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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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실학은 조선 시대에 등장한 사상으로, 명나라 말 서구 과학과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 문제 해결과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실제 생활에 유용한 지식과 기술을 추구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개혁을 시도했다. 실학은 주자학 비판, 양명학의 전래,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으며,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이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실학은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 등 다양한 학문적 경향을 보였으며, 국학, 과학 기술, 예술 분야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에는 개화 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나, 청에 대한 의존과 서양 과학 금지라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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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학 - 박제가
박제는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청나라 문물을 수용하여 상업 진흥과 신분 차별 타파 등을 주장하며 폐쇄적인 조선 사회의 개혁을 촉구했다. - 실학 - 서학
서학은 18세기 중국 선교사들의 서적을 통해 한국에 간접적으로 전래된 서양 종교 사상으로, 초기 진보적 사상가들 사이에서 기술과 철학으로 인식되었으나 유교적 질서와 충돌하며 박해를 받았고 실학과의 갈등, 사회적 논쟁을 야기하며 한국 천주교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 조선의 유학 - 위정척사파
위정척사파는 조선 후기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외세에 저항하며 쇄국정책을 옹호하고 서양 문물을 배척한 유학자 집단으로, 항일 의병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학파로 구성되었다. - 조선의 유학 - 위정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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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학 | |
|---|---|
| 실학 | |
| 다른 이름 | 실사구시, 경세치용, 이용후생 |
![]() | |
| 배경 | |
| 발생 시기 | 조선 후기 |
| 발생 원인 | 성리학의 형식화와 모순 심화 사회 경제적 변화와 새로운 지식 요구 증대 |
| 주요 내용 | |
| 학문적 경향 | 실증주의적 연구 방법론 사회 개혁과 국가 발전에 대한 관심 민생 안정과 국부 증진 추구 |
| 주요 분야 | 농업, 상업, 수공업 등 실생활 관련 학문 지리, 역사, 천문학, 의학 등 과학 기술 분야 국어학, 문학 등 인문 분야 |
| 주요 학파 | |
| 경세치용 학파 | 주요 인물: 유형원, 이익, 정약용 특징: 사회 제도 개혁과 국가 통치 질서 확립 강조 |
| 이용후생 학파 | 주요 인물: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특징: 상업 발전과 기술 혁신을 통한 실생활 개선 중시 |
| 실사구시 학파 | 주요 인물: 김정희, 최한기 특징: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실증적 연구 추구 |
| 영향 | |
| 사회적 영향 | 사회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 인식 확대 근대 사상 형성에 영향 개화기 사상적 기반 마련 |
| 학문적 영향 | 실증주의적 학문 연구 방법 확립 국학 연구 발전 |
| 현대적 의의 | |
| 현재적 가치 | 실용주의적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 중요성 강조 과거의 잘못된 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자세 강조 실사구시 정신의 중요성 재확인 |
2. 조선시대 실학의 특징
조선의 실학은 명나라 말기 서구 과학의 전래와 청나라 초기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청나라의 실학이 경서 고증에 치중한 반면, 조선의 실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즉, 조선의 실학은 서구 과학과 청의 농법·농제를 토대로 하는 경세의 학문을 주로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서학(西學)이 중국에 유입되었다.[41] 1601년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북경 개교(開敎)와 함께 포교를 위한 방법으로 《천주실의》 등의 천주교 교리서와 《기하원본》 등 서구 과학서를 번역하여 전포했다.[41] 천리경·자명종·지구의·천구의·곤여만국전도·서양포(西洋布)·유리제품 등 중국민의 취미에 맞는 서양 기물을 만들어 중국인의 마음을 사는 데 사용하였다.[41] 이런 것들은 해마다 북경에 내왕하는 한국의 사절들이 호기심을 가졌고, 조선에도 들어오기 시작하여 서학이 천주교와 서구 과학을 겸한 두 방면으로 발전하였다.[41]
실학파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활동하며,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 등 다양한 학문적 경향을 보였다.
