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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티니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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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레티니 조약은 1360년 5월 10일,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백년 전쟁의 일시적인 휴전을 가져왔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프랑스 왕 장 2세의 몸값과 프랑스 영토 할양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조약으로 잉글랜드는 기옌, 가스코뉴 등 프랑스 영토를 획득하고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받았으며, 장 2세는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으나, 이후 조약이 파기되고 백년 전쟁이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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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티니 조약
지도
기본 정보
조약명브레티니 조약
다른 이름칼레 조약
조약 정보
기안일1360년 5월 8일
서명일1360년 10월 24일
서명 장소샤르트르 근처의
발효일1360년 10월 24일 (칼레 조약)
당사국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내용강화 협정
관련 정보
관련 전쟁백년 전쟁 (에드워드 시대)

2. 역사적 배경

프랑스의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1356년 9월 19일)에서 포로로 잡힌 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와 함께 런던 조약을 작성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삼부회의 비난을 받았고, 삼부회는 샤를 도팽에게 이를 거부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전년도에 실패로 끝난 런던 조약에서 주장했던 이점들을 거의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에드워드는 랭스를 포위 공격했다. 이 포위 공격은 1월까지 지속되었고,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에드워드는 부르고뉴로 철수했다. 잉글랜드 군대가 파리를 무익하게 포위 공격한 후, 에드워드는 샤르트르로 행군했고, 4월 초에 조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3]

장 2세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된 지 4년 후, 파리에서 발생한 에티엔느 마르셀과 도팽 사이의 갈등과 자켈리의 난 발발로 인해 프랑스의 협상 입장이 더욱 약해졌다. 잉글랜드도 전년의 런던 조약에서 주장한 영토를 최대한 잃지 않기 위해 강경한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협상은 매우 어려웠고,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3]

2. 1. 푸아티에 전투와 프랑스의 위기

프랑스의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1356년 9월 19일)에서 포로로 잡힌 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와 함께 런던 조약을 작성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삼부회의 비난을 받았고, 삼부회는 샤를 도팽에게 이를 거부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전년도에 실패로 끝난 런던 조약에서 주장했던 이점들을 거의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에드워드는 랭스를 포위 공격했고, 이 포위 공격은 1월까지 지속되었다.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에드워드는 부르고뉴로 철수했다. 잉글랜드 군대가 파리를 무익하게 포위 공격한 후, 에드워드는 샤르트르로 행군했고, 4월 초에 조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된 지 4년 후, 파리에서 발생한 에티엔느 마르셀과 도팽(후일 프랑스 왕 샤를 5세) 사이의 갈등과 자켈리의 난 발발로 인해 프랑스의 협상 입장이 더욱 약해졌다. 잉글랜드도 전년의 런던 조약에서 주장한 영토를 최대한 잃지 않기 위해 강경한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협상은 매우 어려웠고, 4월 초에 시작된 협상은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3]

2. 2. 런던 조약과 프랑스 삼부회의 반발

프랑스의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1356년 9월 19일)에서 포로로 잡힌 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와 함께 런던 조약을 작성했다. 이 조약은 삼부회의 비난을 받았고, 삼부회는 샤를 도팽에게 이를 거부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전년도에 실패로 끝난 런던 조약에서 주장했던 이점들을 거의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에드워드는 랭스를 포위 공격했다. 이 포위 공격은 1월까지 지속되었고,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에드워드는 부르고뉴로 철수했다. 잉글랜드 군대가 파리를 무익하게 포위 공격한 후, 에드워드는 샤르트르로 행군했고, 4월 초에 조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3]

장 2세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된 지 4년 후, 파리에서 발생한 에티엔느 마르셀과 도팽 사이의 갈등과 자켈리의 난 발발로 인해 프랑스의 협상 입장이 더욱 약해졌다. 잉글랜드도 전년의 런던 조약에서 주장한 영토를 최대한 잃지 않기 위해 강경한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협상은 매우 어려웠고,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3]

2. 3. 잉글랜드의 공세와 브레티니 협상

프랑스의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1356년 9월 19일)에서 포로로 잡힌 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와 함께 런던 조약을 작성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삼부회의 비난을 받았고, 삼부회는 샤를 도팽에게 이를 거부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전년도에 실패로 끝난 런던 조약에서 주장했던 이점들을 거의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에드워드는 랭스를 포위 공격했다. 이 포위 공격은 1월까지 지속되었고,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에드워드는 부르고뉴로 철수했다. 잉글랜드 군대가 파리를 무익하게 포위 공격한 후, 에드워드는 샤르트르로 행군했고, 4월 초에 조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3]

