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추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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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초 1세는 956년부터 966년까지 레온의 왕이었다. 라미로 2세의 손자이자 오르도뇨 3세의 이복 동생인 그는 비만으로 인해 폐위된 후 코르도바의 압드 알 라흐만 3세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되찾았다. 통치 말년에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으며, 966년 독살당해 사망했다. 그의 뒤는 아들 라미로 3세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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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추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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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군주 유형 | 군주 |
이름 | 산초 1세 |
![]() | |
통치 | |
직위 | 레온의 왕 |
재위 기간 1 | 956년–958년 |
이전 통치자 1 | 오르도뇨 3세 |
다음 통치자 1 | 오르도뇨 4세 |
재위 기간 2 | 960년–966년 |
이전 통치자 2 | 오르도뇨 4세 |
다음 통치자 2 | 라미로 3세 |
개인 정보 | |
배우자 | 테레사 안수레스 |
자녀 | 라미로 3세 우라카 |
왕가 | 아스투르-레온 왕조 |
가문 유형 | 왕조 |
아버지 | 라미로 2세 |
어머니 | 우라카 산체스 데 팜플로나 |
출생일 | 기원전 932년경 |
사망일 | 966년 12월 19일경 |
매장지 | 산 이시도로 대성당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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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
별칭 | 뚱보왕 (es) |
2. 생애
라미로 2세와 두 번째 왕비 우라카 산체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951년 아버지 사망 후 이복형 오르도뇨 3세가 즉위하자, 산초는 카스티야와 나바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956년 오르도뇨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즉위 2년 만인 958년, 극심한 비만을 이유로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사촌인 오르도뇨 4세가 왕위를 차지했다. 산초 1세는 할머니 토다와 코르도바 칼리프국의 칼리프 압드 알라흐만 3세의 도움을 받아 왕위 회복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코르도바의 유대인 의사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에게 비만 치료를 받기도 했다.
960년, 나바라와 이슬람 연합군의 도움으로 레온을 점령하고 왕위를 되찾았다. 하지만 복위 후 이슬람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관계가 악화되었고, 통치 말기에는 귀족들의 반란과 카스티야, 갈리시아 귀족들의 독립 움직임으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966년 갈리시아 귀족 곤잘로 산체스가 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산초 1세는 라미로 2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우라카 산체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산초 1세와 토다의 외손자이기도 하다.951년 아버지 라미로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이복형인 오르도뇨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젊은 산초는 카스티야와 나바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형과 대립했다. 그러나 오르도뇨 3세는 레온 성벽 밖에서 반란군을 물리쳤다.
956년 오르도뇨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산초 1세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즉위한 지 불과 2년 만인 958년, 그는 극심한 비만을 이유로 페르난 곤살레스(오르도뇨 3세의 매형)가 이끄는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의 자리는 사촌인 오르도뇨 4세("사악왕")가 차지했다. 산초 1세가 코르도바 칼리프국과의 평화 조약을 존중하기를 거부했고, 957년 코르도바 군대에 패배한 사건 역시 그의 폐위에 영향을 미쳤다.
폐위된 산초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먼저 할머니인 토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토다 여왕, 산초 1세, 그리고 그의 아내 테레사 안수레즈는 958년 코르도바로 가서 코르도바 칼리프국의 칼리프 압드 알라흐만 3세와 협상을 벌였다. 협상의 결과, 산초는 두에로 강 유역의 일부 영토를 넘겨주는 대가로 왕위 회복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한 망명 기간 동안 코르도바 궁정의 유대인 의사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의 치료를 받았다. 하스다이는 산초에게 40일간 차 외에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도록 하여 그의 체중 감량을 도왔다.
959년 봄, 나바라와 이슬람 연합군은 사모라를 점령했고, 960년 하반기에는 레온을 점령하여 산초 1세를 다시 왕위에 앉혔다. 오르도뇨 4세는 아스투리아스로 도망쳤다.
2. 2. 폐위와 복위
951년 아버지 라미로 2세가 사망하고 이복형 오르도뇨 3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산초는 카스티야와 나바라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형과 대립했다. 956년 오르도뇨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산초 1세가 왕위에 올랐다.그러나 즉위 2년 만인 958년, 그의 극심한 비만을 문제 삼은 카스티야의 페르난 곤잘레스 백작이 이끄는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의 자리는 사촌인 오르도뇨 4세(알폰소 4세의 아들)가 차지했다. 산초 1세가 즉위 초 코르도바 칼리프국과의 평화 조약을 존중하지 않았고, 957년 코르도바 군대의 공격을 받아 패배한 것 역시 그의 폐위에 영향을 미쳤다.
