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크로체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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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타 크로체 성당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성당으로, 조토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프레스코화, 무덤과 기념비가 특징이다. 전설에 따르면 성 프란치스코가 세웠으며, 현재 건물은 1294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443년에 축성되었다. 1966년 아르노 강 홍수로 인해 피해를 입었으며, 19세기 이후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 전쟁 이후 공공 재산이 되었다. 성당에는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 유명 인사들의 무덤과 기념비가 있으며, 현재는 가죽 제품 학교로 사용되는 수도원 부속 시설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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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크로체 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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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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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성 십자가 성당 |
원어 이름 | Basilica di Santa Croce (이탈리아어) |
별칭 | 이탈리아 영광의 사원 (Tempio dell'Itale Glorie) |
위치 | 피렌체, 토스카나 주 |
국가 | 이탈리아 |
종교 | 가톨릭 교회 |
교회법적 소속 | 라틴 교회 |
수도회 | 작은 형제회 |
대교구 | 피렌체 대교구 |
지위 | 작은 바실리카 수도원 교회 |
축성 연도 | 1443년 |
건축 양식 | 고딕 건축, 르네상스 건축, 고딕 리바이벌 건축 |
기공 | 1294–1295년 |
완공 | 1385년 |
2. 역사
산타 크로체 성당은 세계에서 제일 큰 프란치스코회 성당이다.[2]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은 조토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6개의 예배당,[1] 무덤과 세노타프이다. 전설에서는 산타 크로체 성당이 성 프란치스코가 세웠다고 한다. 옛 건물을 대체한 현재 교회의 건설은 아마 아르놀포 디 캄비오에 의해 1294년 5월 12일에 시작되었고,[2] 피렌체의 부유한 가문들의 일부가 비용을 지불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축성을 해주었다. 건물의 디자인은 프란치스코회의 소박함을 추구하는 방식을 반영했다. 평면도는 115 미터 길이의 회랑과 2 개의 통로가있는 팔각형의 줄로 구분 된 이집트 또는 티 십자가 (성 프란치스코의 상징)이다.
성당의 남쪽은 수녀원이였고 현재도 일부 남아있다.
파치 채플이 있는 주 회랑인 프리모 키오스트로 (Primo Chiostro)는 사제단 회의장으로 지어져, 1470년대에 완공됐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두오모의 돔 디자인을 해내고 시행함)는 이 건물의 엄격하게 단순하면서 아무런 장식이 없는 디자인에 관여했다.
1560년에 루드 스크린이 반종교 개혁 발생으로 인한 변화의 일종으로서 사라졌고 조르조 바사리가 내부를 재건축하였다. 그 결과 교회의 장식에 손상이 생겼고 이전 루드 스크린에 있던 대부분의 제단이 소실되었다. 성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던 바르디 경당은 코시모 1세의 지시에 따라 회반죽으로 덮였고, 바사리는 벽에 새로운 제단을 설치하여 프레스코화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3]
종탑은 과거 번개로 손상이 생긴 것을 대체한 1842년에 지어졌다. 신고딕 양식의 대리석 파사드는 1857년-18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안코나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 니콜로 마타스 (Niccolo Matas)가 성당의 파사드를 디자인했고, 파사드 구성에 다윗의 별이 들어갔다. 마타스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히길 원했으나, 그는 유대인이였기에 성당의 문턱에 비문과 함께 존중을 받으며 묻혔다.
