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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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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귀족으로, 외교관이자 작가였다. 그는 만토바, 우르비노, 로마 교황청, 스페인 등 여러 궁정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대표작 《궁정인》을 통해 이상적인 궁정인의 자질을 제시하여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서는 상류 계급의 사교술과 교양을 다루며 오랫동안 교양인의 규범으로 여겨졌지만,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고 귀족 중심적인 가치관을 옹호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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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라파엘로 산치오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초상화
라파엘로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초상화
출생일1478년 12월 6일
출생지마르카리아 근처 카사티코, 만토바 변경백국
사망일1529년 2월 2일
사망지톨레도, 스페인 제국
직업궁정인, 외교관, 군인, 작가
국적이탈리아
활동 시대르네상스
사조르네상스
대표 작품《궁정론》

2. 생애

카스틸리오네는 만토바 근처 카사티코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 루이지아 곤자가를 통해 만토바를 다스리는 곤자가 가문과 연결된 소귀족 가문 출신이었다.[4] 1494년, 16세가 된 카스틸리오네는 밀라노로 보내져 인문학적 연구를 시작했다. 1499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카사티코로 돌아와 가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프란체스코 2세 곤자가, 만토바 후작의 궁정을 대표하여 여러 외교 임무를 수행했으며, 로마로의 외교 임무에서 우르비노 공작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 부부를 만났다. 1504년, 카스틸리오네는 우르비노 궁정에 거주하게 되었다.[4]

우르비노 궁정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 중심지 중 하나였다. 엘리사베타 곤자가와 그의 처제 에밀리아 피아가 궁정을 이끌었으며, 피에트로 벰보, 줄리아노 데 메디치 등 많은 인물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카스틸리오네는 엘리사베타를 기리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6] 1506년 카스틸리오네는 전원시 ''티르시스''를 썼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우르비노 궁정을 비유적으로 묘사했다.[7]

1516년 카스틸리오네는 만토바로 돌아와 이폴리타 토렐리와 결혼했지만, 그녀는 4년 만에 사망했다. 1521년 교황 레오 10세는 카스틸리오네에게 톤수라를 허락했고, 그의 종교 경력이 시작되었다.[8]

1524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스틸리오네를 스페인교황 대사로 파견했다. 1527년 로마 약탈 당시, 카스틸리오네는 스페인 황제와의 관계로 인해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알폰소 데 발데스의 주장에 반박하고, 교황에게는 바티칸 정책을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다.[8]

카스틸리오네는 교황의 사과를 받았고, 황제는 그에게 아빌라 주교직을 제안했다. 그는 1529년 톨레도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했다.[8] 사후, 그의 출생지인 만토바 외곽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역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줄리오 로마노가 디자인한 이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만토바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는 천성적으로 모든 재능과 많은 학문의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그리스 및 라틴 문학을 배웠으며 이탈리아어(토스카나어) 시인이었으며, 영국과 로마에 대사 직을 수행한 후 군사적 용맹함으로 인해 페사로에 성을 받았다. 그는 클레멘스 7세를 위해 스페인 궁정에서 일하면서 귀족 교육을 위한 ''궁정인''을 작성했으며, 간단히 말해 카를 5세 황제가 그를 아빌라 주교로 선출한 후, 그는 톨레도에서 사망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았다. 그는 50년 2개월 1일을 살았다. 그의 어머니 루이지아 곤자가는 아들보다 오래 살아 슬픔을 겪었으며, 1529년에 그를 위한 이 기념물을 세웠다.[9]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카스틸리오네는 만토바 근처 카사티코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 루이지아를 통해 만토바를 다스리는 곤자가 가문과 연결된 소귀족 가문 출신이었다.[4] 1494년, 열여섯 살이 된 카스틸리오네는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의 통치 하에 있던 밀라노로 보내져, 데메트리오스 칼코콘딜레스(라틴어식 이름은 데메트리우스 칼콘딜라)와 조르지우스 메룰라의 학교에서 인문학적 연구를 시작했다.[5]

2. 2. 밀라노 및 우르비노 궁정 생활

1494년, 열여섯 살이 된 카스틸리오네는 밀라노로 보내졌다. 당시 밀라노는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그는 그곳에서 데메트리오스 칼코콘딜레스와 조르지우스 메룰라의 학교에서 인문학적 연구를 시작했다.[5] 1499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카스틸리오네는 카사티코로 돌아가 가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프란체스코 2세 곤자가, 만토바 후작의 궁정을 대표하여 여러 외교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 해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밀라노 왕립 입성에 동행했다.[4] 로마로의 외교 임무에서 카스틸리오네는 프란체스코 곤자가의 매형이자 우르비노 공작인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와 그의 아내 엘리사베타 곤자가를 만났다. 1504년, 프란체스코는 카스틸리오네가 우르비노 궁정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했다.

