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루아부르고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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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루아부르고뉴가는 프랑스 발루아가의 분가로, 1363년부터 1482년까지 부르고뉴 공국을 통치했다. 장 2세의 아들 필리프 2세가 부르고뉴 공작이 되면서 시작되었으며, 플랑드르, 아르투아, 르텔, 느베르 등을 상속받아 영토를 확장했다. 장 1세, 필리프 3세를 거쳐 용담공 샤를 1세가 마지막 공작이 되었으나 낭시 전투에서 사망하며 단절되었다. 샤를 1세의 딸 마리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면서 부르고뉴 공작령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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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루아부르고뉴가 - 선량공 필리프
필리프 3세는 부르고뉴 공작으로서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잔 다르크를 넘겼지만, 아라스 조약으로 동맹이 깨졌으며, 영토 확장과 예술 후원에 힘썼고, 황금 양모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 발루아부르고뉴가 - 장 1세 드 부르고뉴 공작
장 1세 드 부르고뉴 공작은 14세기 후반에 태어나 15세기 초반에 암살당한 부르고뉴 공작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되었고, 어머니로부터 여러 백국을 상속받았으며, 오를레앙 공작과의 권력 다툼과 암살, 그리고 아르마냐크파와의 내전, 도팽과의 회담 중 암살당한 사건으로 백년 전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발루아가 - 샤를 8세
샤를 8세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왕으로, 브르타뉴 여공작과의 결혼으로 브르타뉴를 프랑스에 통합하고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큰 성과 없이 사망하여 발루아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었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프랑스에 전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 발루아가 - 샤를 5세
샤를 5세는 백년 전쟁 시기 섭정으로 즉위하여 에티엔 마르셀의 반란과 자크리의 난을 진압하고 잃었던 영토를 회복했으며, 상비군과 관료층을 확립하여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초를 다졌다.
| 발루아부르고뉴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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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샤를 6세가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으면서, 필리프 용담공은 프랑스 왕국 전역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이는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플랑드르에서 자란 장 1세는 1404년 부친의 뒤를 이어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담피에르의 유산을 부르고뉴 공국과 통합했다. 필리프 2세와 앙투안에게 프랑스 영지인 뇌베르와 레텔을 양도하고, 잉글랜드 왕국과의 백년 전쟁으로 프랑스 영토가 황폐해지는 동안 자유로운 행동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능숙하게 정치적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발루아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와 다투었고, 1407년 그를 암살했다. 오를레앙 지지자들과의 지속적인 긴장으로 프랑스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이 발발했고, 용맹공 장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와 동맹을 맺어 1418년 파리를 점령했지만, 다음 해 아르마냑 지도자 탕기 뒤 샤텔에게 함정에 빠져 살해되었다.
1419년부터 부르고뉴 공작이 된 장의 아들 필리프 3세는 트로와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 도팽 샤를 7세에 대항하여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와의 동맹을 갱신했다. 그는 먼저 부르고뉴 영토를 확장하는 데 집중하여 1421년(1429년부터 효력 발생) 신성 로마 제국의 나뮈르 백국의 상속을 획득하고, 그의 사촌 생폴의 필리프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의 브라반트 공국과 림부르크 공국을 상속받았다. 그는 또한 그의 어머니 마르가레테 폰 비텔스바흐와 그의 삼촌 바이에른-슈타우빙 요한 3세의 바이에른-슈트라우빙 유산을 확보했고, 마침내 1433년 마지막 슈타우빙 상속녀 자클린이 그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에노 백국, 젤란트 백국, 홀란트 백국, 그리고 프리지아의 자유를 양도했다. 1435년 아라스 회의에서 필리프 공작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통치를 인정했고, 그 대가로 부르고뉴 영토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공식적인 독립을 얻었다. 1441년 그는 또한 마지막 여공작 괴를리츠의 엘리자베트로부터 룩셈부르크 공국을 매입했다.
