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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실리오 피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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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1433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아 플라톤 아카데미를 이끌며 플라톤 철학을 연구하고, 플라톤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양에 플라톤 철학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와 헤르메스주의를 융합한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구축했으며, 플라톤적 사랑, 점성술, 자연 마법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피치노는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조화시키려 노력했으며,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예술, 철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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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실리오 피치노
기본 정보
마르실리오 피치노
마르실리오 T. 피치노,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토르나부오니 채플에 있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프레스코화에서
존칭 접두사신부
이름마르실리오 피치노
출생일1433년 10월 19일
출생지피렌체 공화국 필리네발다르노
사망일1499년 10월 1일
사망지카레지의 메디치 빌라
국적피렌체 공화국
종교가톨릭
부모디오티페치 다뇰로
알레산드라 디 나노치오
철학
시대르네상스 철학
학파기독교 인문주의
신헤르메스주의
신플라톤주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토마스주의
주요 관심사신학
점성술
형이상학
주요 사상플라토닉 러브
원초 신학
주요 저서
주요 저서1474년 De Christiana Religione
1482년 Theologia Platonica
de immortalitate animae

1484년 De amore
1489년 생명에 대하여(De vita libri tres)

2. 생애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피글리네 발다르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디오티페치 다뇰로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는 의사였으며, 이 인연으로 코시모는 젊은 피치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평생 후원하였다. 피치노는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도 그의 제자였다.[3] 피치노의 최초 철학 교사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의사였다.

1439년, 코시모 데 메디치는 에우게니우스 4세와의 관계를 통해 피렌체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은 서양에 전해지지 않았던 플라톤의 저서를 가지고 와 코시모의 후원으로 플라톤 강의를 했다. 마누엘 크리솔로라스는 플라톤의 『국가』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했다.[22] 코시모는 플레톤의 제안으로 고대 플라톤 아카데미아를 본뜬 서클을 구상했고, 장차 설립될 플라톤 아카데미아를 위해 자신의 주치의 아들인 피치노(당시 6세)를 발탁하여 생활비 일체를 지원하며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게 했다.[22]

중세 유럽 스콜라 학파 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려져 있었지만, 플라톤에 대해서는 (『티마이오스』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피렌체 공의회 등을 계기로 동로마 제국 학자 등을 통해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그리스어 문헌이 전해졌다. 피치노의 플라톤 전집 번역은 르네상스신플라톤주의 융성의 근원이 되었다. 다만, 신플라톤주의는 플로티노스가 주창한 것으로, 피치노는 플라톤보다 플로티노스의 번역에 전념했다고도 한다.[23]

1434년 코시모는 피렌체 지도자가 된 후,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후의 니콜라오 5세 등 저명인사를 초청하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등을 포함한 그리스와 로마 지식을 포함한 수학 연구를 수행했다. 니콜로 니콜리의 후원 등으로 많은 고전 문헌을 수집하여, 1444년 산 마르코 수도원에 도서관을 설립하고 후의 니콜라오 5세가 관리하여, 문헌 등 학술적인 환경을 갖추었다.

1456년부터 피치노는 다양한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이 무렵부터 플라톤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피렌체 대주교는 플라톤 사상의 이단성을 우려하여 볼로냐에서 의학과 토마스 아퀴나스 연구를 병행하도록 조언했다. 1450년대 중반, 코시모는 플라톤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학자와 그리스어 학자 등 다양한 저명인사를 초청하여 강의를 들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동로마의 그리스 학자들이 피렌체에 많이 오게 되었고, 로디 조약에 따라 코시모는 주변 국가에 학자를 파견하기도 했다. 특히 플라톤 사상에 경도된 조반니 알지로풀로가 피렌체에서 강연을 했고 피치노도 그것을 들었으며, 바르톨로메오 삭키도 강연을 듣기 위해 방문하여 피치노와 삭키는 친구가 되었다. 피치노는 후에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크게 활용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하지 않았다.[24]

1462년(1459년이라는 기록도 있음)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피치노에게 피렌체 교외의 카레지(Careggi)에 별장을 하사하고,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그 수장으로 삼았다.[25] 코시모의 의뢰로 피치노는 플라톤 전집과 헤르메스 문집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5] 1463년 헤르메스 문집을 번역하여 1471년에 간행했고,[7] 1469년경부터 플라톤 전집 번역을 시작하여 1484년에 완료하여 출판했다.[6]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를 비롯한 여러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저작도 번역하여 출판했다.[23]

헤르메스 문집: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1471년 라틴어 초판, 암스테르담의 헤르메스 철학 도서관 소장.


