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타비아 (수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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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타비아는 수리남 사라마카 강 근처에 위치했던 나병 환자 치료를 위한 식민지였다. 1790년에 설립되어 1897년에 폐쇄되었으며, 2017년에 재건되어 관광 명소로 운영되고 있다. 바타비아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나병 환자들을 격리, 치료하는 장소였으며, 가톨릭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페테르 뒨데르스 신부가 이곳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다 사망했으며, 1982년 복자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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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타비아 (수리남)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위치 | 수리남 사라마카 구 캘커타 | 
| 좌표 | 좌표: | 
| 행정 구역 | |
| 국가 | 수리남 | 
| 구 | 사라마카 구 | 
| 자치구 | 캘커타 | 
2. 역사
1790년, 수리남의 사라마카 강 근처 Voorzorg 지역이 나병 치료를 위해 지정되었다.[1] 1824년에는 나병 환자들이 코페남(Coppename) 지역의 버려진 농장으로 이주했다.[1] 바타비아는 '오렌지 로드'의 일부인 중요한 군사 기지였으며, 내부에서 활동하는 전 노예 집단으로부터 농장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2]
1786년에 네덜란드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수리남 식민지로 파견되었으나 농장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3] 개신교 선교사들 역시 환영받지 못했지만, 당시 개신교는 국교였다.[3] 1836년, 나병 환자 식민지는 야코부스 흐로프가 이끄는 로마 가톨릭 선교소를 영구적으로 갖게 되었고, 페테르 뒨데르스를 포함한 여러 인물들이 그 뒤를 이었다.[3] 1865년, 수리남 선교는 (네덜란드) 구속자회에 할당되었으며,[3] 이들은 "가장 버려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할 것"을 규칙 중 하나로 삼았다.[4] 사제들은 ''윈티''와 같은 아프리카 문화 및 종교 관습에 대해 거의 존중하지 않았고, 이는 여러 차례 심각한 긴장을 야기했으며, 1849년에는 한 사제가 독살당하기도 했다.[5]
페테르 뒨데르스는 1866년 구속자회에 합류한 후, 아메리카 원주민과 마룬 사람들을 위한 선교 여행을 떠났고, 1885년에는 사도 대리 주교 요하네스 스하프에 의해 다시 바타비아로 보내져 신장 감염에 걸려 1887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6] 페테르 뒨데르스는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6][7]
1826년, 바타비아에는 약 300명의 나병 환자가 있었고, 1853년에는 453명으로 늘어났다.[5][8] 1863년 네덜란드의 노예 폐지 당시에는 380명의 감염자가 있었고, 그 중 11명은 이미 자유인이었다.[5] 나병에 걸린 369명의 전 노예들은 성씨를 부여받았지만, 전 소유주들은 재정적 보상을 받지 못했다.[5] 바타비아의 관리들은 나병 환자들의 배급에서 흑인과 아시아인 ('계약 노동자') 사이에 차별을 계속했다.[5] 바타비아의 나병 환자 수는 감소하여, 많은 감염자들이 파라마리보와 주변 지역에 숨어들었다.[5] 1875년에는 125명의 나병 환자와 45명의 다른 사람들이, 1880년에는 101명의 나병 환자와 76명의 다른 사람들만 있었다.[5] 거주자들은 오염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를 돌보았으며, 건강한 사람과 감염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존재했고 아이들이 태어났다.[5]
바타비아는 1897년에 폐쇄되었고, 남아있는 81명의 나병 환자들은 Groot Chatillon으로 이주했으며, 바타비아는 나병의 재발을 막기 위해 불태워졌다.[2] 2000년에는 식민지 복원 계획이 세워졌고, 2017년 1월 14일에 재건축이 재개되어 현재 바타비아는 관광 명소이자 순례지가 되었다.[2]
2. 1. 초기 역사 (1790년-1836년)