당시 우르비노의 궁정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세련되고 우아한 곳 중 하나였으며, 문화 중심지로서 공작 부인 엘리사베타와 그의 처제 에밀리아 피아가 훌륭하게 이끌고 관리했다.[6] 정기적인 손님으로는 피에트로 벰보, 루도비코 다 카노사, 줄리아노 데 메디치, 비비에나 추기경, 제노바 공화국 출신의 형제 오타비아노와 페데리고 프레고소가 있었다.[6]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조카이자 양자), 그리고 체사레 곤자가는 카스틸리오네와 공작의 사촌이었다. 주인과 손님들은 지적 경쟁, 연회, 춤, 콘서트, 낭독, 연극 및 기타 문화 활동을 조직하여 훌륭한 문학 작품을 만들었다.[7] 엘리사베타의 덕과 능력은 카스틸리오네가 그녀를 기리기 위해 일련의 플라톤적 사랑 노래와 소네트를 작곡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1506년 카스틸리오네는 목가극인 그의 전원시 ''티르시스''를 쓰고 (그리고 출연)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세 명의 양치기의 모습을 통해 우르비노의 궁정을 비유적으로 묘사했다.[9] 카스틸리오네는 다른 왕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작품과 다른 손님들의 작품에 대해 썼으며, 문학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외교에 매우 가까운 활동을 유지했다. 이는 그의 친구이자 친족인 루도비코 다 카노사와의 서신에서 나타난다.

2. 3. 만토바와 로마에서의 활동

1516년 카스틸리오네는 만토바로 돌아와 이폴리타 토렐리와 결혼했다. 카스틸리오네가 이폴리타에게 보낸 두 통의 열정적인 편지에서, 이전의 엘리사베타 곤차가에 대한 플라톤적 애착과는 다른 그의 깊은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폴리타는 결혼 4년 만에 사망했고, 카스틸리오네는 만토바 공작의 대사로 로마에 있었다. 1521년 교황 레오 10세는 카스틸리오네에게 ''톤수라''(첫 번째 사제 의식)를 허락했고, 이후 그의 두 번째 종교 경력이 시작되었다.[8]

1524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스틸리오네를 스페인으로 보내 교황 대사(성좌의 대사)로 임명했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카를 5세의 궁정을 따라 톨레도, 세비야, 그라나다까지 이동했다. 1527년 로마 약탈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스틸리오네가 스페인 황제와 "특별한 우정"을 맺고 있다고 의심했다. 교황은 카스틸리오네가 카를 5세의 의도를 성좌에 알렸어야 했다고 질책했다. 스페인이 로마를 상대로 무엇을 계획하는지 조사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반면, 황제의 비서이자 인문주의자 후안 데 발데스의 쌍둥이 형제인 알폰소 데 발데스는 로마 약탈이 성직자의 죄악에 대한 신성한 징벌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8]

카스틸리오네는 부르고스에서 보낸 두 통의 유명한 편지로 교황과 발데스 모두에게 답했다. 그는 발데스를 심하게 질책하며 로마 약탈에 대한 그의 발언을 비판했다. 1527년 12월 10일자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바티칸 정책의 모순과 동요가 황제와의 합의를 훼손하고 카를 5세를 자극했다고 비판했다.[8]

예상과 달리 카스틸리오네는 교황에게 사과를 받았고, 황제는 그에게 아빌라 주교직을 제안하며 존경을 표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카스틸리오네가 스페인에서 대사 임무를 명예롭게 수행했으며 로마 약탈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평가한다. 그는 1529년 톨레도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했다.[8]

2. 4. 로마 약탈과 말년

1524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스틸리오네를 스페인교황 대사(성좌의 대사)로 파견했으며, 그는 이 역할을 수행하면서 황제 카를 5세의 궁정을 톨레도, 세비야, 그라나다까지 따라갔다.[9] 1527년 로마 약탈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스틸리오네가 스페인 황제와 특별한 친분을 맺고 있다고 의심했다.[9] 교황은 카스틸리오네가 카를 5세의 의도를 성좌에 알렸어야 한다고 믿었는데, 스페인이 로마를 상대로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조사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기 때문이다.[9] 반면, 인문주의자 후안 데 발데스의 쌍둥이 형제이자 황제의 비서였던 알폰소 데 발데스는 로마 약탈이 성직자의 죄악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9]

카스틸리오네는 부르고스에서 보낸 두 통의 유명한 편지로 교황과 발데스 모두에게 답했다.[9] 그는 발데스가 로마 약탈에 대해 언급한 것에 대해 심각하고 장황하게 질책했다.[9] 1527년 12월 10일자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바티칸 정책의 모순과 동요가 황제와의 공정한 합의를 추구하는 목표를 훼손했고 카를 5세를 자극하여 공격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9]

모든 예상을 깨고 카스틸리오네는 교황에게 사과를 받았고, 황제는 그에게 아빌라 주교직을 제안하여 존경을 표했다.[9] 오늘날 역사가들은 카스틸리오네가 스페인에서 대사 임무를 명예롭게 수행했으며 로마 약탈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평가한다.[9] 그는 1529년 톨레도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했다.[9]

