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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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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야마 사건은 1963년 5월, 일본 사이타마현 사야마시에서 발생한 여고생 유괴 살인 사건이다. 피해자의 실종과 협박장, 몸값 요구가 있었고, 용의자 이시카와 가즈오가 체포되었으나, 자백의 신빙성과 증거의 조작 의혹으로 인해 재판 과정에서 부락민 차별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시카와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세 차례의 재심 청구가 모두 기각되었다. 이 사건은 여러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일본 사회의 부라쿠민 차별, 사법 제도와 인권 문제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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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마 사건
사건 개요
명칭사야마 사건
일본어 명칭狭山事件 (さやまじけん)
발생 위치사이타마현 사야마시
발생 날짜1963년 5월 1일
유형아동 살해 (교살)
아동 강간
유괴
피해자
나이16세
용의자 (유죄 판결)
이름(유죄 여부 논란 있음)
유죄 판결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 (1963년 재판)
혐의
혐의 내용가중 살인
강간
유괴
형량
형량사형 (1963년)
무기 징역 (1973년, 1994년 가석방)
재판 정보
최고재판소 판례 사건명강도강간, 강도살인, 사체 유기, 공갈미수, 절도, 삼림 절도, 상해, 폭행, 횡령
최고재판소 판례 사건번호쇼와 49년 (あ) 제2470호
최고재판소 판례 재판 날짜1977년 (쇼와 52년) 8월 9일
최고재판소 판례 판례집형집 제31권 5호 821쪽
최고재판소 판례 법정명최고재판소 제2소법정
최고재판소 판례 재판장요시다 유타카
최고재판소 판례 배석 판사오카하라 마사오, 오쓰카 키이치로, 모토바야시 유즈루, 구리모토 가즈오
최고재판소 판례 다수 의견전원 일치

2. 사건 발생

1963년 5월 1일, 사이타마현 사야마시에서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당시 16세)이 하굣길에 실종되었다.[1] 그날 저녁, 여학생의 집에는 몸값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배달되었다. 협박장은 5월 2일 자정까지 여학생의 집 근처에 200000JPY(당시 약 556USD)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1]

5월 2일, 경찰은 몸값 전달 장소에 잠복했다. 여학생의 언니(나중에 자살)가 가짜 돈을 가지고 약속 장소에 나갔지만, 한 남자가 접근하여 말을 걸다 경찰을 의심하고 도주하여 체포에 실패했다.[1]

5월 4일 아침, 여학생은 농가 골목길에서 강간당한 후 살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1] 언론은 한 달 전 발생한 무라코시 요시노부 유괴 사건과 마찬가지로 경찰의 범인 검거 실패를 비난했다.

사건 발생 전후의 자세한 경과는 다음과 같다.

사건・재판의 경과
연도월일사건
1963년5월 1일하교 중이던 여고생이 행방불명되고, 자택에 몸값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도착[190]
5월 2일협박장에 지정된 장소에 현금을 가져갔지만, 범인은 현금을 받지 않고 도주. 경찰이 범인 체포에 실패[190]
5월 4일여고생의 시체가 발견[190]


2. 1. 협박장

1963년 5월 1일, 피해 소녀가 하굣길에 행방불명된 후, 소녀의 집에 협박장이 배달되었다. 협박장은 소녀의 학생 수첩과 함께 흰 봉투에 담겨 있었으며, 파란색 볼펜으로 쓰여 있었다.

협박장 원문은 다음과 같다.

> 아이의 목숨을 알고 싶다면 5월 2일 밤 12시에

>

> 돈 200000JPY 여자 한 명이 가지고 사노야의 문 앞에 있어라.

>

> 친구가 차를 가져갈 테니 그 사람에게 건네주어라.

>

> 시간이 1분이라도 늦으면 아이의 목숨이 없다고 생각해.

>

> 형찰에는 이름 알면 아이는 죽는다.

>

> 만약 차를 가져간 친구가 시간대로 무사히 돌아오지 못하면

>

> 아이는 세이부엔의 연못 속에 죽어 있으니 그곳에 가 보아라.

