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
1. 개요
홍명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후 좌익 계열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05년 일본 유학 중 아버지 홍범식의 자결로 귀국, 3.1 운동에 참여하고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 근로인민당 당수 등을 역임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펼쳤으며,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다가 찬탁으로 입장을 바꿨다.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방북한 후 북한에 정착하여 부수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6.25 전쟁에 관여했다. 그는 1968년 사망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는 소설 《임꺽정》이 있다.
| 한글 | 홍명희 |
|---|---|
| 한자 | 洪命熹 |
| 로마자 표기 | Hong Myeong-hui |
| 호 | 벽초 (碧初) |
| 필명 | 홍가인 (洪假人) 홍가인 (洪可人) 백옥석 (白玉石)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직책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
|---|---|
| 임기 시작 | 1948년 9월 9일 |
| 임기 종료 | 1962년 10월 23일 |
| 총리 | 김일성 |
| 함께한 부수상 | 박헌영 김책 허가이 최창익 최용건 박의완 박창옥 김일 정준택 남일 리주연 리종옥 김광협 |
| 출생일 | 1888년 7월 3일 |
|---|---|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괴산군 동부리 |
| 사망일 | 1968년 3월 5일 |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환) |
| 국적 | 한국 |
| 시민권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정당 | 민주독립당 |
|---|---|
| 주요 경력 | 소설가 출신 정치인 조선로동당 명예대표고문위원 |
| 종교 | 없음 (무신론) |
| 배우자 | 여흥 민씨 부인 |
|---|---|
| 부모 | 홍범식 (부) 은진 송씨 (모) 조경식 (계모) |
| 자녀 | 장남: 홍기문(洪起文) 차남: 홍기무(洪起武) 3남: 홍기하(洪起夏) 장녀: 홍주경(洪姝瓊) 차녀: 홍무경(洪茂瓊) 3녀: 홍계경(洪季瓊) |
| 친인척 | 홍승목(친조부) 조완구(고모부) 김일성(사위) |
| 관련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60)풍산 홍씨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 Hsinhua News Agency Relea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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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에스페란티스토 -
김억
김억은 평안북도 곽산 출신의 시인이자 번역가, 문학 평론가로, 《오뇌의 무도》와 《해파리의 노래》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기반을 다졌으며, 김소월의 스승이자 '김포몽'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가로도 활동했지만, 친일 행적과 납북으로 인해 행적이 불분명한 인물이다. -
한국의 에스페란티스토 -
최용건
최용건은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하고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을 지휘했으며 김일성 정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저술가 -
박문원 (미술가)
박문원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이후 북한에서 활동한 화가이자 미술사학자로, 유화 작품과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반영한 작품을 남겼으며 미술사 저술과 고구려 벽화 평론을 발표하고 조선미술동맹 등에서 활동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저술가 -
계응상
계응상은 일제강점기부터 북한에서 활동한 유전학자이자 잠학자로, 북한 잠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재직 당시 리센코의 유전 이론을 비판하며 고전 유전학 연구를 옹호한 인물이다. -
조선문학가동맹의 인물 -
박태원 (1909년)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로, 모더니즘 소설을 주로 썼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조선문학가동맹의 인물 -
이태준
이태준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로, 섬세한 문체와 서정적인 분위기로 현실을 그린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여 주목받았으며, 특히 1930년대 〈달밤〉, 〈까마귀〉, 〈복덕방〉 등의 작품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미학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월북 후 숙청되어 정확한 사망 시기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2. 생애
1919년 3·1 운동 당시 고향인 괴산군에서 시위를 지도하였다. 동아일보 주필을 역임하였고, 이후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소설 《임꺽정》을 집필하였다. 1927년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항일단체인 신간회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으나, 1929년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45년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며 남한에서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 결정 소식이 전해지자 처음에는 반탁운동을 주장했으나, 이후 찬탁으로 돌아섰다. 1947년 여운형 암살 이후, 근로인민당 당수 등으로 활동했으나 정치적 역량 부족으로 세력 확대에 실패했다.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 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부수상에 선임되었다. 1962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68년 3월 5일 사망하여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걸쳐 정치 활동으로 소식이 전해진 홍석형은 그의 손자이다.
2.1. 생애 초반
1905년 일본 도쿄에 유학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아버지 홍범식이 자결하자 큰 충격을 받고 귀국하였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3.1 운동 때에는 괴산군에서 충청북도 최초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상하이에서 이광수를 만나 톨스토이를 권하기도 했으며, 조소앙 등과 함께 궁핍한 생활을 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27년에는 이관용, 안재홍 등과 함께 《현대평론》 창간에 참여하였다.
