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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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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좌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8세에 노비 해방을 실천하며 근대 한국 최초의 노비 해방을 이끌었다. 북로군정서 사령관, 한국독립당 회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1930년,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게 암살당했다. 김좌진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받았으며, 그의 생가터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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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좌진
이름김좌진
한자 표기金佐鎭
로마자 표기Gim Jwajin
다른 로마자 표기Kim Jwa-jin
백야
한자 호白冶
로마자 호 표기Baegya
출생일1889년 11월 24일
출생지홍성군, 충청도, 조선 (현재의 홍성군, 대한민국)
사망일1930년 1월 24일
사망지중화민국 지린성 닝안현 산시진 (현재의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
국적대한제국
배우자오숙근
김계월
나혜국
김영석
자녀김두한
어머니이상희
아버지김형규
친척김을동 (손녀)
송일국 (외증손자)
김옥균 (먼 친척)
가문안동 김씨
관직 정보
정당무소속
경력군인
독립운동가
시인
저술가
문장가
군 복무대한독립군 참장 (전역)
종교유교(성리학) → 대종교
임기1929년 2월 15일 ~ 1929년 11월 1일
주석이동녕 대한 임정 수반
총리김구 대한 임정 총리
장관김구 대한 임정 내무총장
차관이유필 대한 임정 내무차장
직책조선한민족총연합회 회장 겸 총재
가족 관계
형제김경진 (형)
김옥출 (누나)
김동진 (남동생)
군사 정보
참전청산리 전투
서훈
서훈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제1급 추서
참고 자료

2. 생애

김좌진은 1889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안동 김씨이며, 16세기 문인 김상용의 11대손이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김덕규에게 길러졌다.[7]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했으나, 소위로 임관되지는 못했다.[7]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호명학교를 설립하고, 대한협회, 기호흥학회 등 애국계몽운동을 지원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7] 1909년에는 한성신보 이사가 되었다.[7]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김좌진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한성 관수동에 이창양행이라는 위장 회사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려 했으나, 곧 일본 당국에 발각되었다.[7] 해외 독립운동 거점 마련을 위해 기부금을 모으던 중, 1911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7] 1913년 석방 후, 1916년 노백린, 신현대 등과 대한광복단에 가입하였다.[7]

1918년 만주로 망명한 김좌진은 서일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북로군정서군 사령관직을 맡았다.[2]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밀산현에서 지청천한국독립군, 홍범도의 대한국립군 등 여러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형성하였으나, 얼마 안 가 와해되었다.[7] 자유시 참변 이후 소련에서 추방되어 만주로 돌아왔다.[7]

1925년, 김좌진은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을 겸임하며 신민부를 창건하고,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정예 장교 양성에 힘썼다.[7]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 전념하였다.[7]

1928년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1929년 재만한족총연합회(한족총연) 주석으로 추대되었다.[3]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3]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은 한족총연의 정미 공장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소속 부하였던 박상실(이복림이라고도 함)에게 암살당했다.[9]

2. 1. 출생과 성장 (1889-1904)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하였다. 흔히 청산리 대첩의 대표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24] 1892년(만 3세) 아버지 김형규를 여의었으나, 넉넉한 집안 환경 덕에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어머니 한산 이씨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904년 해주 오씨 오숙근과 혼인하였다.

18세(만 17세) 때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50여 가구 노비들에게 살 수 있을 만큼의 땅을 나누어 주며 해방시켰다. 이는 근대 한국 최초의 노비 해방 사례였다.[1]

2. 2. 애국계몽운동 (1905-1910)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1907년 호서(충청도) 지방을 밝게 한다는 뜻인 호명학교를 설립하였다. 가산을 정리한 뒤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으로 된 자신의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했다. 홍성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기호흥학회 장학재단을 설립하였고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였다. 안창호,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를 설립하여 교감을 역임하는 한편,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1]

18세 때 50가구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각 가정에 살 수 있을 만큼의 땅을 제공하였다. 이는 근대 한국에서 최초의 노비 해방이었다.[1]

2. 3. 항일 무장 투쟁 (1911-1929)

1911년 동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 조달 문제로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13년 출소했다.[25] 1917년 대한광복단에서 활동하다 1918년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여 대한정의단 군사부문 책임자가 되었고, 이 단체를 군정부로 개편한 후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25] 1918년 박상진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파옥계획을 세웠으나 실현하지는 못했다.[25]

1918년 길림에서 무오 독립선언에 서명했다.[25] 1919년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했다.[25]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했다.[25] 1921년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으나, 얼마 안 가 와해되었고, 자유시참변은 겪지 않았다.[25]

1925년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을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하고, 북간도 목릉현에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힘썼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25]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고, 1929년 신민회의 후신인 한국총연합회가 설립되면서 주석으로 추대되었다.[3]

2. 4. 암살 (1930)

1928년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고, 1929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다.[3]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은 일제의 사주를 받은 한국인 간첩 박상실에게 암살당했다.[3] 김좌진은 사망하기 직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란 말을 남겼다.