>

> 만약 차를 가져간 친구가 시간대로 무사히 돌아오면

>

> 아이는 1시간 후에 차로 무사히 돌려보내겠다,

>

> 다시 한 번 말한다. 형찰에는 말하지 마라.>

> 이웃 사람에게도 말하지 마라>

>   아이가 죽어버린다.>

> 만약 돈을 가지러 가서 다른 사람이 있다면

>

> 그대로 돌아와서 아이를 죽여 버리겠다.

협박장에는 몸값으로 200000JPY을 요구했으며, 5월 2일 밤 12시에 사노야(사노야 주점) 앞에 돈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또한 경찰에 알리면 아이를 죽이겠다는 협박도 포함되어 있었다.

협박장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 "少時様"이라는 의미 불명의 문자를 지운 후 피해자 소녀 아버지의 성명이 쓰여 있었다.
  • "4월 29일"이 "5월 2일"로, "앞의 문"이 "사노야의 문"으로 수정되었지만, 사노야에는 문이 없었다.
  • 맞춤법 및 한자 표기 오류가 발견되었다.
  • "時(때 시)"의 土(흙 토)가 잘못되어 主(주인 주)의 필기체로 쓰여졌다.
  • 히라가나 つ를 써야 할 곳에 가타카나 ツ를 썼다.
  • 편지 날짜에 한자 숫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혼용했다.
  • 일본어 조사 は를 쓸 때 わ와 は를 혼용했다.
  • 히라가나 で를 써야 할 곳에 한자 出을 썼다.


이러한 특징들은 피의자 이시카와 카즈오의 필적 및 학력과 관련하여 중요한 증거로 다루어졌다. 특히 "時"의 오자와,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혼용, 조사 혼용, 한자 사용 등은 이시카와가 경찰서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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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사 및 체포

경찰은 피해자 집 근처의 이시다 양돈장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1963년 5월 23일, 이시다 양돈장 직원이었던 이시카와 가즈오(당시 24세)가 폭행, 절도, 공갈 미수 혐의로 체포되었다.[18] 체포 당시 이시카와 가즈오의 집에서 발견된 고무 끈은 살해 현장 근처에서 발견된 피해자 자전거의 고무 끈과 매우 유사했다.[86]

이시카와는 체포 초기 범행을 부인했으나, 경찰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의 소지품(가방, 만년필, 손목시계)이 발견되는 등 증거가 나오면서 결국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이 자백은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7] 이시카와는 이후 재판 과정에서 무죄를 주장하며 자백을 번복했다.

사건 및 재판 경과는 다음과 같다.

사건・재판의 경과
연도월일사건
1963년5월 1일하교 중이던 여고생이 행방불명되고, 자택에 몸값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도착.[190]
5월 2일협박장에 지정된 장소에 현금을 가져갔지만, 범인은 현금을 받지 않고 도주. 경찰이 범인 체포에 실패.[190]
5월 4일여고생의 시체가 발견.[190]
5월 23일이시카와 가즈오, 공갈 미수・절도・폭행 혐의로 체포.[18]
6월 13일이시카와, 절도・산림 절도・상해・폭행・횡령 혐의로 기소.[18]
6월 17일이시카와, 보증금 5만 엔으로 보석, 강도 강간・강도 살인・시체 유기 혐의로 재체포.[88][198]
6월 20일이시카와, 3명 공범 자백.
6월 23일이시카와, 단독 범행 자백.
7월 9일이시카와, 강도 강간・강도 살인・시체 유기 및 공갈 미수 혐의로 추가 기소.[18]
9월 4일우라와 지방 법원에서 첫 공판. 단독 범행 자백 유지.
1964년3월 11일우라와 지방 법원, 사형 판결.[202][203]
9월 10일도쿄 고등 법원에서 항소심 제1회 공판. 이시카와, 범행 부인으로 전환.
1974년10월 31일도쿄 고등 법원, 원심 판결 파기, 무기 징역 판결.[18][205]
1977년8월 9일최고 재판소, 상고 기각 결정.[19][206]
8월 30일도쿄 고등 법원에 제1차 재심 청구 신청.
1986년8월 21일도쿄 고등 법원에 제2차 재심 청구 신청.
2006년5월 23일도쿄 고등 법원에 제3차 재심 청구 신청.