실학은 공리공담을 벗어나 실제 생활에 유용한 지식과 기술을 추구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을 통해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지배층의 부패와 수탈로 인해 사회 모순이 심화되면서, 실학은 새로운 사회 개혁 방안과 구국 운동으로 나타났다.
주자학에 대한 비판과 양명학의 전래,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은 실학 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학파의 비조(鼻祖)는 유형원인데, 그의 저서 《반계수록》과 이익의 《성호사설》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들의 장래에 대한 이상과 구상을 논한 책이다. 정약용도 《목민심서》,《경세유표》를 지어 현실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한편, 1729년(영조 5) 양득중(梁得中)은 실사구시의 학이 이상적이며 실제적인 학문임을 왕에게 아뢰었고, 왕은 ‘실사구시’란 4자를 써서 실내의 벽상에 걸어 놓고 양득중으로 하여금 진강하게 하였다고 한다.
3. 전개
이수광(李睟光)은 서학을 조선에 소개하였으며, 허균(許筠)과 소현세자 등이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41] 김육(金堉)·정두원(鄭斗源)·이영준(李榮俊) 등은 서학의 과학적 측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41] 서학의 종교는 이익에게서 크게 이해되어 그의 문하에서 홍유한(洪有漢)·이벽(李蘗)·이승훈(李承勳)·권일신(權日身)·정약종(丁若鍾) 등의 천주교 실천자가 배출됨으로써 종교로서 발전을 거듭하였다.[41] 서학의 과학면은 이익에 이르러 크게 발전되어 그의 문하에서 홍대용(洪大容)·신경준(申景濬)·정약용·최한기(崔漢綺)·김정호(金正浩) 등의 서구 과학의 실제 응용자를 얻음으로써 과학으로서의 발전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41]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중국 문화는 한인(漢人)의 한문화 재건으로부터 오는 고증학적 학풍과 서구 과학의 섭취로써 얻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경제 정책 또는 산업 정책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41] 북학파(北學派)로 알려져 있는 홍대용·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의 신진학자들은 중국의 문물제도를 배워 그대로 사용하자는 주장을 펼쳤고, 이는 조선 실학 성립의 한 초석이 되었다.[41]
4. 실학파
18세기 전반, 농업 중심의 개혁론이 대두되었다.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한 실학자들을 경세치용학파라고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42]
유형원은 경세치용파의 선구자로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 문벌 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이익은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성호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을 주장하고, 저서 《성호사설》을 통해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42] 정약용은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이를 공동경작, 공동 분배하자는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류경원(柳馨遠)은 벼슬하지 않고 저술에 전념하여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농업 중심의 제도 개혁을 주장하였다. 『반계수록』은 후에 영조(英祖)의 명으로 출판되었다.
이익(李瀷)의 아버지 이하진은 남인(南人)이었는데, 서인(西人)의 탄압으로 평안도에 유배되었다. 이익은 어릴 적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죽고 형 이잠에게 길러졌으나, 형 또한 1706년에 처형당하였다.[23] 역경 속에서 벼슬을 포기하고 백과사전적인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저술하였다. 이익은 조선의 문인들이 청(清)을 이적(夷狄)으로 여기고 명(明)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는 행위를 비판하며, 청 지배하의 중국을 중화 문명으로 보았다.[24] 또한 이익은 서학(漢訳された西洋の学問) 연구를 주도하고,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디아스의 『천문략(天問略)』, 아레니의 『직방외기(職方外紀)』에 대한 발(跋)을 썼다. 이익은 지구설을 따르며,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 사상을 부정하였다.[25]