1473년 피치노는 의사로 훈련받았지만 사제 서품을 받았다.[12][13][14][27] 1474년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논문인 ''플라톤 신학''과 종교의 역사이자 기독교 옹호 논문인 ''De Christiana Religione'' (기독교에 관하여)를 완성했다.[15] 고대 문헌 재발견에 대한 열정으로 점성술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와 마찰을 빚었다. 148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4] 앞에서 이단 혐의로 고발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1492년 로렌초 데 메디치 사후, 플라톤 아카데미는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고, 피치노 역시 후원자를 잃었다.[27] 피치노는 처음에는 사보나롤라의 신학을 크게 칭찬했던 것으로 보인다.[21] 1498년, 피치노는 (메디치 가문을 몰락시킨) 사보나롤라적그리스도로 로마 교황청에 고발했다.[21]

1499년 10월 1일 피치노는 카레지에서 사망했다. 1521년 안드레아 페루치가 그의 업적을 기리는 흉상을 제작했으며, 피렌체 대성당 내부 남쪽 측면에 안치되었다.

2. 1. 초기 생애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피글리네 발다르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디오티페치 다뇰로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는 의사였는데, 이 인연으로 코시모는 젊은 피치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평생 후원하였다. 피치노는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가정교사가 되었으며,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도 그의 제자였다.[3] 피치노의 최초 철학 교사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의사였다.

1439년, 코시모 데 메디치가 에우게니우스 4세와의 관계를 통해 개최한 피렌체 공의회 때,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이 서양에 전해지지 않았던 플라톤의 저서를 가지고 와서 코시모의 후원을 얻어 플라톤 강의를 했다. 이때 마누엘 크리솔로라스는 플라톤의 『국가』를 직접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22] 플레톤의 제안으로 코시모는 고대 플라톤 아카데미아를 본뜬 서클을 구상했고, 장차 설립될 플라톤 아카데미아를 위해 코시모는 자신의 주치의 아들인 마르실리오 피치노(당시 6세)를 발탁하여 생활비 일체를 지원하며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게 했다.[22]

중세 유럽에서는 스콜라 학파 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려져 있었지만, 플라톤에 대해서는 (『티마이오스』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피렌체 공의회 등을 계기로 동로마 제국의 학자 등을 통해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그리스어 문헌이 전해졌다. 피치노에 의한 플라톤 전집 번역은 르네상스신플라톤주의 융성의 근원이 되었다. 다만, 신플라톤주의는 플로티노스가 주창한 것으로, 피치노는 플라톤보다 이 플로티노스의 번역에 전념했다고도 한다.[23]

코시모는 1434년 피렌체의 지도자가 된 후,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후의 니콜라오 5세 등 저명인사를 초청하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도나텔로 등을 포함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을 포함한 수학 연구를 수행했다. 그리고 나서 니콜로 니콜리의 후원 등을 거쳐 많은 고전 문헌을 수집하여, 1444년 산 마르코 수도원에 도서관을 설립하고 후의 니콜라오 5세가 관리하여, 문헌 등 학술적인 환경을 갖추었다.

1456년, 피치노는 다양한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플라톤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피렌체 대주교는 플라톤 사상의 이단성(당시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신앙이 강했고, 그리스 학문은 이교도의 학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을 우려하여, 볼로냐에서 의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구를 병행하도록 조언했다.

1450년대 중반, 코시모는 플라톤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학자와 그리스어 학자 등 다양한 저명인사를 초청하여 강의를 들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인해 동로마의 그리스 학자들이 피렌체에 많이 오게 되었고, 로디 조약에 따라 코시모는 주변 국가에 학자를 파견하기도 했다. 특히 플라톤 사상에 경도된 조반니 알지로풀로가 피렌체에서 강연을 했고 피치노도 그것을 들었으며, 바르톨로메오 삭키도 강연을 듣기 위해 방문하여 피치노와 삭키는 친구가 되었다.

