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푸리 주는 스웨덴, 러시아, 핀란드의 영토 분쟁으로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1812년 핀란드 대공국에 편입되어 비푸리 주로 설립되었다. 핀란드가 독립한 후에도 주 지위는 유지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에 영토가 할양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핀란드인이 이주하였고, 핀란드 영토는 퀴미 주로 개칭되었다가 남부 핀란드 주에 통합되었다. 비푸리 주는 행정 구역으로 9개의 지구와 주요 도시 및 타운으로 구성되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와의 근접성으로 경제가 발달했다. 이 지역은 칼 야니쉬, 마르티 아티사리 등 다양한 분야의 저명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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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푸리주
지도
일반 정보
원래 이름
langx|fi|Viipurin lääni (핀란드어) langx|sv|Viborgs län (스웨덴어) langx|ru|Выборгская губерния (러시아어)
p1: 비보르크 현 flag_p1: Coat of Arms of Vyborg (Vyborg Governorate) (1788).png border_p1: no
이후
s1: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flag_s1: Flag of the Karelo-Finnish SSR.svg s2: 레닌그라드 주 flag_s2: Flag of Leningrad Oblast.svg s3: 퀴미 주 flag_s3: Kymen lääni.vaakuna.svg border_s3: no
통치
직함
주지사
통계
기준 연도
1939년
면적
32,134 제곱킬로미터
인구
620,838명
상징
비푸리 주의 문장
1913년 비보르크 현 지도
2. 역사
비푸리 주의 역사는 스웨덴 제국, 러시아 제국, 핀란드 세 국가 간의 복잡한 영토 분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비푸리 주 성립 이전 ===
1721년 니스타드 조약과 1743년 오보 조약을 통해 스웨덴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카렐리야 지역을 할양했다.[1] 1721년 비보리 및 뉘슬로트 주와 케크홀름 주, 1743년 사볼락스 및 키메네고르드 주의 일부에서 유래한 할양된 영토는 1744년에 비보르크 현으로 설립되었으며, 구 핀란드로도 알려졌다.[1]
나폴레옹 전쟁 동안, 스웨덴 왕국은 영국 등과 함께 프랑스 제1제국에 맞서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1] 그러나 1807년틸지트 조약 이후 러시아는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1808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는 핀란드 전쟁에서 핀란드에 대한 스웨덴의 지배에 성공적으로 도전했다.[1]1809년9월 17일 프레데릭스함 조약에서 스웨덴은 토르네 강 동쪽의 모든 핀란드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1] 러시아 제국은 새로운 영토를 자치적인 핀란드 대공국으로 재구성했고, 러시아 차르가 대공을 맡았다.[1]
=== 핀란드 대공국 시대 ===
나폴레옹 전쟁 동안 스웨덴 왕국은 영국 등과 함께 프랑스 제1제국에 맞서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나, 1807년 틸지트 조약 이후 러시아는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1] 1808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는 핀란드 전쟁에서 핀란드에 대한 스웨덴의 지배에 성공적으로 도전했다.[1] 1809년 9월 17일 프레데릭스함 조약에서 스웨덴은 토르네 강 동쪽의 모든 핀란드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1] 러시아 제국은 새로운 영토를 자치적인 핀란드 대공국으로 재구성했고, 러시아 차르가 대공을 맡았다.[1]
1812년, 비보르크 현의 영토는 러시아 본토에서 핀란드 대공국으로 이관되어 비푸리 주가 설립되었다. 1811년 12월 23일 구력 (1812년 1월 4일 신력)에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발표한 이관은 강제로 자국을 정복당한 핀란드 국민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상징적인 제스처이자 시도로 볼 수 있다. 1864년에는 세스트로레츠크가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현으로 이관되었다.
1940년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핀란드는 비푸리를 포함한 비푸리 주 대부분을 소련에 할양했다.[3] 할양된 면적은 22,973km²로 비푸리 주의 71.5%에 달했으며,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이로 인해 42만 명 이상의 핀란드인이 핀란드로 이주하거나 난민이 되었다.
