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다네스 1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바르다네스 1세는 "장미"를 의미하는 이름으로, 파르티아 제국의 왕이었다. 아르타바누스 2세의 아들로, 40년 왕위를 계승했으나, 고타르제스 2세에게 찬탈당했다. 그는 고타르제스를 물리치고 파르티아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셀레우키아 포위 실패로 중앙 아시아의 박트리아로 도망쳤다. 이후 고타르제스와의 협상으로 왕위를 되찾고 셀레우키아를 복속시켰다. 아르메니아 침공을 준비했으나 로마의 위협과 고타르제스와의 갈등으로 포기했다. 그는 고타르제스를 격파하고 영토를 확장했지만, 46년경 파르티아 귀족들에게 암살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그리스계 이란인 - 이스마일 1세
이스마일 1세는 사파비 왕조의 창시자이자 첫 번째 샤로, 키질바시 부족의 지지를 받아 사파비 제국을 건국하고 시아파를 국교로 선포했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는 등 격렬한 생애를 살았고 시와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아제르바이잔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 그리스계 이란인 - 바르시네
바르시네는 파르나바조스의 딸로서 멘토르와 멤논의 아내였으며, 알렉산드로스 3세의 측실이 되어 헤라클레스를 낳았지만, 아들과 함께 카산드로스에게 살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 살해된 1세기 군주 - 비텔리우스
비텔리우스는 69년 짧게 로마 황제를 지낸 인물로, 명문가 출신이지만 게르마니아 군단의 지지로 황제가 된 후 무능과 사치로 악명을 떨치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반란으로 몰락하여 처형당했다. - 살해된 1세기 군주 - 클라우디우스
클라우디우스는 기원전 10년에 태어나 프라이토리안 근위대의 지지로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가 되었으며, 재정 개혁과 영토 확장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원로원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았고 정치적 암투 속에 54년 사망, 아그리피나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는 다작의 저술가이다. - 1세기 이란 사람 - 오스로에스 1세
오스로에스 1세는 파코루스 2세에게 반기를 들고 왕위를 찬탈하여 볼로가세스 3세와 경쟁하며 파르티아 서부 지역을 장악했으나, 로마의 침공과 볼로가세스 3세와의 권력 다툼 끝에 왕위를 잃고 사망한 파르티아의 왕이다. - 1세기 이란 사람 - 볼로가세스 2세
바르다네스 1세 | |
---|---|
기본 정보 | |
칭호 | 제왕 |
![]() | |
계승 | 파르티아 제국의 왕 |
재위 | 40년 – 46년 |
선임자 | 아르타바누스 2세 |
후임자 | 고타르제스 2세 |
왕조 | 아르사케스 왕조 |
아버지 | 아르타바누스 2세 |
사망일 | 46년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2. 이름
"바르다네스" (Bardanes로도 표기)는 "장미"를 의미하는 중기 이란어 이름 ''Wardān''의 라틴어 표기이다. 이 이름은 그리스어로 ''Ordanes'' Ὀρδάνηςgrc와 ''Ordones'' Ὀρδώνηςgrc로, 하트라 아람어로는 wrdn으로 음역된다.[1]
파르티아 제국의 왕 아르타바누스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바르다네스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1] 그러나 왕위는 아르타바누스 2세의 양자였던 고타르제스 2세가 차지했다.[1] 고타르제스 2세는 왕위에 오른 뒤 또 다른 형제 아르타바누스를 그의 아내와 자녀와 함께 처형했다.[1] 이러한 처형에 대한 반발로 바르다네스 1세는 고타르제스 2세를 기습하여 이틀 만에 약 603.50km를 이동하여 그를 격파했다.[1] 이후 바르다네스 1세는 인접한 파르티아 지방 총독들의 지원을 받아 파르티아 영토 대부분을 빠르게 장악했다.[1]
3. 생애
바르다네스 1세는 셀레우키아 대반란을 진압하고, 아르메니아를 재정복하려 했으나, 로마와의 갈등 및 고타르제스 2세와의 분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바르다네스 1세는 46년경 파르티아 귀족들에게 암살당했다.
3. 1. 왕위 계승 분쟁과 내전
아르타바누스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영토를 물려받은 바르다네스 1세는 고타르제스 2세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1] 고타르제스 2세는 다른 형제 아르타바누스를 아내와 자녀와 함께 처형했고,[1] 이에 반발한 바르다네스 1세는 기습 공격으로 약 603.50km를 이동하여 고타르제스 2세를 격파했다.[1] 이후 바르다네스 1세는 파르티아 지방 총독들의 지원을 받아 영토 대부분을 빠르게 장악했다.[1]
서기 35년부터 반란을 일으킨 메소포타미아 도시 셀레우키아는 바르다네스 1세를 인정하지 않아 포위 공격을 받았으나, 이로 인해 고타르제스 2세가 우위를 점하고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바르다네스 1세를 중앙 아시아의 박트리아로 몰아냈다. 이때 바르다네스 1세가 월지족(초기 쿠샨족) 궁정에 피난 및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흉상이 박트리아 칼차얀에서 발견되었다.[2]
한편, 아르메니아에서는 바르다네스 1세의 형제 오로데스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폐위되고 파르나바지드 왕조의 미트리다테스가 임명되어 혼란을 겪었다.
