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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식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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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공식 처형은 1968년 2월 1일, 베트남 전쟁 중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남베트남 경찰 응우옌 응옥 로안이 베트콩 분대 리더 응우옌 반 렘을 즉결 처형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AP통신 사진 기자 에디 아담스가 촬영한 사진으로 인해 전 세계에 알려졌으며, 사진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반대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 속 응우옌 반 렘은 민간인 복장으로 즉결 처형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당성 논란이 일었다. 사진 촬영자 에디 아담스는 퓰리처상을 수상했지만, 사진으로 인해 로안과 렘 두 사람의 인생이 파괴되었다고 자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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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년 2월 - 1968년 동계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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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년 2월 - 후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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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식 처형
사건 개요
명칭응우옌반렘 처형
다른 명칭사이공에서의 처형, 베트콩 포로의 거리 처형
발생 위치베트남 공화국 사이공 10군 응오자뜨 거리 252번지
좌표10°45′49.68″N 106°40′15.6″E
발생 날짜1968년 2월 1일
사진
응우옌반렘 처형 사진
에디 아담스 (AP 통신) 촬영 "사이공에서의 처형". 총을 쏘는 사람이 응우옌응옥로안 중령, 총에 맞는 사람이 응우옌반렘 대위.
관련 인물
처형자응우옌응옥로안
피해자응우옌반렘 (별명: 바이롭)

2. 배경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되던 1968년 초, 미국 정부와 군 수뇌부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2][3] 그러나 1968년 1월 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VC)은 남베트남 전역의 주요 도시를 기습 공격하는 테트 공세를 감행하며 전쟁의 양상을 급변시켰다.

특히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 시)에서는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는 등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4][5], 이는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사회에 생생하게 전달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6]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믿음은 흔들렸고, 전쟁의 실상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7]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남베트남 국가경찰 총수인 응우옌 응옥 론 준장이 베트콩으로 지목된 포로 응우옌 반 렘을 거리에서 즉결 처형하는 장면이 AP 통신 소속 종군 사진기자 에디 아담스의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이 사진은 테트 공세의 충격과 맞물려 베트남 전쟁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강력한 이미지가 되었고[8],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 1. 테트 공세 이전

응우옌 반 렘은 베트콩(VC)의 대위였으며, 코드명 바에이 롭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내 응우옌 티 롭과 함께 사이공에서 타이어를 위장 사업으로 하면서 비밀리에 무기 밀매업자로 활동했다.

응우옌 응옥 론은 베트남 공화국 국가 경찰(RVNP)의 수장이자, 베트남 공화국 육군(ARVN)의 준장이었다. 그는 텟 공세를 예상했으며, VC가 작전 기지로 사용하던 안 꽝 사원을 점령하기 위해 RVNP를 지휘하는 것을 포함하여, 사이공에서 ARVN의 대응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에디 아담스는 AP 통신의 종군 사진작가였다. 이전에 미국 해병대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그는 두려움 없이 위험에 가까이 접근하여 사진을 찍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종종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아담스는 1965년부터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베트남에 있었으며, 1968년 2월 1일 미국 방송 회사 (NBC)로부터 쩌런에서의 전투 소식을 들었다. 그는 NBC 기자 하워드 터크너, 카메라맨 보 후잉과 보 수, 음향 기사 레 푹 딘을 만났다. 그들은 쩌런으로 차를 함께 타고 가서 분쟁을 취재했다.

2. 2. 테트 공세

베트남 전쟁은 1950년대에 시작되었으며, 미국은 초기부터 남베트남에 "군사 원조 고문단"을 파견하며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1962년에는 이 고문단을 남베트남 군사 지원 사령부(MACV)로 개편하며 미국군의 개입 수준을 높였다. 1968년 초,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과 MACV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베트남 전쟁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공언했고, 많은 미국 국민들도 이를 믿고 있었다. 당시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 같은 주요 언론들도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1968년 1월 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테트 공세라 불리는 대규모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세로 남베트남의 여러 도시가 공격받았으며, 특히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 시)에서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야 할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관 부지까지 베트콩에게 침입을 허용하고 일시적으로 점령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미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전까지 베트남 전쟁의 전투는 주로 농촌이나 산악 지대에서 벌어져 미국 텔레비전 방송이 충분히 취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테트 공세는 도시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사이공에 있던 방송국의 취재진과 카메라맨들 앞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 국민들은 컬러 영상과 위성 중계를 통해 생생한 전투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는 모습, 미군이 혼란에 빠진 모습 등이 그대로 방영되면서 미국 내에서 군 지도부에 대한 불신감이 커졌다. 이 시기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비율은 27%에서 44%로 급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에디 아담스가 촬영한 '사이공식 처형' 사진은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며 미국 내 반전 여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3. 사이공 전투

베트콩(VC)의 대위였던 응우옌 반 렘(코드명 바에이 롭)은 아내 응우옌 티 롭과 함께 사이공에서 타이어 가게를 위장 사업으로 운영하며 비밀리에 무기 밀매업자로 활동했다.[1]

베트남 공화국 국가 경찰(RVNP)의 수장이자 베트남 공화국 육군(ARVN)의 준장이었던 응우옌 응옥 론은 텟 공세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사이공에서의 ARVN의 대응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특히 베트콩이 작전 기지로 사용하던 안 꽝 사원을 점령하기 위해 RVNP를 지휘했다.

