미국 측 입장과 차이를 보였다.
  • 선거 참여: 김규식은 1948년 5.10 단독 총선거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참했으나, 당원들의 선거 참여는 허용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석을 확보하였다.


민족자주연맹은 한국 전쟁 중에 소멸되었다.

3. 1. 조선 민주주의 사회 건설 선언

1947년 12월 20일 민족자주연맹은 결성식에서 "오늘날 조선에는 독점 자본주의 사회도 무산계급 사회도 건립될 수 없고, 오직 조선의 현실이 지시하는 조선적인 민주주의 사회의 건립만이 가능하다"라고 선언하였다.[9] 이는 독점자본주의와 무산계급 사회를 모두 배격하고 조선의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민족자주연맹은 남북통일 중앙정부의 조속한 수립을 위하여 남북정치단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할 것을 주장하였다.[9]

3. 2. 남북 통일 정부 수립 노력

민족자주연맹은 남북통일 중앙정부의 조속한 수립을 위하여 남북정치단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할 것을 주장하였다.[9]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자주연맹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았지만, 원칙적으로 미소 양군의 철수를 지지하여 미국 측 입장과는 차이를 보였다. 또한 민족자주연맹은 자주국가 건설 방안으로 남북요인회의를 열 것을 주장하였다.[10]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참여한 후 1948년 5.10 단독 총선거에 불참하였으나, 당원들에게는 참가해도 좋다고 선언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김규식 자신은 불참했지만, 당원들의 출마는 허락하였다.

3. 3. 미군정과의 관계

미군정은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함으로써,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9] 결성식에는 하지 미국 육군 중장, 윌리언 딘 군정장관, 브라운 미육군 소장, 헬믹 미육군소장, 장건상, 조병옥, 장택상 등이 축사를 하였는데, 장건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군정의 핵심인물들이었다.[9] 남조선노동당의 당수 박헌영, 민족주의독립전선 측의 조봉암도 사람을 보내 개회사 직전에 참여하여 내빈축사를 낭독하고 돌아갔다.

김규식을 정점으로 한 민족자주연맹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10] 원칙적으로 미소 양군의 철퇴를 지지하여 미국측 입장과는 차이를 보였다.[10] 민족자주연맹은 창립 발기회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가졌으며, 결성식 때에도 미군정 고위 인사들이 참여하였다.[8]

4. 조직 구성 및 주요 인물

민족자주연맹은 1947년 10월 1일 창립발기회를 개최하고 공식 출범하였다.[8] 1947년 12월 20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결성식을 가졌으며, 15개 정당과 25개 사회단체가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결성식에는 하지 미국 육군 중장, 윌리언 딘 군정장관 등 미군정의 핵심인물들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9]

김규식은 남북협상 참여 이후 1948년 5.10 단독 총선거에 불참하였으나 당원들에게는 참가해도 좋다고 선언하였다. 1950년 5월 10일의 제2대 총선거에도 김규식 자신은 불참하였으나, 당원들의 출마는 허락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석을 확보하였으나, 6.25 전쟁 중에 소멸되었다.

4. 1. 지도부

1947년 12월 20일 서울특별자유시 천도교당에서 열린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서 김규식이 총재로 선임되었고, 홍명희, 원세훈, 이극로, 손두환, 윤기섭, 김성규, 김순애 등이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다.[9]

4. 2. 참여 정당 및 단체

1947년 12월 20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이 열렸으며, 15개 정당과 25개 사회단체가 통합하여 참여하였다.[8] 주요 참여 인사로는 총재 김규식, 정치위원 홍명희, 원세훈, 이극로, 손두환, 윤기섭, 김성규, 김순애 등이 있었다.[9] 남조선노동당 당수 박헌영과 민족주의독립전선의 조봉암도 사람을 보내 개회사 직전에 참여하여 내빈 축사를 낭독하였다.[9]

5. 총선 참여 및 해산

1948년 5.10 단독 총선거에 당수 김규식은 남북협상 참여 이후 불참하였으나, 당원들의 참가는 허용하였다.[10]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도 김규식 자신은 불참하였으나, 당원들의 출마는 허락하여 1석을 확보하였다.[10] 그러나 6.25 전쟁 발발로 인해 민족자주연맹은 소멸되었다.[10]

5. 1.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 불참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참여한 후 1948년 5.10 단독 총선거에는 불참했지만, 당원들의 참가는 허용했다.[4]

5. 2.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참여

1950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족자주연맹은 당수 김규식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당원들의 출마를 허용하였다. 김규식은 남북협상 참여 이후 1948년 5.10 단독 총선거에 불참하였으나, 당원들에게는 참가해도 좋다고 선언하였다.[4] 이는 김규식이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했지만, 현실 정치 참여의 필요성은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1950년 총선거에서 민족자주연맹은 1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4]

선거대표득표수득표율의석순위지위
1950윤치영33,4640.481석9위야당



이는 당시 민족자주연맹이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주요 정당으로 자리 잡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1석을 확보한 것은 민족자주연맹의 이념과 노선이 일부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5. 3. 한국 전쟁 중 소멸

1950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2대 총선거에서 민족자주연맹은 1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민족자주연맹은 소멸되었다.[5] 당수였던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참여한 이후 1948년 5.10 단독 총선거에는 불참하였으나, 당원들에게는 참가를 허용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김규식 자신은 불참하였지만, 당원들의 출마는 허락하였다.[5]

6. 평가 및 의의

민족자주연맹은 1947년 좌우 합작 운동이 종료된 직후, 중도 노선을 표방하며 김규식을 중심으로 결성된 정치 단체였다.[5] 이들은 "조선식 민주주의 사회 건설"을 주장하며, 남북 통일 중앙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 단체 대표자 회의 개최를 제안했다.[6]

민족자주연맹은 미국 육군 군정 장관을 비롯한 미 군정 수뇌부의 지지를 받았지만, 미군정 측은 남북 지도자 회의를 지지하지 않아 김규식 개인에 대한 지지와는 별개로 미군정 및 미국과 완전히 일치하는 입장은 아니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자주연맹은 원칙적으로 미·소 양군 철수를 지지했고, 자주 국가 건설을 위해 남북 요인 회의를 주장하는 등 민족 통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7]

김규식은 제1대 총선거와 제2대 총선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당원들의 참여는 허용하여 제2대 총선에서 1석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중에 민족자주연맹은 소멸하였다.

민족자주연맹은 중도 노선을 통해 좌우 이념 대립을 극복하고 민족 통합을 이루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민족자주연맹의 이러한 노력이 대한민국 정치 발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조

[1] 서적 다시 김구를 부르다: 민족자주 통일을 향한 김구의 꿈 https://books.google[...] 와이즈베리 2022
[2] 뉴스 제4부 두 개의 분단정부(5) – 중도파 민족주의세력의 동향(2) https://www.tongilne[...] 2023-04-14
[3] 서적 통일 문제 와 정치・사회적 갈등, 1953-1961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4] 서적 Political parties of Asia and the Pacific Greenwood Press 1985
[5] 서적 韓国現代民族運動研究 歴史批評社 1992
[6] 서적 韓国現代民族運動研究 歴史批評社 1992
[7] 서적 韓国現代民族運動研究 歴史批評社 1992
[8]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9]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10]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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