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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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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대왕은 고구려의 제6대 국왕으로, 태조대왕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태조왕 치세 후반부터 군사적, 정치적으로 활약했으며, 146년 태조대왕의 선위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측근을 중용했으나, 폭정을 일삼아 165년 신하 명림답부에게 시해당했다. 차대왕 사후에는 차대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삼국유사》에는 그가 신대왕에게 살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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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구려 군주 (6-11)
고구려 군주 (6-11)
고수성(高遂成)
고(高)
존호차대태왕(次大王)
생애
출생121년
사망165년 (94세)
능묘마선구 2378호 (추정)
가족 관계
부친고재사(高再思)
자녀고추안(高鄒安)
재위 정보
즉위146년
퇴위165년
전임태조대왕
후임신대왕
기타 정보
왕호차대왕(次大王)
시호차대(次大)
로마자 표기Chadae-wang
한자 표기次大王
한국어 표기차대왕

2. 즉위 이전

차대왕은 태조왕의 동생으로, 태조왕 치세 후반부터 장군으로 활약하며 정치에도 참여하였다. 121년 후한이 침입했을 때, 수성(차대왕)은 거짓 항복으로 적을 속이고 험한 곳을 차지하여 막았으며,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 해부터 태조왕을 대신하여 국정과 군사를 통괄하였다.

132년, 양신 등 측근들에게 왕위 찬탈을 권유받은 수성은 차기 왕위를 노리는 언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146년에는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아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실행 전 태조대왕이 먼저 왕위를 물려주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차대왕은 용감했지만 잔혹했다고 전해진다.[1]

태조대왕 69년(121년) 후한유주자사 풍환, 현도군 태수 요광, 요동군 태수 채풍 등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왕명에 따라 병사 2천 명을 이끌고 이들을 막고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포로 2천 명을 얻는 공을 세웠다. 132년 7월경부터 수성은 측근들과 함께 왕위를 노렸고, 146년 7월에는 태조대왕을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우보 고복장 등이 수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태조대왕에게 알렸으나, 태조대왕은 수성의 공로와 다툼을 피하려는 이유로 146년 12월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에 수성은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1][2]

즉위 후에는 측근들을 고위직에 임명하고, 자신을 해치려 했던 우보 고복장과 태조대왕의 적자 막근(莫勤, 모곤)을 죽였다. 막근의 동생 막덕(莫德, 모독)은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1. 출자 및 가계에 대한 논란

차대왕은 태조왕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한 논란이 있다. 중국의 《후한서》와 《위서》에는 차대왕이 태조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7]삼국사기》에는 태조왕의 아버지 재사유리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재사의 조카 모본왕53년에 사망했고, 유리왕은 18년에 사망했으므로 재사의 나이는 많아야 35세이다. 그런데 재사는 연로함을 이유로 왕위를 사양했으므로 35세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또한 재사의 다른 아들들로 기록된 차대왕과 신대왕의 출생 연도는 각각 71년88년으로, 신대왕 출생 시 재사의 나이는 최소 70세를 넘는다. 이러한 이유로 신채호는 태조왕이 유리왕의 손자가 아니라 대무신왕의 손자이며, 재사는 대무신왕의 아들이라 주장하였다.[6]

《후한서》에는 차대왕이 태조왕의 아들, 신대왕은 차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는 차대왕이 없고, 신대왕이 태조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7]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후한서》를 인용하여, 안제 건광 원년(121)에 궁(태조왕)이 죽고 그의 아들 수성(차대왕)이 즉위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태조왕 가계의 의문점은 《삼국지》의 "고구려의 왕실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었다."라는 기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태조왕 이전 왕들의 이름이나 시호에 부여의 왕성인 해(解)씨가 나타나는 것을 토대로, 태조왕 이전은 해씨 소노부, 태조왕 이후는 고씨 계루부가 왕위를 이었다는 주장이 있다.[8]

3. 치세

146년 12월, 태조대왕은 수성(차대왕)의 공로와 다툼을 피하려는 이유로 왕위를 물려주었다. 차대왕은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3] 즉위 후, 자신의 왕위 계승을 반대한 우보(右輔) 고복장을 처형하고, 좌보 목도루(穆度婁)는 은퇴시켰으며, 국가 주요 요직에 자신의 측근들을 임명하였다.[3]

여러 자연 재해가 발생하고 사회가 불안해지자, 차대왕은 신하 명림답부에게 살해당했다.[4]

3. 1. 최후

148년, 차대왕은 태조왕의 맏아들 고막근(高莫勤)을 죽였고, 둘째 아들 고막덕(高莫德)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

165년, 계속되는 폭정에 백성이 견디지 못함을 명분으로 연나부(椽那部) 조의(皂衣)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었다.[4] 次大王중국어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매장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힘썼다. 재위 3년에는 태조왕의 두 아들을 죽이고, 자신의 동생인 백고(훗날 신대왕)를 박해했다.[3]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165년에 태조대왕과 차대왕이 모두 신대왕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형 혹은 아버지태조대왕삼국사기》에는 차대왕의 형으로, 《후한서》에는 아버지로 기록됨.
왕후미상
아들추안(鄒安)명림답부에 의해 차대왕이 살해되고 신대왕이 즉위하자 궁궐을 빠져나가 몸을 숨겼다. 신대왕 즉위 후 사면받고 양국군에 봉해졌다.


5. 평가

차대왕은 즉위 후 측근들을 고위직에 임명하고, 자신을 해치려 했던 우보 고복장과 태조대왕의 적자 막근(莫勤)을 죽였다.[1] 막근의 동생 막덕(莫德)은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 반대파가 사라지자 더욱 폭정을 휘둘러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165년 10월에 신하 명림답부에게 시해당했다.[1] 차대왕(次大王)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매장지는 전해지지 않는다.[1]

차대왕의 죽음에 대해 『삼국유사』 왕력에는 165년에 국조왕(태조대왕)과 차대왕이 모두 신왕(신대왕)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

6. 기타

중국의 역사서인 《후한서》와 《위서》에는 차대왕이 태조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7]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후한서》의 기록을 인용하여 안제 건광 원년(121)에 "궁(태조대왕)이 죽고 궁의 아들 수성(차대왕)이 즉위하였다"는 대목을 넣기도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King Chadae https://www.culturec[...] 2016-01-28
[2] 서적 삼국사기 卷第十五 髙句麗本紀 第三
[3] 서적 삼국사기 卷第十五 髙句麗本紀 第三
[4] 서적 삼국사기 卷第十五 髙句麗本紀 第三
[5] 서적 조선상고사 종로서원 1948
[6] 서적 조선상고사 종로서원 1948
[7] 논문 고구려 초기 왕계의 복원을 위한 검토 1992
[8] 논문 고구려王家의上世의世孫에 대하여 / 고구려오족오부고 / 백제사회와 그 문화 1951, 1949,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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