장 2세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된 지 4년 후, 파리에서 발생한 에티엔느 마르셀과 도팽(후일 프랑스 왕 샤를 5세) 사이의 갈등과 자켈리의 난 발발로 인해 프랑스의 협상 입장이 더욱 약해졌다. 잉글랜드도 전년의 런던 조약에서 주장한 영토를 최대한 잃지 않기 위해 강경한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협상은 매우 어려웠고, 한 달 이상 계속되었다.[3]

3. 조약의 내용

칼레 조약의 상자


브레티니 조약은 1360년 5월 10일 샤를 왕세자(도팽)와 6명의 영국 기사들에 의해 샹스 호텔(Hôtel de Sens)에서 비준되었다. 1360년 6월 14일, 영국에 억류되어 있던 장 2세는 에드워드 3세, 웨일스 공, 그리고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다른 프랑스 귀족들이 참석한 연회에서 조약을 비준했다. 조약의 최종 확정은 1360년 10월 24일 칼레에서 이루어졌다.

이 조약의 조건에 따라 에드워드 3세는 기옌, 가스코뉴, 푸아투, 생통주, 오니, 아제나, 페리고르, 리무쟁, 케르시(케르시 (프랑스)), 빅주, 고레 백작령, 앙굴렘, 루에르그, 몽트뢰유쉬르메르, 퐁티외, 칼레, 상가트, 암 그리고 백작령 기네를 얻었다. 영국 국왕은 이 지역들을 자유롭게 소유하며, 이에 대한 봉신 의례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더 나아가, 이 조약은 '영국 국왕이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섬들'에 대한 소유권이 더 이상 프랑스 국왕의 종주권 아래 있지 않음을 명시했다. 아키텐 공작(duke of Aquitaine)의 칭호는 아키텐 영주(lord of Aquitaine)로 변경되었다.

영국 국왕은 그 대가로 프랑스 왕위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했다. 브레티니 조약의 조건은 많은 갈등을 야기했던 봉건제적 책임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고, 영국인들의 관점에서는 확장된 아키텐 지역에 영국 영토를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은 또한 1228년 영국 국왕에 의해 박탈당했던 쿠탕스 주교의 올더니에 대한 권리를 회복시켰다.

장 2세는 몸값으로 300만 에퀴를 지불해야 했고, 100만 에퀴를 지불한 후 석방되었다. 이는 1 리브르 투르누아(20 수에 해당)와 동일한 프랑의 최초 주조 시기였다. 몸값 지불을 보장하기 위해 장 2세는 아들인 앙주의 루이 1세와 베리의 장 두 명의 공작, 여러 명의 왕족과 귀족, 파리 시민 4명, 그리고 프랑스의 19개 주요 도시 각각에서 시민 2명을 인질로 제공했다.

3. 1. 잉글랜드의 영토 확장



브레티니 조약은 1360년 5월 10일 샤를 왕세자와 6명의 영국 기사들에 의해 샹스 호텔(Hôtel de Sens)에서 비준되었다. 1360년 6월 14일, 영국에 억류되어 있던 장 2세는 에드워드 3세, 웨일스 공, 그리고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다른 프랑스 귀족들이 참석한 연회에서 조약을 비준했다. 조약의 최종 확정은 1360년 10월 24일 칼레에서 이루어졌다.

이 조약의 조건에 따라 에드워드 3세는 기옌, 가스코뉴, 푸아투, 생통주, 오니, 아제나, 페리고르, 리무쟁, 케르시, 빅주, 고레 백작령, 앙굴렘, 루에르그, 몽트뢰유쉬르메르, 퐁티외, 칼레, 상가트, 암 그리고 백작령 기네을 얻었다. 영국 국왕은 이 지역들을 자유롭게 소유하며, 이에 대한 봉신 의례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더 나아가, 이 조약은 '영국 국왕이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섬들'에 대한 소유권이 더 이상 프랑스 국왕의 종주권 아래 있지 않음을 명시했다. 아키텐 공작의 칭호는 아키텐 영주로 변경되었다.

영국 국왕은 그 대가로 프랑스 왕위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했다. 브레티니 조약의 조건은 많은 갈등을 야기했던 봉건적 책임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고, 영국인들의 관점에서는 확장된 아키텐 지역에 영국 영토를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은 또한 1228년 영국 국왕에 의해 박탈당했던 쿠탕스 주교의 올더니에 대한 권리를 회복시켰다.

