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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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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코메데스 1세는 기원전 279년부터 기원전 255년경까지 비티니아 왕국의 왕이었다. 그는 형제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으며, 형제 지포에테스 2세의 반란과 셀레우코스 제국의 침략 위협에 직면했다. 이에 헤라클레아 폰티카,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와 동맹을 맺고, 켈트족 용병을 고용하여 지포에테스 2세를 제압하고 비티니아를 통일했다. 그는 수도 니코메디아를 건설하여 왕국의 번영을 이끌었으며, 두 번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나, 후계자 문제로 혼란을 겪었다. 그는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상을 얻기 위해 도시의 공채를 탕감해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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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티니아의 왕 - 니코메데스 4세 필로파토르
    니코메데스 4세 필로파토르는 기원전 94년부터 기원전 74년까지 비티니아 왕국을 통치했으며,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갈등, 로마와의 관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연관성으로 특징지어지고, 비티니아 왕국을 로마에 유증하여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1세
기본 정보
칭호비티니아의 바실레우스
재위 기간기원전 278년 ~ 기원전 255년경
계승 순서비티니아의 바실레우스
이전 통치자지포이테스 1세
다음 통치자에타제타
출생기원전 300년경
사망기원전 255년경
가계
아버지지포이테스 1세
배우자디티젤레, 에타제타
자녀지아엘라스, 프루시아스, 리산드라
이미지
니코메데스 1세의 주화. 앞면에는 머리에 머리 장식을 한 니코메데스의 모습이, 뒷면에는 벤디스가 앉아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범례는 ΒΑΣΙΛΕΩΣ ΝΙΚΟΜΗΔΟΥ[Σ]이다.
니코메데스 1세의 주화. 앞면에는 머리 장식을 한 니코메데스의 모습이, 뒷면에는 벤디스가 앉아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2. 생애

그는 형제들 중 둘을 죽이면서 통치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이후 지포에테스 2세라 불리는 세 번째 형제가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비티니아의 상당한 지역에 독립적인 주권을 가진 나라를 잠시 동안 유지해내는데 성공한다. 한편, 니코메데스는 과거 그의 아버지와도 전쟁을 했었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의 침략 위협에 놓여있었고, 이 위험에 맞서기 위해 헤라클레아 폰티카와 동맹을 맺었고 그리고 얼마 안되어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와도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이 위험에 처한 공격은 약간의 피해만을 입고 넘어갔다. 안티오코스가 실제로 비티니아를 공격했지만 전투의 피해 없이 철수해버렸다.

외국의 적들보다 그의 형제에 더욱 맞섰던 니코메데스는 조금 더 강력한 보조병들의 도움을 끌여들여, 당시 보스포루스 해협 반대편에 도착하여 기원전 277년에 비잔티움에 포위를 하고 있던 켈트족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이 갈라티아를 세우는 아시아에 건너올 방법을 마련해준 그는 지포에테스 2세를 상대로 처음 그의 보조병들을 사용하여, 그를 패배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그리하여 그의 지배하에 비티니아 전역이 통합되었다.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선 조금 밖에 알려지지 않다. 켈트족들이 이후에도 안티오코스에 맞서 니코메데스를 도왔을 것이지만 특별히 기록된 것은 없으며, 전쟁이나 평화 둘 중 하나가 끝났을 것이다. 니코메데스가 비티니아의 비분쟁 지역에 한정된 것으로 나타났고, 그곳을 그때부터 죽을때까지 계속해서 통치했고 그의 길고 평화로운 통치 기간에 힘과 번영이 고도로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와 아시아의 많은 그리스 통치자들을 모방하여, 그는 그가 택한 메가라의 식민지의 아스타코스가 바로 인접한 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립함으로써 그의 이름을 영속하기로 결정했고 매우 신중하게 선정된 니코메디아는 6세기 이상을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성한 도시 중 하나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에우세비우스는 니코메디아 설립을 기원전 264년으로 본다.

이 사건 이후의 니코메데스의 통치 기간은 알려져있지 않고 그의 죽음 기원전 255년 쯤으로 본다. 그는 두 차례 혼인을 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프리기아 출신의 디티젤레/Διτιζέληgrc로 그와 사이에서 두 아들 프루시아스, 지아엘라스와 딸 리산드라를 가졌고, 두 번째 부인 에타제타는 첫 번째 혼인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때어두고 그녀의 자녀들이 왕위에 오르도록 그를 설득했다.