피치노는 후에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크게 활용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부정하지 않았다.[24]

2. 2. 플라톤 아카데미

1438년부터 1445년까지 피렌체에서 열린 페라라-피렌체 공의회 기간 동안, 메디치가의 코시모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을 만났다. 플레톤의 강의에 감명을 받은 코시모는 플라톤 아카데미 설립을 구상하고,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그 책임자로 발탁했다.[4] 1459년 요하네스 아르규로풀로스가 피렌체에서 그리스어와 문학 강의를 하자, 피치노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4]

메디치가의 코시모는 1462년(1459년이라는 기록도 있음) 피치노에게 피렌체 교외의 카레지(Careggi)에 별장을 하사하고,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그 수장으로 삼았다.[25]

플라톤 아카데미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피치노는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안젤로 폴리치아노,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2. 3. 플라톤 및 신플라톤주의 저작 번역

메디치가의 코시모의 의뢰로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플라톤 전집과 헤르메스 문집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5] 1463년 헤르메스 문집을 번역하여 1471년에 간행했고,[7] 1469년경부터 플라톤 전집 번역을 시작하여 1484년에 완료하여 출판했다.[6]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를 비롯한 여러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저작도 번역하여 출판했다.[23]

2. 4. 사제 서품과 종교 활동

피치노는 의사로 훈련받았지만 1473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12][13][14][27] 1474년에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논문인 ''플라톤 신학''과 종교의 역사이자 기독교 옹호 논문인 ''De Christiana Religione'' (기독교에 관하여)를 완성했다.[15]

고대 문헌 재발견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점성술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와 마찰을 빚었다. 148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4] 앞에서 이단 혐의로 고발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2. 5. 로렌초 데 메디치 사후

1492년 로렌초 데 메디치 사후, 플라톤 아카데미는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로렌초의 후계자 피에로에 의해 피치노의 제자였던 미란돌라폴리치아노가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피치노 역시 후원자를 잃었다.[27]

이 해에 피치노는 로렌초 시대를 황금기로 묘사하며, 문법, 시, 수사학, 회화, 조각, 건축, 음악 등 거의 사라졌던 인문학을 복원했고, 이 시대가 점성술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피치노는 처음에는 사보나롤라의 신학을 크게 칭찬했던 것으로 보인다.[21]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로렌초 시대의 그리스·로마 사상과 예술을 이교도 사상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피치노가 어떻게 칭찬했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요절한 피코는 죽음을 앞두고 산 마르코 수도원의 수도사로 매장되도록 사보나롤라에게 간청했다.”[21]는 기록도 있어 칭찬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1498년, 피치노는 (메디치 가문을 몰락시킨) 사보나롤라적그리스도로 로마 교황청에 고발했다.[21] 이는 서명 없는 문서였지만, 피치노가 작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문서는 『변명』이라는 저서인 듯하며, "사보나롤라의 사형 후, 그의 추종자로서 로마로부터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썼다."[21]고 하며, "사보나롤라의 악담을 하여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21]

2. 6. 사망

피치노는 1499년 10월 1일 카레지에서 사망했다. 1521년 안드레아 페루치가 그의 업적을 기리는 흉상을 제작했으며, 피렌체 대성당 내부 남쪽 측면에 안치되었다.

3. 사상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은 페라라-피렌체 공의회 기간 동안 메디치가의 코시모와 그의 지식인 그룹에게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소개했고, 그의 플라톤과 알렉산드리아 신비주의자들에 대한 강연은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4] 1459년 요하네스 아르규로풀로스가 피렌체에서 그리스어와 문학을 가르치면서 피치노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4]

코시모는 피치노를 플라톤 학원의 원장으로 임명하고 플라톤 저작의 그리스어 원고를 제공했다. 피치노는 플라톤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했고(1468~1469년 초고 완성,[6] 1484년 출판), 레오나르도 다 피스토이아가 발견한 헤르메티카[7]와 포르피리오스, 이암블리코스, 플로티누스 등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저술도 번역했다.

피치노는 플라톤 신학[4]에서 영혼의 불멸성을 논하고, ''De Christiana Religione''(기독교에 관하여)에서 기독교를 옹호했다.[15] 점성술에 관심을 보였으나,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4] 앞에서의 이단 고발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지만, 이성과 지성을 통해 이데아(Idea)의 세계를 인식하고 신과 합일될 수 있다고 보았다. 세계의 영혼과 인간 영혼의 통합을 주장하며, ''De vita libri tres(삶에 관한 세 권의 책)''에서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했다.

