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량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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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량좌는 북송 시대의 학자로, 정호와 정이에게 학문을 배우고 유초, 여대린, 양시와 함께 정문의 사선생으로 불렸다. 원풍 8년에 진사가 되어 관직을 역임했으나, 휘종에게 소환된 후 뜻에 거슬려 좌천되었고 참언으로 옥에 갇혀 관직을 해제당했다. 그는 지식이 해박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사서를 인용하여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으며, 저서로 『논어설』이 있다. 그의 학설은 정호의 영향을 받아 "마음"을 인의 본체로 삼고 궁리를 통해 "마음"을 개발하려 했으며, "지행합일"을 강조했다. 그의 사상은 조선 시대 양명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한국 유학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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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량좌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사량좌(謝良佐) | 
| 자 | 현도(顯道) | 
| 시호 | 문정(文正) | 
| 생애 | |
| 출생 | 1050년 | 
| 사망 | 1103년 | 
| 국적 | 중국 | 
| 학문 | |
| 스승 | 정호(程顥) | 
| 문파 | 낙학(洛學) | 
| 사상 | 성리학 | 
| 가족 | |
| 아버지 | 사항중(謝 항중) | 
| 아들 | 사원명(謝源明) | 
| 손자 | 사대방(謝伾方) | 
2. 생애
채주 상채현 출신이다. 정호와 정이에게 학문을 배웠고, 유초, 여대린, 양시와 함께 정문의 사선생으로 불렸다. 원풍 8년(1085년)에 진사가 되어 주현 관직을 역임했으며, 응성 지현을 지냈다. 건중정국 원년(1101년)에 휘종에게 소환되었으나 뜻에 거슬려 서경 죽목장의 감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참언으로 옥에 갇혀 관직을 해제당했다. 
사량좌는 지식이 해박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사서를 인용할 때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1] 그의 저서로는 『논어설』이 있다. 증념과 호안국이 기록한 『상채어록』 3권은 정호, 정이에서 주희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발전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1] 
                        
3. 학문
3. 1. 사상적 특징
사량좌의 학설은 정호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계승하여 "마음"을 인의 본체로 삼고, 궁리를 통해 "마음"을 개발하려 했다.[1] 그는 근본적이고 최대의 이법을 구하기 위해 "마음"을 중시했으며, 여기서 "지행합일"이라는 덕목에 도달했다.[1] 이 점은 육상산의 학문에 계승되었다.[1]
3. 2. 영향
사량좌는 지식이 해박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사서를 인용할 때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저서로는 『논어설』이 있다. 증념과 호안국이 기록한 『상채어록』 3권은 정호, 정이에서 주희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발전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3. 2. 1. 한국 유학에 미친 영향
사량좌의 학설은 정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마음"을 인의 본체로 삼고, 궁리를 통해 "마음"을 개발하려 했다. 그는 근본적이고 최대의 이법을 구하기 위해 "마음"을 중시하는 데서 "지행합일"이라는 덕목에 도달했다. 이러한 사상은 육상산의 학문에 계승되었다.[1]
사량좌의 사상은 조선 시대 양명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마음' 중심 사상과 지행합일 강조는 이황, 이이 등 조선 성리학자들에게 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도, 한국 유학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그의 사상은 강화학파 등 양명학 계열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실학 사상의 형성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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