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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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정희 대통령 생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을 보낸 경상북도 구미시에 위치한 생가이다. 1900년경 또는 1916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전통적인 농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한국 전쟁 중 훼손된 후 재건되었으며, 1964년에는 안채가 현대식 건물로 대체되었다. 1990년대부터 기념관 건립 논의가 있었으나, 자금 문제와 정치적 논란으로 인해 오랜 기간 지연되었다. 2016년에는 방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현재 생가 주변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 시설이 있으며, 윤석열 대통령의 방문으로 정치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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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생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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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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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박정희 대통령 생가 |
한자 | 朴正熙 大統領 生家 |
로마자 표기 | Bakjeonghui daetongnyeong saengga |
영어 | Birthplace of Park Chung Hee |
위치 | 박정희로 107, 구미시, 경상북도 |
상세 정보 | |
완공일 | 1900년 또는 1916년 |
면적 | 2672 제곱미터 |
개보수 날짜 | 1964년 |
웹사이트 |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웹사이트 |
문화재 지정 정보 | |
지정 종류 | 경상북도 기념물 |
지정 번호 | 86 |
지정일 | 1993년 2월 25일 |
주소 |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 (상모동 171) |
2. 역사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아버지 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사이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구미초등학교와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곳 생가에서 살았다.[2]
생가는 1900년경[1] 또는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이 상모동으로 이사한 후인 1916년에 지어졌다고 전해진다.[5] 박정희가 태어난 곳은 아래채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좌측에는 앞뒤로 온돌방 1칸씩, 우측에는 방앗간과 외양간이 있었다고 한다. 앞쪽 온돌방은 박정희가 공부하던 방이었다.
이 집은 한국 전쟁 발발 이전까지 건립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유지했으나,[1][5] 전쟁 중 소이탄에 맞아 피해를 입기도 했다.[5]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안채('안방')가 파괴되었다.[1][5] 파괴된 안채는 초가집 형태로 재건되었다가, 1964년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이후 현대적인 벽돌 및 콘크리트 구조로 다시 지어졌다.[1][5]
2. 1. 건립 초기
이 집은 1900년경[1] 또는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朴成彬)이 상모동으로 이사한 후인 1916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5] 전기 작가 조갑제에 따르면, 박성빈은 당시 집 주변을 거의 완전히 둘러싼 울창한 숲 때문에 담장을 세울 필요가 없어 이 부지를 선택했다고 한다. ''안채''는 바람을 막기 위해 나무와 인근 언덕을 향하도록 북쪽을 향해 지어졌다.[5]생가는 원래 안채(여성들이 주로 사용하던 더 큰 건물)와 사랑채(남성들이 주로 사용하던 건물)로 구성된 전형적인 농촌 가옥 형태였다.[1][5] 두 건물 모두 직사각형 모양이었으며,[5] 나뭇가지와 짚을 섞은 흙으로 지어졌고, 짚으로 이은 지붕과 흙바닥을 가지고 있었다.[1][5][3] 두 건물 사이에는 작은 뜰과 물을 긷는 우물이 있었다.[5]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사이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구미초등학교와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2] 박정희 가족은 매우 가난했으며, 그가 태어날 당시 어머니 백남의는 43세였다.[5] 박정희는 사랑채에서 가장 큰 방에서 태어났는데,[5] 이 방의 크기는 2m × 2.3m 정도였다.[5] 사랑채는 좌측에 앞뒤로 온돌방 1칸씩이 있고, 우측에는 방앗간과 외양간이 1칸씩 배치된 구조였다. 앞쪽 온돌방은 박정희가 공부하던 방이었다. 박정희가 사용했던 사랑채 침실의 천장은 키가 작은 편이었던 박정희조차 일어설 때 머리를 숙여야 할 정도로 낮았다고 전해진다.[3] 한때 박정희의 형인 박무희 소유의 다른 흙집이 사랑채 밖에 있었다고도 한다.[5]