AP 통신의 종군 사진작가였던 에디 아담스는 이전 미국 해병대 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접근하여 사진을 찍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1965년부터 베트남 전쟁을 취재해 왔으며, 1968년 2월 1일 미국 방송 회사(NBC)로부터 사이공 내 쩌런 지역에서의 전투 소식을 듣고 NBC 기자 및 촬영팀과 함께 현장으로 이동하여 취재에 나섰다.

3. 즉결 처형

1968년 테트 공세 중이던 2월 1일, 사이공 시가전에서 체포된 베트콩 용의자 응우옌 반 렘은 베트남 공화국 경찰 총장 응우옌 응옥 로안 앞으로 끌려왔다. 당시 현장에는 AP통신의 사진기자 에디 아담스와 NBC 뉴스 소속 보 수(Võ Sửu|보 수vie) 등 여러 취재진이 있었다.

로안은 자신의 .38 스페셜 스미스 & 웨슨 보디가드 리볼버를 꺼내, 결박된 상태의 렘의 머리를 거리에서 즉시 쏘아 살해했다.[2] 이 즉결 처형 장면은 에디 아담스가 촬영한 사진과 보 수가 촬영한 영상을 통해 그대로 기록되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응우옌 응옥 로안이 응우옌 반 렘을 치명적으로 쏜다. 그의 시신이 땅에 떨어지고, 그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쳐 나온다.
1968년 2월 1일, 사이공 거리에서 응우옌 응옥 로안이 베트콩 용의자 응우옌 반 렘을 즉결 처형하는 장면. NBC 뉴스 카메라맨 보 수() 촬영.


일부에서는 로안이 취재진 앞에서 자신의 결단력을 과시하기 위해 처형을 감행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3. 1. 응우옌반렘 체포

1968년 1월 30일부터 시작된 테트 공세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군대가 남베트남 주요 도시들을 기습 공격한 사건이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역시 공격 대상이었다. 테트 공세 이틀 뒤인 2월 1일, 사이공 시가전 중 베트콩 분대 지휘관으로 알려진 응우옌 반 렘 대위가 남베트남군에게 체포되었다.

응우옌 반 렘은 베트콩(VC)의 대위였으며, '바에이 롭'이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했다. 그는 아내 응우옌 티 롭과 함께 사이공에서 타이어 가게를 운영하며 이를 위장 사업으로 삼아 비밀리에 무기를 밀매한 것으로 알려졌다.[1]

1968년 2월 1일, 에디 아담스를 포함한 AP 통신, 미국 방송 회사(NBC), 아메리카 방송사(ABC) 기자 및 촬영팀은 쩌런 지역의 전투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안 꽝 사원 근처에 있었다. 같은 날 오전,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던 렘은 베트남 공화국 육군(ARVN) 해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해병대는 그를 기자들이 모여 있던 장소로 데려왔다. 기자들은 이 상황을 인지했고, NBC와 ABC 카메라맨은 촬영을 시작했다.

남베트남 당국은 렘이 테트 공세 중 베트콩에 반대하는 주요 인사들을 살해하는 작전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렘이 응우옌 응옥 론 장군의 부하이자 친구였던 경찰 소령과 그의 가족 전체를 살해했다는 주장이 1980년대에 제기되었고, 에디 아담스도 이를 믿고 언급하기도 했다.[4][5] 이후에는 렘이 살해한 대상이 경찰 소령이 아니라 ARVN 장갑 부대 장교인 응우옌 투안 중령과 그의 가족이라는 다른 버전의 이야기도 나왔다.[6] 그러나 베트남 전쟁 역사가 에드윈 E. 모이즈 등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주장이 사건 초기 로안 장군의 설명에는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남베트남 측의 선전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역사학자 맥스 헤이스팅스는 "진실은 결코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으며[7][8], 연구자 크리스토퍼 손더스 역시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9] 이 외에도 렘이 경찰과 베트콩 양측을 위해 일한 이중 첩자였다거나, 단순히 탈출하려다 붙잡힌 하급 정보원이었다는 다른 주장들도 존재한다.[11]

