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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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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운홍은 함양 여씨이며, 호는 근농으로,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 초기의 정치인이다. 1891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중앙중학교와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 후, 3·1 운동 직전 귀국하여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사회민주당을 창당하여 당수를 역임하고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으며, 남북협상에도 참여했다.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과 제5대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73년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적을 보였으며,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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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홍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인명呂運弘
각국어 표기lang: ko
text: 여운홍
2열 왼쪽에서 세 번째가 呂運弘
출생일1891년 9월 1일
출생지[[File:Flag of Korea (1882-1910).svg|border|25px]] 조선국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사망일1973년 2월 3일
사망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출신 학교우스터 대학교
소속 정당조선인민당
사회민주당
민족자주연맹
자유당
자유민주당
민주공화당
배우자사별한 초취 부인 변씨, 재혼한 계취 부인 김창희
자녀呂声九, 呂明九
친족 (정치인)여운형
로마자 표기Lyuh Woon-hong
정치 경력
국회의원선거구: 양평군
당선 횟수: 1회
재임 기간: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29일
참의원 의원선거구: 경기도
당선 횟수: 1회
재임 기간: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개인 정보
한글 이름여운홍
한자 이름呂運弘
가나 표기ヨ・ウノン
영어 표기Yeo Un-hong
근농
거주지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부모부: 여정현
모: 경주 이씨 부인
형제여운형(형)
기타 경력
연희대학교초빙교수
민주공화당고문 겸 당무위원

2. 생애

여운홍은 1919년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1920년 상하이 인성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1] 1921년 귀국 후에는 사업에 종사하기도 했다.[1]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시국 강연과 친일 논문을 기고하는 등 변절하였다.[1]

1945년 광복 후, 형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25] 1946년부터 형,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과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조선인민당에 참여했으나 1946년 박헌영의 노선에 반발하여 탈당하고 사회민주당 당수를 지냈다.[28][29][30]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35]

1948년 4월 남북 협상에 참여하여 평양을 방문했다가 박헌영에게 위협을 받았다.[36] 5월 협상을 단념하고 돌아왔다.[37]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2대 국회의원, 제5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37] 그밖에 자유당 선전부장,[37] 민주공화당 선거대책위원장, 공화당 상임고문 등을 지냈다.

2. 1. 초기 생애 (1891년 ~ 1913년)

함양 여씨(咸陽)인 여운홍은 호는 근농(勤農)이며, 치계(稚溪) 여우길(呂祐吉)의 11대손이다. 1891년 9월 1일 경기도 양평 양서면 신원리 묘꼴에서 아버지 여정현(呂鼎鉉)과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항복의 11대손녀였다. 위로 형 셋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요절했고[15], 친형 여운형과 여운홍, 그리고 누이 2명만 살아남았다.

1903년 10월 조부 여규신의 상, 1905년 9월 모친상, 1906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1909년 서울 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경신학교에 진학했다.[1] 1911년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1]여운형안창호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조선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같은 해 9월 1일 요코하마에서 天洋丸을 타고 9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 후 오하이오주의 우스터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2. 2. 미국 유학과 독립운동 (1913년 ~ 1921년)

1911년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 3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미국 유학을 위한 여권을 얻기 어려웠는데, 미국 감리교회 해리스 목사의 소개장을 통해 여권을 얻고, 논 열마지기를 언더우드 목사에게 저당잡히고 이자 없이 600KRW을 빌려서 도미하였다.[16] 1913년 3월 미국에서 한국 선교를 목적으로 미국 감리교회 목사 해리스가 입국하자 미국 유학을 하고 싶었던 그는 해리스 목사에게 뜻을 피력했다.

1913년 6월 배를 타고 도미, 일본에 체류하다가 9월 1일 요코하마에서 천양환(天洋丸)이라는 선박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15일 만인 9월 16일 로스앤젤레스 주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오갈 데 없던 여운홍은 바로 대한인국민회에 도착했고, 1919년 11월에 출범한 흥사단에서 가입 부탁이 들어왔으나 독립운동의 범위를 넓게 투신하기 위해 거절하였다. 곧 오하이오주의 우스터 대학에 입학했다.

학비를 마련해야 했던 여운홍은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했다. 시카고 주 레이크폴리스트에는 백만장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한때 여운홍은 이곳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부잣집의 보일러 화구에 석탄을 넣는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보일러 아르바이트가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1918년 6월 오하이오주의 우스터 대학을 졸업했다. 우스터 대학을 졸업한 여운홍은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원으로 진학한다.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원에서는 희랍어를 주로 배웠으나, 그해 11월 스페인 독감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1918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14개조 평화 원칙에 민족 자결이 명시되자,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였던 그를 만나고자 대학교수와 목사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백악관을 방문했으나, 비서에게 면담을 거절당해 만나지 못했다.