이익의 문하에는 안정복(安鼎福)과 권철신(權哲身)이 있다. 안정복은 『하학지남(下學指南)』『동사강목(東史綱目)』『열조통기(列朝通紀)』 등을 저술하였다. 『하학지남』에서는 조선의 유학이 이기설(理氣說)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하학(日常生活の中で聖人の道を実践すること)을 중시하였다.[26] 『동사강목』은 고려 말까지의 통사로, 자국의 왕조사를 “세가(世家)”로 하는 경향을 비판하며, 조선인에게는 조선이야말로 본기(本紀)라고 주장하였다.[26] 또한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斎)의 존황 사상을 이익에게 보낸 편지에서 평가하였다.[27] 권철신은 서양 학문에 대한 관심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세례명 안브로시오).[28]
이 학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권철신의 문인인 정약용(丁若鏞)이다. 정약용은 세 번째 형(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두 번째 형(정약전)과 함께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나, 1791년 기독교도가 조상 제사를 폐지하는 사건(진산 사건)이 일어나자 기독교에서 멀어졌다.[29] 형 정약종은 이후에도 전교에 헌신하며, 기독교를 한문을 읽지 못하는 일반 민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주교요지(主教要旨)』 2권을 전부 한글로 썼다.[30]
정약용 또한 중국 중심의 천하 사상과 화이관(華夷觀)을 부정하였다.[31] 또한 「일본고(日本考)」를 저술하여 일본의 고학(古學)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오기 소라이(荻生徂徠), 다자이 슌타이(太宰春台) 등의 설을 인용하였다.[32] 1792년 상소하여 성제(城制)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정조(正祖)는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 수록된 슈렉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주어 연구하게 하였다.[33] 수원 화성(水原華城) 축성 당시, 거중기와 도르래를 이용하여 돈 4만 관(貫)을 절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34]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1800년 정조의 사후, 노론 벽파가 다시 권력을 잡았다. 1801년 기독교를 이유로 이익의 학파가 탄압을 받았다(신유교옥(辛酉敎獄)). 권철신과 정약종 등 140명이 처형당하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다.[35] 이후 서학은 금지되었다.
18세기 후반 영조·정조 대에는 상공업 발전 및 기술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당시 오랑캐라 배척하던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 라고도 한다. 그들은 주로 청나라에 내왕하면서 청조 문화의 우수함을 보고 조선에 돌아와서 그 발달한 문화를 수입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견문을 토대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실학자는 주류인 노론파에서도, 특히 조선 연행사로 청나라를 방문했던 사람들 중에서 나타났다. 김정희는 박제가에게 배우고, 북경을 방문하여 옹방강과 원원을 알게 되었다.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과안록』 등을 저술했다.
4. 1. 경세치용학파
18세기 전반, 농업 중심의 개혁론이 대두되었다.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한 실학자들을 '''경세치용학파'''라고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42]
유형원은 경세치용파의 선구자로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 문벌 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이익은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성호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을 주장하고, 저서 《성호사설》을 통해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42] 정약용은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이를 공동경작, 공동 분배하자는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류경원(柳馨遠)은 벼슬하지 않고 저술에 전념하여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농업 중심의 제도 개혁을 주장하였다. 『반계수록』은 후에 영조(英祖)의 명으로 출판되었다.