이상적인 기사도적인 공작의 모습을 지녔던 발루아부르고뉴 공작 샤를 1세은 스스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헬러 공작령을 획득하면서,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는 최대 영토에 도달했다. 샤를의 왕조 부흥 계획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에게서 "부르고뉴 국왕"이라는 인정 협상과 그의 딸 부르고뉴의 마리를 프리드리히의 아들 대공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을 통해 그의 왕조의 부흥을 완수하는 것이였다. 황제의 거부에 격분한 샤를 1세은 1474년에 실패한 노이스 공성전을 벌였고 로렌 공국, 스위스 연방을 상대로 부르고뉴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공작은 1477년에 샤를 1세가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남성후계가 단절되고 말았다.[2]
2. 1. 부르고뉴 공국의 기원과 초기 발전
옛 프랑크족의 부르고뉴 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로 분할되었다. 동부 지역은 아를 왕국과 부르고뉴 자치국으로 발전하여 1032년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지만, 서부의 부르고뉴 공국은 918년 리샤르 정의공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002년 프랑스 왕 카페 왕조의 봉토가 되었다. 부르고뉴 귀족들의 자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로베르 2세는 1016년경 둘째 아들 앙리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임명했고, 이 칭호는 앙리가 1031년 부친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이 된 후 그의 동생 로베르 1세와 그의 후손들에게 이어졌다.부르고뉴의 카페 왕가는 1361년 필리프 1세가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 드 담피에르와 결혼하기 전에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 이후 부르고뉴 공국은 발루아 왕 장 2세 치하에서 프랑스 왕령지와 통합되었다. 그러나 곧 장의 넷째 아들 필리프 용담공은 아버지로부터 분봉으로 부르고뉴 공국을 받았다.[3]

필리프 용담공은 1369년 마르그리트 드 담피에르와 결혼했고, 1384년 장인이자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사망하자 플랑드르 백국, 아르투아 백국, 레텔, 뇌베르뿐만 아니라 부르고뉴 백국까지 상속받아 신성 로마 황제의 직접적인 봉신이 되었다. 다음 해 그는 아들이자 후계자인 용맹공 장과 마르가레테 폰 비텔스바흐(알베르트 1세의 딸이자 빌헬름 2세의 여동생)와의 결혼을 주선했고, 빌헬름 2세는 필리프의 딸 마르가레테와 결혼했다. 1380년 샤를 5세가 사망하자, 필리프는 앙주 공작 루이 1세, 베리 공작 장과 함께 미성년자였던 아들 샤를 6세를 대신하여 섭정을 수행했다.
2. 2.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등장과 영토 확장
- -|]]|thumb|left|필리프 용담공과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 결혼, ''프랑스 연대기'', 14세기 후반]]
1361년, 카페 왕조 출신 부르고뉴 가문의 마지막 남계 후손 필리프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공령은 프랑스 왕령에 병합되었다. 1363년,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막내아들 필리프 (용담공)에게 부르고뉴 지역을 하사했다.
다음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와의 대립을 배경으로 필리프 용담공과 부르고뉴 여백작이자 플랑드르 여백작마르그리트 3세를 결혼시켰다.
이로써 프랑스 북동부에서 독일 북서부에 이르는 거대한 세력이 탄생했다. 이후 필리프 용담공과 장 1세 (무공)는 부르고뉴파의 영수로 프랑스 왕국 내에서 오를레앙파, 뒤에는 아르마냑파와 격렬하게 대립했으며 잉글랜드에도 접근했다. 3대 필리프 3세 (선량공) 역시 잉글랜드에 친화적인 자세를 유지했지만 1435년 아라스 조약을 통해 아르마냑파와 화해했다. 그 결과 백년 전쟁은 프랑스 측의 승리로 끝났다.
필리프 선량공은 생전에 플랑드르의 각 도시에 거점을 두었고, 그곳은 문화적으로도 성숙했다. 그러나 다음 대 샤를 (용담공)은 세력 확대를 꾀하며 왕국으로의 승격을 노리고 부르고뉴 전쟁을 일으킨 끝에 1477년 초에 전사했다.
2. 3. 백년전쟁 시기의 부르고뉴 공국
1361년, 카페 왕조 출신 부르고뉴 가문의 마지막 남계 후손 필리프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공령은 프랑스 왕령에 병합되었다. 1363년,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막내아들 필리프 (용담공)에게 부르고뉴 지역을 하사했다.[3]다음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과의 대립을 배경으로 필리프 용담공과 부르고뉴 여백작이자 플랑드르 여백작마르그리트 3세를 결혼시켰다.
이로써 프랑스 북동부에서 독일 북서부에 이르는 거대한 세력이 탄생했다. 이후 필리프 용담공과 장 1세 (무공)는 부르고뉴파의 영수로 프랑스 왕국 내에서 오를레앙파, 뒤에는 아르마냑파와 격렬하게 대립했으며 잉글랜드에도 접근했다. 3대 필리프 3세 (선량공) 역시 잉글랜드에 친화적인 자세를 유지했지만 1435년 아라스 조약을 통해 아르마냑파와 화해했다. 그 결과 백년 전쟁은 프랑스 측의 승리로 끝났다.