후자의 자녀는 그가 사망할 당시에 여전히 유아 상태였기에, 그는 유언을 통해 두 명의 왕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와 헤라클레아 폰티카, 비잔티움, 키오스 등의 자유 도시들과 함께 그들의 보호를 위탁하였다. 하지만 이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지아엘라스는 신속히 왕위에 올랐다. 프락시텔레스에 의해 만들어진 크니도스의 유명한 아프로디테상을 구입하고 싶어하던 니코메데스는 크니도스 도시의 전체 공채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2. 1. 권력 장악 과정

니코메데스 1세는 형제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지만, 셋째 형제 지포에테스 2세의 반란에 직면했다. 지포에테스 2세는 비티니아의 상당 지역을 독립적으로 다스리는 데 성공했다. 한편, 니코메데스 1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여, 헤라클레아 폰티카 및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와 동맹을 맺었다. 안티오코스 1세는 비티니아를 공격했지만, 전투 없이 철수했다.

니코메데스 1세는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에서 비잔티움을 포위하던 켈트족과 동맹을 맺고, 그들이 아시아로 건너가 갈라티아를 세우도록 도왔다. 이후 켈트족의 도움을 받아 지포에테스 2세를 패배시키고 죽여 비티니아 전역을 통합했다. 켈트족이 이후 안티오코스에 대항하여 니코메데스를 도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자세한 기록은 없다.

2. 2. 켈트족과의 동맹

니코메데스 1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의 침략 위협에 맞서기 위해 켈트족과 동맹을 맺었다. 이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처럼 독립을 쟁취하려 노력하던 비티니아 왕국의 상황을 보여준다.

니코메데스 1세는 형제인 지포에테스 2세의 반란과 셀레우코스 제국의 침략이라는 이중 위협에 직면했다. 이에 그는 헤라클레아 폰티카,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더 강력한 군사적 지원이 필요했다.

기원전 277년, 레온노리우스와 루타리우스가 이끄는 켈트족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에 도착하여 비잔티움을 포위하고 있었다. 니코메데스 1세는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지포에테스 2세를 제압하고 비티니아를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켈트족은 이후 갈라티아를 건국하게 된다.

켈트족과의 동맹 이후, 니코메데스 1세는 비티니아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며 왕국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의 통치 기간과 켈트족과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비티니아가 그의 통치 아래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2. 3. 니코메디아 건설

니코메데스 1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수도 니코메디아를 건설하여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티니아 왕국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의 침략 위협에 맞서기 위해 헤라클레아 폰티카,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와 동맹을 맺었다. 또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의 켈트족과 동맹을 맺고 그들이 아시아로 건너갈 수 있도록 지원하여, 비티니아의 지포에테스 2세를 격파하고 비티니아 전역을 통합했다.

메가라의 고대 식민지였던 아스타코스 근처에 건설된 새로운 수도 니코메디아는 6세기 이상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영한 도시 중 하나로 명성을 이어갔다. 에우세비우스는 니코메디아의 건국을 기원전 264년으로 추정한다.

니코메데스 1세는 크니도스의 공공 부채를 탕감해주는 대가로 프락시텔레스가 만든 아프로디테 상을 얻고자 했다.

2. 4. 후계자 문제와 사망

니코메데스 1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프리기아 출신의 디티젤레/Διτιζέληgrc였다. 디티젤레와의 사이에서는 두 아들 프루시아스, 지아엘라스와 딸 리산드라를 두었다. 그러나 두 번째 부인인 에타제타는 자신의 자녀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니코메데스 1세를 설득하여,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제쳐두도록 하였다. 이는 권력을 둘러싼 암투의 전형적인 사례로, 에타제타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왕실의 안정을 해치는 행위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니코메데스 1세 사후, 에타제타 소생의 자녀들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는 유언을 통해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두 왕과 헤라클레아 폰티카, 비잔티움, 키오스 등의 자유 도시들에게 자신의 어린 자녀들의 후견을 맡겼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니코메데스 1세의 첫 번째 아들 지아엘라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한편, 니코메데스 1세는 크니도스의 유명한 아프로디테 상을 구매하기 위해 크니도스 시의 모든 공공 부채를 탕감해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3. 문화적 업적

3. 1. 예술 후원

3. 2. 헬레니즘 문화 진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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