2.1.1. 출생과 가계
홍명희는 충청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괴산 홍범식 고가)에서 출생하였으며, 근처 제월리로 이주했으며 지난날 한때 충청도 괴산군 증평면 증평리에서도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제월리에는 그의 일가가 살던 생가가 존재하고 있다.
그의 가계는 풍산 홍씨로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남편 영안위 (永安尉)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의 차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63 홍만형(洪萬衡, 1633~1670)]이 그의 10대조이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홍인한 형제는 홍주원의 장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57 홍만용(洪萬容, 1631~1692)]의 증손이고, 방계 선조들 중에는 정조 때의 세도재상 홍국영도 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의 처가 역시 그의 집안의 방계 혈족들이었다. 고모 홍정식은 독립운동가 조완구의 아내이기도 했다.
홍명희의 증조부 홍우길은 장원급제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홍승목은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가 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금산군수 홍범식은 한일합방에 분개하여 자결한다. 어려서 생모를 잃고, 아버지 홍범식은 조씨와 재혼했으며, 계모 조씨에게서 이복 동생들이 태어났다.
생모 은진 송씨(恩津 宋氏, 1871~1890)는 군수 송은로(宋殷老)의 딸로, 송시열과 함께 서인의 영수였던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9대손이다. 외숙 송종면(宋鍾冕, 1866~?)도 문과 급제자였다.
1900년에 참판 민영만(閔泳晩, 1863~1916)의 딸 여흥 민씨(驪興 閔氏, 1885~1953)와 결혼하였다. 장인 민영만은 고종(高宗, 1852~1919)의 외조부 민치구(閔致久, 1795~1874)의 형 민치대(閔致大)의 손자이며, 민선호(閔璿鎬)의 아들이다.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나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 집안과도 그리 멀지 않다.
2.1.2. 학창시절과 독립운동 활동
1901년부터 1906년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중경의숙에서 학문을 공부하고 문학에 처음 접했다. 부친은 법학을 공부하길 바랐으나, 그는 문학을 더 좋아했다.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다이세이 중학에서 수학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아버지 홍범식이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자, 일본에서 공부하던 홍명희는 큰 충격을 받고 학업을 포기, 조선으로 돌아왔다. 부친상을 치르던 중인 1911년 4월에는 일본 문예지에 일본어 단편 소설 "유서"를 게재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괴산에서 충청북도 최초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상하이로 건너가 이광수를 다시 만나기도 했는데, 이때 이광수에게 톨스토이를 권했다고 한다. 조소앙, 이광수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으나,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며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홍명희는 이광수를 버리지 않았다.
항일 독립운동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으로 근무하고, 아들 홍기문과 함께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아들 홍기문의 증언에 따르면, 홍명희는 맑스주의를 공부하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69374&cid=40942&categoryId=33406 가와카미 하지메]와 [https://ja.wikipedia.org/wiki/%E5%B1%B1%E5%B7%9D%E5%9D%87 야마카와 히토시] 등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920년대 중반에는 조선 공산당 비밀 당원이었다가 출당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비록 적극적인 공산주의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우호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927년 《현대평론》 창간에 이관용, 안재홍, 김준연, 이순탁, 백남운, 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2.2. 광복 이후
1945년 해방 이후, 홍명희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정개선환영대회에서 축사를 했고, 12월 23일에는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여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 결정 소식이 전해지자, 홍명희는 서울신문과의 기자회견에서 반탁운동을 주장했다. 김구와 임시정부 측의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여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중앙위원 겸 상임위원이 되었다. 같은 날 40여 개의 좌익단체가 모인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에서 위원장을 맡아 신탁통치안 철폐요구 성명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신탁통치가 후견통치이며 분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인식하고 반탁운동에서 탈퇴하여 찬탁으로 돌아섰다.
1947년 여운형 암살 이후, 홍명희는 근로인민당 당수로 활동했으나, 여운형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이후 민주통일당, 민주독립당 등 군소 정당 대표를 맡았지만, 정치적 역량 부족으로 세력 확대에 실패했다.