필리프 선량공은 생전에 플랑드르의 각 도시에 거점을 두었고, 그곳은 문화적으로도 성숙했다. 그러나 다음 대 샤를 (용담공)은 세력 확대를 꾀하며 왕국으로의 승격을 노리고 부르고뉴 전쟁을 일으킨 끝에 1477년 초에 전사했다.[4] 유일한 상속녀 마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했지만,[5] 1482년에 사고로 사망하면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단절되었다. 그 유령의 대부분은 사위가 된 합스부르크 가문에 상속되어, 동 가문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2. 4. 부르고뉴 공국의 번영과 몰락
1361년, 카페 왕조 출신 부르고뉴 가문의 마지막 남계 후손 필리프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공령은 프랑스 왕령에 병합되었다. 1363년,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막내아들 필리프 (용담공)에게 부르고뉴 지역을 분봉으로 하사했다.다음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과의 대립을 배경으로 필리프 용담공과 부르고뉴 여백작이자 플랑드르 여백작마르그리트 3세를 결혼시켰다.
이 결혼으로 프랑스 북동부에서 독일 북서부에 이르는 거대한 세력이 탄생했다. 이후 필리프 용담공과 장 1세 (무공)는 부르고뉴파의 영수로 프랑스 왕국 내에서 오를레앙파, 뒤에는 아르마냑파와 격렬하게 대립했으며 잉글랜드에도 접근했다. 3대 필리프 3세 (선량공) 역시 잉글랜드에 친화적인 자세를 유지했지만 1435년 아라스 조약을 통해 아르마냑파와 화해했다. 그 결과 백년 전쟁은 프랑스 측의 승리로 끝났다.
필리프 선량공은 생전에 플랑드르의 각 도시에 거점을 두었고, 그곳은 문화적으로도 성숙했다. 그러나 다음 대 샤를 (용담공)은 세력 확대를 꾀하며 왕국으로의 승격을 노리고 부르고뉴 전쟁을 일으킨 끝에 1477년 초에 전사했다.[2] 유일한 상속녀 마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했지만, 1482년에 사고로 사망하면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단절되었다. 그 유산의 대부분은 사위가 된 합스부르크 가문에 상속되어, 동 가문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2. 5.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의 계승
1361년, 카페 왕조 출신 부르고뉴 가문의 마지막 남계 후손 필리프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공령은 프랑스 왕령에 병합되었다. 1363년,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막내아들 필리프 (용담공)에게 부르고뉴 지역을 하사했다.다음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와의 대립을 배경으로 필리프 용담공과 부르고뉴 여백작이자 플랑드르 여백작마르그리트 3세를 결혼시켰다.
이로써 프랑스 북동부에서 독일 북서부에 이르는 거대한 세력이 탄생했다. 이후 필리프 용담공과 장 1세 (무공)는 부르고뉴파의 영수로 프랑스 왕국 내에서 오를레앙파, 뒤에는 아르마냑파와 격렬하게 대립했으며 잉글랜드에도 접근했다. 3대 필리프 3세 (선량공) 역시 잉글랜드에 친화적인 자세를 유지했지만 1435년 아라스 조약을 통해 아르마냑파와 화해했다. 그 결과 백년 전쟁은 프랑스 측의 승리로 끝났다.
필리프 선량공은 생전에 플랑드르의 각 도시에 거점을 두었고, 그곳은 문화적으로도 성숙했다. 그러나 다음 대 샤를 (용담공)은 세력 확대를 꾀하며 왕국으로의 승격을 노리고 부르고뉴 전쟁을 일으킨 끝에 1477년 초에 전사했다. 유일한 상속녀 마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했지만, 1482년에 사고로 사망하면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단절되었다. 그 유산의 대부분은 사위가 된 합스부르크 가문에 상속되어, 동 가문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2]
부르고뉴의 유산은 결국 합스부르크 대공 막시밀리안에게 넘어갔고, 그는 아버지의 죽음 7개월 후 부르고뉴의 마리와 결혼했고, 1479년 귀네가트 전투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제기한 주장을 막을 수 있었다. 프랑스 왕은 부르고뉴 공국 본토, 아르투아, 그리고 과거 부르고뉴의 피카르디 봉토만을 점령할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수세기 동안의 프랑스-합스부르크 경쟁의 대가로 유럽 규모의 왕가로 급부상했다.