3. 『궁정인』

''궁정인'', 1549


카스틸리오네의 『궁정인(Il Libro del Cortigiano)』은 1528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그의 대표작이다. 16세기 초 우르비노 궁정을 배경으로, 이상적인 궁정인의 모습을 대화 형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카스틸리오네는 인문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궁정인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예술적 능력과 더불어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스프레차투라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마치 노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궁정인』은 엘리자베타 곤차가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여 궁정인의 자질, 남녀 관계, 사랑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한다. 특히, 여성의 역할과 능력에 대한 논의는 당시 사회적 통념에 도전하는 진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 책은 출판 직후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오랫동안 상류층 교양인의 필독서로 여겨졌다. 또한, 후대의 에티켓 안내서와 윌리엄 셰익스피어 등 여러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3. 1. 집필 배경 및 구성

카스틸리오네의 대표작 『궁정인(Il Libro del Cortegiano)』은 그가 사망한 후 1528년 베네치아의 알딘 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11] 이 책은 대화 형식으로, 16세기 초 카스틸리오네가 젊은 시절을 보낸 우르비노의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로 통치하 귀족 궁정을 애가적으로 묘사한다. 엘리사베타 곤차가가 주재하고, 그녀의 올케 에밀리아 피아가 함께하는 우아한 철학적 대화를 묘사한다. (엘리사베타의 남편 귀도발도는 병약하여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카스틸리오네는 자신이 부재했을 때 일어났다고 상상되는 논의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이 책은 우르비노에서의 삶과 궁정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우정에 대한 카스틸리오네의 추모 작품이며, 그들 모두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많은 이들이 책이 출판될 때 사망하여 그들의 묘사에 감동을 더했다.[12]

『궁정인』의 배경이 된 우르비노의 공작 궁전.


대화는 카스틸리오네가 잉글랜드에 대사로 가 있던 1507년에 4일 동안 진행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대화는 페데리코 프레고소가 제안한 주제, 즉 이상적인 르네상스 시대 신사가 갖춰야 할 조건에 대해 다룬다. 중세 시대의 완벽한 신사는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기사였지만, 카스틸리오네의 책은 이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완벽한 신사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문학에 대한 고전 교육을 받아야 했다. 키케로가 "정직한 사람"이라고 부른 이상적인 웅변가에 대한 키케로주의적 인본주의 모델(『궁정인』의 기초)은 웅변가에게 전쟁이나 평화를 불문하고 조국에 봉사하는 적극적인 정치 생활을 규정한다. 학자들은 카스틸리오네가 키케로의 『의무론』("신사의 의무")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으며,[13] 1421년에 재발견되어 이상적인 웅변가-시민의 형성에 대해 논의한 『웅변가론』에서 더욱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데 동의한다.[14] 제니퍼 리차드는 『웅변가론』이 제기한 질문, 즉 수사학을 가르칠 수 있는가, 아니면 타고난 재능인가 하는 질문이 『궁정인』의 질문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장르 또한 『궁정인』과 『웅변가론』에서 동일하다. 키케로 수사학에서 ''sermo''(대화)라고 불리는 편안하고, 비공식적이며, 열린 논의[16]에서, 연설자들은 논쟁의 다양한 측면을 적대적인 방식이 아닌 우호적인 방식으로 제시하여, 독자들을 침묵하는 참여자로서 스스로 진실을 결정하도록 초대한다.[17]

초기 이탈리아 인문주의는 독립적인 도시 공화국, 특히 피렌체의 산물이었다. 한스 바론은 이를 "시민적 인문주의"라고 불렀다. 그러나 카스틸리오네가 글을 쓸 당시, 이러한 공화국은 군주 궁정으로 대체되고 있었다.[18] 피터 버크에 따르면, 카스틸리오네의 업적을 요약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가 인문주의를 궁정 세계에 적응시키고 궁정을 인문주의에 적응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19] 카스틸리오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르네상스 시대 신사의 목표는 자기 계발 자체가 아니라, 키케로가 권장한 대로 공공 봉사의 적극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3. 2. 주요 내용

카스틸리오네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궁정인(Il Libro del Cortegiano)』은 1528년 베네치아에서 알두스 마누티우스의 상속자들이 운영하는 알딘 인쇄소를 통해 출판되었다.[11] 이 책은 16세기 초 카스틸리오네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우르비노의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로의 모범적인 귀족 궁정에 대한 애가적인 초상화이다.[12]

이 책은 엘리자베타 곤차가가 주재하고 그녀의 올케 에밀리아 피아가 함께하는 우아한 철학적 대화를 묘사한다. (엘리자베타의 남편 귀도발도는 병약하여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카스틸리오네는 자신이 부재했을 때 일어났다고 상상되는 논의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는다. 이 책은 우르비노에서의 삶과 궁정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우정에 대한 카스틸리오네의 추모 작품이며, 그들 모두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많은 이들이 책이 출판될 때 사망하여 그들의 묘사에 감동을 더했다.[12]