피치노는 명상과 학문적 연마를 통해 인간이 완성에 가까워지고, 현세와 내세의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24] 인간이 주체적으로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며, 그 능력은 신의 사랑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했다.[28]

플라톤적 사랑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19] 플라톤의 『향연』 주석서인 『사랑에 대하여(일본어 제목: 사랑의 형이상학)』에서 아모르 플라토니쿠스(Amor Platonicus)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플라토닉 러브(정신적인 사랑)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현재의 플라토닉 러브 개념과는 상당히 달랐다.

피치노에 따르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의 운동이 “사랑”이며, 인간 정신에서 사랑의 운동은 사물 속에서 생명체의 아름다움을 보고, 더 나아가 그것을 초월하여 내면의 “이성”으로, “이데아”로 나아가 마침내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21]

헤르메스 문서의 영향을 받아 점성술과 자연 마법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천체의 움직임이 인간의 운명과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으며, 별들의 힘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고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489년 《삼중의 생애(De Vita Triplici)》에서 점성술적, 마법적 방법을 이용한 건강과 장수에 대한 조언을 제시했다.[16]

1492년 "이 세기는 마치 황금기와 같이 거의 멸종된 교양 과목들을 다시 빛으로 되돌려놓았다... 이 세기는 점성술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선언했다.[4] 세계의 영혼과 인간 영혼의 통합을 주장하며, 세상 모든 것이 살아있다고 보았다.[17]

아버지의 영향으로 의학 논문을 출판하여 파라켈수스(Paracelsus)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 의사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논문들은 점성술적, 연금술적 개념을 다루어 이단으로 의심받기도 했다.[18] 신화를 천상의 힘의 표현으로 여겨 비너스(Venus)를 인간성, 헤르메스(Hermes)를 최초의 철학자, 토성(Saturnus)을 지적 탐구에 몰두하게 하는 존재로 보았다.[21]

헤르메스 문서를 번역하고 실천적인 점성술을 연구했으며, 《삼중의 생애(De Vita Triplici)》에서 행성의 힘으로 건강을 얻는 방법을 제시했다. 신화와 마법(魔術),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キリスト教)와 일치한다고 생각했으며, 조로아스터를 동방 박사의 한 사람으로 보기도 했다.[29] 최근에는 자연 마법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23]

1473년 사제가 되었고,[12][13][14] 1474년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논문인 ''플라톤 신학''[4]과 종교의 역사이자 기독교 옹호 논문인 ''De Christiana Religione''(기독교에 관하여)를 완성했다.[15] 고대 문헌 재발견에 대한 열정 속에서 점성술에 관심을 보였고, 가톨릭 교회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148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4] 앞에서 이단 혐의로 고발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요한복음 19장 11절을 인용하여 인간의 지혜는 신만이 부여할 수 있는 미덕이므로,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는 결합될 수 있다고 보았다.[24] 플라톤적인 미적 범신론과 가톨릭의 인격신 사상을 결합하여 양립시켰다.[28]

3. 1. 플라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은 페라라-피렌체 공의회 기간 동안 메디치가의 코시모와 그의 지식인 그룹에게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소개했다. 플라톤과 알렉산드리아 신비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강연은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4] 1459년 요하네스 아르규로풀로스가 피렌체에서 그리스어와 문학을 가르쳤고, 피치노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4]

코시모는 피치노를 플라톤 학원의 원장으로 임명하고, 플라톤 저작의 그리스어 원고를 제공했다. 피치노는 플라톤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했고(1468~1469년 초고 완성,[6] 1484년 출판), 레오나르도 다 피스토이아가 발견한 헤르메티카[7]와 포르피리오스, 이암블리코스, 플로티누스 등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저술도 번역했다.

피치노는 Theologia Platonica de immortalitate animae(플라톤 신학)[4]에서 영혼의 불멸성을 논하고, ''De Christiana Religione''(기독교에 관하여)에서 기독교를 옹호했다.[15] 그는 점성술에 관심을 보였으나,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4] 앞에서의 이단 고발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피치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지만, 이성과 지성을 통해 이데아(Idea)의 세계를 인식하고 신과 합일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세계의 영혼과 인간 영혼의 통합을 주장하며, ''De vita libri tres(삶에 관한 세 권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치노는 명상과 학문적 연마를 통해 인간이 완성에 가까워지고, 현세와 내세의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24] 그는 인간이 주체적으로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며, 그 능력은 신의 사랑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했다.[28]