1866년에 성당 단지는 대부분의 종교적 건물들에 대한 정부의 압박으로서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 전쟁 이후 공공 재산이 되었다.[18][19]
19세기에 복원 작업 중 16세기 제단과 회반죽이 바르디 경당에서 제거되어 성 프란체스코의 삶을 묘사한 조토의 프레스코화가 드러났는데, 여기에는 ''성 프란체스코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다. 제단이 벽에 붙어 있던 부분이 없어진 이 그림은 19세기에 대대적으로 복원되었다. 이후 이 복원 작업은 조토의 작품임이 확실한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 제거되었고, 그림의 일부분이 없어진 채로 남았다.[6]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여러 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과정에서 우고 프로차치(Ugo Procacci)는 바디아 다폭화가 교회에서 반출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이것이 나폴레옹 점령 기간 동안 피렌체 바디아에서 제거되어 산타 크로체에 실수로 재설치된 것이라고 추론했다.[7]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레오네토 틴토리(Leonetto Tintori)는 조토의 페루치 경당 그림에서 백색 페인트와 덧칠을 제거하여 그의 원작을 드러냈다.[1]
1966년 아르노 강이 범람하여 피렌체의 많은 지역을 침수시켰는데, 산타 크로체 성당도 포함되었다. 물이 성당으로 들어와 진흙, 오염 물질, 난방유를 가져왔다. 건물과 예술품의 피해는 심각했으며 복구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오늘날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옛 기숙사는 Scuola del Cuoio (피렌체 장인 가죽학교)이다.[20]
프란치스코회 창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1211년 카시아 가도를 따라 피렌체를 방문했고, 1226년부터 1228년까지 수 명의 신자들과 함께 피렌체의 아르노 강 중류에 정착했다. 이들은 현재의 베카리아 광장 부근에 예배당을 건설했고, 신자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을 증축, 1252년에 완전히 개축했다.
1294년에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참여하여 재건축이 결정되었다. 조반니 빌라니는 1294년 5월 3일에 성대한 의식과 함께 기초석이 놓였다고 기록했다. 건축 비용은 피렌체 공화국 시민들이 제공했으며, 아르놀포가 1302년에 사망했을 때는 내진과 측랑이 완성된 상태였다. 1320년에는 성당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나, 14세기의 위기, 홍수, 페스트 등 여러 재난으로 완공이 지연되었다. 1385년경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되며, 1443년 1월 6일 주현절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참석한 가운데 베사리오네 추기경에 의해 성당이 성별되었다.
성당과 동시기에 탄생한 수도원은 성구실, 기숙사, 병실, 손님 숙박실, 식당, 도서관으로 구성되었다. 성당은 성별된 후에도 7세기에 걸쳐 증축 및 개수를 계속해 왔다. 16세기 후반 조르조 바사리의 개축과 19세기 산타 크로체 성당을 이탈리아 역사의 위대한 묘소로 만들기 위한 개축은 역사적, 정치적 변천의 결과였다.
1966년 피렌체를 덮친 대홍수는 산타 크로체 성당과 수도원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이때 치마부에의 ≪십자가≫가 크게 파손되었다.
2. 1. 건립 배경
산타 크로체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프란치스코회 교회이다.[2] 전설에 따르면 성 프란치스코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현재 교회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에 의해 1294년 5월 12일에 착공되어[2] 피렌체의 부유한 가문들이 비용을 지불했으며, 1442년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축성했다. 건물의 디자인은 프란치스코회의 소박함을 추구하는 방식을 반영하여, 평면도는 115 미터 길이의 회랑과 2 개의 통로가있는 팔각형의 줄로 구분 된 이집트 또는 티 십자가 (성 프란치스코의 상징)이다. 성당의 남쪽에는 수녀원이였고 현재도 일부 남아있다.파치 채플이 있는 주 회랑인 프리모 키오스트로 (Primo Chiostro)는 사제단 회의장으로 지어져, 1470년대에 완공됐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이 건물의 엄격하게 단순하면서 아무런 장식이 없는 디자인에 관여했다.
1560년에 루드 스크린이 반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사라졌고 조르조 바사리가 내부를 재건축하면서 교회 장식에 손상이 생겼고 이전 루드 스크린에 있던 대부분의 제단이 소실되었다.
종탑은 과거 번개로 손상된 것을 대체하여 1842년에 지어졌다. 신고딕 양식의 대리석 파사드는 1857년-1863년에 건설되었으며, 안코나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 니콜로 마타스 (Niccolo Matas)가 디자인했고 파사드에 다윗의 별이 들어갔다. 마타스는 유대인이였기에 성당 문턱에 비문과 함께 묻혔다.
1866년에 성당 단지는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 전쟁 이후 대부분의 종교적 건물들에 대한 정부의 압박으로서 공공 재산이 되었다.[4][5]
무세오 델로페라 디 산타 크로체 (Museo dell'Opera di Santa Croce)는 회랑 밖에 있는 수도원 식당에 위치해 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향한 기념비는 회랑에 서있다.