김좌진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이복림이라고도 함)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9]

신용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암살 배후에 조선공산당(구 상해파)의 재만 하부 조직인 “적기단”의 존재를 지적하였다.[10] 또한, 임시정부 국무총리실 서기를 지낸 이강훈 등에 의하면, 여류 프롤레타리아 작가 강경애와 내연 관계였던 청년 회원 김봉환(金奉煥, 1897년)이 하얼빈 영사관 경찰에 회유되어 박상실에게 암살을 교사했다는 설이 널리 퍼졌으나, 명백한 증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11]

2. 5. 사후


  • 1933년 경성에 있던 부인 오숙근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다시 가서 상자에 김좌진의 유해를 위장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몰래 장사지냈다. 1957년 김두한에 의해 지금의 장소로 이장되었고, 이듬해 사망한 부인 오숙근은 남편 김좌진과 함께 합장되었다.
  • 1947년 김좌진을 추모하는 추모회가 열렸다.
  •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1974년 보령시에서 김좌진의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고, 그의 업적과 정신을 후세에 계승하고자 매년 10월 22일에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 생가터(안채, 사랑채, 광이 따로 있고 앞면 8칸 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음)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다.[26]
  • 1999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2013년 8월, 대한민국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 4번함이 '김좌진함'으로 명명되었다.
  • 한국 독립 운동 지도자였던 김좌진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기억되고 있다. 1991년, 홍성군은 그의 생가를 복원했고, 매년 10월에는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5]

2. 6. 암살 배후

1928년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하고 1929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된 김좌진은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던 중,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9] 김좌진은 사망 직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학교 신용하 명예교수는 암살 배후에 조선공산당(구 상해파)의 재만 하부 조직인 “적기단”이 있었다고 지적했다.[10] 임시정부 국무총리실 서기를 지낸 이강훈 등은 여류 프로레타리아 작가 강경애와 내연 관계였던 청년 회원 김봉환(金奉煥, 1897년)이 하얼빈 영사관 경찰에 회유되어 박상실에게 암살을 교사했다는 설을 제기했으나, 명백한 증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11] 이 외에도, 신민부의 약탈 행위에 대한 보복이라는 견해도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2. 7. 김두한 친자 여부

김두한과 그의 딸 김을동은 국회의원이 되어 한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두한의 손자인 송일국은 배우가 되었고, 송일국의 세 쌍둥이 자녀(대한, 민국, 만세)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김두한이 정말로 김좌진의 아들인지 여부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16][17]

2. 8.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제외 논란

자유시 참변 이후 민족 진영과 공산 진영의 대립 과정에서 공산 진영이 김좌진을 친일파로 비난했으나, 이는 김좌진을 깎아내리기 위한 주장이었다.[30] 실제 김좌진은 좌우 협력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민족주의자였다.[31]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좌진의 비서이자 참모였던 이정(1895~1943)이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하며 김좌진 관련 정보를 일제에 넘긴 것으로 밝혀졌다.[32]

2019년 10월 14일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과정에서 당초 대상에 올라 있던 김좌진이 제외되고 공산주의자 이동휘가 포함되어 논란이 되었다.

김좌진은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반공 정책에 따라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및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평가가 낮았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 자체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대한민국의 "건국 신화"와 관련된 정치적 문제로 인해 역사적 검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12] 1990년대 이후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김좌진 암살 배경에는 단순한 정치적 충돌 외 다른 요인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연해주 농민들에게 반복적인 약탈을 자행하여 "마왕", "폭군" 등으로 불리며 멸시받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13][14]

김완섭은 인터넷 상에서 "김좌진은 이씨조선 시대라면 바로 산적 두목이었을 것이다", "김좌진의 자식은 국회에서 똥을 뿌리기도 한 악당이었다"라고 언급했다. 2006년 2월 22일, 김좌진의 손녀이자 배우인 김을동은 김완섭을 명예훼손죄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김을동은 2008년 8월,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제안하여 명예를 훼손한 자에 대한 처벌 및 벌금 강화를 주장했다.[15]

3. 평가

김좌진은 칠 척 거구에 만인을 위압하는 태산과 같은 위엄과 형형한 안광, 그리고 도도한 웅변력을 가진 진정한 영웅호걸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8] 동아일보의 1930년 2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김좌진은 몸이 뚱뚱하면서도 키가 매우 큰 거인이었고, 힘도 매우 센 장사였다. 놋두멍을 혼자서 쉽게 들고, 밥 몇 그릇과 고기 몇 근은 먹어야 양에 찰 정도였다고 묘사되어 있다.[27]