이시카와는 체포 전, 사건 당일 알리바이에 대해 거짓 진술을 했으며, 체포 후에도 여러 차례 진술을 번복했다.

3. 1. 이시카와 가즈오의 알리바이

체포 전 이시카와는 경찰 조사에서 사건 당일(1963년 5월 1일)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151][152]

  • 8시경 - 형과 함께 근처에서 일을 시작.
  • 16시경 - 일을 마치고 귀가. 이후에는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보냄.
  • 21시경 - 저녁 식사 후 취침.


이시카와 체포 후인 1963년 5월 25일에도 이시카와의 친척과 친구들은 "이시카와는 사건 당일 지붕 수리를 하러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117] 그러나 이 주장은 가족, 친척, 친구들과 입을 맞춘 거짓으로 드러났다.[150] 이시카와는 허위 알리바이의 근거로 형을 이용했음에도 "형이 범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가족의 기둥인 형이 체포되면 큰일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내가 죄를 뒤집어쓰기로 했다"고 진술했다.[118][119][120] 그러나 이 진술은 스스로 범인이라고 의심하는 자와 함께 있었다고 주장해도 알리바이가 성립하지 않는 모순이 있으며, 이 점은 "극히 부자연스럽다", "괴상한 진술", "도저히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비판받았다.[84]

범행 자백 후 이시카와는 사건 당일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을 번복했다.[122]

  • 14시 대 - 이리마가와역에서 하차, 우유를 마시며 걷기 시작.
  • 15시 대 - 50분경, 사야마시 이리마가와의 카사시 가도의 교차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피해자와 마주침.
  • 16시 30분경 - 강간 및 살인을 실행.
  • 17시 대 - 시체 처리에 대해 30분 정도 생각한 후, 시체를 고구마 구덩이 옆으로 옮김. 협박장을 수정.
  • 18시 대 - 짚 밧줄을 훔침. 시체를 고구마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고 피해자의 집으로 피해자의 자전거를 타고 출발.
  • 19시 대 - 피해자의 집으로 가는 도중, 산림에서 피해자의 교과서와 가방을 버림. 30분경 피해자의 집에 도착하여, 현관 유리문에 협박장을 꽂아 넣음. 걸어서 돌아가는 도중, I 양돈장에서 삽을 훔침.
  • 20시 대 - 훔친 삽으로 구멍을 팜. 고구마 구덩이에서 시체를 꺼내 시체 매장용 구덩이에 매장. 삽은 보리밭에 버림.
  • 21시 대 - 자택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음.


사형 판결 후, 자백을 철회하고 무죄를 주장하면서 이시카와는 다시 사건 당일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경했다.[122]

  • 7시 이후 - "일하러 간다"고 말하고 도시락을 지참하고 집을 나섬. 그러나 일하러 가지 않고, 이리마가와역에서 세이부 신주쿠행 급행을 타고, 세이부엔에서 하차, 세이부엔에서 2시간 이상을 보낸 후, 토코로자와의 파칭코 가게에서 시간을 보냄.
  • 14시 대 - 이리마가와역에서 하차, 일 땡땡이가 발각되면 아버지에게 혼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서쪽 출구에서 계속 시간을 보냄. 카네코 야채 가게의 지인으로부터 "파칭코 치러 왔어?"라는 질문을 받음 (이시카와 가즈오는 이렇게 주장하지만, 해당 야채 가게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123]).
  • 15시 대 - 담배와 성냥을 삼. 이리마가와 초등학교(당시는 이리마가와역 서쪽 출구에 있었음. 현재는 이전)의 축산에서 쉬고 있는데 비가 옴.
  • 16시 대 - 이리마가와역 서쪽 출구 앞의 짐 헛간에 도착.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19시가 넘을 때까지 3시간 이상 비를 피함. 이 동안, 16시경에 중학생 집단을 보았고, 17시경에 잔반을 싣고 존슨 기지에서 이시카와의 자택 방면으로 향하는 I 양돈장의 차를 보았다고 한다.[124]
  • 19시경 - 자택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음.
  • 22시경 - 식사와 입욕 후 취침. 침대에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이 오토바이를 타고 흠뻑 젖어 귀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죄 주장으로 전환한 이후의 알리바이는 가족의 증언 외에는 뒷받침할 증거가 없고, 유원지, 파칭코 가게, 초등학교, 짐 헛간 등 어디에서도 이시카와의 모습은 목격되지 않았다. 또한, 이시카와는 이전에 가족과 입을 맞춰 알리바이를 위조했던 경위가 있어 재판에서는 사실로 인정되지 않았다. 도쿄 고등법원 판결에서의 "이시카와 거짓말쟁이론"[126]을 비난하고 있는 사야마 변호단의 마츠모토 켄오도 알리바이를 둘러싼 이시카와의 허언에 대해서는 다투지 않았다.[127]