3. 부르고뉴 공작 (1363–1482)
카페 가문의 부르고뉴 분가는 플랑드르의 루이 2세의 후계자인 마가레타와 결혼한 필리프 1세가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 부르고뉴 공국은 발루아 가의 장 2세가 통치하던 프랑스 왕가 소유지로 합해졌다. 하지만 곧 장의 네 번째 아들 용담공 필리프 2세가 그의 아버지에게서 대봉토로서 부르고뉴 공국을 받았다.[3] 이후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출신 공작들의 계보와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조하라.
3. 1.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카페 가의 부르고뉴 분가는 플랑드르의 루이 2세의 후계자인 담피에르가의 마가레타와 결혼한 필리프 1세가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 부르고뉴 공국은 발루아 가의 장 2세가 통치하던 프랑스 왕가 소유지로 합해졌다. 하지만 곧 장의 네 번째 아들 용담공 필리프 2세가 그의 아버지에게서 대봉토로서 부르고뉴 공국을 받았다.[3]
1369년, 전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의 미망인 담피에르 가문의 마가레타와 결혼하였고, 1384년에 그의 장인인 플랑드르의 루이 2세가 사망하자, 플랑드르, 아르투아, 르틀, 느베르를 상속받았다. 부르고뉴 자치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직속 속국이 되었다. 다음 해, 그는 그의 아들 용맹공 장을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딸 마르그리트와 혼인한 바이에른 공작 빌헴름 2세의 자매 사이에서 태어난 비텔스바흐가의 마르가레테와 혼인시켰다. 1380년에 샤를 5세가 이미 사망하면서, 필리프와 함께 앙주 공작 루이 1세, 베리 공작 장은 미성숙한 샤를 6세의 섭정을 맡았다.
샤를 6세가 심각해지던 정신 착란으로 고통받을 때,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의 루이 1세의 강한 반발과 마주치며 프랑스 왕국 너머로 자신의 영향력을 퍼트렸다. 플랑드르에서 자란 용맹공 장은 1404년 그의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부르고뉴 공국과 그의 어머니 당피에르가의 마르그리트가 지녔던 유산을 하나로 합쳤다. 느베르와 르틀의 프랑스 백작령지를 그의 동생들인 필리프 2세, 앙트완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는 프랑스 영토가 잉글랜드 왕국과의 백년전쟁으로 파괴당하는 동안 능숙하게 시소타듯이 정치 기회를 엿보았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는 발루아 가의 친척인 오를레앙의 루이 1세와 다투었고, 그를 1407년에 암살시켰다. 오를레앙과의 남은 긴장 상태는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으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장 공작은 헨리 5세와 동맹을 맺고 1418년 파리를 점령했다. 하지만 다음 해에 아르마냐크파 지도자인 탄귀 뒤 카스텔에게 매복당하여 살해당한다.
장 1세의 아들인 선량공 필리프 3세는 1419년에 부르고뉴 공작에 올랐고, 프랑스 도팽 샤를 7세와 대항해서, 1420년에 트루아 조약을 맺으며, 그의 아버지와 동맹이었던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동맹을 재개하였다. 그는 부르고뉴 공국의 1421년(1429년부터 유효)에 제국령인 나무르 백국 계승으로 인한 획득, 제국의 공국인 랭부르, 브라반트를 그의 친척인 필리프 1세에게서 상속받으면서 영토 확장에 집중하였다.
그는 또한 1433년 슈트라우빙의 마지막 후손인 자클린이 신성 로마 제국령인 에노 백국, 제일란트 백국, 홀란트 백국 거기에 프리지아 자유국을 그에게 넘기면서 그의 어머니 비텔스바흐가의 마르가레테와 그의 작은 아버지인 바이에른 공작 요한 3세의 유산인 바이에른-슈트라우빙을 확보하였다.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선량공 필리프는 샤를 7세의 프랑스 통치를 인정하였고 결국 프랑스 왕가에게서 부르고뉴 영토의 공식적인 독립에 도달하였다. 1441년 그는 또한 마지막 여공인 괴를리츠의 엘리사베트에게서 룩셈부르크 공국을 얻어냈다.
