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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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홍은 저족 출신으로, 오호십육국 시대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영가의 난 시기에 저족의 수장으로 세력을 키웠으며, 전조와 후조에 복속되기도 했다. 후조의 혼란기에 동진에 복속했다가 삼진왕을 칭하고 자립하여 부씨로 성을 고쳤으나, 부하 마추에게 독살당했다. 그의 아들 부건은 전진을 건국하여 화북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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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은 351년부터 394년까지 화북 지방을 지배한 오호십육국 시대의 국가로, 저족 출신 부건이 건국하여 부견 치세에 왕맹을 등용해 화북을 통일하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비수대전 패배 후 쇠퇴하여 멸망하였다.
| 부홍 | |
|---|---|
| 기본 정보 | |
| 즉위 정보 | |
| 칭호 | 전진 황제 (추존) |
| 재위 시작 | 350년 |
| 계승 | 부건 |
| 묘호 | 태조 (太祖) |
| 시호 | 혜무황제 (惠武皇帝) |
| 존호 | 대장군, 대 선우, 삼진왕 (大將軍 大單于 三秦王) |
| 개인 정보 | |
| 출생 | 317년 |
| 사망 | 355년 |
| 아버지 | 푸화이구이 |
2. 생애
부홍은 저족 출신으로 약양(略陽)에서 출생하였다. 원래 성은 포씨(蒲氏)였다.[3] 영가의 난이 일어났을 무렵에 저족 무리의 수장으로 부족을 이끌며 호저교위, 진주자사, 약양공(護氐校尉秦州刺史略陽公)을 자칭하였다. 아버지 부회귀는 부락 소수(小帥)에 불과했지만, 부홍은 략양(略陽) 저족(氐族)의 장로들에게 추대되어 맹주가 되었다.[3]
310년에 전조의 유연이 부홍에게 관작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유요가 관중(關中)을 장악한 이후 전조에 복속하였으며 329년에 전조가 멸망하자 후조에 복속되었다. 부홍은 석호에게 관중(關中) 주민의 동방 이주를 설득했고, 부홍은 유민 도독이 되어 방두(枋頭)로 본거지를 옮겼다.[3]
333년, 석생(石生)의 반란에 참여하여 석호에 맞섰으나 패배한 후 다시 석호에게 복속하였는데, 석호는 저족과 강족(羌族) 10여 만 호를 관동(關東)으로 이주시켰다. 부홍은 저족을 이끌고 방두(枋頭 : 허난성 준현)에 주둔하였다.
349년 4월에 석호가 사망하고 후조가 장군 염민과의 내란으로 혼란에 빠지자, 한때 동진에 복속했지만, 350년 2월에 대장군, 대선우, 삼진왕을 칭하고 자립하여 부씨로 성을 고쳤다.[3]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도참인 "草付應王"을 따른 것으로 草(艸)와 付를 합쳐 苻를 성으로 삼았다. 석호의 옛 부하로 당시 자신의 가신이었던 마추가 서쪽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여, 장안 진출을 도모했다.[3]
=== 후조(後趙)에서의 활동 ===
333년, 석생(石生)의 반란에 참여하여 석호에 맞섰으나 패배한 후 다시 석호에게 복속되었다. 석호는 저족과 강족(羌族) 10여 만 호를 관동(關東)으로 이주시켰고, 부홍은 저족을 이끌고 방두(枋頭 : 허난성 준현)에 주둔하였다. 석호 치하에서 부홍은 장군으로 활약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염민의 참소를 받기도 했다.
=== 삼진왕(三秦王) 즉위와 최후 ===
349년, 장안(長安) 방면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석호가 죽고 석세가 즉위하자, 부홍 등은 석준을 옹립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염민의 참소로 불만을 품은 부홍은 방두를 점거하고 동진에 투항하여 관작을 받았다.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부홍은 요익중과 함께 관중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요익중의 습격을 받았지만 격퇴하였다.