3. 2. 처형 과정

1968년 테트 공세가 시작된 지 이틀 후인 2월 1일, 사이공에서의 시가전 중 베트남 공화국 육군(ARVN) 해병대는 베트콩(VC)으로 활동하던 응우옌 반 렘을 체포했다. 당시 렘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1] 그는 남베트남군 응우옌 뚜안 중령과 그의 가족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체포된 렘은 베트남 공화국 국가 경찰(RVNP)의 수장이자 ARVN 준장이었던 응우옌 응옥 로안에게 인계되었다. 마침 그곳에는 AP 통신의 사진기자 에디 아담스와 NBC 뉴스의 기자 하워드 터크너, 카메라맨 보 후잉과 Võ Sửu|보 수vie, 음향 기사 레 푹 딘 등 취재진이 쩌런 지역의 전투를 취재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로안은 ARVN 해병에게 렘을 사살하라고 지시했으나, 병사가 망설이자 직접 자신의 .38 스페셜 스미스 & 웨슨 보디가드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2] 아담스는 로안이 렘을 위협하여 심문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진을 찍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로안은 즉시 렘의 머리를 향해 총을 발사하여 그를 즉결 처형했다. 이 순간 아담스는 사진을 촬영했고, 거의 동시에 NBC 카메라맨 보 수는 이 장면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렘은 총을 맞고 쓰러졌고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처형 직후 로안은 기자들에게 다가가 사망한 남베트남인과 미군을 언급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후 렘의 시신은 거리에 방치되었다가 나중에 집단 매장지로 옮겨졌다. 아담스는 나중에 당시 상황에 대해 로안이 총을 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으며, 포로를 위협하는 일반적인 심문 과정으로 생각하고 카메라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4. 처형의 정당성 논란

1968년 1월 말 테트 공세 당시, 베트콩은 남베트남 주요 도시를 공격했으며, 심지어 미국 대사관까지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베트남 전쟁이 최종 단계에 있다고 믿었던 미국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전까지 주로 농촌 지역에서 벌어지던 전투와 달리, 테트 공세는 도시에서 전개되었고, 텔레비전을 통해 생생한 전투 장면이 미국 안방에 그대로 중계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디 애덤스가 촬영한 응우옌 반 렘의 즉결 처형 사진은 전쟁의 참혹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미국 내 반전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처형 장면은 이후 처형을 집행한 응우옌응옥로안의 행위가 정당했는지, 국제법에 위배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전쟁 중 민간인 복장의 적군을 즉결 처형하는 행위의 윤리성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처형된 인물의 신원과 행적, 그리고 처형의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도 다양한 주장과 반박이 제기되며 논란이 이어졌다.

4. 1. 응우옌응옥로안의 주장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1968년 인터뷰에서 로안은 렘을 쏜 이유에 대해 "그는 군복을 입지 않았고, 군복 없이 쏘는 사람은 존경할 수 없다... 분노가 치솟았다"고 주장했다.[3] 이후 1972년 ''하퍼스 매거진''의 톰 버클리와의 인터뷰에서는 "사복 차림의 남자가 리볼버로 당신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응우옌 탄 닷, 일명 한 손이었다. 그는 공병 부대 지휘관이었다. 그는 경찰을 죽였다. 그는 그를 체포한 사람들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말했다.[2]

테트 공세 당시 베트콩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주요 인사들을 표적으로 삼아 살해했는데, 일부 저자는 렘이 이러한 활동에 관여했다고 주장한다. 1980년대에는 렘이 로안 장군의 부하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경찰 소령과 그의 가족 전체(아내와 아이들 포함)를 살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사진을 촬영한 에디 애덤스 역시 이 이야기를 믿고 언급하기도 했다.[4] "나는 그 베트콩이 가족을 날려버리는 사진은 없었다."[5] 그러나 2008년에는 이야기가 바뀌어, 렘이 살해한 대상이 경찰 소령의 가족이 아니라 남베트남군(ARVN)의 장갑 부대 장교인 응우옌 투안 중령의 가족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타났다.[6]

베트남 전쟁 역사가 에드윈 E. 모이즈는 렘의 잔혹 행위에 대한 후대의 이야기들이 로안의 초기 설명에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이야기들이 남베트남 정부의 선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역사학자 맥스 헤이스팅스는 이러한 상반된 주장들을 언급하며 "진실은 결코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으며,[7][8] 연구원 크리스토퍼 손더스 역시 비슷한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9]

렘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은 그가 경찰과 베트콩 양측을 위해 일했던 변절자였거나, 단순히 탈출하려다 붙잡힌 베트콩의 하급 정보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11]