장 2세는 몸값으로 300만 에퀴를 지불해야 했고, 100만 에퀴를 지불한 후 석방되었다. 이는 1 리브르 투르누아(20 수에 해당)와 동일한 프랑의 최초 주조 시기였다. 몸값 지불을 보장하기 위해 장 2세는 아들인 앙주 공 루이 1세와 베리의 장, 여러 명의 왕족과 귀족, 파리 시민 4명, 그리고 프랑스의 19개 주요 도시 각각에서 시민 2명을 인질로 제공했다.

3. 2. 프랑스 왕의 권리 포기



브레티니 조약의 조건에 따라 에드워드 3세는 기옌, 가스코뉴, 푸아투, 생통주, 오니, 아제나, 페리고르, 리무쟁, 케르시(Quercy), 빅주, 고레 백작령, 앙굴렘, 루에르그, 몽트뢰유쉬르메르, 퐁티외, 칼레, 상가트, 암 그리고 백작령 기네을 얻었다.[3] 영국 국왕은 이 지역들을 자유롭게 소유하며, 이에 대한 봉신 의례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더 나아가, 이 조약은 '영국 국왕이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섬들'에 대한 소유권이 더 이상 프랑스 국왕의 종주권 아래 있지 않음을 명시했다.[2] 아키텐 공작(duke of Aquitaine)의 칭호는 아키텐 영주(lord of Aquitaine)로 변경되었다.

영국 국왕은 그 대가로 프랑스 왕위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했다. 브레티니 조약의 조건은 많은 갈등을 야기했던 봉건제적 책임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고, 영국인들의 관점에서는 확장된 아키텐 지역에 영국 영토를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은 또한 1228년 영국 국왕에 의해 박탈당했던 쿠탕스 주교의 올더니에 대한 권리를 회복시켰다.[4]

3. 3. 장 2세의 몸값과 인질



브레티니 조약은 1360년 5월 10일 샤를 왕세자(도팽)와 6명의 영국 기사들에 의해 샹스 호텔(Hôtel de Sens)에서 비준되었다. 1360년 6월 14일, 영국에 억류되어 있던 장 2세는 에드워드 3세, 웨일스 공, 그리고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다른 프랑스 귀족들이 참석한 연회에서 조약을 비준했다. 조약의 최종 확정은 1360년 10월 24일 칼레에서 이루어졌다.

이 조약의 조건에 따라 에드워드 3세는 기옌, 가스코뉴, 푸아투, 생통주, 오니, 아제나, 페리고르, 리무쟁, 케르시(케르시 (프랑스)), 빅주, 고레 백작령, 앙굴렘, 루에르그, 몽트뢰유쉬르메르, 퐁티외, 칼레, 상가트, 암 그리고 백작령 기네를 얻었다. 영국 국왕은 이 지역들을 자유롭게 소유하며, 이에 대한 봉신 의례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더 나아가, 이 조약은 '영국 국왕이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섬들'에 대한 소유권이 더 이상 프랑스 국왕의 종주권 아래 있지 않음을 명시했다. 아키텐 공작(duke of Aquitaine)의 칭호는 아키텐 영주(lord of Aquitaine)로 변경되었다.

영국 국왕은 그 대가로 프랑스 왕위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했다. 브레티니 조약의 조건은 많은 갈등을 야기했던 봉건적 책임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고, 영국인들의 관점에서는 확장된 아키텐 지역에 영국 영토를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은 또한 1228년 영국 국왕에 의해 박탈당했던 쿠탕스 주교의 올더니에 대한 권리를 회복시켰다.

장 2세는 몸값으로 300만 에퀴를 지불해야 했고, 100만 에퀴를 지불한 후 석방되었다. 이는 1 리브르 투르누아(20 수에 해당)와 동일한 프랑의 최초 주조 시기였다. 몸값 지불을 보장하기 위해 장 2세는 아들인 앙주의 루이 1세와 베리의 장 두 명의 공작, 여러 명의 왕족과 귀족, 파리 시민 4명, 그리고 프랑스의 19개 주요 도시 각각에서 시민 2명을 인질로 제공했다.