350년, 부홍은 삼진왕(三秦王)을 자칭하며 성을 부씨(苻氏)로 고쳤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도참인 "草付應王"을 따른 것이었다. 관중 진격을 준비하던 중, 부하 마추에게 독살당했다.[3] 부홍은 아들 부건에게 관중으로 들어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자립
부홍은 저족 출신으로 약양(略陽)에서 출생하였다. 원래 성은 포씨(蒲氏)였다.[3] 영가의 난이 일어났을 무렵에 저족 무리의 수장으로 부족을 이끌며 호저교위, 진주자사, 약양공(護氐校尉秦州刺史略陽公)을 자칭하였다. 아버지 부회귀는 부락 소수(小帥)에 불과했지만, 부홍은 략양(略陽) 저족(氐族)의 장로들에게 추대되어 맹주가 되었다.[3]310년에 전조의 유연이 부홍에게 관작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유요가 관중(關中)을 장악한 이후 전조에 복속하였으며 329년에 전조가 멸망하자 후조에 복속되었다. 부홍은 석호에게 관중(關中) 주민의 동방 이주를 설득했고, 부홍은 유민 도독이 되어 방두(枋頭)로 본거지를 옮겼다.[3]
333년, 석생(石生)의 반란에 참여하여 석호에 맞섰으나 패배한 후 다시 석호에게 복속하였는데, 석호는 저족과 강족(羌族) 10여 만 호를 관동(關東)으로 이주시켰다. 부홍은 저족을 이끌고 방두(枋頭 : 허난성 준현)에 주둔하였다.
349년 4월에 석호가 사망하고 후조가 장군 염민과의 내란으로 혼란에 빠지자, 한때 동진에 복속했지만, 350년 2월에 대장군, 대선우, 삼진왕을 칭하고 자립하여 부씨로 성을 고쳤다.[3]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도참인 "草付應王"을 따른 것으로 草(艸)와 付를 합쳐 苻를 성으로 삼았다. 석호의 옛 부하로 당시 자신의 가신이었던 마추가 서쪽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여, 장안 진출을 도모했다.[3]
2. 2. 후조(後趙)에서의 활동
부홍은 저족 출신으로 영가의 난이 일어났을 무렵에 저족 무리의 수장으로 부족을 이끌며 호저교위,진주자사,약양공(護氐校尉秦州刺史略陽公)을 자칭하였다. 333년, 석생(石生)의 반란에 참여하여 석호(石虎)에 맞섰으나 패배한 후 다시 석호에게 복속되었다. 석호는 저족과 강족(羌族) 10여 만 호를 관동(關東)으로 이주시켰고, 부홍은 저족을 이끌고 방두(枋頭 : 허난성 준현)에 주둔하였다. 석호 치하에서 부홍은 장군으로 활약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염민(冉閔)의 참소를 받기도 했다.2. 3. 삼진왕(三秦王) 즉위와 최후
349년, 장안(長安) 방면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석호가 죽고 석세가 즉위하자, 부홍 등은 석준을 옹립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염민의 참소로 불만을 품은 부홍은 방두를 점거하고 동진에 투항하여 관작을 받았다.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부홍은 요익중과 함께 관중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요익중의 습격을 받았지만 격퇴하였다.350년, 부홍은 삼진왕(三秦王)을 자칭하며 성을 부씨(苻氏)로 고쳤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도참인 "草付應王"을 따른 것이었다. 관중 진격을 준비하던 중, 부하 마추에게 독살당했다.[3] 부홍은 아들 부건에게 관중으로 들어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3. 사후
부홍이 사망한 후, 아들 부건은 마추를 살해하고 장안으로 진출하여 관중에 세력을 구축하고 전진을 건국하였다.[3] 손자 부견은 화북 통일을 이루어 전진을 강력한 국가로 성장시켰다. 부건은 부홍에게 혜무황제(惠武皇帝)라는 시호와 태조(太祖)라는 묘호를 추존하였다.[3]
4. 평가
부홍은 비록 전진을 직접 건국하지는 못했지만, 혼란한 시기에 저족을 이끌고 세력을 확장하여 전진 건국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3] 그의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판단력은 훗날 전진이 화북을 통일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349년 석호가 사망하고 후조가 염민과의 내란으로 혼란스러워지자 동진에 복속했다가, 350년에는 대장군, 대선우, 삼진왕을 칭하고 자립하여 부씨로 성을 고쳤다.[3] 마추의 설득으로 장안 진출을 도모하기도 했다.[3]
하지만, 350년 3월, 부홍은 자신의 가신이었던 마추에 의해 독살당했다.[3] 향년 67세였다.[3] 이는 그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 사후 아들 부건에 의해 혜무황제라는 시호와 태조라는 묘호가 추존되었다.[3]
5. 가계
참조
[1]
서적
Shiliuguo Chunqiu
[2]
서적
Book of Jin
[3]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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