처형된 인물이 베트콩 소속 군인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반면, 렘이 처형된 이유가 된 대량 살인에 대해서는, 렘이 시체 더미 곁에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한 것으로, 실제로 범인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처형된 인물이 실제로 응우옌 반 렘(군 코드네임은 "베이 롭"{Bay Lop})이라는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으며,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4. 2. 국제법적 관점

응우옌 반 렘의 처형은 국제법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49년 제네바 협약의 제3조약(포로의 대우에 관한 조약)에 따르면, 전투 행위자는 특정 요건을 갖추어야 전쟁 포로로서 보호받을 수 있다.[1] 렘의 경우, 제네바 협약 제4조에서 규정한 포로의 요건, 특히 전투원임을 나타내는 군복이나 고정된 식별 표지 착용 등의 조건을 충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점이 지적된다.[2][3] 실제로 처형 당시 촬영된 사진과 영상에서도 렘은 민간인과 구별되지 않는 평상복 차림이었다.[4]

이 때문에 렘을 Francs-tireurs|프랑-티렐영어(비정규 전투원 또는 변의병)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제네바 협약에 따른 포로로서의 보호를 주장할 수 없다는 해석이 존재한다.[5] 이러한 관점에서 응우옌 응옥 로안의 즉결 처형은 당시 전시법상 합법적인 행위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6] 실제로 로안은 이 사건으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으며,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이 처형과 관련하여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7][8]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인 1978년, 미국으로 이주한 로안에 대해 미국 의회에서 그의 처형 행위가 당시 남베트남 법률에 위배된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조사가 이루어졌다.[9] 미국 이민귀화국(INS)은 로안이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하여 영주권을 취소하고 추방하려 했다.[10][11] 하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such historical revisionism is folly|그러한 역사 수정주의는 어리석다영어"[12]고 언급하며 미국 법무부에 직접 지시하여 추방 절차를 중단시켰다.[13][14] 이 결정에 대해서는 INS의 판단을 지지하는 의견과 카터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하는 의견이 엇갈렸다.[15]

4. 3. 윤리적 비판

사진과 영상이 퍼지면서 처형을 실행한 응우옌응옥로안은 세계적으로 악명을 얻게 되었다. 이 사건 3개월 후인 5월 5일, 로안은 사이공에서 베트콩과의 전투 중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치료를 위해 호주로 이송되었으나, 현지에서 로안에 대한 격렬한 항의 운동이 일어나 미국 워싱턴 D.C.의 월터 리드 육군 의료 센터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비슷한 항의 시위가 벌어지며 그의 즉결 처형 행위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치료 후 사이공으로 돌아온 로안은 부상으로 인해 지휘관 임무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고아 지원 활동에 힘썼다. 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자 로안은 남베트남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는 버지니아주 페어팩스군 버크 교외에서 조용히 지내며 작은 식당을 운영했다.

1978년, 미국 의회에서 로안이 행한 렘의 약식 처형이 당시 남베트남 법률에 비추어 위법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조사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미국 이민귀화국(INS)은 로안이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영주권을 취소하고 추방하려 했다. 이에 대해 당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재임: 1977년-1981년)는 "그러한 역사 수정주의는 어리석다"(such historical revisionism is follyeng)고 언급하며, 미국 법무부에 직접 명령하여 INS의 추방 절차를 중지시켰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INS의 판단을 지지하는 의견과 카터 대통령의 조치를 지지하는 의견이 엇갈렸다.

로안은 추방은 면했지만, 이 사건으로 거주지가 알려지면서 그의 가게에 협박성 낙서가 써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로안은 기자의 취재 요청에 베트남 전쟁에 대해 침묵하며 "전쟁은 전쟁이고, 타협은 있을 수 없다"고만 말했다고 전해진다.

5. 사진 "사이공식 처형"

'''사이공 처형'''(Saigon Execution영어)은 AP 통신의 보도 사진 기자 에디 아담스가 촬영한 사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진은 베트남 공화국 경찰청장 응우옌 응옥 로안이 베트콩 용의자 응우옌 반 렘을 길거리에서 권총으로 즉결 처형하는 순간, 특히 총알이 렘의 머리에 박히는 찰나를 포착한 것이다.