박정희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집은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전까지 건립 당시의 상태를 거의 유지하고 있었다.[1][5]
2. 2. 한국 전쟁과 재건
박정희의 자서전에 따르면,[5] 생가는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전까지 건립 당시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었다.[1][5] 전쟁 중 한때 소이탄 공격을 받아 거주자 중 한 명이 실명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5]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안채('안방')가 파괴되었다.[1][5]또한, 박정희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낙태를 시도하기 위해 사용했던 발로 밟아 작동하는 절구 역시 전쟁 중에 파괴되었다. 박정희는 자신에게 일어날 뻔했던 일을 기억하고자 형에게 절구를 복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형이 만든 복제품이 현재 생가에 남아 있다.[6]
파괴된 안채는 처음에는 흙으로 만든 초가집 형태로 재건되었다. 이후 1964년,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직후 철거되었고, 콘크리트 바닥 위에 L자형의 현대식 벽돌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1][5][3]
사랑채의 원형 보존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대부분의 정부 및 박씨 일가 관련 자료에서는 현재의 사랑채가 원형 그대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박정희의 전기를 쓴 작가 이종식은 이러한 주장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2012년 저서에서 "재건된 집의 사당 같은 모습은 내가 옛 사진에서 본 원래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재현인 것 같다"고 기술하며 의문을 제기했다.[3] 생가에 있던 우물 역시 현대적인 펌프로 교체되었다.[5][3]
2. 3. 기념관 건립과 논란
1993년, 대구시는 기념관 건립 계획을 발표하고 1997년을 착공 목표로 설정했다.[4] 그러나 목표했던 해까지 착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요 정적 중 한 명이었으며, 박정희 정권 하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을 겪었던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선거 유세 과정에서 기념관 건립 지원을 공약으로 내걸었다.[4][7] 이에 따라 김대중 정부는 민간에서 5000억원의 기부금이 모금되면 정부가 추가로 2000억원을 지원하여 건설 자금을 마련하는 계획을 수립했다.[7]하지만 기념관 건립은 상당한 논란에 휩싸였다. 2000년에는 여러 진보 성향의 사회 단체들과 역사학자들이 연대하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박정희기념관 반대 국민연대"를 결성하고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4]
건설은 2002년에 시작되었으나, 지속적인 반대 여론과 자금 확보 문제로 인해 수년간 중단되는 등 난항을 겪었다.[4] 더욱이 2005년에는 정부가 기존의 지원 계획을 철회하면서 법적 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정부는 2008년 관련 소송에서 패소하여 지원 계획을 다시 추진하게 되었지만, 당시까지 모금된 금액은 목표액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1000억원에 불과했다.[7] 이러한 여러 문제로 인해 기념관은 2008년이 되어서도 완공되지 못했다.[7]
2. 4. 방화 사건
2016년 12월 1일 오후 3시경,[8] 한 남성이 생가 기념관 내부에 페인트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화재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 여사의 초상화, 헌사 등 건물 내부 일부가 소실되었다. 불은 사랑채의 초가지붕까지 옮겨붙었으나, 다행히 큰 피해로 번지기 전 10분 만에 진화되었다.[9]방화범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범행 동기에 대해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불만으로 박정희 일가에 보복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이 스캔들은 이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9][10]
체포된 남성은 이전에도 비슷한 범죄 전력이 있었는데, 2012년 12월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생가에 불을 질러 1년 6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바 있다. 그는 이번 방화 사건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8]
사건 이후 구미시는 소실된 생가 복구를 위해 9000만원의 예산을 투입했다.[8]
3. 구조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나 구미초등학교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1][5] 원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초가집 형태였으나,[1][5][3] 현재는 일부 모습이 바뀌었다. 박정희가 태어난 사랑채(아래채)는 온돌방, 방앗간, 외양간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가 공부하던 방도 이곳에 있었다.