4. 재판 과정

이시카와 가즈오는 경찰에 체포된 후 처음에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1963년 6월 20일에 납치 및 살인을 자백했다.[4] 그러나 이시카와와 그의 지지자들은 경찰이 그를 거의 한 달 동안 고립시키고 협박하여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5]

이시카와는 가중 살인, 강간, 납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이시카와의 형량은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94년에 가석방되었다.[10]

이 사건은 부라쿠민 출신인 이시카와가 사회적 소수자로서 차별을 받았다는 점에서 인권 단체와 변호사들의 주목을 받았다.[11] 이들은 법원이 이시카와가 유죄라고 추정했다고 주장했다.[11] 부락 해방 동맹 등 부락 해방 운동 단체는 이 사건 재판을 '''사야마 차별 재판'''이라고 불렀다.[25] 그러나 일본 변호사 연합회는 이 사건을 재심 지원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21] 재심 억울한 사건 전국 연락회의 가맹 사건에도 포함되지 않았다.[22] 1977년 최고재판소는 상고 기각 결정에서 "사야마 재판 차별설"을 부정했다.[140]

이시카와 가즈오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른바 '''3대 물증'''(가방, 만년필, 손목시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사야마 사건 3대 물증 관련 의문점
물증내용의문점
손목시계피해자가 사용하던 시티즌 코니 6형발견된 것은 시티즌 으로, 다른 물건이었다. 변호 측은 증거 공개를 통해 품촉에 실려 있던 측면 번호가 견본 시계의 것임을 확인했다.[128][129]
만년필피해자가 펜글씨 수업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만년필만년필 안 잉크는 블루 블랙이었으나, 피해자가 사용한 잉크는 라이트 블루였다. 또한, 이시카와의 자택 수색 당시 발견되지 않았던 만년필이 "자백" 후에 갑자기 발견되었다.
협박장범인이 피해자 가족에게 보낸 협박장경찰 측 증거인 협박장 필적이 이시카와의 필적과 다르며, 당시 이시카와는 글자를 쓰는 능력이 없었다.



최고재판소는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 손목시계: 측면 번호가 다른 것은 수사관의 실수이며, 발견된 손목시계는 피해자나 그 언니가 사용하던 것이 맞다.
  • 만년필: 피해자 또는 이시카와가 잉크를 채워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만년필이 발견된 장소는 경찰관이 간과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 협박장: 협박장 필적과 이시카와의 필적 특징은 동일하며, 이시카와는 한자를 몰랐지만 보조 수단을 통해 협박장을 작성할 수 있었다.


오노 스스무 등 국어학자는 협박장이 이시카와의 일본어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분석했지만,[136] 재판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137]

4. 1. 1심

1963년 9월 4일, 우라와 지방 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이시카와는 단독 범행을 자백했다.[18] 같은 날, 우라와 지방 법원은 이시카와에 대한 접견 금지를 해제했다.

1964년 3월 7일, 이시카와는 아는 순사장인 세키 겐조에게 "저는 반드시 사람을 죽이고 반성을 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또 저는 어떤 벌을 받더라도 결코 불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201]

1964년 3월 11일, 우라와 지방 법원은 이시카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202][203] 재판장은 우치다 다케후미였다.

