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약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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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약광은 7세기 고구려 멸망 후 일본에 정착한 인물로, 일본 역사서에 '현무약광' 또는 '고려약광'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703년 몬무 천황으로부터 '고마노 고니키시'라는 성을 하사받았으며, 716년 무사시국에 고구려인 1799명과 함께 이주하여 고마군을 설치하고 대령으로 임명되어 민생 안정에 힘썼다. 사후에는 '고려명신'으로 추앙받아 고마신사에 모셔졌으며, 그의 후손들은 고마씨를 형성하여 대대로 고마신사를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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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약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씨명 | 고씨 왕 |
| 시대 | 나라 시대 |
| 출생 | 미상 |
| 사망 | 미상 |
| 묘소 | 사이타마현히다카시 신호리에 있는 쇼텐인 승락사 |
| 관위 | 종5위하 |
| 씨족 | 고려 왕 |
| 부모 | 보장왕? |
| 배우자 | 미상 |
| 자녀 | 가중, 성운 |
| 기타 정보 | |
| 이름 | 고약광 |
| 원어 이름 | 高若光 |
| 휘 | 약광(若光) |
| 출생일 | 미상 |
| 출생지 | 미상 |
| 사망일 | 미상 |
| 사망지 | 미상 |
| 성별 | 남성 |
| 국적 | 고구려→일본 |
| 왕조 | 고씨 |
| 가문 | 고씨 |
| 아버지 | 보장왕 |
2. 생애
고약광은 보장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그에게 한반도 왕족의 자손을 뜻하는 고니키시(건길지)의 가바네를 내렸다.[3]
일본에 흩어져 살던 1,799명의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고마군을 형성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해당 지역에서 그에 대한 인식이 대단하였음을 보여주며, 이는 그가 고구려 왕족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일본서기 덴지 천황 5년(666년)에 고구려가 왜국에 파견한 사신단의 부사 자격으로 도왜하였으며,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정착했다. 703년 몬무 천황은 종5위하 관위의 고약광에게 '고마노 고니키시(高麗王)'라는 가바네를 내렸다.[3] 이후 자세한 내용은 "도일과 정착"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
霊亀|료키일본어 2년(716년) 일본 조정은 무사시국에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하고 도카이도 7개국에서 고구려 유민 1,799명을 이주시켰으며, 고약광은 고마군의 대령(大領)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자세한 내용은 "고마군(高麗郡) 설치와 통치"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6]
만년의 고약광은 흰 머리카락과 흰 수염을 길러 '시라히게(白髭)'라는 경칭으로 불렸으며, 고마군 사람들은 그를 '고려명신(高麗明神)'으로 숭앙하였다. 사후 고마 신사(고구려 신사)에 시라히게 명신(白髭明神)으로서 모셔져 오늘날까지 제사를 받고 있다.[7] 자세한 내용은 "만년과 사후"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
사가미국 오이소(지금의 가나가와현 오이소정)에 살았으며, 오이소 사람들은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고마데라(高麗寺)를 짓고 약광의 영혼을 모셨다고 한다. 고라이(高来) 신사는 메이지 시대의 신불분리령에 따라 신도로 편입됐고, 현재는 약광 대신 일본 황실의 조상신을 모시고 있다.