바르다네스 1세와 고타르제스 2세는 전투 직전, 유력 세력들의 음모를 알게 되어 합의를 통해 바르다네스 1세는 왕위를 유지하고 고타르제스 2세는 히르카니아 통치자가 되었다. 42년 6월, 바르다네스 1세는 7년간의 반란을 끝내고 셀레우키아를 다시 복종시켰으며, 도시 자율성을 줄이고 주화 주조 특권을 없앴다.[3]
이후 바르다네스 1세는 아르메니아 재정복을 준비했으나,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의 위협과 고타르제스 2세와의 갈등 재개로 포기했다. 바르다네스 1세는 메디아와 히르카니아 국경 에린데스 강에서 고타르제스 2세를 격파하고 아리아까지 정복했으나, 46년경 파르티아 귀족들의 사주로 사냥 중 암살당했다.
3. 2. 셀레우키아 반란 진압
기원전 40년경, 파르티아 제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메소포타미아 도시 셀레우키아는 바르다네스 1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바르다네스 1세는 셀레우키아를 포위했다.[1] 그러나 셀레우키아에 대한 장기간의 포위 공격은 고타르제스 2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고, 고타르제스 2세는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바르다네스 1세를 중앙 아시아의 박트리아로 몰아냈다.[2]
42년 6월, 바르다네스 1세는 7년간의 반란 끝에 셀레우키아가 다시 파르티아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3] 그는 도시의 자율성을 크게 줄이고 자체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특권을 없앴다.[3] 이로 인해 파르티아 내에서 유력 세력으로서의 그리스인 폴리스의 역사는 사실상 끝났다. 이후 그리스인 폴리스가 특별히 큰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는 일은 파르티아의 멸망까지 없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그리스 철학자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가 바르다네스 1세의 궁정을 방문했고, 바르다네스 1세는 그가 인도-파르티아로 여행할 때 호송대의 보호를 제공했다. 아폴로니우스가 인도-파르티아의 수도 탁실라에 도착했을 때, 그의 호송대장은 파르티아어로 쓰여진 바르다네스 1세의 공식 서한을 읽었고, 인도 관리는 아폴로니우스를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다.
3. 3. 아르메니아 문제와 로마와의 관계
서기 40년경, 바르다네스의 아버지이자 당시 파르티아 왕이었던 아르타바누스 2세가 사망하면서 바르다네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1] 그러나 왕위는 아르타바누스 2세의 양자인 고타르제스 2세가 찬탈했다.[1] 고타르제스는 다른 형제 아르타바누스를 아내와 자녀와 함께 처형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바르다네스는 고타르제스를 기습하여 격파했다.[1] 이후 바르다네스는 파르티아 대부분의 지역을 빠르게 장악했다.[1]
이와 동시에 아르메니아에서는 바르다네스의 형제 오로데스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폐위되고 파르나바지드 왕조의 왕자 미트리다테스가 왕위에 오르는 혼란이 있었다.
바르다네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재정복할 준비를 했지만, 시리아의 로마 총독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의 전쟁 위협과 고타르제스와의 갈등 재개로 인해 계획을 포기했다.
3. 4. 고타르제스 2세와의 재대결 및 암살
바르다네스는 히르카니아의 통치자였던 고타르제스가 파르티아의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맞서 재대결을 벌였다. 고타르제스는 다른 형제 아르타바누스를 아내와 자녀와 함께 처형했는데, 이에 대한 반발이 즉시 일어났고, 바르다네스는 고타르제스를 기습하여 이틀 만에 약 603.50km를 이동하여 그를 격파했다.[1] 바르다네스는 인접한 파르티아 지방 총독들의 지원을 받아 파르티아 영토 대부분을 빠르게 장악했다.[1]
서기 35년부터 반란을 일으킨 메소포타미아 도시 셀레우키아는 바르다네스를 인정하지 않아, 바르다네스는 그 도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셀레우키아에 대한 긴 포위 공격으로 고타르제스가 이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그는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바르다네스를 몰아냈고, 바르다네스는 중앙 아시아의 박트리아로 도망쳤다.[2]
바르다네스와 고타르제스가 전투를 벌이기 직전에 고타르제스가 바르다네스에게 유력한 세력들이 그들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면서 합의에 도달했다. 그 합의에 따라 바르다네스는 왕위를 유지하고, 고타르제스는 히르카니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42년 6월, 바르다네스는 7년의 반란 이후 셀레우키아가 다시 파르티아에 복종하도록 강요했다.[3] 그는 도시의 자율성을 크게 줄였고 자체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특권을 없앴다.
최근의 승리에 힘입어 바르다네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재정복할 준비를 했지만, 시리아의 로마 총독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의 전쟁 위협과 합의를 파기한 고타르제스와의 재개된 갈등으로 인해 결국 계획을 포기했다. 바르다네스는 메디아와 히르카니아 국경에 위치한 에린데스 강에서 고타르제스를 격파했다. 그는 그 후 남은 파르티아 지방을 정복하여 아리아까지 이르렀다. 그는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한 파르티아 귀족들의 사주로 사냥 중에 암살당했다.
참조
[1]
문서
11.8
https://www.perseus.[...]
Tacitus
[2]
서적
Splendeurs des oasis d'Ouzbékistan
Louvre Editions
2022
[3]
문서
2017, 2012, 198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