2.2.1. 사회운동
1947년 11월 총선 실시 및 감시를 위해 입국하는 UN위원단 환영대회에 명예회장 이승만, 회장 조소앙에 이어 부회장으로 참여하였다. 1948년 1월 UN한국위원단이 도착하면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과 남북협상론이 나오자 그는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
1945년 12월 김일성, 무정 두 사람의 입경(入京) 환영준비 위원장을 맡은 바 있는데, 그들의 입경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이때부터 홍명희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보아 중도좌파에 해당하는 인물인 홍명희는 1946년 봄부터 북한공산당에 포섭되었다고 하며, 1946년 3월말과 8월에 두 차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 지도급 인사들을 만났고, 이들의 요청에 응하여 남한에서의 정치 활동을 했다는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의 비밀 방북에는 일찍부터 공산주의자가 된 둘째 아들 홍기무의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1947년 11월 중순 세 번째로 방북하였고, 돌아온 이후로 남한 단독 총선 반대와, 남북 협상 성사를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1948년 4월 김구의 방북은 성시백의 공작도 있었지만 홍명희의 설득이 결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박갑동은 남로당의 홍남표가 홍명희를 시켜 김구가 방북하도록 공작을 하게 했다고 한다.
홍명희는 김구 등의 방북 직전인 1948년 2월에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왔다고 하는데, 소련군의 군사위원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이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이 1994년 공개되면서 1948년의 남북정치협상은 소련군의 치밀한 정치공작에 따른 것이었다고 밝혀졌다. 그는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방북하는 김구, 김규식 등과 같은 때 방북하였으나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눌러 앉았다.
북한에 남은 홍명희는 몇 달 뒤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 남한과 미국을 격렬히 비난하는 대남방송을 하였다. 1962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2.2.2. 단정 수립 반대와 남북협상 참여
1947년 11월 UN위원단 환영대회에 부회장으로 참여했고, 1948년 1월 UN한국위원단이 도착하면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과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자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 1946년 3월말과 8월에 두 차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 지도급 인사들을 만났고, 이들의 요청에 응하여 남한에서의 정치 활동을 했다는 흔적이 많이 보인다. 1947년 11월 중순 세 번째로 방북하였고, 돌아온 이후로 남한 단독 총선 반대와, 남북 협상 성사를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1948년 4월 김구의 방북은 성시백(成始伯, 1905~1950)의 공작도 있었지만 홍명희의 설득이 결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박갑동은 남로당의 홍남표(洪南杓, 1888~1950)가 홍명희를 시켜 김구가 방북하도록 공작을 하게 했다고 한다.
홍명희는 김구 등의 방북 직전인 1948년 2월에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왔다고 하는데, 1948년의 남북정치협상은 소련군의 치밀한 정치공작에 따른 것이었다고 밝혀졌다. 그는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방북하는 김구, 김규식 등과 같은 때 방북하였으나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눌러 앉았다.
2.2.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정치활동
홍명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하여 1948년 9월 9일 북한 부수상(副首相)에 선임되었다.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 내각 부수상 등을 역임하며 주요 정치활동을 하였다.
1949년 1월 평양에서 열린 조소(朝蘇)공식회의(제1차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 소련 사절단에게 공군 확장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1949년 3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부수상 자격으로 동행했다. 스탈린은 당시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북한군이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김일성은 이후 48차례나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중국 공산혁명 성공 등 상황 변화에 따라 1950년 1월 30일 남침 지원 의사를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
홍명희는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일찍부터 알고 협력했으며, 6.25 남침 개시 이튿날인 6월 26일 조직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쟁 최고 지휘부였던 7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이었다. 따라서 그는 주요 6.25 전범 중 한 명이다.
1950년 7월 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남한 토지개혁 실시를 발표했다. 홍명희는 1949년 5월 13일부터 <공화국 남반부의 토지개혁실시를 위한 법령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 법령안을 만들었다. 이는 그가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적극 협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9년 9월 김정숙이 사망하자, 김일성은 1950년 1월 15일에 홍명희의 딸 홍영숙과 재혼한다. 6.25 남침 당시 그는 김일성의 장인이었다. 홍영숙은 결혼 초기에 사망하여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홍명희를 여러모로 배려하고 지원하여 두 사람은 상당한 유착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박갑동에 의하면 홍명희는 부수상에 선임되자 이에 감격하여 쌍둥이 딸 둘을 김일성 관저에 가정부로 들여보냈다고 한다. 이들 중 한 명이 김일성과 결혼한 것이다.
대부분의 월북 문인들이 숙청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홍명희만 고위직에서 승승장구한 것은 김일성과의 유착관계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6.25 전쟁 중인 1952년 "근로자"지에 《김일성 장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며 조직자이다》라는 글을 써서 김일성을 찬양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 때 피난오던 도중 이광수가 동상과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그는 직접 이광수를 찾아가 김일성의 재가를 얻어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15km 떨어진 자기 숙소에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광수는 폐결핵의 악화로 사망했다.