4. 2. 항소심

이시카와는 항소 과정에서 무죄를 주장하며 어떠한 형사적 책임도 거부하기 시작했다.[8] 그의 형량은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8] 1969년, 부라쿠 해방 동맹이 그의 사건을 맡았지만, 일본 공산당 지지자인 그의 변호사를 비판하는 데 집중했다. 이에 일본 공산당은 부라쿠 해방 동맹을 비판했다.[8] 1975년, 이시카와의 변호사는 이시카와의 반공주의적 성향을 이유로 사임했다.[8]

4. 3. 상고심

이시카와 가즈오는 경찰이 거의 한 달 동안 자신을 고립시키고 협박하여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5] 그는 강도강간, 강도살인, 사체유기 및 공갈미수로 우라와 지방재판소(현 사이타마 지방재판소)에 기소되었고,[18] 1964년 3월 11일 우라와 지방재판소는 이시카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5. 증거 논란

이시카와 가즈오는 1심에서 범행을 인정했지만, 1964년 9월 10일 도쿄 고등 법원 항소심에서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 변화에는 부락 해방 운동가 오기하라 유스케의 암시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173]

1심에서 범행을 인정한 것은 "인정하면 10년 안에 감옥에서 내보내 주겠다"는 경찰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죄 주장으로 돌아선 후에도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세키 순사부장에게 자백 사실을 언급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찰에 대한 감정은 악화되었고, 1966년에는 오기하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유죄 판결한 재판장과 경찰관들을 사형시켜 달라는 저주의 말을 하기도 했다.[176]

1974년 10월 31일, 도쿄 고등 법원은 변호단의 무죄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원심의 사형 판결을 파기하고 무기 징역을 선고했다. 사형을 선고하지 않은 이유로는 범행의 우연성, 전과가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5. 1. 유죄 증거


  • 협박장에 적힌 "時(때 시)" 자는 土(흙 토) 대신 主(주인 주)의 필기체로 쓰여졌다. 이시카와가 경찰서장에게 보낸 편지에도 같은 오류가 있었다.
  • 이시카와와 협박장 작성자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필기 방식을 공유한다.
  • 히라가나 つ를 써야 할 곳에 가타카나 ツ를 쓴다.
  • 편지 날짜에 한자 숫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혼용한다.
  • 일본어 조사 は를 쓸 때 わ와 は를 혼용한다.
  • 히라가나 で를 써야 할 곳에 한자 出을 쓴다.
  • 이시카와는 나카타 집에 협박장을 전달하러 갈 때 가마쿠라 가이도에서 세 바퀴 달린 차가 지나갔다고 진술했다. 자백 후, 경찰은 같은 시기에 가마쿠라 가이도를 지나간 세 바퀴 차 운전자를 찾았다.[50]
  • 이시카와는 나카타 집에 협박장을 전달하러 갈 때 근처 농부에게 "나카타 에이사쿠 씨 댁이 어디입니까?"라고 물었고, 에이사쿠는 나카타의 아버지였다. 경찰이 이시카와를 용의자 대질 심문했을 때, 농부는 그 장소를 물어본 사람은 "분명히" 이시카와라고 증언했다.[50]
  • 이시카와는 나카타 집에 협박장을 전달하러 갈 때 나카타 집 근처에 차가 주차된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비료 상인이 같은 시기에 소형 밴을 그곳에 주차했음을 확인했다.[50]
  • 나카타의 시신은 수건과 손수건으로 묶여 있었다. 전자는 쓰키시마 식품 공업 주식회사, 후자는 이소코 베이코쿠텐이라는 쌀 가게에서 배포했다. 이시카와는 두 물건을 모두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50]
  • 몸값 전달 시도 중, 나카타의 누나와 전직 군 경찰이 납치범의 목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 모두 이시카와의 목소리였다고 증언했다.[50]
  • 이시카와는 처음에 하루 종일 집 근처에서 형과 함께 일했다고 주장했으나, 경찰은 그의 알리바이가 거짓임을 밝혀냈다.[50]
  • 6월 26일, 이시카와의 자백에 따라 그의 자택에서 만년필이 발견되었다.[112]
  • 7월 2일, 이시카와의 자백에 따라 시계를 버렸다는 장소 부근에서 시계가 발견되었다.[112]

5. 2. 무죄 주장 측 증거

이시카와 가즈오와 그의 지지자들은 법원 판결의 주요 근거가 된 자백이 경찰의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한다.