1790년, 수리남의 사라마카 강 근처 Voorzorg 지역이 나병 치료를 위해 지정되었다.[1] 1824년에는 나병 환자들이 코페남(Coppename) 지역의 버려진 농장으로 이주했다.[1] 바타비아는 '오렌지 로드'의 일부인 중요한 군사 기지였으며, 내부에서 활동하는 전 노예 집단으로부터 농장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2]1786년에 네덜란드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수리남 식민지로 파견되었으나 농장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3] 개신교 선교사들 역시 환영받지 못했지만, 당시 개신교는 국교였다.[3] 1836년, 나병 환자 식민지는 야코부스 흐로프가 이끄는 로마 가톨릭 선교소를 영구적으로 갖게 되었고, 페테르 뒨데르스를 포함한 여러 인물들이 그 뒤를 이었다.[3] 1865년, 수리남 선교는 (네덜란드) 구속자회에 할당되었으며,[3] 이들은 "가장 버려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할 것"을 규칙 중 하나로 삼았다.[4] 사제들은 ''윈티''와 같은 아프리카 문화 및 종교 관습에 대해 거의 존중하지 않았고, 이는 여러 차례 심각한 긴장을 야기했으며, 1849년에는 한 사제가 독살당하기도 했다.[5]
페테르 뒨데르스는 1866년 구속자회에 합류한 후, 아메리카 원주민과 마룬 사람들을 위한 선교 여행을 떠났고, 1885년에는 사도 대리 주교 요하네스 스하프에 의해 다시 바타비아로 보내져 신장 감염에 걸려 1887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6] 페테르 뒨데르스는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6][7]
1826년, 바타비아에는 약 300명의 나병 환자가 있었고, 1853년에는 453명으로 늘어났다.[5][8] 1863년 네덜란드의 노예 폐지 당시에는 380명의 감염자가 있었고, 그 중 11명은 이미 자유인이었다.[5] 나병에 걸린 369명의 전 노예들은 성씨를 부여받았지만, 전 소유주들은 재정적 보상을 받지 못했다.[5] 바타비아의 관리들은 나병 환자들의 배급에서 흑인과 아시아인 ('계약 노동자') 사이에 차별을 계속했다.[5] 바타비아의 나병 환자 수는 감소하여, 1875년에는 125명의 나병 환자와 45명의 다른 사람들이, 1880년에는 101명의 나병 환자와 76명의 다른 사람들만 있었다.[5] 거주자들은 오염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를 돌보았으며, 건강한 사람과 감염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존재했고 아이들이 태어났다.[5]
2. 2. 가톨릭 선교와 페테르 뒨데르스 (1836년-1887년)
1786년 네덜란드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수리남 식민지로 파견되었지만, 농장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3] 개신교 선교사들 역시 환영받지 못했지만, 당시 개신교는 국교였다.[3] 사제들의 바타비아 방문이 처음에는 드문드문 이루어지다가, 1836년 나병 환자 식민지는 로마 가톨릭 선교소를 영구적으로 갖게 되었다.[3] 이 선교소는 야코부스 흐로프가 이끌었고, 그 뒤를 이어 페테르 뒨데르스를 포함한 여러 인물들이 이어받았다.[3]1865년, 수리남 선교는 (네덜란드) 구속자회에 할당되었다.[3] 그들의 규칙 중 하나는 "가장 버려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할 것"이었다.[4] 일반적으로 사제들은 ''윈티''와 같은 아프리카 문화 및 종교 관습에 대해 거의 존중하지 않았다.[5] 이는 여러 차례 심각한 긴장을 야기했고, 1849년에는 한 사제가 독살당했다.[5]
페테르 뒨데르스는 1866년 구속자회에 합류한 후, 아메리카 원주민과 마룬 사람들을 위한 여러 차례의 선교 여행을 내부로 떠났다.[6] 그는 1882년 사도 대리 주교 요하네스 스하프에 의해 수도로 소환되었다.[6] 그 후 뒨데르스는 코로니 구역에 있는 면화 농장 메리스 호프에서 수년간 일했지만, 스하프는 1885년에 그를 다시 바타비아로 보냈다.[6] 여기서 그는 신장 감염에 걸렸고, 1887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6] 페테르 뒨데르스는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6][7]
2. 3. 노예 폐지와 바타비아의 쇠퇴 (1863년-1897년)
