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찰스 스탠리 마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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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벤저민 찰스 스탠리 마틴은 영국 해군 장교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07년 해군에 입대하여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했으며, 비스마르크 격침 작전에 참여하여 수훈 훈장을 받았다. 1944년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한국을 방문하여 '이영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1947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195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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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찰스 스탠리 마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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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벤저민 찰스 스탠리 마틴 |
원래 이름 | 리영덕, Stanley Keessumm, Benjamin Charles Stanley Martin |
출생일 | 1891년 7월 18일 |
사망일 | 1957년 6월 3일 |
사망지 | 영국 자치직할식민지 남아프리카 나탈 주 피터마리츠버그 |
출생지 | 잉글랜드 아일 오브 와이트 주 뉴포트 |
거주지 | 잉글랜드 햄프셔 주 윈체스터, 잉글랜드 런던, 캐나다 뉴 펀들랜드 주 세인트 존스 |
종교 | 잉글랜드 성공회 → 개신교(장로회) |
경력 | |
직책 | 지브롤터 총독 예하 행정공보비서관 |
임기 | 1946년 2월 15일 ~ 1947년 2월 2일 |
군주 | 조지 6세 (영국 군주) |
총리 |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 |
수상 | 프란시스코 프랑코 (에스파냐 총통 겸 총리) |
총독 | 랠프 이스트우드 (지브롤터 총독) |
군사 복무 | |
소속 | 영국 해군 |
계급 | 예비역 영국 해군 대령, Vice Admiral |
복무 기간 | 1907년 3월 16일 ~ 1944년 2월 29일 |
지휘 | 전대장,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학력 | |
학력 | 미국 미주리 종합군사학원(1923년) |
훈장 | |
서훈 | KBE(대영 제국 훈장), DSO |
기타 | |
정당 | 무소속 |
친인척 | 이복 종조부 스탠리 해리스 마틴(Stanley Harris Martin) |
웹사이트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1,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2 |
2. 생애
벤저민 찰스 스탠리 마틴은 1891년 7월 18일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인 일등병조는 1893년 HMS 빅토리아 침몰 사고로 사망했다.[2] 그는 그리니치에 있는 왕립 해군 병원 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일등 해군 소년으로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 경력을 시작했다. 1915년 준위로 진급하고[3] 이듬해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하는 등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복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경력을 이어가 1919년 해군 중위로 진급했으며,[5] 여러 순양함과 구축함에서 어뢰 장교 및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31년 해군 중령,[6] 1935년 해군 대령으로 진급하며[7] 지중해와 차이나 기지 등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순양함 HMS 도싯셔의 지휘를 맡았다. 1941년 5월, 비스마르크 격침 작전에 참여하여 어뢰 공격으로 격침에 기여했고, 이 공로로 수훈 훈장을 받았다. 이후 1942년 더반 기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1944년 신년 서훈에서는 대영 제국 훈장(CBE)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7일 영국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는데,[8] 이는 하급 수병 출신으로는 87년 만에 처음으로 현역 제독 계급에 오른 이례적인 진급이었다. 전쟁 막바지인 1945년에는 동부 함대 소속으로 상륙 부대를 지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국 해군에서 퇴역했으며, 그의 군 복무 공로를 인정받아 1946년 기사 작위(KBE)를 받았다. 1948년 9월 2일에는 퇴역 명단에서 중장으로 진급했다.[9]
2. 1. 어린 시절과 해군 입대
1891년 7월 18일, 영국 잉글랜드 아일오브와이트 뉴포트에서 벤자민 S. 마틴과 앨리스(결혼 전 성 가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일등병조는 1893년 6월 22일 HMS 빅토리아의 사고 침몰로 사망했다.[2] 그는 그리니치에 있는 왕립 해군 병원 학교에 다녔으며, 1907년에 일등 해군 소년으로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 1915년 5월 28일 포술장(어뢰)으로 준위 계급으로 진급했으며,[3] 이듬해 휴 이반-토마스 후방 제독 휘하의 제5 전함 전대 소속 HMS 말라야에 탑승하여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했다. 1916년 10월 13일 부관으로 임관되었으며,[4] 잠시 구축함으로 전출되었다가 다시 HMS 말라야로 복귀했다. 1919년 5월 13일 해군 중위로 진급했다.[5]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5년 5월 28일 포술장(어뢰)으로 준위 계급으로 진급했다.[3] 이듬해 휴 이반-토마스 후방 제독 휘하의 제5 전함 전대 소속 HMS Malaya에 탑승하여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했다.1916년 10월 13일 부관으로 임관되었으며,[4] 잠시 구축함으로 전출되었다가 다시 HMS Malaya로 복귀했다. 1919년 5월 13일 해군 중위로 진급했다.[5]
2. 3. 전간기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1919년 5월 13일 해군 중위로 진급한 후,[5] 마틴은 순양함 HMS 리바이어던과 HMS 켄트에서 어뢰 장교로 복무했다. 1924년에는 포츠머스에 있는 영국 해군 어뢰 학교 HMS 버논에 배속된 HMS 세이블을 지휘하며 첫 함장 임무를 맡았다.이후 마틴은 구축함 HMS 베네치아와 HMS 보티건을 지휘했다. 1931년 6월 30일 해군 중령으로 진급했으며,[6] 지중해에서 제1 구축함 전대의 부대장(Flotilla leader)으로서 HMS 보이저를 지휘했다. 1935년 6월 30일 해군 대령으로 진급한 후,[7] 마틴은 차이나 기지에서 슬루프 HMS 포크스톤을 지휘했다. 2년 뒤인 1937년 대관식 해군 검열에서는 예비 함대의 HMS 브로크와 구축함 전대를 지휘했다. 영국 해군성에서 잠시 근무한 후, 마틴은 순양함 HMS 도싯셔의 지휘를 맡았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해군 중령으로 참전하였으며, 전쟁 중인 1941년 1월 31일에는 영국 해군 대령으로 진급하였다.1941년 5월, 시에라리온 해상 호송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손상된 비스마르크를 추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가 지휘하던 군함 ''도싯셔''는 비스마르크를 발견하고 어뢰 공격을 감행하여, 5월 27일 비스마르크 격침에 기여하였다. 이 공로로 수훈 훈장을 받았다.