3. 2. 플라톤적 사랑

피치노는 1476년 알라마노 도나티에게 보낸 편지에서 "플라톤적 사랑"(플라톤적 사랑)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19] 1492년 피치노는 라틴어로 쓰여진 플라톤적 사랑에 관한 편지들을 담은 『에피스툴라에』(Epistulae, 서간집)를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그의 학문적 동료이자 평생 친구였던 조반니 카발칸티에게 보낸 편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피치노가 동성애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의 편지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근거를 찾기 어렵다.[19] 또한, 그는 『국가』에 대한 주석에서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동성애적 언급이 단지 "무거운 기분을 덜기 위해 한 농담" 이상의 의미는 아니라고 독자들에게 분명히 부인했다.[20] 어찌되었든 피치노가 카발칸티에게 보낸 편지들은 서유럽에서 플라톤적 사랑이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지는 데 기여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향연』에 대한 주석서인 『사랑에 대하여(일본어 제목: 사랑의 형이상학)』에서 아모르 플라토니쿠스(Amor Platonicus)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플라토닉 러브(정신적인 사랑)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플라토닉 러브 개념과는 상당히 달랐다.

피치노에 따르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의 운동이 “사랑”이다. 그리고 인간 정신에서 사랑의 운동은, 사물 속에서 생명체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더 나아가 그것을 초월하여 내면의 “이성”으로, “이데아”로 나아가, 마침내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21]

3. 3. 점성술과 자연 마법

피치노는 헤르메스 문서의 영향을 받아 점성술과 자연 마법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천체의 움직임이 인간의 운명과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으며, 별들의 힘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고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489년에 출판된 《삼중의 생애(De Vita Triplici)》에서 점성술적, 마법적 방법을 이용한 건강과 장수에 대한 조언을 제시했다.[16]

1492년 피치노는 "이 세기는 마치 황금기와 같이 거의 멸종된 교양 과목들을 다시 빛으로 되돌려놓았다... 이 세기는 점성술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선언했다.[4] 그는 세계의 영혼과 인간 영혼의 통합을 주장하며, 세상 모든 것이 살아있다고 보았다.[17]

피치노는 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의학 논문을 출판하여 파라켈수스(Paracelsus)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 의사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논문들은 점성술적, 연금술적 개념을 다루어 피치노는 이단으로 의심받기도 했다.[18] 그는 신화를 천상의 힘의 표현으로 여겨 비너스(Venus)를 인간성, 헤르메스(Hermes)를 최초의 철학자, 토성(Saturnus)을 지적 탐구에 몰두하게 하는 존재로 보았다.[21]

피치노는 헤르메스 문서를 번역하고 실천적인 점성술을 연구했으며, 《삼중의 생애(De Vita Triplici)》에서 행성의 힘으로 건강을 얻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신화와 마법(魔術),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キリスト教)와 일치한다고 생각했으며, 조로아스터를 동방 박사의 한 사람으로 보기도 했다.[29] 최근에는 자연 마법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23]

3. 4. 기독교와의 조화

피치노는 1473년에 사제가 되었고,[12][13][14] 1474년에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논문인 ''플라톤 신학''[4]과 종교의 역사이자 기독교 옹호 논문인 ''De Christiana Religione''(기독교에 관하여)를 완성했다.[15] 그는 고대 문헌 재발견에 대한 열정 속에서 점성술에 관심을 보였고,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1489년에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4] 앞에서 이단 혐의로 고발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피치노는 요한복음 19장 11절을 인용하여 인간의 지혜는 신만이 부여할 수 있는 미덕이므로,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는 결합될 수 있다고 보았다.[24] 또한 그는 플라톤적인 미적 범신론과 가톨릭의 인격신 사상을 결합하여 양립시켰다.[28]

4. 저작


  • 플라톤 신학: 영혼의 불멸성에 관하여(Theologia Platonica de immortalitate animae)[27]
  •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편지들''(The Letters of Marsilio Ficino)

''Delle divine lettere del gran Marsilio Ficino'' (1563)