이익(李瀷)의 아버지 이하진은 남인(南人)이었는데, 서인(西人)의 탄압으로 평안도에 유배되었다. 이익은 어릴 적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죽고 형 이잠에게 길러졌으나, 형 또한 1706년에 처형당하였다.[23] 역경 속에서 벼슬을 포기하고 백과사전적인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저술하였다. 이익은 조선의 문인들이 청(清)을 이적(夷狄)으로 여기고 명(明)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는 행위를 비판하며, 청 지배하의 중국을 중화 문명으로 보았다.[24] 또한 이익은 서학(漢訳された西洋の学問) 연구를 주도하고,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디아스의 『천문략(天問略)』, 아레니의 『직방외기(職方外紀)』에 대한 발(跋)을 썼다. 이익은 지구설을 따르며,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 사상을 부정하였다.[25]
이익의 문하에는 안정복(安鼎福)과 권철신(權哲身)이 있다. 안정복은 『하학지남(下學指南)』『동사강목(東史綱目)』『열조통기(列朝通紀)』 등을 저술하였다. 『하학지남』에서는 조선의 유학이 이기설(理氣說)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하학(日常生活の中で聖人の道を実践すること)을 중시하였다.[26] 『동사강목』은 고려 말까지의 통사로, 자국의 왕조사를 “세가(世家)”로 하는 경향을 비판하며, 조선인에게는 조선이야말로 본기(本紀)라고 주장하였다.[26] 또한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斎)의 존황 사상을 이익에게 보낸 편지에서 평가하였다.[27] 권철신은 서양 학문에 대한 관심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세례명 안브로시오).[28]
이 학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권철신의 문인인 정약용(丁若鏞)이다. 정약용은 세 번째 형(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두 번째 형(정약전)과 함께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나, 1791년 기독교도가 조상 제사를 폐지하는 사건(진산 사건)이 일어나자 기독교에서 멀어졌다.[29] 형 정약종은 이후에도 전교에 헌신하며, 기독교를 한문을 읽지 못하는 일반 민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주교요지(主教要旨)』 2권을 전부 한글로 썼다.[30]
정약용 또한 중국 중심의 천하 사상과 화이관(華夷觀)을 부정하였다.[31] 또한 「일본고(日本考)」를 저술하여 일본의 고학(古學)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오기 소라이(荻生徂徠), 다자이 슌타이(太宰春台) 등의 설을 인용하였다.[32] 1792년 상소하여 성제(城制)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정조(正祖)는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 수록된 슈렉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주어 연구하게 하였다.[33] 수원 화성(水原華城) 축성 당시, 거중기와 도르래를 이용하여 돈 4만 관(貫)을 절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34]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1800년 정조의 사후, 노론 벽파가 다시 권력을 잡았다. 1801년 기독교를 이유로 이익의 학파가 탄압을 받았다(신유교옥(辛酉敎獄)). 권철신과 정약종 등 140명이 처형당하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다.[35] 이후 서학은 금지되었다.
4. 2. 이용후생학파
18세기 후반 영조·정조 대에는 상공업 발전 및 기술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당시 오랑캐라 배척하던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 라고도 한다. 그들은 주로 청나라에 내왕하면서 청조 문화의 우수함을 보고 조선에 돌아와서 그 발달한 문화를 수입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견문을 토대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실학자는 주류인 노론파에서도, 특히 조선 연행사로 청나라를 방문했던 사람들 중에서 나타났다. 김정희는 박제가에게 배우고, 북경을 방문하여 옹방강과 원원을 알게 되었다.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과안록』 등을 저술했다.
4. 3. 실사구시학파
5. 실학의 영향
조선의 실학은 후세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청을 오랑캐로 여겨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청을 배우자는 북학론이 일반화되었지만, 청에 대한 의존만이 강조되었다. 서양 과학은 금지되었다.[40]
후에,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조선의 척화(攘夷) 정책에 반대하였고, 그의 문하에서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개화파가 형성되었다.[22]
실학의 영향으로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였다.
역사 분야에서는 이익의 제자 안정복이 우리 시각의 역사관을 반영한 강목체 형식의 역사서 《동사강목》을 저술했고, 그밖에 《열조통기(列朝通紀)》를 펴냈다. 이긍익은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한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한치윤은 《해동역사》를 편찬하여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종휘의 고구려사 연구와 유득공의 《발해고》 저술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지리 분야에서는 조선 후기에 서양 선교사가 만든 《곤여만국전도》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하여 전해짐으로써 지리학에서도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지도 제작에서도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정상기의 《동국지도》 및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권상기의 《팔도분도》 등이 대표적이다. 역사 지리서로는 유득공의 《사군지》,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신경준의 《강계고》 등이 나왔고, 인문 지리서로는 이중환의 《택리지》,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 정약용의 《조선수경(朝鮮水經)》,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 《산수경(山水經)》,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이 편찬되었다.
언어학 영역에서는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와 유희의 《언문지》, 황윤석의 《이재집(頤齋集)》 등이 나왔고, 한국의 방언과 해외 언어를 정리한 이의봉의 《고금석림》도 편찬되었다.