김구는 1947년 김좌진 장군 추도사에서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라며 김좌진을 추모했다.[28]

중국의 작가 장완린은 청산리 전투의 승리가 중국인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켰으며, 일본 제국주의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바꿔놓았다고 평가했다.[29]

김좌진은 한국 독립 운동 지도자로서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기억되고 있다. 1991년 홍성군은 그의 생가를 복원했으며, 매년 10월에는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5]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했다.[12]

김좌진은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문에, 전후 반공 정책에 따라 한국에서는 높게 평가받았지만, 북한 및 중국에서는 평가가 낮았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 자체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대한민국의 "건국 신화"와 관련된 정치적 문제로 인해 역사적 검증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12] 1990년대 이후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김좌진의 암살 배경이 단순한 정치적 충돌이 아니라는 점과 연해주 농민들로부터 반복적인 약탈을 저질러 "마왕", "폭군"이라 불리며 멸시받았다는 사실[13][14] 등이 밝혀지면서, 최근의 평가가 과거와 항상 일치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김완섭은 인터넷 상에서 김좌진을 "이씨조선 시대라면 바로 산적 두목이었을 것이다", "김좌진의 자식은 국회에서 똥을 뿌리기도 한 악당이었다"라고 언급하여, 2006년 2월 22일 김좌진의 손녀이자 배우인 김을동에게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했다. 김을동은 2008년 8월,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제안하여 명예를 훼손한 자에 대한 처벌 및 벌금 강화를 주장했다.[15]

4.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조부김병호(金炳皓)1825년 ~ 1886년
양조부김병태(金炳泰)
삼촌김덕규(金德圭)1848년 ~ 1900년
아버지김형규(金衡圭)1864년 ~ 1892년[34]
어머니한산 이씨 이상희1863년 ~ 1949년
김경진(金敬鎭)1883년 ~ 1963년삼촌 김덕규의 양자로 출가
누나김옥출
남동생김동진1891년 ~ 1938년
첫째 부인오숙근1887년 ~ 1958년
적장녀김석출
둘째 부인김계월(金桂月)1904년 ~ 1970년대
서장자김두한1918년 ~ 1972년
셋째 부인박계숙박상궁의 딸, 김계월과 동일인물 추정
넷째 부인나혜국1901년 ~ 1992년
적차남김철한1924년 ~ 1998년
다섯째 부인김영숙
서차녀김강석
장손자김경동1955년 ~[35]
차손자김현동[36]
며느리이재희(李載熙)김두한의 부인
손녀김을동배우, 국회의원
증손자송일국배우
증손녀송송이|송송이한국어배우
고손자김도현(金度賢)육군 제39사단 헌병대 병장 전역 후, 국군 사이버사령부 부속 공군 부사관으로 재입대, 이후 해군 장교가 됨. "육해공 삼군 삼계급" 경험[19]
사촌 형제김옥균개화파
종질김종진



김좌진에게는 최소 네 명의 부인이 있었고, 그 후손은 많다. 특히 김두한과 그의 딸 김을동은 국회의원이 되어 한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손자인 송일국은 배우가 되었고, 그의 세 쌍둥이 자녀(대한, 민국, 만세)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김두한이 정말로 김좌진의 아들인지 여부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1980년대 이후 자신을 김좌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몇 명 더 나타나기도 했다.[16][17]

5. 어록


  •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33]
  •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것이다."[33]
  •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33]
  •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33]
  • "본년 8월 이래로 적의 독균이 간도에 파급되어 슬프다! 우리 무고한 양민이 적의 독봉 아래 원혼이 된 자 얼마며 그 많은 재물과 양곡이 화염 속에 사라진 것이 얼마며 이렇게 땅은 얼고 찬 기운이 뼈를 깎는데 옷 없고 집 없이 길에서 굶어 죽는 자 얼마인가. 종이조각에 대한 두 글자만 나타나도 그 집은 잿더미가 되고 탄피의 빈 껍질 하나라도 드러나면 그 사람은 죽임을 당하니 모든 사람이 입을 봉하고 서로 눈짓만 하고 있다.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학교를 헐어 문명을 박멸하니 천인이 공노하고 있는도다. 우리 군정서는 죽을힘을 다하여 혈전 4, 5일에 적의 연대장 이하 수십 명의 장교와 1천2백 명의 병졸을 죽였다. 그러나 부득이 험악한 산중으로 물러나 스스로를 지키면서 재기의 그날을 기약할 것이다. 이에 아래와 같은 격문을 포고한다. 정의를 보고 용감한 것이 우리 독립군의 정신이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은 우리 독립군의 기백이니 어찌 공로를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하여 대의를 저버릴 것인가. 이 격문이 이르는 날부터 각기 정의를 분발하여 성패를 불문하고 다 함께 함몰되어 가는 민족과 조국을 건져내어서 대한 광복의 대업을 조속히 완성합시다."[33]

