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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18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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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상진은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 총사령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울산 출신으로 허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양정의숙을 졸업한 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기지 설립을 모색했다. 귀국 후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여 대한광복회로 확대,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모금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했다. 1918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김좌진의 구명 시도에도 불구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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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1884년)
박상진 (朴尙鎭)
기본 정보
출생1884년 12월 7일
사망1921년 8월 11일 (36세)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도 울산군 상북면
사망지대한민국 경상남도 대구부
묘소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활동
직업독립운동가
군인
기업인
소속대한광복회 총사령
주요 활동대한광복회 조직 및 활동
군자금 모금
친일파 처단
종교유교
가족 관계
아버지박인규(朴寅奎)
어머니김해 김씨(金海 金氏)
배우자김수연(金守連)
자녀슬하 2남 2녀
학력
교육양정의숙 졸업
훈장
훈장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기타
로마자 표기Bak Sang-jin

2. 생애

박상진은 경상남도 울산 출신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허위에게 수학하고, 양정의숙을 졸업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판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임용을 거절하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 귀국 후 상덕태상회를 설립,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회 총사령을 맡았다. 광복회는 무장 독립운동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 학교를 세우며 친일파를 처단했다. 박상진은 자금 모집에 협조하지 않는 장승원 등의 부호와 친일파를 처단했고, 1918년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2]

2. 1. 초기 생애 및 수학

경상남도 울산의 유학자 집안에서 출생하여 경상남도 밀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그는 영남 지역의 명망 있는 유학자로 의병 운동을 일으켰다가 사형 집행된 허위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하면서 신학문도 익혔다.[2]

2. 2. 독립운동 투신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한 그는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 임용을 거절하고 1911년 만주 지역의 망명자들을 만나러 갔다. 만주에는 허위의 형인 허겸을 비롯하여 이상룡, 김동삼, 손일민, 김대락 등이 망명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영남 지역의 유학자 출신으로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간 인물들이었다.[2]

귀국한 뒤에는 해외의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안둥 삼달양행과 창춘 상원양행, 지린을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였고, 1915년에는 비밀 결사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계몽 운동가 중심의 이 단체는 곧 채기중 등이 결성한 구 의병 운동가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광복회를 조직했으며, 박상진은 이 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았다.[2]

광복회의 강령은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기부받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2]

그는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칠곡의 부호 장승원(장택상의 아버지) 등의 부호들과 친일파를 처단하기도 했으며 1918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만주에 있던 김좌진은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파옥 계획을 세웠으나 시행하지는 못했다. 이후 변호사 선임 등을 거부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2]

2. 3. 국내 독립운동 활동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한 그는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 임용을 거절하고 1911년 만주 지역의 망명자들을 만나러 갔다. 만주에는 허위의 형인 허겸을 비롯하여 이상룡, 김동삼, 손일민, 김대락 등이 망명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영남 지역의 유학자 출신으로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간 인물들이었다.[2]

귀국 후에는 해외의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안둥 삼달양행과 창춘 상원양행, 지린에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였고, 1915년에는 비밀 결사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계몽 운동가 중심의 이 단체는 곧 채기중 등이 결성한 구 의병 운동가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광복회를 조직했으며, 박상진은 이 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았다.[2]

광복회의 강령은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기부받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2]

그는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칠곡의 부호 장승원(장택상의 아버지) 등의 부호들과 친일파를 처단하기도 했으며 1918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만주에 있던 김좌진은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파옥계획을 세웠으나 시행하지는 못했다. 이후 변호사 선임 등을 거부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2]

2. 4. 친일 부호 처단 및 투옥

그는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칠곡의 부호 장승원(장직상, 장택상의 아버지) 등 친일파를 처단하기도 했다.[2] 1918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만주에 있던 김좌진은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파옥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2] 이후 변호사 선임 등을 거부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2]

2. 5. 순국

1910년 양정의숙 졸업 후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임용을 거절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 운동가들을 만났다. 귀국 후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여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1915년 비밀 결사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으며, 박상진은 총사령을 맡았다.[1]

광복회는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기부받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일본인 고관이나 친일파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1]

박상진은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칠곡의 부호 장승원(장직상·장택상의 아버지) 등을 처단하기도 했다. 1918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만주에 있던 김좌진은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탈옥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 이후 변호사 선임 등을 거부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1]

3. 사후

건국훈장 독립장이 1962년에 추서되었다.

4. 가계

관계이름
백부박시룡
부친박시규
부인최영백 (\최현교의 딸)
외아들박경중
손자박위동
증손자박대훈
증손자박정훈 (1951년생)
증손자박중훈 (1956년생)
증손자박필훈 (1959년생)
현손자박성환 (1985년생)


5. 기타

경주 최부자집의 12대 손이자 마지막 최부자였던 최준의 사촌 처남이었다. 또한 박상진 자신이 처형한 장승원과는 외가, 처가 쪽으로 먼 인척으로 두 집안은 칠곡양천 허씨 집안과 통혼관계였다.[1]

참조

[1] 웹사이트 박상진 - 네이버 http://100.naver.com[...]
[2] 뉴스 고헌 박상진 의사 재조명한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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