1942년에는 남아프리카 연방의 더반 기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1944년 신년 서훈에서는 대영 제국 훈장(CBE)을 받았다. 1944년 7월 7일에는 영국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8] 이는 하급 수병 출신으로는 87년 만에 처음으로 현역 제독 계급에 오른 사례였다. 1945년에는 동부 함대 소속으로 HMS 불롤로에 승선하여 상륙 부대를 지휘하였다.
2. 5. 한국과의 인연
1948년 2월 29일부터 3월 16일까지 당시 미군정 하에 있던 서울특별자유시를 미군정청의 초청으로 방문하였다. 이때 '''이영덕'''(李英悳)이라는 한국어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존 리드 하지 장군을 비롯한 미군정청 간부급 주한미군과 서울에 머물던 영국 및 미국 외교관들과 교류하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그를 '''이닉슨'''(李Nixon), '''리 닉슨'''(Lee Nixon), 또는 '''스탠리 키섬'''(Stanley Keessumm)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2. 6. 은퇴와 말년
예편 후 지브롤터 총독 예하 비서관 직책을 잠시 지냈다. 1947년 2월 26일 기사(knight) 작위를 받았고, 1948년 1월 31일에는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1948년 2월 29일부터 3월 16일까지 당시 미군정 하에 있던 서울특별시를 방문했다. 이는 미군정청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다. 방한 당시 그는 '''이영덕'''(李英悳)이라는 한국어 이름을 사용했으며, 존 리드 하지 장군을 비롯한 미군정청의 고위급 인사들과 주한미군, 그리고 한국에 체류 중이던 영국 및 미국 외교관들은 그를 '''이닉슨'''(李Nixon), '''리 닉슨'''(Lee Nixon), 또는 '''스탠리 키섬'''(Stanley Keessumm)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한국 방문 후, 그는 캐나다 뉴펀들랜드 주의 세인트 존스를 거쳐 당시 영국 자치령이었던 남아프리카 나탈 주의 피터마리츠버그로 이주했다. 이후 1957년 별세할 때까지 피터마리츠버그에서 거주했다.
3. 수상 경력
참조
[1]
웹사이트
Benjamin Charles Stanley Martin DSO, RN
http://uboat.net/all[...]
uboat.net
2013-11-01
[2]
웹사이트
Memorials and Monuments in Portsmouth City Centre (HMS Victoria)
http://www.memorials[...]
2006-03-23
[3]
간행물
Navy List, October 1916, page 298
[4]
간행물
Navy List, January 1919, page 413
[5]
간행물
Navy List, July 1920, page 388a
[6]
간행물
Navy List, January 1933, page 85
[7]
간행물
Navy List, July 1947, page 128
[8]
간행물
Navy List, July 1947, page 128
[9]
간행물
Navy List, July 1949, page 153
[10]
간행물
London Gazette
1941-01-01
[11]
간행물
London Gazette
1942-10-14
[12]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06-07
[13]
문서
한국식 이름은 이금순(李錦純), 참고로 '이금순(李錦純)'이 중국어 독음으로는 '리진춘'이 된다.
[14]
문서
참고로 여담이지만 그의 이복 종조부(이복 작은할아버지, 친할아버지의 배다른 남동생.)인 스탠리 해리스 마틴(Stanley Harris Martin, 한국식 이름은 이금순(李錦純), 참고로 '이금순(李錦純)'이 중국어 독음으로는 '리진춘'이 된다. 생몰연대: 1870.07.23. 출생~1941.05.31. 하세)은 영국 햄프셔 주 윈체스터 출신 외과 전문의 겸 개신교 장로회 선교사인데 의사가 되고 나서 1906년 캐나다로 이주를 하였고 그 후 동양 국가로 의료 관련 선교 내방하였으며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룽징과 일제 강점기 조선국 함경북도 무산에서 의료 활동하였고 만저우 지린 룽징 제창병원 원장 봉직을 하는 등 사회사업가 활동하였는데 1919년 3월 13일 만저우 룽징 조선촌에서 거행된 삼일 대한 독립 만세 운동 시절 시위에 참가로 인하여 일군의 총에 부상을 입은 조선인들을 제창병원으로 이동시켜 진료하고 삼일 만세 시위에서 일군의 총격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을 위한 대규모 합동 장례식을 개최하여 1968년 3월 1일을 기하여 작은할아버지 스탠리 해리스 마틴(Stanley Harris Martin)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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