대화는 카스틸리오네가 잉글랜드에 대사로 부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1507년에 4일에 걸쳐 진행된다. 이 대화는 이상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신사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대한 페데리코 프레고소가 제안한 주제를 다룬다. 중세 시대에 완벽한 신사는 전장에서 자신의 용맹함을 발휘한 기사였다. 카스틸리오네의 책은 그 점을 바꾸었다. 이제 완벽한 신사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문학에 대한 고전적인 교육을 받아야 했다. 키케로가 "정직한 사람"이라고 부른 이상적인 웅변가에 대한 키케로주의적 인본주의 모델(『궁정인』의 기초가 됨)은 웅변가에게 전쟁이나 평화를 불문하고 조국에 봉사하는 적극적인 정치 생활을 규정한다.[13]

학자들은 카스틸리오네가 키케로의 유명한 논문인 『의무론』("신사의 의무")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으며, 중세 시대에 널리 알려졌고,[13] 1421년에 재발견되어 이상적인 웅변가-시민의 형성에 대해 논의한 그의 『웅변가론』에서 더욱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데 동의한다.[14] 제니퍼 리차드는 『웅변가론』이 제기한 질문, 즉 수사학을 가르칠 수 있는가, 아니면 타고난 재능인가 하는 질문이 『궁정인』의 질문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장르 또한 『궁정인』과 『웅변가론』에서 동일하다. 키케로 수사학에서 ''sermo''(대화)라고 불리는 편안하고, 비공식적이며, 열린 논의[16]에서, 연설자들은 논쟁의 다양한 측면을 적대적인 방식이 아닌 우호적인 방식으로 제시하여, 독자들을 침묵하는 참여자로서 스스로 진실을 결정하도록 초대한다.[17]

카스틸리오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르네상스 시대 신사의 목표는 자기 계발 자체가 아니라, 키케로가 권장한 대로 공공 봉사의 적극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동료와 가장 중요한 통치자, 즉 군주의 존경과 우정을 얻어야 했다. 즉, 그는 도시를 통치하는 방법에 대한 귀중한 도움과 사심 없는 조언을 제공할 수 있도록 궁정인이 되어야 했다. 그는 스포츠, 농담, 싸움, 시 쓰기, 음악 연주, 그림, 춤 등에서 훌륭하면서도 너무 지나치지 않은 가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했다. 그의 도덕적 우아함(그의 개인적인 선함)에 훌륭한 문학(즉,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과의 친밀함이 부여하는 영적 우아함이 더해져야 했다. 또한 그는 겉으로 보기에 노력 없이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뛰어나야 하며, 모든 것을 쉽고 자연스럽게 보이게 해야 한다.

유명한 구절에서, 카스틸리오네의 친구 로도비코 다 카노사(그의 견해는 카스틸리오네 자신의 견해를 나타낸다고 주장할 수 있음)는 "궁정인의 매력, 즉 궁정인을 자연스러운 귀족으로 보이게 하는 품질의 신비로운 근원"을 설명한다:[20] ''스프레차투라''.[21] ''스프레차투라'', 또는 예술을 숨기는 기술(다른 고대 수사학자인 퀸틸리아누스의 말)은 단순히 표면적인 위선이 아니라, 은혜는 또한 자신의 일이 제2의 본성이 되어 타고난 것처럼 보이게 할 만큼 부지런한 연습의 결과일 수 있다.

논의 초반에 카노사는 또한 완벽한 궁정인이 되는 기술은 가르칠 수 없는(즉, 일련의 규칙이나 가르침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따라서 그는(수사학적으로 – 그리고 ''스프레차투라''로) 그것을 가르치기를 거부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 기술을 습득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연습과 모방을 통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대화 자체와 마찬가지로) 가르침의 한 형태, 즉 가르침 없이 가르치는 것이다. 자신을 완벽하게 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기 위한 개인의 공적 및 사적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22]

