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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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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영발은 일제강점기 좌익 항일 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토목노조위원장, 남조선로동당 간부로 활동했다. 1947년 월북 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유학했으며, 한국 전쟁 중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을 맡아 유격전을 지휘했다. 그는 이현상의 남부군 활동을 견제했으며, 1954년 부하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사후 평양 애국렬사릉에 가묘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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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발

2. 생애

박영발은 경상북도 봉화군 출신으로, 1930년대부터 좌익 항일 운동을 시작했다.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해 1945년 경에는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2]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군정 시기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토목노조위원장과 전평 집행위원을 겸임하며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남조선로동당 창당에 참여하여 간부가 되었으나, 남로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1947년 경 월북하여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하자 전남도당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전세 역전 후 전남 지역에 남아 김선우와 함께 유격전을 지휘했다. 지리산을 거점으로 활동한 이현상의 남부군과는 갈등 관계에 있었으며,[2] 1951년 이현상의 유격대 개편안에 방준표와 함께 반대했고, 1953년 이현상 사망 직전 제5지구당 해체 과정에서 이현상을 비판하여 평당원으로 강등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1. 일제강점기 및 해방 직후 활동

경상북도 봉화군 출신이다. 1930년대에 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좌익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받아 1945년 경에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2]

적색노조 운동을 벌이면서 토목노동자로 일하던 중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었다. 미군정 초기에 좌익 운동이 활발해졌을 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토목노조위원장을 맡았고, 전평의 집행위원도 겸임했다. 1946년에는 남조선로동당을 창당하여 간부가 되었다.

2. 2. 월북 및 한국 전쟁 참전

1947년 경 월북하여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했다.[2]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초기 조선인민군낙동강 전선까지 남하했을 때, 합법적으로 결성된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전세가 역전되어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전남 지역에 남아 김선우와 함께 유격전을 지휘했다.

박영발은 한국 전쟁 중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이현상의 남부군 활동을 견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2] 1951년 이현상이 제안한 유격대 개편안에 방준표와 함께 반대하는 등 이현상과 대립했다는 증언이 있다. 1953년 이현상 사망 직전 제5지구당이 해체될 때, 이현상을 비판하여 평당원으로 강등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3. 유격대 활동과 이현상과의 갈등

박영발은 한국 전쟁 중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이현상의 남부군 활동을 견제한 인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2] 1951년 남부군의 이현상이 제안한 유격대 개편안을 방준표와 함께 반대하는 등 이현상과 대치되는 지점에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1953년 이현상이 사망하기 직전 제5지구당이 해체될 때도 이현상을 비판하여 평당원으로 강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최후

1953년 5월 토벌대와 전투에서 박영발의 주치의 박 모씨가 다리에 총상을 입어 이동이 어려웠다. 동굴 생활이 길어지고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토벌대의 수색 작전이 강화되자, 일행 사이에서는 은신처를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총상 때문에 이동이 불가능했던 박 모씨는 버려질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결국 1954년 2월 21일, 박 모씨는 보초를 서던 중 동굴 안에 있던 박영발과 무전사, 비서 이정례에게 카빈총 30발을 난사했다. 이로 인해 박영발과 무전사는 즉사했고, 비서 이정례는 박 모씨에게 수류탄을 던져 그도 즉사했다. 이정례는 총상과 수류탄 폭발로 인한 부상, 그리고 허기로 동굴에서 버티다가 다음 날인 22일, 식량을 전달하러 온 조국출판사 대원 이주현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다.[3][4]

백선엽은 박영발을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정신력이 대단했던 인물로 평가했다.

4. 사후

2003년 평양 애국렬사릉이현상, 방준표 등과 함께 박영발의 가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5]

참조

[1] 웹인용 박영발 http://www.encyber.c[...] 엔싸이버 백과사전 2008-06-25
[2] 서적 혁명에 배반당한 비운의 혁명가들 선인 2004-06-20
[3] 웹사이트 http://www.siminsori[...]
[4] 문서
[5] 저널 “분명히 있었는데, 왜 몽양과 죽산의 묘가 없지?” - 평양 애국렬사릉의 사라진 묘, 생겨난 묘 http://www.minjog21.[...] 200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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