1961년 5월 13일, 부수상 홍명희는 북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를 대표하는 33명의 준비위원들이 모여 만든 노동당 외곽단체 [http://nkinfo.unikorea.go.kr/nkp/term/viewNkKnwldgDicary.do?pageIndex=18&koreanChrctr=&dicaryId=170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위원장을 맡아 대남 정치공세를 펼쳤다. 그는 올림픽 위원장, 과학원장을 역임하다 1962년에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됐다.
홍명희가 북한에서 아무 기반도 없고 공산주의 활동 전력도 없었음에도 1948년 4월 월북 직후 부수상이라는 최고위직에 발탁된 것은, 해방 직후부터 비밀리에 북한을 왕래하며 북한에 포섭되어 남한에서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활동을 했고, 김구와 김규식의 방북을 성사시키고 동행한 400여 명 중 70여 명이 북한에 눌러앉게 하여 남한 우파 진영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남북협상 찬반으로 남한 내 갈등을 조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로 보인다. 당시 남으로 귀환하지 않은 70여 명은 처음부터 북한을 위해 활동하던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홍명희의 아들과 비서가 남파되어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대남 공작에도 적극 간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차남 홍기무는 1949년 9월 초순에 남파되어 홍명희가 월북 전 당수로 있었던 민주독립당 조직을 강화하고, 한국 정부 파괴 및 요인 암살 등을 기도하다 12월 말에 체포되었다. 그는 6.25 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감옥을 탈출하여 장인 정인보를 납북하였고, 위당의 죽음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홍기무는 6.25 당시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당 연락부장 [https://web.archive.org/web/20170426055732/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15_1_0026783 이주상]의 지시로 내무성 정보국장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810 방학세]의 요인 납북 공작에 협력하고 있었다. 위당의 셋째 아들이자 홍기무의 처남 정흥모는 6.25 때 국군으로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홍명희의 차석 비서 김원철도 6.25 때 남파되어 선전 사업 중 서울 탈환으로 9월 20일 월북하였다가, 1950년 11월 5일 다시 남파되어 11월 14일에 체포되었다. 6.25 와중에 그의 고모부 조완구나 위당 정인보를 납북한 일에도 그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홍명희는 6.25 전후로 전쟁 준비와 수행에 적극 협력하여 전쟁에 대한 책임이 상당하다. 휴전 이후 1961년 5월 13일, 부수상이었던 그가 위원장이 되어 조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대남 정치 공작과 선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남한 내 여론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유발하는 일을 해 왔다. 그의 제자로 알려진 이구영도 1958년 7월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9월에 부산에서 검거되어 1980년까지 22년간 징역을 살았다.
2.2.4. 대남 적대 활동 간여
홍명희는 1945년 12월 김일성과 무정의 입경 환영준비 위원장을 맡았으나, 이들의 입경은 성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김일성은 홍명희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도좌파 성향의 홍명희는 1946년 봄부터 북한 공산당에 포섭되었고, 1946년 3월 말과 8월에 두 차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 지도급 인사들을 만났으며, 이들의 요청에 따라 남한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는 여러 흔적이 보인다. 1947년 11월에는 세 번째로 방북하였고, 돌아온 후에는 남한 단독 총선 반대와 남북 협상 성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1948년 4월 김구의 방북에는 성시백의 공작도 있었지만, 홍명희의 설득이 김구가 방북을 결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한 박갑동은 남로당의 홍남표가 홍명희를 시켜 김구가 방북하도록 공작을 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1994년 공개된 "레베데프 비망록"에 따르면, 1948년의 남북정치협상은 소련군의 치밀한 정치공작에 따른 것이었다. 홍명희는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방북하였으나,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
홍명희는 북한에 남은 지 몇 달 뒤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남한과 미국을 격렬히 비난하는 대남방송을 하였다. 같은 해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수상에 선임되었다.
1949년 1월 평양에서 열린 조소(朝蘇)공식회의(제1차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해 소련 사절단에게 공군력 확장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같은 해 3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부수상 자격으로 동행했다. 당시에는 스탈린이 남침을 불허했지만, 이듬해 1월 30일 남침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
홍명희는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이에 협력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는 한국 전쟁 발발 이튿날인 6월 26일 조직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쟁 최고 지휘부였던 7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이었다.
1950년 7월 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남한 토지개혁 실시를 발표했다. 홍명희는 1949년 5월 13일부터 <공화국 남반부의 토지개혁실시를 위한 법령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 법령안을 만들었다.