  • ''철학의 정원: 플라톤에 관한 피치노''(Gardens of Philosophy: Ficino on Plato)
  • 피치노의 플라톤 주석 서문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에게 보냄].
  • 《히파르쿠스(Hipparchus)》: 이득에 대한 욕망
  • 《철학(Philosophy)》 또는 《연인(The Lover)》
  • 《테아게스(Theages)》: 지혜
  • 《메논(Meno)》: 덕
  • 《알키비아데스 1(Alcibiades I)》: 인간의 본성
  • 《알키비아데스 2(Alcibiades II)》: 기도
  • 《미노스(Minos)》: 법
  • 《에우튀프론(Euthyphro)》: 신성
  • 《히피아스(Hippias Major)》: 아름다움과 고귀함
  • 《리시스(Lysis)》: 우정
  • 《테아이테토스(Theaetetus)》: 지식
  • 《이온(Ion)》: 시적 영감
  • 《정치가(Statesman)》: 군주제
  •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덕
  • 《에우튀데무스(Euthydemus)》: 소피스트들의 견해
  • 《히피아스 소(Lesser Hippias)》: 정직성
  • 《카르미데스(Charmides)》: 절제
  • 《라케스(Laches)》: 용기
  • 《크라튀로스(Cratylus)》: 이름
  • 《고르기아스(Gorgias)》: 수사학
  • 《변명(Apology)》: 소크라테스(Socrates)의 변론
  • 《크리톤(Crito)》: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식
  • 《파이돈(Phaedo)》: 영혼의 본성
  • 《메넥세누스(Menexenus)》: 조국에 대한 사랑
  • 《크리티아스(Critias)》: 아틀란티스(Atlantis) 이야기
  • 플라톤의 《서한(Epistles)》(12편)에 대한 논의
  • 피치노의 대화편 및 그 주석에 대한 다른 두 개의 서문
  • ''영원히 그러하리라: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피치노''(Evermore Shall Be So: Ficino on Plato's Parmenides)
  • ''철학자들이 통치할 때: 플라톤의 ''국가'', ''법'', 그리고 ''에피노미스''에 관한 피치노''(When Philosophers Rule: Ficino on Plato's Republic, Laws, and Epinomis)
  • ''모든 자연적인 것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관한 피치노''(All Things Natural: Ficino on Plato's Timaeus)
  • ''사랑의 본성에 관하여: 플라톤의 ''향연''에 관한 피치노''(On the Nature of Love: Ficino on Plato's Symposium)
  • 플라톤 주석집 (''Commentaries on Plato'')
  • 제1권, 2008, 『파이드로스』(Phaedrus) 및 『이온』(Ion)
  • 제2권, 2012,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제1부
  • 제3권, 2012,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제2부
  • 플라톤의 향연에 대한 주석 (''Commentary on Plato's Symposium on Love'')[27]
  • ''결혼 산술: 플라톤의 ''국가'' 8권에 나오는 운명의 숫자에 대한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주석''(Nuptial Arithmetic: Marsilio Ficino's Commentary on the Fatal Number in Book VIII of Plato's Republic)
  • ''이카스테스: 플라톤의 ''소피스트''에 대한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해석''(Icastes. Marsilio Ficino's Interpretation of Plato's Sophist)
  • ''생명의 책''(The Book of Life)
  • ''De vita libri tres''(삶에 관한 세 권의 책, 1489)
  • De triplici vita(세 가지 삶에 관하여)[27]

''De triplici vita'', 1560

  • ''De religione Christiana et fidei pietate''(1475–6)
  • ''In Epistolas Pauli commentaria''
  • ''영혼에 대한 명상: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편지 선집''(Meditations on the Soul: Selected letters of Marsilio Ficino)
  • 전집: ''Opera'' (피렌체, 1491, 베네치아, 1516, 바젤, 1561).

5. 영향

피치노의 플라톤 전집 라틴어 번역은 서구 지성계에 플라톤 철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5][6] 1462년 메디치가의 코시모는 피치노에게 플라톤 저작의 그리스어 원고를 제공했고, 피치노는 이를 바탕으로 번역을 시작했다.[5] 이 번역 작업은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치노는 신플라톤주의헤르메스주의를 결합한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 신학,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헤르메티카[7]와 포르피리오스, 이암블리코스, 플로티누스 등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저술 번역은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피치노의 사상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프레스코화 ''사카리아의 성전''에 등장하는 크리스토포로 란디노, 안젤로 폴리치아노 등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사카리아의 성전'' (세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프레스코화 (1486~1490년), 피렌체 토르나부오니 예배당에 있으며, (좌측부터 우측으로) 마르실리오 피치노, 크리스토포로 란디노, 안젤로 폴리치아노, 젠틸레 데 베키 또는 데메트리오스 칼콘딜레스를 보여준다.