이 사진은 아담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안겼다. 그는 훗날 "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여주고 돈을 받았다. 두 개의 생명이 파괴되었고, 나는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 나는 영웅이었다"고 술회했다. 또한 "그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이 죽었다. 그 장군은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카메라로 그 장군을 죽였다"고 덧붙이며 사진이 로안의 삶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했다.[10]

돌프 브리스코 미국사 연구 센터의 벤 라이트는 이 사진에 대해 "정지된 이미지의 본질에는 보는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기억에 남는 무언가가 있다. 비록 끔찍하지만, 총격 사건의 영화 영상은 동일한 긴박감과 뚜렷한 비극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평가하며, 순간을 포착한 사진 한 장이 가진 강력한 전달력과 파급력을 설명했다.[10]

5. 1. 사진 촬영

AP 통신의 보도 사진 기자 에디 아담스는 베트남 전쟁 취재를 위해 세 번째 파견 중이었다. 1968년 2월 1일, 그는 NBC 뉴스의 보 수와 함께 사이공의 차이나타운인 쩌론 지구에서 벌어진 전투를 취재하고 있었다. 쩌론에서의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근처에서 총성이 들리자 아담스와 동료 기자들은 현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남베트남군 병사들이 민간인 복장을 한 응우옌 반 렘을 붙잡아 연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담스는 처음에는 이를 본보기로 삼기 위한 일종의 공개 연행(Perp walk|퍼프 워크영어)으로 생각하고 취재를 시작했다.

NBC와 AP 취재진은 같은 날 아침 일찍부터 현장에 있었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철수하려던 참이었다. ABC의 카메라맨도 현장에 있었다. 해병대가 렘을 기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데려오자, NBC와 ABC 카메라맨은 촬영을 시작했다. 이때 응우옌 응옥 로안이 나타나 해병에게 렘을 사살하라고 지시했지만, 해병이 망설이자 로안은 직접 자신의 .38 스페셜 스미스 & 웨슨 보디가드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2] ABC 특파원은 로안의 모습에 겁을 먹고 촬영을 중단했다.

아담스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다가오는 세 사람에게 렌즈를 향해 몇 번 셔터를 눌렀다. 꽤 가까이, 아마 1.5m 정도까지 왔을 때, 병사들이 멈춰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왼쪽에서 한 남자가 파인더 안으로 들어와서,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 들어올렸다... 설마 쏠 줄은 몰랐다. 포로를 심문할 때 권총을 머리에 들이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포로를 위협하여 심문하는 모습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었다. 그런데 달랐다."

아담스는 로안이 렘을 위협하려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사진을 찍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로안은 실제로 렘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아담스는 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사진에는 총알이 렘의 머리에 박히는 찰나가 담겼다. 렘은 즉시 땅에 쓰러졌고 머리의 상처에서 피가 솟구쳤다. 로안은 기자들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며 사망한 미군과 남베트남인을 언급했다. 아담스는 로안이 "그들은 내 부하와 당신 국민들을 많이 죽였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아담스는 촬영 당시 로안이 실제로 발포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며, 로안이 남베트남 경찰의 고위 간부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가 사살 순간을 포착한 것은 우연이었고, 촬영 직후에도 자신이 정확히 어떤 순간을 찍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 역사적인 사진을 촬영하는 데 사용된 장비는 니콘 F 카메라와 35mm 단렌즈였다. 필름은 Kodak Tri-X|코닥 트라이엑스영어를 사용했으며, 셔터 속도는 1/500초, 조리개는 F11로 설정되어 있었다.

5. 2. 사진의 영향

이 사건은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되어 전 세계에 알려졌으며, 특히 에디 아담스가 촬영한 사진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진은 촬영 다음 날인 2월 1일 아침 미국의 주요 신문에 실렸고, 같은 날 저녁 NBC의 뉴스 프로그램 ''헌틀리-브링크리 리포트''를 통해 약 2천만 명의 미국 시청자에게 전달되었다.[2] 사진과 함께 보 수(Võ Sửu)가 촬영한 영상 역시 전 세계로 배포되었지만,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렘이 총에 맞는 순간을 포착한 아담스의 사진이었다.

뒤로 손이 묶인 사복 차림의 남성이 길거리에서 즉결 처형되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전쟁의 잔혹함과 무법적인 상황을 강렬하게 보여주었다. 이 사진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 내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테트 공세로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관까지 공격받는 등 전쟁이 예상보다 길고 격렬하다는 인식이 퍼지던 상황에서, 이 사진은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전쟁의 비인간적인 측면을 부각했다. 사진은 미국이 부정한 정권과 손잡고 싸우고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켰고, 반전 여론을 급격히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의 무익함과 승리에 대한 회의감을 자극하며 반전 운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데 기여했다. 다만 역사학자 데이비드 펄머터(David Perlmutter)는 사진이 여론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사진이 공개된 후 CBS의 저명한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와 같은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도 베트남 전쟁 개입을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민주당 내 대통령 예비 선거에서 반전 기조의 유진 매카시 후보에게 예상외의 고전을 겪었고, 결국 1968년 3월 31일 재선 불출마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에디 아담스의 이 사진은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이미지 중 하나로 남았다. 사진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8년 세계 보도 사진 대상을 수상했으며, 이듬해인 1969년 5월에는 퓰리처상속보 사진 부문을 수상했다.