1790년, 수리남의 사라마카 강 근처 Voorzorg 지역이 나병 치료를 위해 지정되었고, 1824년에는 나병 환자들이 코페남(Coppename) 지역으로 이주했다.[1] 바타비아는 '오렌지 로드'의 일부인 중요한 군사 기지로서, 내부에서 활동하는 전 노예 집단의 공격으로부터 농장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2]1786년에 네덜란드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수리남 식민지로 파견되었으나 농장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3] 1836년, 야코부스 흐로프가 이끄는 로마 가톨릭 선교소가 바타비아에 영구적으로 설치되었고, 이후 페테르 뒨데르스를 포함한 여러 인물들이 선교를 이어받았다.[3] 1865년, 수리남 선교는 (네덜란드) 구속자회에 할당되었으며,[3] 사제들은 ''윈티''와 같은 아프리카 문화 및 종교 관습을 존중하지 않아 긴장을 야기했고, 1849년에는 한 사제가 독살당하기도 했다.[5]
페테르 뒨데르스는 1866년 구속자회에 합류한 후 아메리카 원주민과 마룬 사람들을 위한 선교 여행을 떠났고, 1885년에는 다시 바타비아로 돌아와 신장 감염으로 1887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6] 그는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6][7]
1863년 네덜란드의 노예 폐지 당시 바타비아에는 380명의 감염자가 있었고, 그 중 11명은 자유인이었다. 나병에 걸린 369명의 전 노예들은 성씨를 부여받았고, 전 소유주들은 재정적 보상을 받지 못했다.[5] 바타비아의 관리들은 나병 환자들의 배급에서 흑인과 아시아인 ('계약 노동자') 사이에 차별을 계속했다.[5] 바타비아의 나병 환자 수는 감소하여, 많은 감염자들이 파라마리보와 주변 지역에 숨어들었다.[5] 1880년에는 101명의 나병 환자와 76명의 다른 사람들만 있었다.[5][8]
바타비아는 1897년에 폐쇄되었고, 남아있는 81명의 나병 환자들은 Groot Chatillon으로 이주했으며, 바타비아는 나병의 재발을 막기 위해 불태워졌다.[2] 2000년에는 식민지 복원 계획이 세워졌고, 2017년 1월 14일에 재건축이 재개되어 현재 바타비아는 관광 명소이자 순례지가 되었다.[2]
2. 4. 폐쇄와 복원 (1897년-현재)
1790년, 수리남의 사라마카 강 근처의 미개간지인 Voorzorg 지역은 나병 치료를 위해 지정되었다.[1] 1824년에는 나병 환자들이 더 멀리 떨어진 코페남(Coppename) 지역, 즉 버려진 농장으로 이주했다.[1] 바타비아는 '오렌지 로드'의 일부인 중요한 군사 기지였으며, 이는 내부에서 활동하는 전 노예 집단으로부터 농장에 대한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선이었다.[2]1826년 바타비아에는 약 300명의 나병 환자가 있었고, 1853년에는 453명, 1863년 네덜란드의 노예 폐지 당시에는 380명의 감염자가 있었다.[5][8] 노예 폐지에도 불구하고, 바타비아의 관리들은 나병 환자들의 배급에서 차별을 계속했으며, 흑인과 아시아인 ('계약 노동자') 사이에 차별이 있었다.[8] 바타비아의 나병 환자 수는 곧 감소했고, 1875년에는 125명의 나병 환자와 45명의 다른 사람들, 1880년에는 101명의 나병 환자와 76명의 다른 사람들만 있었다.[5][8]
바타비아는 1897년에 폐쇄되었고, 남아있는 81명의 나병 환자들은 수리남 강에 있는 전 설탕 농장 Groot Chatillon으로 이주했다. 바타비아는 나병의 재발을 막기 위해 불태워졌다.[2] 2000년에는 식민지 복원 계획이 세워졌고, 2017년 1월 14일에 재건축이 재개되어 현재 바타비아는 관광 명소이자 순례지가 되었다.[2]
3. 한국과의 연관성
참조
[1] 
웹사이트
 
Batavia en Lepra
 
https://www.suriname[...] 
2020-05-22
 
[2] 
웹사이트
 
Batavia in history
 
http://www.bataviasu[...] 
2020-05-21
 
[3] 
웹사이트
 
Wie is Petrus Donders
 
https://www.petrusdo[...] 
2020-05-23
 
[4] 
웹사이트
 
Peerke Donders 1809-1887
 
https://www.tilburge[...] 
2009-10-27
 
[5] 
서적
 
Leprosy and Colonialism: Suriname Under Dutch Rule, 1750-1950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17
 
[6] 
웹사이트
 
Blessed Peter Donders
 
http://www.santiebea[...] 
Santi e Beati
 
2020-05-22
 
[7] 
웹사이트
 
Heiligverklaring
 
http://www.peerkedon[...] 
2020-05-22
 
[8] 
간행물
 
De bannelingen van Batavia. Lepra-bestrijding gedurende de negentiende eeuw in koloniaal Suriname
 
OSO Tijdschrift voor Surinamistiek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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