1961년 5월 13일, 부수상이었던 홍명희는 위원장이 되어 북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를 대표하는 33명의 준비위원들을 모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를 조직하였다. 조평통은 대남 정치 공작과 선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남한 내 여론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유발하는 일들을 해 왔다.
홍명희의 아들과 비서가 남파되어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대남 공작에도 적극적으로 간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차남 홍기무는 1949년 남파되어 정부 파괴 및 요인 암살 등을 기도하다 체포되었다. 홍명희의 차석 비서 김원철도 한국 전쟁 때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었다.
2.3. 사망
1968년 3월 5일 사망하였다.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생가는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보전하고 있다.
3. 작품 활동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집필하였다. 이 소설은 1562년에 죽은 한국의 반란군 임꺽정의 삶을 바탕으로 한 역사 소설이다. 그는 1927년부터 민족 통일 전선 조직 신간회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으나, 1929년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4. 평가
홍명희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다이세이 중학에서 수학하였다. 1910년 그의 아버지 홍범식이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자 큰 충격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받들어 3.1 운동에 참여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항일 독립운동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아들 홍기문의 증언에 따르면, 맑스주의 원서를 읽고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등의 책을 탐독했으며, 1920년대 중반에는 조선 공산당 비밀 당원이었다가 출당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소설 임꺽정은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작가의 투옥과 개인 사정, 1940년 조선일보 폐간 등으로 연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941년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 1945년 언론보국회(言論報國會)에 참여한 경력 때문에 친일 논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후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 부수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68년 사망 후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5. 가계
홍명희의 가계는 풍산 홍씨로,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와 남편 영안위 홍주원의 차남 홍만형(1633~1670)이 10대조이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63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홍인한 형제는 홍주원의 장남 홍만용(1631~1692)의 증손이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057 방계 선조들 중에는 정조 때의 세도재상 홍국영도 있고, 정약용의 처가 역시 그의 집안의 방계 혈족들이었다.
| 관계 |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 증조부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4285 홍우길(洪祐吉)] | 1809~1890 | 이조판서 역임 |
| 조부 | 홍승목(洪承穆) | 1843~1925 | 병조판서 역임, 생부는 홍우필(洪祐弼)https://web.archive.org/web/20170408082341/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75_013887&curSetPos=1&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
| 아버지 | 홍범식(洪範植) | 1871~1910 | 경술국치 때 자결 |
| 생모 | 은진 송씨(恩津 宋氏) | 1871~1890 | 군수 송은로(宋殷老)의 딸, 오빠 송종면(1866~?) |
| 계모 | 조경식(趙璟植) | 1876~1950 | 6.25 전쟁 중 우익 인사들에게 살해 |
| 동생 | 홍성희(洪性憙) | 1894~? | 형 홍명희와 함께 월북 |
| 동생 | 홍도희(洪道憙) | 1903~1923 | |
| 동생 | 홍교희(洪敎憙) | 1907~1922 | |
| 고모 | 홍정식(洪貞植) | ? ~ 1945년 2월 | 조완구에게 출가 |
| 처 | 여흥 민씨(驪興 閔氏) | 1885~1953 | 민영만(1863~1916)의 딸 |
| 장남 | 홍기문(洪起文) | 1903~1992 |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부원장 |
| 장자부 | 덕수 이씨 | ||
| 손자 | 홍석형(洪錫亨) | 1936~? |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으로 있다 숙청 |
| 손자 | 홍석중(洪錫中) | 1941~ | 소설가 |
| 차남 | 홍기무(洪起武) | 1910~? | 초명 기은(起殷),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피체 투옥, 6.25때 탈출하여 월북 |
| 차자부 | 정경완(鄭庚婉) | 1920~? | 정인보의 둘째 딸 |
| 손자 | 홍석우 | ||
| 손자 | 홍석주 | ||
| 손녀 | 홍석매(1957~) | ||
| 3남 | 홍기하(洪起夏) | 1919~1920 | |
| 장녀 | 홍주경(洪姝瓊) | 1921~? | |
| 차녀 | 홍무경(洪茂瓊) | 1921~? | |
| 3녀 | 홍계경(洪季瓊) | 1926~? |
1950년 1월 15일 그의 딸 홍영숙(洪永淑, 또는 홍애연(洪愛姸))이 김일성과 결혼하였는데, 맏딸 또는 둘째딸이라는 것으로 보아 쌍둥이인 홍주경과 홍무경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정된다.
홍명희의 조부 홍승목이 1867년에 작성한 직계 선조 계보 "풍산홍씨직파연보도(豐山洪氏直派年譜圖)"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