1918년 프린스턴 대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하와이와 도쿄를 거쳐 귀국했다. 도쿄에서는 유학 중이던 김성수, 송진우, 윤치영 등에게 재미 동포의 현황과 독립 자금 조달 상황을 알렸다. 최남선, 이상재 등과 연락을 취한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삼일 운동 직전에 귀국했으나,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해서는 정부 내 파벌 투쟁에 실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개설되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1919년 6월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 강화 회의김규식 등과 함께 신한 청년당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했다.[1] 일본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3월 13일파리에 도착했다.[3] 그러나 열강들이 조선 독립 청원을 무시하자 실망하여 김규식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0년 상하이의 조선인 학교인 인성학교 교장에 취임[1]하여 학업 유지·발전을 위한 자금 조달 활동을 했다. 인성학교는 조선 해방 후에도 상하이 거주 한국인을 위해 존속되었으나, 학생 수 감소로 1980년에 폐교되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임시 정부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손문에게 밀서를 전달하기 위해 광주로 파견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인 거류민단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9월 귀국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혐의 부족으로 석방되었다.

2. 3. 귀국과 교육, 사업 활동 (1921년 ~ 1940년)

1921년 9월 귀국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혐의 없음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 11월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대비하여 상하이에서 조직된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재무 간사를 맡았다.[1] 1922년1925년보성전문학교 영문학 교수를 지내는 등 영문학자로 활동했다.[1] 그 후 싱거미신회사(Singer)에 입사하여[1] 1927년1939년에 싱거미신회사 총감독을 지냈다. 1930년대 일본 제국에서는 전향요구가 계속되었고, 여운홍은 일본 제국을 피해 공식 활동을 중단하였다.

1940년 김동성이 운영하던 식당 백합원(百合苑)을 인수, 운영하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YMCA 건물 건너편 골목에 위치한 양식집이었다. 이후 한동안 여운홍은 양식집을 운영하였다. 백합원은 백관수, 유자후, 유억겸, 백상규, 여운형, 장덕수, 구자옥, 김찬영, 이병직 등의 당대 인사들이 주로 왕래하였다.

2. 4. 일제 말기 친일 행적 (1941년 ~ 1945년)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여운홍은 부일협력의 길로 들어섰다. 1941년 9월, 전시체제하에서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했다.[1] 그 해 12월 이광수, 김동환 등과 함께 시국강연에 나섰으며, 이 시국강연에서 연설한 내용은 잡지 삼천리 1942년 1월호에 게재되었다. 1942년 2월호 조광내선일체를 지지하는 내용의 논문을 기고했다.[1] 같은 해 12월 매일신보사에서 주최한 '대동아전쟁의 전망' 좌담회에 참석했다.[1] 1943년 11월 '임시지원병제도익찬위원회'가 경성부 종로지역의 지원병 제도 홍보와 권유를 위해 주최한 가정방문 계몽행사 실행위원을 맡아 고원훈, 이광수, 조병상, 한상룡 등과 제2반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뒤 고향 경기도 양평에 내려가 1945년 광복 때까지 칩거생활을 했다.

1941년 이후 미국의 라디오 방송인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들으며 일본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2. 5. 해방 이후 정치 활동과 좌우합작, 남북협상 (1945년 ~ 1948년)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형 여운형안재홍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정치 일선에 나섰다.[25] 8월 15일 아침, 형 여운형은 엔도 정무총감으로부터 부총독(정무총감)은 미군이 코리아를 점령하지 않을 것이며, 점령은 순전히 소련군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25] 이에 자극받은 여운형은 엔도 총감과의 회동 직후 계동 집으로 돌아왔고, 여운홍은 간밤에 자기에게 접수하라 했던 방송국은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며 물어보았다. 그러자 여운형은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기 때문에 사정이 달라졌다"고 말했다.[25] 그러나 9월 남한에 상륙한 것은 소련군이 아니라 미국군이었다.