현재 안채는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으며,[5][3][1] 사랑채의 원형 보존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3] 과거 사용했던 우물 역시 현대식 펌프로 교체되었다.[5][3] 생가 경내 옆에는 박정희와 부인 육영수를 기리는 기념관이 별도로 건립되어 있으며,[4][8] 생가 건물들과 함께 박물관 및 기념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1][2]
3. 1. 원래 모습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아버지 박성빈(朴成彬)과 어머니 백남의(白南義) 사이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구미초등학교와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박정희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은 원래 안채(여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더 큰 건물)와 사랑채(남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건물)로 구성된 초가집이었다.[1][5] 두 건물 모두 직사각형 모양이었으며,[5] 나뭇가지와 짚을 섞은 흙으로 벽을 만들고 지붕 이엉을 얹었으며, 바닥은 흙바닥이었다.[1][5][3] 두 건물 사이에는 작은 뜰과 물을 긷는 우물이 있었다.[5]
박정희가 태어난 사랑채(아래채)는 좌측에 앞뒤로 온돌방 1칸씩, 우측에 방앗간과 외양간 1칸씩이 배치된 구조였다. 앞쪽 온돌방은 박정희가 공부하던 방이었다. 사랑채의 가장 큰 방 크기는 2m x 2.3m 정도였다.[5] 박정희가 사용했던 사랑채 침실의 천장은 키가 작은 박정희조차 일어설 때 머리를 숙여야 할 정도로 낮았다고 전해진다.[3]
3. 2. 현재 모습
박정희 대통령 생가의 ''안방''은 이후 콘크리트 바닥에 L자형의 현대식 벽돌 건물로 교체되었다.[5][3][1] 사랑채의 경우, 원형 보존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정부 및 박씨 일가 관련 자료 대부분은 사랑채가 원형이라고 주장하지만, 전기 작가 이종식은 2012년 저서에서 "재건된 집의 사당 같은 모습은 내가 옛 사진에서 본 원래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재현인 것 같다"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3] 생가 내 우물 역시 현대적인 펌프로 교체되었다.[5][3]이러한 건물들 외에도 박정희와 그의 부인 육영수를 기리는 기념관이 생가 경내 바로 옆에 건립되어 있다.[4][8] 현재 생가 건물들은 박정희를 기리는 박물관이자 기념관으로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1][2]
4. 주변 시설 및 논란
박정희 생가는 구미시에 있는 여러 기념물 중 하나이며, 주변에는 그를 기리는 다양한 시설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생가가 위치한 거리는 "박정희로"로 명명되었고,[1] 인근에는 5m 높이의 동상,[11][12] 25km2 규모의 새마을 운동 테마파크,[12] 박정희 대통령 생가 기념관 등이 건립되었다.[13] 또한 구미시는 28억원을 지원하여 박정희를 주제로 한 뮤지컬 제작을 돕기도 했다.[12]
이러한 기념 시설 건립과 관련 사업에 막대한 공적 자금이 투입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에서는 이를 "경제적 이익이 없는 과도한 영웅 숭배"라고 비판했으며, 박정희의 군사 독재자로서의 유산이 논란의 주요 배경이 되고 있다.[12]
윤석열 대통령은 여러 차례 생가를 방문하여 기념 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으나,[15][16] 이러한 행보가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지지 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17]
4. 1. 박정희 관련 시설
박정희 생가 주변에는 그를 기리는 여러 시설이 있다.- 생가가 위치한 거리는 "박정희로"로 명명되었다.[1]
- 인근에는 2011년 기부금 6억원을 들여 세운 5m 높이의 박정희 동상이 있다.[11][12]
- 구미시는 28억원을 지원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주제로 한 뮤지컬 제작을 도왔다.[12]
- 박정희의 정치적 구상인 새마을 운동을 주제로 한 25km2 규모의 테마파크가 근처에 있다.[12]
- 또한 근처에 박정희 대통령 생가 기념관이 2021년에 개관했다.[13]
이 외에도 여러 개의 작은 기념비가 있다.[14] 참여연대 구미지부 회원 등은 이러한 기념물 건립과 막대한 공적 자금 투입에 대해 "경제적 이익이 없는 과도한 영웅 숭배"라고 비판했다. 박정희의 군사 독재자로서의 유산은 이러한 논란의 주요 배경이다.[12]
윤석열 대통령은 이 생가를 2021년 9월, 2022년 2월, 2023년 2월 등 여러 차례 방문했다.[15] 2023년 방문 당시 윤 대통령은 박정희 기념물 건립에 대한 비판에 반박하며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15] ''Korea PRO''에 기고한 존 리는 윤 대통령이 박정희의 보수층 지지율을 활용하기 위해 박정희와 자신을 연결하려 하며, 이러한 방문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지지 기반을 다지려는 냉소적인 시도"라고 평가했다.[17]
4. 2. 논란
구미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리는 여러 기념물이 있으며, 생가 역시 그중 하나이다. 이러한 기념 사업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존재한다.생가 주변에는 다음과 같은 시설들이 있다.