이상적인 궁정인은 고귀한 ''스프레차투라''로 행동해야 하며, 카노사는 이상적인 궁정인은 무술가이자 승마술에 능해야 하므로 고귀한 혈통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또 다른 대화 상대인 매우 젊은 가스파레 팔라비치노는 많은 훌륭하고 덕망 있는 사람들이 낮은 출신이라고 반박한다. 다른 참가자들은 결국 비천한 출신이라도 완벽한 궁정인이 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하며, 이는 인생과 역사에서 최고의 모델을 모방하여 훈련을 통해 체화되고 자연스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것이 이론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인정하듯이 명문가에서 태어난 사람이 완벽한 궁정인이 되는 것이 더 쉽다. 어쨌든 이상적인 궁정인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우아하고 적절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궁정인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정통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말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훌륭한 글과 나쁜 글(그리고 다른 예술)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아야 한다. 참가자들은 또한 프랑스인들이 "서기" (또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라고 부르는 것을 경멸하는 무례하고 교양 없는 태도를 비난했지만, 발루아의 프랑수아 프랑스 왕세자에 대한 희망을 표명했다. 이것은 프랑스가 막 이탈리아를 침략했고, 이탈리아인보다 전투에서 분명히 우월함을 보여줬기 때문에 쓰라린 주제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궁정인에게 필요한 조건으로 전투 기술이 처음에 강조되었지만,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이탈리아어의 시인이자 우아함의 중재자였던 피에트로 벰보는 심지어 그것이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상적으로 궁정인은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27세 정도의 젊은 사람이어야 하지만, 나이보다 더 진지하고 사려 깊어 보이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밝은 색상보다는 톤 다운된 색상을 입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자신의 주변 환경의 유행을 따라야 한다. 궁정인은 항상 자신의 지위보다 조금 더 겸손하게 보여야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의 노력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일부 프랑스 및 스페인 귀족이 보이는 오만함을 피해야 한다.[23]

이 대화는 또한 정부 형태가 가장 좋은지, 공화국인지 군주국인지 – 제노바는 오랫동안 공화국 정부를 유지했기 때문에 제노바의 프레고소 형제가 공화국 편을 들었다는 등 다양한 다른 질문에 대해서도 다룬다. 기분 좋은 대화의 필수 요소인 농담(유쾌한 말)에 적합한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긴 논의도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신체적 특징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

음악이 언급되었고, 루도비코 카노사는 궁정인이 음악을 읽고 여러 악기를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젊은 롬바르드 귀족 가스파레 팔라비치노가 음악이 여성스럽다고 반대하자, 카노사는 음악보다 영혼을 달래고 기분을 고조시키는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대답하며, 훌륭한 장군과 고대 영웅들이 음악에 열정적이었다고 언급했다. 훌륭한 소크라테스 자신도 노인이 되었을 때 시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실제로 가장 현명한 고대 철학자들은 하늘 자체가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가 조화롭게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마찬가지로 음악은 개인의 조화와 미덕의 습관을 장려하며,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배워야 한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궁정인에게 음악은 장식품일 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의 남녀에게도 마찬가지로 필수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상적인 궁정인은 음악이 자신의 주요 직업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이어서 그림과 조각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 논의한다. 답은 열린 상태로 남겨졌지만, 그림에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다. 카노사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림 예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내 생각에는 매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말하고 나면, 우리가 하늘의 광대한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우주의 바로 그 구조, 별똥별로 빛나고, 지구를 중심에 두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산, 강, 계곡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나무, 사랑스러운 꽃, 풀로 장식되어 있는 것은 자연과 하나님의 손에 의해 구성된 위대하고 고귀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것을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높은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24]

또 다른 주제인 궁정 부인에 대한 주제는 성의 평등 문제로 이어진다. 한 등장인물인 가스파레 팔라비치노는 논의 내내 철저한 여성 혐오자로 묘사되어 있으며(한때 그는 여성은 아이를 낳는 데에만 쓸모가 있다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엘리자베타 곤차가와 에밀리아 피아는 그의 태도를 도전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여성의 변호를 요청한다.[25] 다음 날 저녁, 28세로 가스파레 팔라비치노보다 조금 더 성숙한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여성들을 변호하도록 선택된다. 그는 여성의 평등을 모든 면에서 남성과 확인하며, 역사 전반에 걸쳐 일부 여성들은 철학에서 뛰어났고, 다른 여성들은 전쟁을 벌이고 도시를 통치했으며, 고전 시대의 여성 영웅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그 기회를 잡는다. 팔라비치노는 화가 나서 줄리아노가 틀렸음을 암시하지만, 결국 그는 여성을 비하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한다.

독자는 여성에 대한 팔라비치노의 쓴맛이 사랑에 대한 진실한 젊은이의 깊은 실망의 결과일 수 있으며, 이는 여성의 옹호자(또는 팔라비치노가 암시하는 아첨자)인 부드럽고 상냥한 줄리아노의 진실성을 어느 정도 의심하게 만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26] 팔라비치노 또는 줄리아노, 또는 둘 다가 여성에 대한 카스틸리오네의 실제 견해를 표현하는지, 아니면 일부 의문이 있다.

이 책은 인본주의 학자 피에트로 벰보(나중에 추기경)의 사랑에 대한 긴 연설로 숭고한 어조로 끝을 맺는다. 벰보는 1470년에 태어났고, 대화가 일어났다고 추정되는 1507년에 3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젊은이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관능적인 경향이 있지만, 벰보는 젊은이와 노인 모두에게 가능한 일종의 상상적이고 비육체적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벰보의 연설은 플라톤향연의 결론에서 사랑의 본질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연설에 대한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영향력 있는 주석을 기반으로 하며, 『궁정인』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동성애가 아닌 이성애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렇다. 벰보는 승화된 사랑의 경험이 어떻게 연인으로 하여금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아이디어를 명상하게 하는지 설명한다.[29] 그는 궁극적으로 연인을 영적 영역의 명상으로 이끌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랑의 신성한 본질과 기원, "진정한 쾌락, 모든 축복, 평화, 부드러움, 선의의 아버지: 거친 야만과 비열함의 적"에 대해 이야기한다.[30]

벰보가 말을 마치자, 다른 사람들은 그의 연설에 너무 매료되어 시간을 잊었고, 이미 해가 뜨고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일어선다.