1945년 9월 8일 새벽, 조한용, 백상규 등과 함께, 이날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한 미국 육군 24군단 사령관 존 하지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26] 이후 인공에서 활동하였으나 부정적이었다.[27]

1946년 5월 9일, 여운홍은 공산당을 비난하고 인민당을 탈당했다.[28] 조봉암박헌영을 비난하는 서신이 보도된 지 이틀 후의 일이었다. 같은 날 여운홍은 중앙방송을 통해 조선인민당 탈당 성명서를 발표하였다.[29] 성명서에서 여운홍은 조봉암의 서신으로 조선공산당의 극좌적 오류와 모략이 폭로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조선인민당이 당내 일부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독자적 정치노선을 상실하고 공산당의 전위적 역할을 한다고 비난하고 신당 창당을 천명하였다.[29]

1946년 5월 11일에는 인민당 중앙집행위원 장권 등 10여 명의 간부를 포함한 94명이 조선인민당 탈당성명서를 발표하였다.[30] 이후 여운홍이 창당하게 될 사회민주당조선인민당 이탈자들이 중심을 이룬 중도파 정당이었다.[30] 그의 인민당 탈당 배경에는 여운형과 박헌영의 좌파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미군정의 계략이 있었다.[31] 박헌영 계열에서 조봉암이 빠지고, 여운형 계열에서는 그가 탈당하면서 좌파 진영의 세력은 축소, 약화되어 갔다.

1946년 5월,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고, 중도 좌파 노선을 지지하였으며, 8월 3일 사민당 결성식에는 이승만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했다.[32] 그가 형 여운형근로인민당을 탈당하게 된 배경에 대해 소련 측에서는 존 하지가 여운홍에게 대통령 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기록하였다.[33] 이후 민보사 사장 등을 지냈고, 여운형,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였다.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설치되자, 12월 미군정 당국에 의하여 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1947년 3월 12일 대한독립신문사 사장에 취임하였다.[34]

1947년 7월여운형이 암살된 뒤에도 김규식을 따라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활동하였으며, 12월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산된 뒤, 김규식 계열에서 정치활동을 하게 된다.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8년 1월 민족자주연맹 중앙당 총무국장을 맡았다. 같은 해 김규식, 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35] 4월 5일 여운홍은 남북협상 때 미군정청에서 연락원을 파견해 달라고 하지에게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같은 날 밤, 김규식, 홍명희, 김붕준 등과 경교장을 찾아 김구 숙소에서 협상 내용에 대한 회담하였다.

남북대표자 연석회의에서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 격문 등을 기초하는 기초위원회의 위원으로 홍명희, 엄항섭 등과 함께 기초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36] 소위원회 회의에서 박헌영이 미국을 제국주의로, 5.10 단독총선거 참가자를 망국노, 반동분자 등으로 과격한 언어를 구사하며 비판하자, 이에 격분하여 이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결정서가 좋을지 모르지만 우리 다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되겠으니 어구 수정이라도 하라고 항의하였다.[36] 그러자 박헌영은 왈거왈부하지 말고 민주주의적으로 가부를 결정하자고 했다.[36] 초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다시 반대발언을 했다가는 서울에 돌아갈 수 없다는 공포감을 느끼게 되자 여운홍은 일체의 발언을 중지하고 표결 등에서도 기권하였다.[36] 이후 남북협상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48년 5월 귀환하였다.

2. 6.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치 활동 (1948년 ~ 1973년)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평양을 방문했으나 발언권을 요구하자 박헌영에게 위협을 받았다. 5월 협상을 단념하고 돌아왔다.[37] 1950년 5월 30일 5.30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경기도 양평군에서 출마하여 민의원에 당선되었고,[37] 1954년 제3대 총선거서울특별시 종로구 을구에서 출마하였으나 5,450표로 낙선하였다. 자유당 선전부장을 지냈고,[37] 1960년 제5대 총선거에서는 참의원 의원에 최고득점으로 당선되었다.[37] 제2공화국 때 남북협상론으로 장면 총리의 공격을 받았다.[38]

1960년 5월 제5대 참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한 교섭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61년 1월 10일 평화통일과 남·북한 인사 교류의 첫 단계로서 김두봉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홍명희 부수상 등을 한국에 초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9][40] 1월 16일 장택상은 국시 위반이 아니냐고 반문했다.[41] 장면 국무총리는 여운홍의 주장이 정치인의 의견이라면 모르나 정식으로 제안한 것이면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고 발언하였다.[42]

1961년 일본을 방문하여, 도쿄에서 엔도 류사쿠를 만나 해방 당시 왜 소련군이 경성에 진주한다고 했는지를 질문했다. 엔도는 “도쿄 내무성에서 온 전보에 조선이 분단 점령된다고 해서 그랬다"고 대답하였다.[25] 같은 해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참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북유럽 등 2차로 세계일주를 하고 1962년 비행기편으로 귀국하였다.

1962년 2월 24일 영문지 재팬 타임즈에 서한을 보내 '군사정부에서 계획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계속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63년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은 군사 지도자들의 정책과 목표를 지지하리라고 확신한다.'고 하였다.