4. 조약의 파기와 백년전쟁 재개

인질들이 억류되는 동안, 장 2세는 몸값을 지불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려 프랑스로 돌아갔다. 1362년, 잉글랜드가 점령한 칼레에 인질로 잡혀 있던 장 2세의 아들, 앙주 백작 루이가 탈출했다.[1] 따라서 대신 인질이 사라지자 장 2세는 잉글랜드에 다시 억류될 의무를 느꼈다.[5][3] 그는 1364년 사로잡힌 채 죽었고,[1] 그의 아들 샤를 5세가 뒤를 이었다. 1369년, 에드워드 3세가 조약 조항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프랑스 왕은 다시 한번 전쟁을 선포했다.

흑태자 에드워드가 1376년 사망하고 에드워드 3세가 1377년 사망할 무렵, 잉글랜드군은 남서부 보르도 주변의 영토로 밀려났다.

이 조약으로 백년 전쟁은 9년간 휴전했을 뿐, 분쟁은 종식되지 못했다. 그 후, 프랑스군은 잉글랜드와 나바라 왕국과의 전투(예를 들어 1364년 5월 16일 코슈레 전투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승리), 그리고 브르타뉴 공국에서의 전투에 휘말렸다.

4. 1. 인질 탈출과 장 2세의 죽음

인질들이 억류되는 동안, 장 2세는 몸값을 지불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려 프랑스로 돌아갔다. 1362년, 잉글랜드가 점령한 칼레에 인질로 잡혀 있던 장 2세의 아들, 앙주 백작 루이가 탈출했다.[1] 따라서 대신 인질이 사라지자 장 2세는 잉글랜드에 다시 억류될 의무를 느꼈다.[5][3] 그는 1364년 사로잡힌 채 죽었고[1], 그의 아들 샤를 5세가 뒤를 이었다. 1369년, 에드워드 3세가 조약 조항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프랑스 왕은 다시 한번 전쟁을 선포했다.

흑태자 에드워드가 1376년 사망하고 에드워드 3세가 1377년 사망할 무렵, 잉글랜드군은 남서부 보르도 주변의 영토로 밀려났다.

4. 2. 샤를 5세의 조약 파기 선언

1362년, 프랑스로 돌아가 몸값을 모으려던 장 2세의 아들 앙주 백작 루이가 잉글랜드칼레에서 탈출했다.[1][5][3] 대신 인질이 사라지자 장 2세는 잉글랜드에 다시 억류될 의무를 느꼈다.[1] 1364년 장 2세가 포로 상태로 사망하자,[5][3] 그의 아들 샤를 5세가 프랑스 국왕에 즉위했다. 1369년, 샤를 5세는 에드워드 3세브레티니 조약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잉글랜드에 다시 전쟁을 선포했다.[5]

1377년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 근처까지 밀려났다.

4. 3. 백년전쟁의 장기화

인질들이 억류되는 동안, 은 몸값을 지불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려 프랑스로 돌아갔다. 1362년, 영국이 점령한 칼레에 인질로 잡혀 있던 존의 아들, 앙주 백작 루이가 탈출했다.[1] 따라서 대신 인질이 사라지자 존은 영국에 다시 억류될 의무를 느꼈다. 그는 1364년 사로잡힌 채 죽었고[1], 그의 아들 샤를 5세가 뒤를 이었다. 1369년, 에드워드 3세가 조약 조항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프랑스 왕은 다시 한번 전쟁을 선포했다.

흑태자가 1376년 사망하고 에드워드 3세가 1377년 사망할 무렵, 영국군은 남서부 보르도 주변의 영토로 밀려났다.

조약은 분쟁에 종지부를 찍지 못했고, 백년 전쟁에서 9년간의 휴전만이 성과였다. 그 후, 프랑스군은 잉글랜드와 나바라 왕국과의 전투(예를 들어 1364년 5월 16일 코슈레 전투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승리), 그리고 브르타뉴 공국에서의 전투에 휘말렸다.

5. 역사적 의의와 영향

이 조약은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백년 전쟁에서 9년간의 휴전을 가져왔다. 그 후 몇 년 동안 프랑스군은 잉글랜드-나바라 왕국 연합군 (1364년 5월 16일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코셰르 전투 승리)과 브르타뉴 공국과의 전투에 참전했다.

참조

[1] 논문 (제목 정보 없음) (출판사 정보 없음) 1930
[2] 서적 Volume 20 of International Law Report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7
[3] 백과사전 Brétigny (출판사 정보 없음, EB1911은 1911년판 Britannica 백과사전을 나타냄)
[4] 웹사이트 Alderney http://www.worldstat[...] Worldstatesmen.org (날짜 정보 없음)
[5] 논문 (제목 정보 없음) (출판사 정보 없음)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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