1941년 핀란드와 소비에트 연방 간에 계속 전쟁이 발발하여 핀란드는 일시적으로 비푸리 주 대부분을 탈환했다. 그러나 1944년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로 인해 다시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되었고, 1947년파리 조약으로 영토 할양이 확정되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핀란드군이 비푸리 주를 탈환하면서 이주했던 사람들이 돌아왔으나, 소비에트 연방에 재점령되자 다시 핀란드로 이주하여 비푸리 주의 인구는 격감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을 이주시켜 인구를 보충했다. 두 번째 점령 시 카렐리야 지협은 레닌그라드 주의 비보르크스키 구와 프리오제르스키 구에, 라도가 카렐리야와 보르델 카렐리야는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라도가 카렐리야의 지명은 대부분 유지되었지만, 카렐리야 지협 주변의 지명은 1948년까지 대부분 소비에트 연방 정부에 의해 변경되었다.[4]
=== 전후 ===
1945년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비푸리 주의 핀란드 영토는 퀴미 주로 개칭되었다.[1] 퀴미 주는 1997년 남부 핀란드 주로 통합되었다.[1]
2. 1. 비푸리 주 성립 이전
1721년 니스타드 조약과 1743년 오보 조약을 통해 스웨덴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카렐리야 지역을 할양했다.[1] 1721년 비보리 및 뉘슬로트 주와 케크홀름 주, 1743년 사볼락스 및 키메네고르드 주의 일부에서 유래한 할양된 영토는 1744년에 비보르크 현으로 설립되었으며, 구 핀란드로도 알려졌다.[1]
나폴레옹 전쟁 동안, 스웨덴 왕국은 영국 등과 함께 프랑스 제1제국에 맞서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1] 그러나 1807년틸지트 조약 이후 러시아는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1808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는 핀란드 전쟁에서 핀란드에 대한 스웨덴의 지배에 성공적으로 도전했다.[1]1809년9월 17일 프레데릭스함 조약에서 스웨덴은 토르네 강 동쪽의 모든 핀란드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1] 러시아 제국은 새로운 영토를 자치적인 핀란드 대공국으로 재구성했고, 러시아 차르가 대공을 맡았다.[1]
2. 2. 핀란드 대공국 시대
나폴레옹 전쟁 동안 스웨덴 왕국은 영국 등과 함께 프랑스 제1제국에 맞서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나, 1807년 틸지트 조약 이후 러시아는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1] 1808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는 핀란드 전쟁에서 핀란드에 대한 스웨덴의 지배에 성공적으로 도전했다.[1] 1809년 9월 17일 프레데릭스함 조약에서 스웨덴은 토르네 강 동쪽의 모든 핀란드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1] 러시아 제국은 새로운 영토를 자치적인 핀란드 대공국으로 재구성했고, 러시아 차르가 대공을 맡았다.[1]
1812년, 비보르크 현의 영토는 러시아 본토에서 핀란드 대공국으로 이관되어 비푸리 주가 설립되었다. 1811년 12월 23일 구력 (1812년 1월 4일 신력)에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발표한 이관은 강제로 자국을 정복당한 핀란드 국민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상징적인 제스처이자 시도로 볼 수 있다. 1864년에는 세스트로레츠크가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현으로 이관되었다.
2. 3. 핀란드 독립과 내전
1721년 니스타드 조약과 1743년 오보 조약을 통해 스웨덴 제국이 러시아에 할양한 영토는 1744년 비보르크 현으로 설립되었다.[1] 이 영토는 1721년 비보리 및 뉘슬로트 주와 케크홀름 주, 1743년 사볼락스 및 키메네고르드 주의 일부에서 유래했으며, 구 핀란드로도 알려졌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스웨덴 왕국은 영국 등과 함께 프랑스 제1제국에 맞서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나, 1807년틸지트 조약 이후 러시아는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1808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는 핀란드 전쟁에서 승리했고, 1809년 프레데릭스함 조약에서 스웨덴은 토르네 강 동쪽의 모든 핀란드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 러시아 제국은 새로운 영토를 자치적인 핀란드 대공국으로 재구성했고, 러시아 차르가 대공을 맡았다.[1]
1812년, 비보르크 현의 영토는 러시아 본토에서 핀란드 대공국으로 이관되어 비푸리 주가 되었다. 1811년 12월 23일 구력 (1812년 1월 4일 신력)에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발표한 이관은 강제로 자국을 정복당한 핀란드 국민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상징적인 제스처이자 시도로 볼 수 있다.[1]세스트로레츠크는 186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현으로 이관되었다.