이시카와 측은 이시카와가 유괴 협박 편지를 쓸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가난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체포 당시 24세였지만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문맹이었다. 그러나 협박 편지에는 많은 한자가 포함되어 있었고, 필적 감정가들은 명백히 다른 필체라고 증언했다. 또한 협박 편지나 봉투에서 이시카와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다.[12]

이시카와 측은 나카타 요시에의 만년필이 이시카와의 집에서 발견된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만년필은 이시카와의 집을 세 번이나 수색한 후에야 발견되었다. 이시카와 체포 당일 12명의 형사가 2시간 동안 집을 수색했지만 만년필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6월 18일 14명의 형사가 다시 2시간 동안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다. 두 차례의 수색 8일 후, 만년필은 이시카와의 부엌 문틀에서 발견되었다.

도쿄 고등 법원과 최고 법원은 26명의 형사들이 문틀을 간과했다고 진술했지만,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다르다. 도쿄 고등 법원은 위치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라고 했고, 최고 법원은 키 작은 사람은 문틀 위를 보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문틀의 높이는 약 1.83m였고, 두 번째 수색 직후 찍은 사진에는 문 앞에 작은 사다리가 있었다.

한 베테랑 경찰 형사는 훈련된 경찰 수사관들이 밝은 분홍색 펜을 간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고, 두 번이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더욱 상상하기 어렵다고 증언했다. 이시카와 집 수색에 동원된 수사관들은 최고 전문가들이었고, 사건은 이미 큰 문제가 되어 경찰은 범인을 찾기 위해 철저한 수색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문틀은 경찰 형사 교과서에 일상적인 수색 장소로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검찰 주장은 주로 이시카와의 자백에 근거하지만, 이 자백은 범죄 현장의 물리적 배치 및 특징과 일치하지 않는 진술로 가득 차 있다.

이시카와와 피해자가 함께 있는 것을 본 증인은 없다. 자백에는 두 사람이 낮에 수백 미터를 함께 걸었다고 되어 있지만, 사건 당일은 마을 축제 날이었고 10명 이상이 밭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800명 이상이 축제에 모였지만 아무도 두 사람을 보지 못했다.

자백에 따르면 이시카와는 피해자가 비명을 질러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약 20m 떨어진 밭에서 일하던 남자는 비명을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500m 떨어진 곳에서 축제 소리를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지만, 비명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

이시카와의 자백에는 피해자가 싸움 중 머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되어 있지만, 토양 분석 결과 혈흔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검시 보고서에 따르면 이시카와가 피해자를 목 졸라 살해했다면 목에 멍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은 없었고 천으로 묶은 자국만 있었다.

자백에는 이시카와가 54kg의 시신을 숲에서 마을과 집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변호인단은 건장한 청년들이 54kg 무게의 시신을 같은 길로 운반하는 실험을 했지만, 아무도 그 무게를 끝까지 옮기지 못했다. 검시관은 시신을 밧줄로 묶어 구멍에 떨어뜨리면 발목에 자국이 남아야 하는데, 그런 흔적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살인 현장과 시신 발견 장소에서 여러 발자국이 발견되었지만, 이시카와의 발자국과 일치하는 것은 없었다.

이러한 불일치와 모순은 사야마 변호팀이 이 사건의 세 번째 재심 청구의 일환으로 도쿄 고등 법원에 제출했다.[12]

6. 부라쿠민 차별 문제

이시카와 가즈오는 피차별 부라쿠민 출신으로, 이 사건은 일본 사회의 부라쿠민 차별 문제를 드러냈다.[23][24] 부락 해방 동맹 등 인권 단체들은 이 사건을 "사야마 차별 재판"으로 규정하고[25] 이시카와의 무죄를 주장하며 지원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사건과 재판의 배경에 "부락 차별에 기인하는 무학무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28]