피치노는 1476년 알라마노 도나티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플라톤적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19] 이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의 연애관과 문학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치노의 제자로는 니콜로 발로리[8][9]와 프란체스코 카타니 다 디아체토가 있었으며, 피치노는 디아체토를 피렌체 플라톤 학원의 후임 원장으로 여겼다.[10]

6. 평가 및 비판

피치노는 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플라톤 철학 번역과 신플라톤주의 연구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4] 그는 1492년에 "이 세기는 마치 황금기와 같이 거의 멸종된 교양 과목들을 다시 빛으로 되돌려놓았다. 문법, 시, 수사학, 회화, 조각, 건축, 음악… 이 세기는 점성술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4]

그러나 피치노는 점성술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이 때문에 가톨릭 교회와 마찰을 빚었다. 1489년에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 앞에서 이단으로 고발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4] 그의 저서 ''De vita libri tres''(삶에 관한 세 권의 책)에는 건강과 활력을 위한 의학적, 점성술적 조언이 담겨 있으며, 세계의 영혼과 인간 영혼의 통합을 주장하는 신플라톤주의적 관점을 보여준다.[16] 그는 "미신적이고 눈먼 어떤 사람들은 가장 하찮은 동물과 가장 보잘것없는 식물에서조차 삶을 분명히 보지만, 하늘이나 세상에서는 삶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제 만약 그 작은 사람들이 세상의 가장 작은 입자에 삶을 부여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질투심이 강한가!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전체가 스스로 살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라고 주장했다.[17]

참조

[1] 서적 Prisci Theologi and the Hermetic Reformation in the Fifteenth Century Repristination Press
[2] 서적 Marsilio Ficino North Atlantic Books 2006
[3] 논문 The Platonic Academy of Florence http://dx.doi.org/10[...] Brill 2024-05-23
[4] 백과사전 Ficino, Marsilio
[5] 서적 The Civilization of the Italian Renaissance: A Sourcebook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6] 서적 Plato in the Italian Renaissance https://books.google[...] Brill
[7] 서적 Giordano Bruno and the Hermetic Tra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8] 서적 Nuovo Dizionario Istorico https://books.google[...] Remondini of Venice
[9] 서적 Biography of Lorenzo de' Medici the elder
[10] 웹사이트 Marsilio Ficino http://plato.stanfor[...]
[11] 웹사이트 Annotated English translation of Corsi's biography of Ficino http://easyweb.easyn[...] 2011-10-15
[12] 서적 Pythagoras and Renaissance Europe: Finding Heave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 서적 Studies in Renaissance thought and letters. IV https://books.google[...] Edizioni di Storia e letteratura
[14] 웹사이트 Three Books on Life http://www.wdl.org/e[...] 2014-03-01
[15] 논문 Marsilio Ficino
[16] 서적 Spiritual and Demonic Magic: From Ficino to Campanella https://books.google[...] Penn State Press 2000
[17] 서적 Three Books on Life The Renaissance Society of America
[18] 웹사이트 Biography and introduction to The Letters of Marsilio Ficino, Volume 1 http://easyweb.easyn[...] 2014-07-22
[19] 논문 Review: Marsilio Ficino. The Letters of Marsilio Ficino. http://www.jstor.org[...] 2006
[20] 서적 The Commentary of Marsilio Ficino to Plato's Republic Shepheard-Walwyn
[21] 서적 ルネサンスの思想家たち 岩波新書
[22] 서적 メディチ家 講談社現代新書 1999-03
[23] 서적 魔術から数学へ 講談社学術文庫 1991-11
[24] 서적 帳簿の世界史 文藝春秋 2015-04
[25] 서적 ルネサンス精神の深層 平凡社
[26] 서적 ルネサンスの思想家たち 岩波新書 1963-09
[27] 서적 ボッティチェリ《プリマヴェラ》の謎 ルネサンスの芸術と知のコスモス、そしてタロット 勁草書房
[28] 서적 新書西洋史④ ルネサンス 講談社現代新書 1973-06
[29] 서적 数量化革命 紀伊国屋書店 2003-11
[30] 서적 사랑에 관하여 나남
[31] 서적 불안 속에서 피어난 지성의 향연 여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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