1940년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핀란드는 비푸리를 포함한 비푸리 주 대부분을 소련에 할양했다.[3] 할양된 면적은 22,973km²로 비푸리 주의 71.5%에 달했으며,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이로 인해 42만 명 이상의 핀란드인이 핀란드로 이주하거나 난민이 되었다.
1941년 핀란드와 소비에트 연방 간에 계속 전쟁이 발발하여 핀란드는 일시적으로 비푸리 주 대부분을 탈환했다. 그러나 1944년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로 인해 다시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되었고, 1947년파리 조약으로 영토 할양이 확정되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핀란드군이 비푸리 주를 탈환하면서 이주했던 사람들이 돌아왔으나, 소비에트 연방에 재점령되자 다시 핀란드로 이주하여 비푸리 주의 인구는 격감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을 이주시켜 인구를 보충했다. 두 번째 점령 시 카렐리야 지협은 레닌그라드 주의 비보르크스키 구와 프리오제르스키 구에, 라도가 카렐리야와 보르델 카렐리야는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라도가 카렐리야의 지명은 대부분 유지되었지만, 카렐리야 지협 주변의 지명은 1948년까지 대부분 소비에트 연방 정부에 의해 변경되었다.[4]
2. 5. 전후
1945년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비푸리 주의 핀란드 영토는 퀴미 주로 개칭되었다.[1] 퀴미 주는 1997년 남부 핀란드 주로 통합되었다.[1]
3. 행정 구역
3. 1. 지구
비푸리 주는 9개의 지구(kihlakuntafi, häradsv)로 나뉘어 있었다. 란타(Strandasv), 에이랴패(Äyräpääsv), 캐키살미(Kexholmsv), 쿠르키요키(Kurkijoki)(Kronoborgsv), 퀴미(Kymi)(Kymmenesv), 라페(Lappvesisv), 살미(Salmissv), 소르타발라(Sordavalasv), 얘스키(Jäskissv)가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의 근접성으로 인해 경제가 발달했다. 1856년 사이마 운하가 개통되어 사이마호와 핀란드 호수 지역을 비보르크만과 연결했다. 1870년 상트페테르부르크-리히미키 철도, 1894년 비보르크-요엔수 철도, 1917년 페트로그라드-히이톨라 철도가 건설되면서 지역 개발이 더욱 촉진되었다.
화강암, 대리석(루스케알라), 습지 철광 채굴과 벌목은 중요한 산업 분야였다. 20세기 초부터 우옥시 강 상류 지역에 수력 발전소가 여러 개 건설되어 스토라 엔소의 제지 공장에 전력을 공급했다.
핀란드 내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비푸리 주의 역사는 핀란드 사회의 좌우 갈등과 이념 대립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특히 겨울 전쟁과 계속 전쟁에서 핀란드가 소련에 영토를 빼앗긴 것은 핀란드 국민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며, 전후 핀란드 정치와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푸리 주 출신 인물 중에는 핀란드의 사회 개혁과 국제 평화 증진에 기여한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이 있다. 레오 메켈린, 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 에드빈 린코미에스 등이 이에 해당한다. 마르티 아티사리는 핀란드 제10대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국제 평화 증진에 기여했다.
반면, 핀란드의 국방력 강화와 반공주의 노선을 옹호한 보수적 성향의 인물들도 있다. 시모 해위해는 저격수 역사상 최고 확인 전과(505명 사살)를 기록한 군인이다. 요한네스 비롤라이넨은 총리를 역임했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statehood in Finland
https://www.eduskunt[...]
2024-04-15
[2]
뉴스
フィンランドとの不可侵条約廃棄を通告
朝日新聞
1939-11-30
[3]
뉴스
ソ連軍、国境全線で攻撃開始
東京日日新聞
1939-12-01
[4]
웹사이트
New regional administration model abolishes provinces in 2010
http://www.hs.fi/eng[...]
HELSINGIN SANOMAT
2012-07-15
[5]
문서
カール・グスタフ・エミール・マンネルヘイムの祖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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