- 생가가 위치한 거리는 "박정희로"로 명명되었다.[1]
- 인근에는 기부금 6억원을 들여 2011년에 세워진 5m 높이의 박정희 동상이 있다.[11][12]
- 구미시는 28억원을 지원하여 박정희를 주제로 한 뮤지컬 제작을 도왔다.[12]
- 박정희의 정치적 구상인 새마을 운동을 주제로 한 25km2 규모의 테마파크가 근처에 조성되었다.[12]
- 또한 인근에 박정희 대통령 생가 기념관이 2021년에 개관했다.[13]
이 외에도 여러 개의 작은 기념비가 존재한다.[14]
참여연대 구미지부 등 시민사회에서는 이러한 기념물 건립과 막대한 공적 자금 투입에 대해 "경제적 이익이 없는 과도한 영웅 숭배"라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 기간 동안 이루어진 군사 독재와 인권 탄압 문제는 이러한 논란의 핵심적인 배경이 되고 있다.[12]
윤석열 대통령은 2021년 9월, 2022년 2월, 2023년 2월 등 여러 차례 이 생가를 방문했다.[15] 특히 2023년 방문에서는 박정희 기념 사업에 대한 비판에 반박하며 오히려 예산을 더 투입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16][15] 이러한 행보에 대해 ''Korea PRO''에 기고한 존 리(John Lee)는 윤 대통령이 박정희의 보수층 지지 기반을 활용하기 위해 자신과 박정희를 연결하려는 시도라고 분석했다. 그는 윤 대통령의 방문을 2024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지지 기반을 다지려는 냉소적인 시도"라고 평가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17]
참조
[1]
웹사이트
박정희대통령생가 - 디지털구미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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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2
[2]
웹사이트
경상북도 기념물 박정희대통령생가 (朴正熙大統領生家)
https://www.heritage[...]
2023-08-22
[3]
서적
Park Chung-Hee: From Poverty to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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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U Press
2012
[4]
웹사이트
The Cultural Politics of Remembering Park Chung Hee
https://apjjf.org/-S[...]
2023-08-26
[5]
간행물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71)
https://www.chosu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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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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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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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al Hall for Former President a Hot Pot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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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sonist of Park Chung Hee's birthplace h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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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뉴스
South Korean Arrested After Fire at Birthplace of President's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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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10]
웹사이트
Birthplace of South Korea president's father 'hit by arson'
https://www.scm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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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웹사이트
구미시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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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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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Excessive idolization of Park Chung-hee around the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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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박정희대통령역사자료관 개관식"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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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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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웹사이트
Strengthening TK Support ahead of Party Convention: President Yoon Visits Park Chung-hee's Birthplace
https://english.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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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Guest essay] The future of the Park Chung-hee faith"
https://english.hani[...]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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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 Suk-yeol pays respect to ROK dictator in latest appeal to conservative base
https://koreapro.org[...]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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