예술 영역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중국의 화풍을 모방하는 당시 풍토를 비판하고 조선의 화풍으로 확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이가 정선으로 중국 산수화의 모방이 아닌 우리의 자연을 그리려는 진경산수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전통 과학 기술을 계승하면서, 중국에 머물던 선교사를 통해 서양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과학 기술 발전에도 큰 진전이 있었다.
- '''천문학 분야''': 이익은 서양 천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으며, 김석문은 지전설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장, 이것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홍대용은 과학 연구에 힘썼으며, 김석문에 이어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내놓았는데,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전통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근대적 우주관으로 접근해 갔다. 현종 때인 1669년에 이민철과 송이영은 각각 혼천시계를 발명하였는데, 1960년대 전상운 교수는 그 중 송이영의 혼천시계에‘동양과 서양의 과학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성주덕은 《서운관지》를 펴내었는데,《서운관지》는 서운관의 내력과 천문·지리·역법(曆法)·기상 관측에 관한 사실에 대한 기록 때문에 독창적이고 정확하다고 한다.
- '''의학 및 생물학 분야''': 허준은 《동의보감》을 쓰는 업적을 통해 우리나라 전통 의학과 중국의 의학을 결합, 정리하였다. 정약용은 마진(홍역)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고 이 분야의 의서를 종합하여 《마과회통》을 편찬하였으며,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을 연구하여 실험하기도 하였다.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하여 사상의학을 확립하였다. 생물학과 관련된 저서는 김려의 《우해이어보》, 정약전의 《자산어보》 등이 있다.
- '''농업 기술 분야''': 실학자들은 농업의 발달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의 영향으로 많은 농서가 편찬되었다. 신속은 《농가집성》을 펴내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소개하고, 이앙법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박세당의 《색경》,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호수의 《해동농서》 등이 대표적인 농서이다. 조선 말기 서유구가 편찬한 《임원경제지》는 농업과 농촌 생활에 필요한 것을 종합한 일종의 농촌 생활 백과사전이었다.
5. 1. 국학의 발달
실학의 영향으로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였다.역사 분야에서는 이익의 제자 안정복이 우리 시각의 역사관을 반영한 강목체 형식의 역사서 《동사강목》을 저술했고, 그밖에 《열조통기(列朝通紀)》를 펴냈다. 이긍익은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한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한치윤은 《해동역사》를 편찬하여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종휘의 고구려사 연구와 유득공의 《발해고》 저술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지리 분야에서는 조선 후기에 서양 선교사가 만든 《곤여만국전도》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하여 전해짐으로써 지리학에서도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지도 제작에서도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정상기의 《동국지도》 및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권상기의 《팔도분도》 등이 대표적이다. 역사 지리서로는 유득공의 《사군지》,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신경준의 《강계고》 등이 나왔고, 인문 지리서로는 이중환의 《택리지》,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 정약용의 《조선수경(朝鮮水經)》,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 《산수경(山水經)》,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이 편찬되었다.
언어학 영역에서는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와 유희의 《언문지》, 황윤석의 《이재집(頤齋集)》 등이 나왔고, 한국의 방언과 해외 언어를 정리한 이의봉의 《고금석림》도 편찬되었다.
예술 영역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중국의 화풍을 모방하는 당시 풍토를 비판하고 조선의 화풍으로 확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이가 정선으로 중국 산수화의 모방이 아닌 우리의 자연을 그리려는 진경산수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5. 2. 과학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전통 과학 기술을 계승하면서, 중국에 머물던 선교사를 통해 서양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과학 기술 발전에도 큰 진전이 있었다.- '''천문학 분야''': 이익은 서양 천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으며, 김석문은 지전설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장, 이것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홍대용은 과학 연구에 힘썼으며, 김석문에 이어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내놓았는데,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전통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근대적 우주관으로 접근해 갔다. 현종 때인 1669년에 이민철과 송이영은 각각 혼천시계를 발명하였는데, 1960년대 전상운 교수는 그 중 송이영의 혼천시계에‘동양과 서양의 과학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성주덕은 《서운관지》를 펴내었는데,《서운관지》는 서운관의 내력과 천문·지리·역법(曆法)·기상 관측에 관한 사실에 대한 기록 때문에 독창적이고 정확하다고 한다.