왕위를 잃은 산초 1세는 할머니인 팜플로나의 토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토다 여왕, 산초 1세, 그의 아내 테레사 안수레즈는 958년 코르도바로 가서 코르도바 칼리프국의 칼리프 압드 알 라흐만 3세와 협상을 벌였다. 이 협상을 통해 산초 1세는 두에로 강 유역의 일부 영토를 넘겨주는 대가로 왕위 회복을 위한 군사적 지원과 비만 치료를 약속받았다. 코르도바 궁정의 유대인 의사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는 40일 동안 차 종류 외에는 아무것도 섭취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산초 1세의 체중 감량을 도왔다.
959년 봄, 나바라와 이슬람 연합군은 사모라를 점령했고, 960년 하반기에는 수도 레온을 점령하여 산초 1세를 다시 왕위에 앉혔다. 폐위되었던 오르도뇨 4세는 아스투리아스로 도망쳤다.
하지만 복위에 성공한 산초 1세는 압드 알 라흐만 3세와의 약속을 대부분 지키지 않았다. 이에 코르도바 칼리프국은 오르도뇨 4세를 지원하며 레온 왕국을 공격했다. 산초 1세의 통치 말기에는 귀족들의 반란이 잦았고, 카스티야와 갈리시아 귀족들의 독립적인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왕권은 약화되었다.
966년, 산초 1세는 독이 든 음식을 먹고 급사했다. 레온 왕국의 성직자 산피로가 기록한 연대기에 따르면, 갈리시아 귀족 곤잘로 산체스가 그에게 독이 든 사과를 주었다고 한다. 정확한 사망 날짜는 불분명하다.
2. 3. 통치 후기와 사망
960년 나바라와 이슬람 연합군의 도움으로 레온을 점령하여 왕위를 되찾았다. 하지만 복위를 도운 후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압드 알 라흐만 3세와 맺었던 두에로 강 유역 영토 할양 등의 약속을 대부분 지키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슬람 세력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그들은 오르도뇨 4세를 지원하며 레온 왕국을 위협했다.산초 1세의 통치 말년은 카스티야와 갈리시아 귀족들의 독립 움직임이 강해지는 등 왕권이 상당히 약화된 시기였다.
966년, 산초 1세는 레온 시에 산 펠라요 수도원을 세우고, 코르도바의 순교자 성 펠라요에게 봉헌했다. 이 수도원은 나중에 왕족 여성들이 머무는 중요한 장소인 인판타도 데 산 펠라요의 중심지가 되었다.
산초 1세는 966년 향년 35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독살로 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피로 연대기에 따르면, 반역 백작 곤살로 메넨데스(일부 기록에서는 곤살로 산체스로 언급되기도 하며,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제기된다)가 독이 든 사과를 주어 갈리시아의 카스트렐로 데 미뇨 수도원에서 살해했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사망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966년 11월 15일 이후 12월 19일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사후 아들 라미로 3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며, 당시 왕비는 테레사 안수레스였다.
3. 가계
레온의 왕인 라미로 2세와 우라카 산체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959년 3월 이전에 몽송 백작이자 카스티야 백작이었던 안수르 페르난데스의 딸 테레사 안수레스와 결혼하여[2] 아들 라미로 3세와 딸 우라카(Urraca)를 낳았다.
4. 매장
산추 1세는 카스트레로 데 미뇨 수도원에 묻혔으나, 이후 그의 유해는 레온으로 옮겨져 산 살바도르 데 팔라트 델 레이 교회에 안장되었다. 이 교회는 라미로 2세의 딸인 인판타 엘비라 라미레스가 수녀가 되기를 원하여 세운, 현재는 사라진 수도원의 일부였다. 산 살바도르 데 팔라트 델 레이 교회에는 산초 1세의 아버지 오르도뇨 3세와 형제 라미로 2세도 함께 묻혀 있었다.
이후 산 살바도르 데 팔라트 델 레이 교회에 묻혔던 세 명의 레온 군주의 유해는 산 이시도로 데 레온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유해는 복음 측 채플 중 하나의 모퉁이에 안치되었으며, 이는 알폰소 4세와 같은 다른 왕들의 유해와 함께 산 이시도로 데 레온 대성당의 왕족 묘소가 아닌 곳에 놓인 것이다.
참조
[1]
문서
Gundisaluus, qui dux erat (...) veneni pocula illi in pomo duxit
[2]
문서
Fecha en la cual aparecen juntos por primera vez en el diploma 356 del Monasterio de Celan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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