>그래서 산 카트리아의 높은 봉우리를 마주하는 궁전 측면의 창문이 열리자, 새벽이 장미의 아름다움과 색깔로 이미 동쪽으로 왔고, 모든 별들이 흩어졌고, 밤과 낮의 경계를 지키는 하늘의 사랑스러운 여주인 비너스만 남았다. 그곳에서 부는 미풍이 공기를 매서운 추위로 채우고, 이웃 언덕의 숲에서 새들을 기쁨의 노래로 깨우는 듯했다. 그러자 모두 공작 부인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날씨가 충분했기 때문에 횃불 없이 자기 방으로 갔다.[31]

3. 3. 역사적 의미와 영향

『궁정인』은 출판되자마자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시대정신"을 포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32] 1528년부터 1616년까지 108판이 출판될 정도로 널리 읽혔으며,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폴란드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다.[32]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라 코르티지아나''는 이 유명한 작품을 패러디한 것이다.[32]

카스틸리오네가 묘사한 이상적인 신사의 모습과 행동 규범은 이후 5세기 동안 유럽 상류층 사회의 행동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32] 이 책은 이상적인 신사에 대한 탐구를 담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수많은 대화록과 논문 중 하나였으며, 스테파노 과초의 『시민적 대화』(1581)와 조반니 델라 카사의 『갈라테오』(1558) 등 후대 에티켓 안내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32]

특히 영국에서는 1561년 토마스 호비 경이 『궁정인』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큰 영향을 미쳤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품의 자료로도 인정받고 있다.[33] 1572년, 에드워드 드 베어는 바솔로뮤 클레르크의 라틴어 번역을 후원하고 라틴어 서문을 쓰기도 했다.[33] 엘리자베스 여왕의 가정교사였던 로저 애스컴은 『궁정인』을 공부하는 것이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평가했다.[33]

후대 비평가들은 『궁정인』이 피상성을 옹호한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34] 이 책은 유럽 전역에 "이탈리아적 가치의 확산에 가장 중요한 단일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34] 피터 버크는 『궁정인』이 "인문주의를 궁정 세계에 적응시키고 궁정을 인문주의에 적응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19] 즉, 『궁정인』은 이상적인 신사에 대한 탐구를 넘어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적 가치를 널리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기타 작품 및 활동

카스틸리오네는 『궁정인』 외에도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다. 시, 편지, 서문 등이 그것이다. 그의 부수 작품들은 덜 알려져 있지만, 엘리사베타 곤차가를 향한 플라톤적 사랑을 노래한 소네트와 4편의 ''Amorose canzoni''(Amorose canzoni|사랑의 노래it)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와 피에트로 벰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소네트 "Superbi colli e voi, sacre ruine"(Superbi colli e voi, sacre ruine|자랑스러운 언덕과 너희, 신성한 폐허it)는 낭만주의 이전의 영감이 깃들어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롤라모 콘베르시에 의해 [http://www.cpdl.org/wiki/index.php/Superbi_colli_e_voi_sacre_ruine_(Girolamo_Conversi) 6성부 마드리갈]로 작곡되었고, 에드먼드 스펜서와 조아생 뒤 벨레 등에게 번역되기도 했다.

라틴어 시로는 라파엘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가 ''De morte Raphaellis pictoris''(De morte Raphaellis pictoris|화가 라파엘로의 죽음에la)와 죽은 아내 이폴리타 토렐리가 쓴 편지 형식을 취한 비가가 있다. 이탈리아어 산문으로는 비비에나 추기경의 희곡 ''칼란드리아''의 서문을 썼는데, 이 작품은 1507년 우르비노에서 초연되었고, 이후 로마에서 더 정교하게 공연되었다.