5. 3. 사진에 대한 평가

AP 통신 사진 편집 부장을 지낸 할 뷰엘(Hal Buell)은 이 사진이 "한 프레임 안에 전쟁의 잔혹성을 모두 상징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이것이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사진이 영향력을 유지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사진 자체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BBC는 "두개골에 총탄이 박힌 충격으로, 총에 맞은 남자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총탄을 발사한 권총은 쏜 남자가 뻗은 팔 안에서 반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진 왼쪽의 병사는 충격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진을 보는 우리도) 바로 죽음의 순간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그와 같은 혐오감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 아담스의 사진을 아카이브하고 있는 돌프 브리스코 미국사 센터(Dolph Briscoe Center for American History)의 연구원 벤 라이트(Ben Wright)는 "사진이라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마음에 새겨지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총살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 영상은 사건의 참혹함을 전해주지만, 이 사진이 전하는 긴박감, 등골이 서늘해지는 참사(stark tragedy)와 같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수잔 손택은 저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다』에서 "아담스의 사진은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죽은 포로는 얼굴을 찌푸리며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이 사진이 찍힌 지 수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이 얼굴들을 보면서 내가 구경꾼 중 한 명이라는 불가사의함, 수상함을 느낀다. 그 마음은 옅어지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사진이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다양한 평가가 있다. 당시 AP 통신 사진 편집 부장으로 사진 배포를 결정했던 할 뷰엘은 "이 사진을 공개하면 두 가지 반응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둘기파는 '남베트남에 있는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보라'고 말할 것이고, 매파는 '이 사진은 사용해서는 안 됐다. 너희도 (나라의) 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라고. 그러나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이 사진이 가져온 충격은 그전까지 어느 쪽도 아니었던 사람들에게까지 미쳐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술회했다. 당시 『뉴욕 타임스』 사진 편집 부장이었던 존 G. 모리스(John G. Morris)는 사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1면에 게재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 사진은 다른 어떤 베트남 전쟁 영상보다 '과연 이 전쟁은 승리를 목표로 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사람들에게 품게 했다."고 평가했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귀도 크노프(Guido Knopp)는 『전후 50년 결정적 순간의 진실』에서 "텔레비전 영상이 아무리 마음을 흔들고, 아무리 공포의 장면을 담고 있어도 - 깊이가 없고, 마음에 와닿지도 않는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지만 사진은 우리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이 사진은 이후 전쟁의 잔혹성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고, 베트남 전쟁 종결을 향해 몇 개 사단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 이 사진을 본 이후 미국인들은 이런 전쟁에서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가 하고 자문하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사진 촬영의 윤리적 측면에 대한 고찰도 있다. 케빈 카터의 『독수리와 소녀』 사진 사례에 대한 논의에서처럼, 사진 기자가 처한 딜레마, 즉 인명 구조와 촬영 중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사실을 알림으로써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주장과 "눈앞의 생명을 구하지 않고 셔터를 누른 행위"에 대한 비판이 공존하며, 이는 사진 보도의 윤리적 기준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을 던진다.

6. 관련 인물들의 이후

응우옌 반 렘은 처형 후 시신이 거리에 버려졌다가 나중에 집단 매장지로 옮겨졌다.[1]

응우옌 응옥 론은 사건 이후에도 계속 복무하다 부상을 입었으며, 1975년 사이공 함락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전쟁 범죄 논란과 추방 시도가 있었으나 지미 카터 대통령의 개입으로 무산되었고, 1998년 사망했다.[11][12][14][15][16][17] (상세 내용은 응우옌응옥로안 섹션 참조)

에디 아담스는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지만, 사진이 가져온 파장과 응우옌 응옥 론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평생 고뇌했다. (상세 내용은 에디 애덤스 섹션 참조)

한편, 렘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알려진 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후안 응우옌은 2019년 미국 해군에서 소장으로 진급하여, 미군 내 최고위직에 오른 베트남계 미국인 장교가 되었다.[18][19]

2012년에는 더글러스 슬론이 애덤스의 사진과 관련 인물들의 삶, 베트남 전쟁 여론에 미친 영향을 다룬 단편 영화 ''사이공 68''을 제작했다.[20]

6. 1. 응우옌응옥로안

응우옌 응옥 론은 베트남 공화국 국가 경찰(RVNP)의 수장이자 베트남 공화국 육군(ARVN)의 준장이었다.[11] 그는 사이공식 처형 사건 이후에도 계속 준장 및 경찰청장으로 복무했으나, 같은 해 5월 작전 중 부상을 입었다.[11]