6. 관련 작품

1983년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에서 배우 김기주가, 2002년~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최동준이, 2011년 SBS 드라마 《북만벌, 칼을 가는 나그네 - 백야 김좌진 장군》에서는 배우 이일재가 김좌진 역을 연기하였다.[16][17][18]

6. 1. 영화

6. 2. 드라마


  • 2002년~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 (배우: 최동준)
  • 2011년 SBS 드라마 《북만벌, 칼을 가는 나그네 - 백야 김좌진 장군》 (배우: 이일재)

참조

[1] 웹사이트 Kim Jwa-jin http://english.hongs[...] 2019-11-05
[2] 논문 The Influence of the Daejyonggyo on the Establishment of the Northern Military Administration Office Army (Bungnogunjeongseo) https://core.ac.uk/d[...] Ritsumeikan University
[3] 뉴스 김좌진 https://www.hongseon[...] 2018-06-16
[4] 서적 Cartography of revolutionary anarchism https://anarchyinact[...] AK Press 2013
[5] 웹사이트 General Kim Jwa-jin's Victory Memorial Festival http://english.hongs[...] 2019-11-05
[6] 웹사이트 金佐鎮 http://encykorea.aks[...] 民族文化大百科事典 2017-10-07
[7] 웹사이트 金佐鎮 http://theme.archive[...] 国家記録院 2017-10-07
[8] 웹사이트 4.独立国首領金佐鎮等救済方ノ件 自大正十二年三月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3041641200、朝鮮人ニ対スル施政関係雑件/難民救済ノ部 第一巻(1-5-3-15_7_001)(外務省外交史料館) 2017-10-07
[9] 뉴스 青山里大捷の英雄、共産主義銃弾に倒れる(청산리 대첩의 영웅, 공산주의 총탄에 스러지다) http://news.joins.co[...] 2012-08-26
[10] 뉴스 金佐鎮将軍暗殺左翼団体「赤旗団」唆嗾(김좌진장군 암살 좌익단체「적기단」사주) http://newslibrary.n[...] 1995-09-27
[11] 뉴스 小説家姜敬愛は金佐鎭将軍暗殺教唆犯と同居」(前解放会長李康勲翁の生前回顧)(소설가 姜敬愛는 金佐鎭 장군 암살 敎唆犯(교사범)의 동거녀』(前 광복회장 李康勲옹의 生前 회고)) http://monthly.chosu[...] 2005-02-10
[12] 일반
[13] 논문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 혁명근거지 건설을 위한 활동을 중심으로
[14] 서적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 지식산업사
[15] 뉴스 민족 능멸하는 신종 매국노씨 말리겠다 http://breaknews.com[...] breaknews.com 2008-08-30
[16] 뉴스 史學者李文昌さん訪中面談 金佐鎮将軍の娘 中国で隠れ住んでいる(사학자 이문창씨 방중면담 김좌진장군 딸 중국서 숨어살고 있다) http://newslibrary.n[...] 1989-10-14
[17] 뉴스 私は金佐鎮将軍の長孫(나는 김좌진장군의 장손) http://newslibrary.n[...] 1986-04-07
[18] 뉴스 軍将校団、独立運動の現場踏査(군 장교단, 독립운동 현장 답사) http://kookbang.dema[...] 2016-08-11
[19] 뉴스 金佐鎮将軍ひ孫、海軍将校になった(김좌진 장군 증손자, 해군 장교 됐다) http://news.mk.co.kr[...] 2015-08-12
[20] 일반
[21] 뉴스 2월에 기릴 인물, 독립운동가 오동진-문태수 선생 http://www.newsmissi[...] 뉴스미션 2008-02-01
[22] 일반
[23] 웹사이트 장군의 민족주의 http://www.kimjwajin[...]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24] 웹인용 연이 어머니/탤런트 김을동 조강지처 5부작 http://www.kbs.co.kr[...] KBS 2003-08-25
[25] 방송 잊혀진 영웅!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http://www.kbs.co.kr[...] KBS 2010-04-10
[26] 웹인용 잠시떠나볼까, "올해는 청산리대첩 100주년"...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터를 가다 http://www.newscj.co[...]
[27] 뉴스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65>김좌진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9-12-29
[28] 서적 백범어록 돌베개 2007-11-12
[29] 방송 (국권침탈100년) 독립의 길을 따라 1만리 대장정 http://www.kbs.co.kr[...] KBS 2010-08-18
[30] 일반
[31] 웹인용 백야 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 http://www.kimjwajin[...] 2010-11-18
[32] 뉴스 김좌진의 비서, 안중근의 동지도…일제의 핵심 '밀정'이었다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19-08-14
[33] 웹사이트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http://www.kimjwajin[...]
[34] 일반
[35] 일반
[36]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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