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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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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태후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태조대왕의 어머니이다. 부여 출신으로,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 재사의 부인이며, 태조대왕이 7세에 즉위하자 섭정했다. 부여태후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고구려로 망명한 부여인으로 추정된다. 대소왕의 종제였거나, 갈사왕의 손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고구려 왕족과 정략 결혼을 통해 외척으로서 권력을 얻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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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태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원래 이름부여태후
작위고구려의 태후
배우자재사
자녀태조대왕
출생일미상
사망일미상
설명
주요 내용태조대왕(혹은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한다)의 어머니
인용문태조대왕의 이름은 궁(宮)이다.
어렸을 때 이름은 어수(於漱)이며, 유리왕(琉璃王)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못나고 어리석어 나라를 맡기에 부족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궁을 환영하며 모본왕에 이어 왕으로 세웠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으며, 어리지만 남들보다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때의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하였다.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고구려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53년) 계사에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7세여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해동고기)

2. 생애

삼국사기에 따르면, 부여태후는 부여 출신으로, 고구려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 재사의 부인이었다. 재사가 늙어 그의 아들인 태조대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당시 태조대왕의 나이가 7세였으므로 부여태후가 섭정하였다.[3][4]

2. 1. 출신 배경

부여태후의 이름은 기록에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 '부여인(扶餘人)'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부여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4] 일각에서는 부여태후가 부여 왕족 출신이라는 설도 제기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4]

부여태후는 기원후 22년 대무신왕의 동부여 공격으로 대소왕이 살해된 후 고구려로 망명한 부여인일 가능성이 제기된다.[4] 대소왕의 종제는 1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항복하여 락씨 성을 받았는데, 부여태후가 이 락씨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4]

또한, 대소왕의 막내 동생이 압록곡으로 탈출하여 건국한 갈사국의 왕족일 가능성도 있다.[4] 기원후 68년 갈사왕의 손자인 도두왕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는데, 부여태후가 갈사왕의 또 다른 손녀일 수 있다는 것이다.[4]

어느 쪽이든, 부여태후는 고구려로 망명한 부여인이며, 고구려 왕족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하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4]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인 대무신왕의 차비가 부여인인 갈사왕의 손녀이며, 유리명왕의 다섯째 아들로 보이는 재사의 아내 또한 부여인인 것을 볼 때, 고구려로 망명한 갈사국이나 락씨의 부여인이 고구려 왕족에게 딸들을 바쳤다고 보인다.[4]

3. 섭정

[3]

모본왕이 죽은 후 태자가 불초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되자, 국인(國人)들이 태조대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3] 태조대왕은 즉위 당시 7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부여태후가 태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3]

4. 가계

참조

[1] 서적 The North and South Korean political systems : a comparative analysis https://www.worldcat[...] Hollym 1999
[2] 웹사이트 고구려의 여성 혁명가 부여태후 http://monthly.chosu[...] 2022-07-14
[3] 서적 『魏志』東夷伝訳註初稿(1)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09-03-31
[4] 뉴스 고구려의 여성 혁명가 부여태후 http://monthly.chosu[...] 2019-12
[5] 문서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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