이상적인 기사도적인 공작의 모습을 지녔던 발루아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 1세은 스스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헬러의 획득으로, 부르고뉴령 네덜란드가 만들어졌다. 샤를의 계획은 합스부르크가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에게서 "부르고뉴 국왕"이라는 인정 협상과 그의 딸 마리를 프리드리히의 아들 대공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을 통해 그의 왕조의 부흥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황제의 거부에 격분한 샤를 1세은 1474년에 실패한 노이스 공성전을 벌였고 로렌 공국, 스위스 연방을 상대로 부르고뉴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공작은 1477년에 샤를 1세가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남성 후계가 단절되고 말았다.[4]
부르고뉴 공국의 유산은 아버지가 죽은 지 7달 후, 부르고뉴의 마리와 결혼한 합스부르크 대공 막시밀리안에게 넘어갔다.[5] 막시밀리안은 1479년 긴가트 전투에 승리하며 루이 11세의 요구로부터 부르고뉴 유산을 지키는 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아르투아에 있는 부르고뉴 공국 재산, 피카르디에 있는 옛 부르고뉴 공국의 영지만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는 갑작스럽게 유럽 제일의 왕실 가문으로서 성장했지만, 프랑스와 여러 세기를 걸쳐 경쟁하게 되었다.
| 부르고뉴 공작 | |||
|---|---|---|---|
|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 |||
| 그림 |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 필리프 2세 (용담공) | 1363–1404 | 프랑스 국왕 장 2세와 그의 아내 룩셈부르크의 보네의 넷째 아들. 1369년 플랑드르의 마르가레트 3세 여백작과 결혼했다. |
![]() | 장 1세 (무공) | 1404–1419 | 필리프 2세 (용담공)의 장남. 어머니의 상속 재산과 부르고뉴를 통합했다. 1385년 바이에른의 마르가레테와 결혼했다. |
![]() | 필리프 3세 (선량공) | 1419–1467 | 장 1세 (무공)의 장남. 부르고뉴 네덜란드의 대부분을 획득했다. |
![]() | 샤를 1세 (용담공) | 1467–1477 | 필리프 3세 (선량공)과 그의 세 번째 아내인 포르투갈의 이사벨라의 유일한 적자 상속자. 부르고뉴의 마지막 발루아 공작으로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
![]() | 마리 | 1477–1482 | 샤를 1세 (용담공)과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부르봉의 이사벨라의 외동딸로, 1477년 합스부르크의 대공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했다. |
4.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이 획득한 주요 영지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양쪽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주요 영지는 다음과 같다.
| 영지 | 획득 시기 및 방법 |
|---|---|
| 부르고뉴 공국 | 1363년 프랑스의 장 2세가 아들 용담공 필리프에게 수여 |
| 플랑드르, 아르투아, 르틀, 느베르 | 1384년 용담공 필리프가 마가레타와의 결혼 및 장인 플랑드르의 루이 2세 사망으로 상속 |
| 부르고뉴 자유국 | 신성 로마 제국의 직속 속국 |
| 나무르 백국 | 1421년 선량공 필리프 3세가 계승 (1429년부터 유효) |
| 브라반트, 랭부르 | 선량공 필리프 3세가 친척 필리프 1세에게서 상속 |
| 에노 백국, 제일란트 백국, 홀란트 백국, 프리지아 자유국 | 1433년 선량공 필리프 3세가 자클린에게서 양도 |
| 룩셈부르크 공국 | 1441년 선량공 필리프 3세가 괴를리츠의 엘리사베트에게서 획득 |
1477년 용담공 샤를 1세가 낭시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남계는 단절되었고, 부르고뉴 공국의 유산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갔다.[4][5]
참조
[1]
서적
es ducs de Nevers et l'État royal: genèse d'un compromis (ca 1550 - ca 1600)
Librairie Droz S.A.
2006
[2]
문서
Although, the Burgundian state passed to Mary of Burgundy|Mary the Rich, the last male representative of the House of Valois-Burgundy was actually a grandson of Philip the Bold, John II, Count of Nevers (20 October 1415 '''–''' 25 September 1491), and the last legitimate male-line descendant of the house was his second daughter, Charlotte, Countess of Rethel (c. 1472 – 23 August 1500), wife of Jean d'Albret, Sire of Orval, and mother of Marie d'Albret, Countess of Rethel (see Boltanski 2006).
[3]
서적
프랑스사
기린원
1998-11-10
[4]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5]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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