1975년, 사이공 함락 당시 남베트남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이민했다.[12] 미국에서는 그의 응우옌 반 렘 처형 행위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미국 의회의 압력으로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13] 그 결과 렘의 처형은 당시 남베트남 법에 따라 불법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14]

1978년, 미국 이민귀화국(INS)은 로안이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그를 추방하려 시도했다.[14] 그러나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그러한 역사 수정주의는 어리석은 짓"이라며 개인적으로 개입하여 추방 절차는 중단되었다. 카터 행정부는 로안이 베트남으로 송환될 경우 받을 처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15][16]

로안은 이후 미국에서 계속 거주하다가 1998년 7월 14일, 버지니아주 버크에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7]

6. 2. 에디 애덤스

에디 아담스(Eddie Adams)가 1969년 자신의 사진과 함께.


에디 아담스는 AP 통신 소속의 종군 사진작가였다. 이전에 미국 해병대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그는 위험에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10] 아담스는 1965년부터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으며, 1968년 2월 1일 미국 방송 회사(NBC)로부터 쩌런에서의 전투 소식을 듣고 NBC 기자 하워드 터크너, 카메라맨 보 후잉과 보 수, 음향 기사 레 푹 딘과 함께 현장으로 향했다.

기자들은 응우옌 응옥 로안 장군이 포로로 잡힌 베트콩 대원 응우옌 반 렘을 심문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담스는 로안이 총을 꺼내 겨누는 것을 단순한 위협으로 생각했으나, 로안은 실제로 렘의 머리에 총을 발사했다. 아담스는 이 순간을 포착하여 총알이 렘의 머리에 박히는 찰나를 사진에 담았다.[10]

이 사진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아담스에게 1969년 퓰리처상 (속보 사진 부문)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 사진은 아담스 자신에게 깊은 고뇌를 안겼다. 그는 세계 보도 사진 대상 시상식에서 "왜 사살하는 것을 막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으며, 퓰리처상 수상 직후에는 다음과 같이 자조적인 소감을 밝혔다.

나는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사살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돈을 받았다. 두 사람의 인생을 파괴한 대가로 나는 그 보상을 얻었다. 나는 영웅이었다.[10]


그는 훗날 이 사진에 대해 "그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이 죽었다. 그 장군은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카메라로 그 장군을 죽였다."라고 술회하며 사진이 가진 파괴력과 그로 인한 죄책감을 표현했다.[10]

사진 속 인물인 로안 장군은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사진으로 인해 '냉혹한 살인자'라는 낙인이 찍혀 평생 고통받았다. 아담스는 사진을 찍은 것을 후회하며 로안과 교류를 이어갔고, 1998년 로안이 사망했을 때 다음과 같은 추도문을 발표하며 그를 변호했다.

나는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쏜 사진으로 1969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 사진 속에서는 총을 맞은 남자와 응우옌 응옥 로안 장군, 두 사람이 죽었다. 장군은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내 카메라로 장군을 죽여 버렸다. 사진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사람들은 사진을 믿지만, 조작이 없을 때조차 사진은 거짓말을 한다. 사진은 진실의 절반일 뿐이다. 그 더운 날, 장군 앞에 끌려온 그 남자가, 여러 명의 미군을 날려버린 악당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그 사진은 말해주지 않는다. 로안 장군은 군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진정한 전사였다. 그가 한 일이 옳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처한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장군이 전쟁 희생자를 위해 베트남에서 병원 건설에 힘썼다는 것도 (사진에는) 적혀 있지 않다. 그 사진은 그의 인생을 그저 망쳐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결코 비난하지 않고 "네가 사진을 찍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찍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와 그의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와 연락을 계속했고,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약 반년 전, 그는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그의 부고를 들었을 때, 나는 "미안하다. 내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라고 적어 꽃을 보냈다.


아담스의 "사진은 진실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말은 포토저널리즘이 가진 힘과 그 이면의 위험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로 자주 인용된다.

6. 3. 응우옌반렘 가족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내용을 뒷받침할 정보가 없어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7. 한국의 시각

(내용 없음)

7. 1.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내용 없음)