카스틸리오네는 외교관으로도 활약했다. 만토바프란체스코 2세 곤차가를 섬기며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밀라노 입성에 동행했고, 로마에서는 우르비노 공작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를 만났다.[4] 1504년 우르비노 궁정에 머물게 되었고,[4] 1508년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가 우르비노 공작이 된 후에는 교황령의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 노빌라라 백작 칭호를 받았다.[8] 교황 레오 10세 시절에는 우르비노 대사로 로마에 파견되었고,[8] 1516년 만토바로 돌아갔다.[8] 1521년에는 톤수라를 받고 종교 경력을 시작했다.[8]

1524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스틸리오네를 스페인 교황 대사로 임명하여 마드리드로 파견했고, 카스틸리오네는 카를 5세의 궁정을 따라 톨레도, 세비야, 그라나다 등지를 방문했다.[8] 1527년 로마 약탈 이후 카를 5세와의 관계로 인해 교황의 의심을 사기도 했으나, 카스틸리오네는 이에 대해 해명하고 교황의 정책을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8] 이후 교황의 사과를 받고 황제로부터 아빌라 주교직을 제안받았으며, 역사가들은 그의 외교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8]

카스틸리오네의 서한들은 그의 개인적인 면모와 그가 만난 유명 인사들, 외교 활동 등을 담고 있어 정치, 문학,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36]

4. 1. 시와 편지

카스틸리오네는 덜 알려진 부수 작품들도 남겼는데, 여기에는 엘리사베타 곤차가를 향한 플라톤적 사랑을 표현한 사랑 소네트와 4편의 ''Amorose canzoni''(Amorose canzoni|사랑의 노래it)가 포함된다. 이 작품들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와 피에트로 벰보의 영향을 받았다. 카스틸리오네는 시인이라기보다는 문인에 가까웠지만, 그의 소네트 "Superbi colli e voi, sacre ruine"(Superbi colli e voi, sacre ruine|자랑스러운 언덕과 너희, 신성한 폐허it)에는 낭만주의 이전의 영감이 깃들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은 지롤라모 콘베르시에 의해 [http://www.cpdl.org/wiki/index.php/Superbi_colli_e_voi_sacre_ruine_(Girolamo_Conversi) 6성부 마드리갈]로 작곡되었으며, 에드먼드 스펜서와 조아생 뒤 벨레 등 여러 사람들에 의해 번역되었다.

카스틸리오네는 라틴어 시도 여러 편 썼는데, 라파엘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가 ''De morte Raphaellis pictoris''(De morte Raphaellis pictoris|화가 라파엘로의 죽음에la)와 페트라르카의 스타일을 따른 또 다른 비가가 있다. 후자의 비가에서는 죽은 아내 이폴리타 토렐리가 그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을 취했다. 이탈리아어 산문으로는 추기경 비비에나의 ''칼란드리아'' 서문을 썼는데, 이 작품은 1507년 우르비노에서 초연되었고 나중에 로마에서 정교하게 공연되었다.

카스틸리오네의 서한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개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가 교류했던 유명 인사들에 대한 묘사와 외교 활동을 담고 있어 정치, 문학,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된다.[36]

4. 2. 외교 활동

카스틸리오네는 프란체스코 2세 곤차가, 만토바 후작의 궁정에서 여러 공식 및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그 해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밀라노 왕립 입성에 동행했다.[4] 로마로의 외교 임무에서 카스틸리오네는 프란체스코 곤자가의 매형인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 우르비노 공작을 만났다.[4] 1504년, 프란체스코는 카스틸리오네가 우르비노 궁정에 거주하도록 허락했다.[4]

1508년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가 우르비노 공작이 되자 카스틸리오네는 그의 궁정에 머물렀다. 그는 교황령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새로운 공작과 함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이탈리아 전쟁베네치아에 대한 원정에 참여했다. 공작은 카스틸리오네에게 노빌라라 백작의 칭호를 수여했다.[8] 교황 레오 10세가 1512년에 선출되자 카스틸리오네는 우르비노의 대사로 로마에 보내졌다.[8]

1516년 카스틸리오네는 만토바로 돌아왔다.[8] 1521년 교황 레오 10세는 그에게 ''톤수라''(첫 번째 사제 의식)를 허락했고, 이후 카스틸리오네의 두 번째 종교 경력이 시작되었다.[8]

1524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스틸리오네를 스페인으로 보내 교황 대사 (성좌의 대사)로 마드리드에 파견했으며, 그는 황제 카를 5세의 궁정을 톨레도, 세비야그라나다까지 따라갔다.[8] 1527년 로마 약탈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스틸리오네가 스페인 황제와 "특별한 우정"을 품고 있다고 의심했다. 교황은 카스틸리오네가 카를 5세의 의도를 성좌에 알렸어야 했다고 믿었다.[8] 알폰소 데 발데스는 약탈이 성직자의 죄악에 대한 신성한 징벌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8]

카스틸리오네는 부르고스에서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교황과 발데스에게 모두 답했다. 그는 발데스를 질책했고,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바티칸 정책의 모순과 동요가 황제와의 합의를 훼손하고 카를 5세를 자극했다고 비판했다.[8]

예상을 깨고 카스틸리오네는 교황의 사과를 받았고 황제는 그에게 아빌라 주교직을 제안했다. 역사가들은 카스틸리오네가 대사 임무를 명예롭게 수행했으며 로마 약탈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평가한다.[8]

5. 평가와 유산

토르콰토 타소는 ''일 말필리오 오베로 데 라 코르테''(1585)에서 "궁정이 존속하는 한, ... 카스틸리오네의 이름은 존경받을 것입니다."라고 평가했다.[32] ''궁정인''은 출판되자마자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폴란드어, 영어로 빠르게 번역되었고, 1528년에서 1616년 사이에 108판이 출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34] 카스틸리오네가 묘사한 이상적인 신사의 교육과 행동 방식은 이후 5세기 동안 유럽 상류층 행동의 시금석으로 작용했다. 스테파노 과초의 시민적 대화(1581)와 조반니 델라 카사의 갈라테오(1558) 등 이상적인 신사를 탐구한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이탈리아 대화록과 논문 중에서도 ''궁정인''은 후기 에티켓 안내서의 원전으로 평가받는다.