1963년 자민당의 지도위원이었다.[43]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자 1963년 8월 27일 자민당을 탈당하고 민주공화당에 입당, 민주공화당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윤치영과 함께 박정희 공화당 총재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군정 연장을 반대하던 야당에서는 그의 남북 협상 참여 전력을 문제 삼으며 윤치영과 군사 세력과 함께 모종의 음모를 획책한다며 비난했다.

1963년 12월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여운홍은 박정희를 찾아 면담하였다. 5.16 군사정변 직후 맏형 여운형의 묘소 주변 토지가 채윤혁에게 매각되자 여운홍은 변호사를 통해 구제 방안을 찾았으나 법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에 관계 당국에 진정서를 내는 대신 박정희에게 직접 호소하였고, 박정희여운형의 묘소 주변 토지 불하를 차단해주었다.[44]

2. 7. 사망 (1973년)

1972년 2월 경향신문에 '내가 겪은 20세기'를 연재하였다. 1973년 2월 3일 오전 9시 45분 노환으로 서울 종로구 계동 140-8 자택에서 별세했다.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생가 근처에 안장되었다.[1] 저서로는 형인 여운형의 평전 《몽양 여운형》(1967), 《영문법》이 있다.

3. 평가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여운홍은 부일협력의 길로 들어섰다. 1941년 9월, 전시체제하에서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했다. 그해 12월 이광수, 김동환 등과 함께 시국강연에 한 차례 나섰으며, 이 시국강연에서 연설한 내용은 잡지 삼천리 1942년 1월호에 게재되었다. 이어 1942년 2월호 조광내선일체를 지지하는 내용의 논문 등을 기고했다. 그해 12월 매일신보사에서 주최한 '대동아전쟁의 전망' 좌담회에 참석했다. 1943년 11월 '임시지원병제도익찬위원회'가 경성부 종로지역의 지원병 제도 홍보와 권유를 위해 주최한 가정방문 계몽행사 실행위원을 맡아 고원훈, 이광수, 조병상, 한상룡 등과 제2반 위원으로 활동했다.[46]

광복 이후, 1940년대 초반부터 관제 시국 강연에 참가하고 삼천리, 조광 등에 친일 논문을 기고한 부일협력 활동 때문에 한국독립당 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 수록되었다. 2000년대 초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 인명 사전 수록 대상자로 선정되었고,[46]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8년에 좌파 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1940년대에 일본을 지지하는 논문을 잡지에 기고하고, 강연회에서 일본에 협력한 사실을 근거로 여운홍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했다.

4. 가족 관계

(여운형의 첫째 딸)여난구1923년?조카
(여운형의 둘째 딸)여연구1927년1996년 9월 28일1946년 북한으로 건너감조카
(여운형의 셋째 딸)여원구1928년2009년 7월 30일1946년 북한으로 건너감5촌 조카여경구1913년1977년


5. 저서

6. 역대 선거 결과

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50년제2대 국회의원 선거무소속5,868표 (22.12%)1위당선초선
1954년제3대 국회의원 선거무소속5,450표 (17.80%)3위낙선
1963년제6대 국회의원 선거민주공화당14,998표 (20.84%)3위낙선


참조

[1] 웹사이트 여운홍(呂運弘) http://encykorea.aks[...] 2022-08-09
[2] 서적 1950년대 남북한의 선택과 굴절 역사비평사 2009
[3] 뉴스 집요한 日帝 방해공작 뚫고 유럽에 울려퍼진 대한독립의 외침 https://www.donga.co[...] 동아일보 2020-02-22
[4]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8∙15해방부터 6∙25전야까지) 인물과사상사 2004-04-03
[5] 서적 한국 현대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웅진지식하우스 2005-04-08
[6]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역사비평사 2006
[7]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역사비평사 2006
[8] 서적 비운의 역사 현장 아! 경교장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2003
[9]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10] 뉴스 동아일보 1961-01-10
[11] 뉴스 동아일보 1961-01-16
[12] 뉴스 경향신문 1963-08-27
[13] 뉴스 경향신문 1971-03-30
[14] 웹사이트 # 추정 근농 여운홍과 이웃
[15]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16] 서적 1950년대 남북한의 선택과 굴절 역사비평사 2009
[17] 서적 초대 대통령 이승만 1 개화와 독립 청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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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뉴스 동아일보 1961-01-16
[43] 뉴스 경향신문 1963-08-27
[44] 서적 여운형 평전 (역사인물찾기 5) 실천문학사 2009
[45] 뉴스 경향신문 1971-03-30
[46] 뉴스 "'여운형 학도병 권유' 기사는 조작됐다" - 해방 뒤 <경성일보> 기자 "사실무근" 증언... 미 군정도 증거 못찾아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9-06
[47] 간행물 고려대 명예교수 박찬기 http://shindonga.don[...] 신동아 2005-04
[48]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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