2. 1. 도일과 정착
고약광의 이름은 일본서기 덴지 천황 5년(666년)에 고구려가 왜국에 파견한 사신단의 부사 '현무약광(玄武若光)'으로 처음 등장한다.[7]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정착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703년 몬무 천황은 종5위하 관위의 고약광에게 '고마노 고니키시(高麗王)'라는 가바네를 내렸는데, 이는 한반도 왕족의 후손에게 주어지는 칭호였다.[3]2. 2. 고마군(高麗郡) 설치와 통치
霊亀|료키일본어 2년(716년) 일본 조정은 무사시국에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하고 도카이도 7개국에서 고구려 유민 1,799명을 이주시켰다.[6] 일본서기에는 이주한 유민의 숫자가 1,799명에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약광은 고마군의 군수(郡司)격인 대령(大領)으로 임명되어 유민들을 이끌고 황무지를 개척하며 민생 안정에 힘썼다.[7]2. 3. 만년과 사후
만년의 고약광은 흰 머리카락과 흰 수염을 길러 고마군 사람들로부터 '시라히게(白髭)'라는 경칭으로 불리며 존경받았다.[7] 그는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지만, 고마군 사람들은 그를 '고려명신(高麗明神)'으로 숭앙하였다.[7] 고마 신사(고구려 신사)가 세워진 뒤에는 시라히게 명신(白髭明神)으로서 신사에 모셔져 오늘날까지 제사를 받고 있다.[7]3. 유산
고약광은 외국의 왕족 후손에게 주어지는 성(가바네)인 왕(고니키시) 작위를 받았으며, 고구려 왕족이다.[3] '겐부 쟈코'라는 별명은 '검은색·북쪽'을 의미하여 북부 출신임을 나타낸다.[4]
일본서기 덴지 천황 5년(666년) 10월 26일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 중 '''현무약광'''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속일본기 다이호 3년(703년) 4월 4일 기록에는 종5위하 고려약광에게 왕(코니키시)의 카바네를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일본서기』의 '''현무약광'''과 『속일본기』의 '''고려약광'''이 동일 인물인지는 불확실하다.[5] '''고려약광'''은 사절이 아니라 고구려 왕의 아들로 귀화하여 왕(코니키시) 작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레이키 2년(716년), 무사시국에 도카이도 7개국에서 이주한 1799명의 고구려인들과 함께 고마군이 설치되었는데,[6] 약광도 이때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5] 사이타마현히다카시 신보리에 있는 쇼텐인 쇼라쿠지는 고마 씨의 보리사이며, 약광의 묘와 동상이 있다.
3. 1. 고마신사(高麗神社)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불분리령에 따라 고약광이 고구려 승려 승락(勝樂)이 세운 승락사(勝楽寺)에서 성천원과 고려신사로 분리되었다.[8] 고려신사는 고약광을 주신으로 모시는 신사로,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위치해 있다.고약광을 모신 사당에 기원하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참배한다.[9] 특히 '출세신사'로 널리 알려져 정·재계 인사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3. 2. 성천원(聖天院)
聖天院|쇼텐인일본어은 고약광과 함께 일본에 온 고구려 승려 승락(勝樂)이 세운 사찰로, 고마신사의 전신인 승락사(勝楽寺)였다.[8] 약광의 3남 성운(聖雲)이 주지를 맡았으며, 고마 씨의 보리사(菩提寺) 역할을 했다. 聖天院|쇼텐인일본어 뇌문 앞 오른쪽에는 약광의 묘로 여겨지는 고마왕묘가 있으며, 聖天院|쇼텐인일본어 본당 왼쪽에는 약광의 동상이 있다.3. 3. 가계와 후손
고마 가문은 장남 고가중(家重)이 이어받아 나라 시대의 유력 호족이 되었다. 3남 고성운(聖雲)은 승려가 되어 성천원의 주지를 역임했고, 그의 후손들은 천태종 계열 승려가 되었다.[3][4] 메이지 유신 시기, 신불분리령에 따라 고마 가문의 후손 고문강(高文康)은 승려직을 포기하고 신관이 되어 현재까지 60대째 고마신사를 지키고 있다.4. 논란
일본서기 덴지 천황 5년(666년) 10월 26일 조에, 고구려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절의 일원 중에 '''현무약광'''이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기술이 있다.
이어서 속일본기 다이호 3년(703년) 4월 4일 조에, 종5위하 고려약광에게 왕(코니키시)의 카바네를 주었다는 기술이 있다. 일본서기의 '''현무약광'''과 속일본기의 '''고려약광'''이 동일 인물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5]. '''고려약광'''은 사절이 아니라 고구려 왕의 아들로 귀화했을 때 왕(코니키시)의 사여를 받았다.
참조
[1]
서적
新編武蔵風土記稿
748
[2]
서적
삼국사기
[3]
문서
백제왕
[4]
서적
고대 일본과 도래계 이민 - 백제군과 고려고군의 성립 -
고시서원
2021
[5]
서적
신설 埼玉県史
[6]
간행물
속일본기
0716-06-10
[7]
문서
니혼쇼키
[8]
뉴스
고구려, 천년 잠에서 깨어난다
http://www.geojenews[...]
[9]
웹인용
고구려 神에게 소원빌고 출세한 일본 정·재계 인사들, 동아일보 매거진
https://web.archive.[...]
2008-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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