- '''의학 및 생물학 분야''': 허준은 《동의보감》을 쓰는 업적을 통해 우리나라 전통 의학과 중국의 의학을 결합, 정리하였다. 정약용은 마진(홍역)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고 이 분야의 의서를 종합하여 《마과회통》을 편찬하였으며,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을 연구하여 실험하기도 하였다.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하여 사상의학을 확립하였다. 생물학과 관련된 저서는 김려의 《우해이어보》, 정약전의 《자산어보》 등이 있다.
- '''농업 기술 분야''': 실학자들은 농업의 발달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의 영향으로 많은 농서가 편찬되었다. 신속은 《농가집성》을 펴내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소개하고, 이앙법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박세당의 《색경》,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호수의 《해동농서》 등이 대표적인 농서이다. 조선 말기 서유구가 편찬한 《임원경제지》는 농업과 농촌 생활에 필요한 것을 종합한 일종의 농촌 생활 백과사전이었다.
5. 3. 백과사전류 편찬
5. 4. 실학파 문학
실학파 문학은 유학 이외의 실생활에 유익한 것을 목표로 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 곧 실학자들의 문학이다. 그들은 신선한 구상과 평이한 사실적 수법으로 시와 산문을 창작했으며, 한국의 속담이언(俗談俚言)을 자유로이 표현하고 풍자와 해학으로 서민적 정취를 섭취하여 한국의 한문학상 새로운 한 유파를 형성하였다.6. 실학의 의의 및 영향
실학은 실증적, 민족적, 근대 지향적 특성을 지닌 학문으로, 18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융성하였다.[40] 특히, 북학파 실학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다. 박규수는 조선의 척화(攘夷) 정책에 반대하였고, 그의 문하에서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개화파가 형성되었다.[22]
하지만, 조선의 실학은 청을 오랑캐로 여겨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청을 배우자는 북학론이 일반화되었지만, 청에 대한 의존만이 강조되었고, 서양 과학은 금지되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였다.[40]
7. 주요 실학자
이지함(1517–1578)은 포천과 아산의 현감으로 재직하며 관련 사업을 시행한 학자이자 예지력 있는 관리였다.[7][8] 실학 사상이 명확한 학문적 접근 방식으로 자리 잡기 이전의 인물이지만, 그의 업적은 실학 운동과 관련지어 이야기되고 있다.[9]
김육(1580–1658)은 전후 개혁가로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개정된 역법을 도입했으며 기술 개선을 지원했다.[10]
이수광(1563–1627)은 서양 과학, 종교, 사회 연구를 한국에 소개한 학자이자 관리였다.[10]
유형원(1622–1673)은 때로는 실학파 제1세대로 여겨지는 인물로,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고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배분하는 "공전제"를 주장했다.[11]
이익(1681–1764)은 실학파 제2세대로,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 세상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를 창시했다.[4][2][11][10]
안정복(1712–1791)은 이익의 제자였다.
윤휴(1617–1680), 박세당(1629–1703)은 시, 문학, 서예, 그림에 능한 학자였다.
유수원(1694–1755)은 때로는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 실용적인 학문을 통해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파)[4]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박지원(1737–1805)은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 실용적인 학문을 통해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파)[4]의 중심 인물이었다.[2][12]
신경준(1712–1781), 위백규(1727–1798), 홍대용(1731–1783)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주장한 천문학자였다. 이덕무(1741–1793), 박제가(1750–1815)는 북학파의 일원으로 과거 제도를 특히 비판했다.[13]
김정희(1786–1856)는 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 실제 상황에 맞춰 진실을 추구하는 학파)[4]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정약용(1762–1836; 다산으로도 알려짐)은 실학의 제3세대를 이끌었다.[14][11][5][15]
서유구(1764-1845)와 최한기(1803-1877)가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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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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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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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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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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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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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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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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