7. 2. 사건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

베트남 전쟁은 1950년대에 시작되었으며, 남베트남에 "군사 원조 고문단"을 주둔시키고 있던 미국은 그 초기부터 군사적 개입을 시작했다. 1962년에 이 고문단을 개편하여 남베트남 군사 지원 사령부(MACV)를 조직하고, 미국군에 의한 개입의 정도를 강화했다. 1968년 초 시점에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과 MACV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베트남에서의 전쟁은 최종 단계에 있다"고 공언했으며, 미국 국민의 대부분도 그것을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1968년 1월 말의 테트 공세로 남베트남의 각 도시가 공격받고, 수도 사이공의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관 부지까지 베트콩의 침입을 허용하여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사태는, 미국 국민에게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 전까지 베트남 전쟁의 전투는 대부분 농촌 지역이나 산악 지대에서 전개되어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국이 충분히 취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테트 공세는 도시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수도 사이공에 있던 텔레비전 방송국의 취재 기자나 영상 카메라맨 앞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미국 국민은 컬러 영상으로 생생한 전투 모습을 위성 중계를 통해 실시간으로 텔레비전에서 시청하게 되었다.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는 모습도 중계되어, 눈앞까지 "적"이 다가오는 모습이나 미군이 후퇴하는 모습을 화면 속에서 목격하면서, 미국의 일반 시민과 정치인들은 군 지도자들에게 불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 기간에 "이 전쟁은 더 이상 졌다고 생각한다"고 여기는 미국 국민의 비율은 27%에서 44%로 급상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사진(사이공식 처형 사진)은 미국 내 여론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7. 3. 한국의 관점에서의 재해석

베트남 전쟁은 1950년대에 시작되었으며, 남베트남에 "군사 원조 고문단"을 파견했던 미국은 초기부터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1962년에는 이 고문단을 개편하여 남베트남 군사 지원 사령부(MACV)를 조직하고, 미국군의 개입 수준을 높여나갔다. 1968년 초,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과 MACV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베트남 전쟁이 마지막 단계에 있다고 공언했고, 대다수 미국 국민도 이를 믿었다.

그러나 1968년 1월 말 시작된 테트 공세는 이러한 인식을 뒤흔들었다. 남베트남의 여러 도시가 공격받았고, 특히 수도 사이공에서는 철저한 경비가 이루어져야 할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관 부지까지 베트콩이 침입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미국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전까지 베트남 전쟁의 전투는 주로 농촌이나 산악 지대에서 벌어져 미국 텔레비전 방송국이 충분히 취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테트 공세는 도시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사이공에 주재하던 방송국의 취재진과 카메라맨 앞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미국 국민은 컬러 영상으로 생생한 전투 장면을 위성 중계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게 되었다. 미국 대사관이 공격당하는 모습, 미군이 혼란에 빠진 모습 등이 중계되면서 미국 시민과 정치인들은 군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이 시기 "이 전쟁에서 졌다고 생각한다"고 응답한 미국 국민의 비율은 27%에서 44%로 급증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 사진(사이공식 처형)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참조

[1] 뉴스 Unforgettable https://people.com/a[...] 2018-07-05
[2] 간행물 Portrait of an Aging Despot https://harpers.org/[...] 1972-04
[3] 서적 Nothing and So Be It
[4] 문서 Eddie Adams oral history in Kim Willenson, Ed., ''The Bad War''
[5] 문서 Al Santoli, ed., ''To Bear Any Burden''
[6] 문서 Bai An Tran, "After 40 Years of the Tet Offensive in the Vietnam War - Half of the Truth Deciphered," VietCatholic News, February 7, 2008 http://www.vietcatho[...] 2018-01-27
[7]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Vietnam War
[8] 서적 Vietnam: An Epic Tragedy, 1945{{n-}}1975 HarperCollins 2018
[9] 웹사이트 History Thread: The Shooter in the Photograph https://the-avocado.[...]
[10] 뉴스 Eddie Adams' iconic Vietnam War photo: What happened next https://www.bbc.com/[...] BBC
[11] 웹사이트 The Saigon Execution https://digitaljourn[...]
[12] 뉴스 NGUYEN NGOC LOAN DIES AT 67 https://www.washingt[...] 1998-07-16
[13] 뉴스 U.S. Acts to Deport Saigon Official Who Killed Bound Prisoner in 1968 https://www.washingt[...] 1978-11-03
[14] 뉴스 U.S. Acts to Deport Saigon Official Who Killed Bound Prisoner in 1968 https://www.washingt[...] 1978-11-03
[15] 뉴스 Carter bids to halt Viet general's deportation https://www.newspape[...] 1978-12-06
[16] 뉴스 Viet executioner won't be deported https://www.newspape[...] 1978-12-02
[17] 뉴스 Nguyen Ngoc Loan, 67, Dies; Executed Viet Cong Prisoner https://www.nytimes.[...] 1998-07-16
[18] 뉴스 Huan Nguyen becomes first Vietnamese U.S. Navy Rear Admiral https://www.navsea.n[...] 2019-10-10
[19] 웹사이트 The Navy's First Vietnamese Admiral Saw His Family Killed by an Infamous Viet Cong Guerrilla https://www.military[...] Military.com 2022-07-19
[20] 웹사이트 Short Film http://tmotfilm.com/[...] 2022-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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