영국에서는 1561년 토마스 호비 경에 의해 번역되어 큰 영향을 미쳤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자료로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엘리자베스 1세의 가정교사이자 비서였던 로저 애스컴은 ''궁정인''을 주의 깊게 공부하는 젊은이는 이탈리아에서 3년 동안 여행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점을 얻을 것이라고 언급했다.[33]

후대 평론가들은 ''궁정인''이 피상성을 옹호한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유럽 전역에 "이탈리아적 가치의 확산에 가장 중요한 단일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34] 그러나 카스티글리오네의 저서 《궁정인》은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고 귀족 중심적인 가치관을 옹호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36]

5. 1. 긍정적 평가

토르콰토 타소는 ''일 말필리오 오베로 데 라 코르테''(1585)에서 "궁정이 존속하는 한, 군주가 통치하고 기사와 귀부인이 만나는 한, 용기와 예의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 한, 카스틸리오네의 이름은 존경받을 것입니다."라고 평가했다.[32]

''궁정인''은 출판되자마자 "시대정신"을 포착하여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폴란드어, 영어로 빠르게 번역되었다. 1528년에서 1616년 사이에 108판이 출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라 코르티지아나''는 이 유명한 작품을 패러디한 것이다.) 카스틸리오네가 묘사한 이상적인 신사의 교육과 행동 방식은 이후 5세기 동안 유럽 상류층 행동의 시금석으로 작용했다. 스테파노 과초의 시민적 대화(1581)와 조반니 델라 카사의 갈라테오(1558) 등 이상적인 신사를 탐구한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이탈리아 대화록과 논문 중에서도 ''궁정인''은 후기 에티켓 안내서의 원전으로 평가받는다.

영국에서는 1561년 토마스 호비 경에 의해 번역되어 큰 영향을 미쳤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자료로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72년, 에드워드 드 베어는 바솔로뮤 클레르크의 라틴어 번역을 후원하고 라틴어 서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가정교사이자 비서였던 로저 애스컴은 ''궁정인''을 주의 깊게 공부하는 젊은이는 이탈리아에서 3년 동안 여행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점을 얻을 것이라고 언급했다.[33]

후대 평론가들은 ''궁정인''이 피상성을 옹호한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준 오스본에 따르면 "약간의 정의"와 함께), 유럽 전역에 "이탈리아적 가치의 확산에 가장 중요한 단일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34]

카스틸리오네는 만토바 근교 카자티코(현재의 마르카리아)의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를 통해 지역 지배 가문인 곤차가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36] 밀라노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후,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섬겼고, 이후 우르비노 궁정에서 외교 사절로 활동하며 각국을 방문했다. 우르비노 공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로의 아내 엘리사베타 곤차가를 흠모하여 그녀를 칭송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1516년 우르비노가 메디치 가문의 교황 레오 10세에게 공격받은 후, 만토바로 옮겨 만토바 공 페데리코를 섬겼다. 이후 로마에서 사절로 활동하며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섬겼고, 교황령의 스페인 대사로 카를 5세의 궁정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1527년 로마 약탈 사건 이후 교황청 내에서 카스틸리오네의 책임을 추궁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1529년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5. 2. 비판적 평가

카스티글리오네의 저서 《궁정인》은 오랫동안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 교양인의 필독서로 여겨졌지만,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고 귀족 중심적인 가치관을 옹호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36] 이상적인 궁정인의 자질을 강조하면서 평민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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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웹사이트 ‘Baldassarre Castiglione’ http://www.italica.r[...] Rai International online 200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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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The Fortunes of the Courtier: The European Reception of Castiglione's Cortegiano Penn State University Press
[20] 문서 "Assumed Simplicity and the Critique of Nobility: Or, How Castiglione Read Cicero"
[21] 인용
[22] 학술 "The Theory and Practice of Imitation in Classical Rhetoric"
[23] 서적 Urbino: the Story of a Renaissance City
[24] 서적 Urbino: the Story of a Renaissance City
[25] 서적 Baldasare Castiglione, The Perfect Courtier: His Life and Letters, 1478–1529 https://archive.org/[...] Murray
[26] 서적 Renaissance Lawgivers: Savonarola, Machiavelli, Castiglione, and Aretino Transaction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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