그러나 이 사건을 차별 재판으로 보는 것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일본 국민 구원회는 "사야마 사건을 차별 재판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모든 사건이 차별 재판이 된다"라고 비판했다.[33] 1977년 최고재판소도 "사야마 재판 차별설"을 부정했다.[140]

이시카와 본인도 차별받는 부락 출신이라서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런 시대였습니다"라고 말했다.[30] 당시에는 가난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31]

6. 1. 부락 해방 동맹과 일본 공산당의 갈등

초기에는 일본 공산당 계열의 변호사가 이시카와를 지원했으나, 이시카와가 무죄를 주장하면서 부락 해방 동맹이 지원에 나서면서 갈등이 발생했다. 부락 해방 동맹은 이 사건을 "차별 재판"으로 규정하고, 일본 공산당은 이를 비판하며 양측의 대립이 심화되었다.[186]

7. 재심 청구

이시카와 가즈오와 변호인단은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해 왔다. 1994년 가석방된 이후에도 이시카와는 "살인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다"며 재심을 통해 결백을 증명하고자 노력했다.[10]

2006년 5월 23일, 이시카와와 변호단은 제3차 재심 청구를 제기했다. 같은 해 12월, 이시카와는 다다 요코 반권력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9년 12월, 도쿄고등재판소는 도쿄 고등 검찰청에 증거 공개를 권고했고, 2010년 5월 13일 검찰은 삼자 협의에서 36점의 새로운 증거를 공개했다.[187] 2015년 1월 23일에는 도쿄고검이 사건 당시 수사에서 확보해 보관 중이던 증거품 목록 279점을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이시카와가 직접 쓴 엽서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188] 또한, 도쿄고검이 사건 현장 항공사진 112장을 공개함에 따라 변호단의 조사가 시작되었다.[189]

8. 사회적 영향 및 평가

사야마 사건은 일본 사회에 부라쿠민 차별 문제를 강하게 제기한 사건이다. 이시카와 가즈오가 부라쿠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인권 단체와 변호사들은 법원이 그를 유죄로 추정했다고 주장했다.[11] 이 사건은 부락 차별과의 연관성이 제기되어 시민 운동에서 큰 쟁점이 되었다.[23][24] 부락 해방 동맹 등 부락 해방 운동 단체들은 이 재판을 '사야마 차별 재판'이라고 불렀다.[25]

그러나 '차별 재판'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부라쿠 내부에서도 반대 의견이 있었다.[32] 일본 국민 구원회는 '차별 재판'이라는 용어 사용을 비판했고,[33] 1977년 최고재판소도 "사야마 재판 차별설"을 부정했다.[140]

사야마 사건은 수사 과정의 문제점도 지적받았다.[20] 이시카와와 변호인단은 억울함을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했지만, 일본 변호사 연합회가 지원하는 재심 사건은 아니었다.[21]

이 사건은 언론 보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변호인 측 견해에 따라 기사를 쓰지 않은 신문사는 부락 해방 동맹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았고,[25] 대부분의 매스컴은 이시카와 가즈오를 "전 수형자"가 아닌 "씨"를 붙여 부르게 되었다.

이 사건은 사법 제도와 인권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이시카와 가즈오가 범인이라는 증거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40] 부락 해방 운동 측에서는 이시카와가 '진범'이었다고 해도 이 사건이 부락 해방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45][46]

9. 관련 자료

이 사건의 관련 인물로는 나카타 나오토, 아오키 에이고로, 야마가미 마스오, 나카야마 타케토시가 있다.

9. 1. 관련 단체

부락 해방 동맹은 이시카와의 무죄를 주장하며 지원 활동을 펼쳤다.[1] 일본 국민 구원회는 초기 이시카와를 지원했으나, 부락 해방 동맹과의 갈등으로 지원을 중단했다.[1] 전국 부락 해방 운동 연합회(전해련)는 사야마 재판을 차별 재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1]

9. 2. 관련 인물


  • 나카타 나오토
  • 아오키 에이고로
  • 야마가미 마스오
  • 나카야마 타케토시

9. 3. 관련 작품

(이전 출력에서 언급했듯이,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관련 작품'에 대한 정보가 없으므로 이 섹션에 내용을 추가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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