1966년 아르노 강이 범람하여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물이 들어와 진흙, 오염 물질, 난방유로 인해 건물과 예술품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복구에 수십 년이 걸렸다. 오늘날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옛 기숙사는 Scuola del Cuoio (피렌체 장인 가죽학교)이다.[8]
프란치스코회 창립자인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1211년 카시아 가도를 따라 피렌체를 방문했고, 1226년부터 1228년까지 수 명의 신자들과 함께 피렌체의 아르노 강 중류에 정착하여 예배당을 건설했다. 신자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은 증축되었고, 1252년에는 완전히 개축되었다.
이러한 건축 공사는 신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신자들 중에는 프란치스코회 규칙에 따라 최소한의 건물만을 원하는 자와 더 넓은 건축을 원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건 계획에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참여한 것으로 보이며, 조반니 빌라니는 1294년 5월 3일에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고 기초석이 놓인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건축 비용은 피렌체 공화국 시민들이 제공했다. 아르놀포가 1302년에 사망했을 때는 내진(内陣)과 측랑(翼廊)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건축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320년에는 성당이 사용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14세기의 위기, 홍수, 페스트 등 여러 가지 재난으로 완공이 크게 지연되었다. 1385년경에 완공되어, 1443년 주현절(1월 6일)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참석하에 베사리오네 추기경에 의해 성당이 성별(聖別)되었다.
수도원은 성당과 동시기에 탄생했다. 최초의 핵심 부분은 성구실, 기숙사, 병실, 손님 숙박실, 식당, 도서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당은 성별된 후에도 7세기에 걸쳐 증축, 개수를 계속해 왔다. 16세기 후반에 조르조 바사리에 의해 이루어진 개축이나 19세기에 산타 크로체 성당을 이탈리아 역사의 위대한 묘소로 만들기 위해 실시된 개축은 역사적·정치적 변천의 결과였다.
2. 2. 건축 과정
산타 크로체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프란치스코회 교회이다.[2] 조토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16개의 예배당,[1] 무덤과 세노타프가 이 성당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전설에 따르면 산타 크로체 성당은 성 프란치스코가 세웠다고 한다.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설계한 것으로 추정되는 현재 교회의 건설은 1294년 5월 12일에 시작되었으며,[2] 피렌체의 부유한 가문들이 비용을 지불했다. 1442년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축성하였다.[5] 건물의 디자인은 프란치스코회의 소박함을 추구하는 방식을 반영했다. 평면도는 115 미터 길이의 회랑과 2 개의 통로가있는 팔각형의 줄로 구분 된 이집트 또는 티 십자가 (성 프란치스코의 상징)이다.
성당 남쪽에는 수녀원이 있었고 현재도 일부 남아있다. 파치 채플이 있는 주 회랑인 프리모 키오스트로 (Primo Chiostro)는 사제단 회의장으로 지어져 1470년대에 완공됐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이 건물의 엄격하게 단순하면서 아무런 장식이 없는 디자인에 관여했다.
1560년에 루드 스크린이 반종교 개혁 발생으로 인한 변화의 일종으로서 사라졌고 조르조 바사리가 내부를 재건축하였다. 그 결과 교회의 장식에 손상이 생겼고 이전 루드 스크린에 있던 대부분의 제단이 소실되었다. 성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던 바르디 경당은 코시모 1세의 지시에 따라 회반죽으로 덮였고, 바사리는 벽에 새로운 제단을 설치하여 프레스코화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3]
종탑은 과거 번개로 손상이 생긴 것을 대체하여 1842년에 지어졌다. 신고딕 양식의 대리석 파사드는 1857년-18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안코나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 니콜로 마타스(Niccolò Matas)가 성당의 파사드를 디자인했고, 파사드 구성에 다윗의 별이 들어갔다. 마타스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히길 원했으나, 그는 유대인이였기에 성당의 문턱에 비문과 함께 존중을 받으며 묻혔다.
1866년에 성당 단지는 대부분의 종교적 건물들에 대한 정부의 압박으로서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 전쟁 이후 공공 재산이 되었다.[4][5]
19세기에 복원 작업 중 16세기 제단과 회반죽이 바르디 경당에서 제거되어 성 프란체스코의 삶을 묘사한 조토의 프레스코화가 드러났는데, 여기에는 ''성 프란체스코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다. 제단이 벽에 붙어 있던 부분이 없어진 이 그림은 19세기에 대대적으로 복원되었다. 이후 이 복원 작업은 조토의 작품임이 확실한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 제거되었고, 그림의 일부분이 없어진 채로 남았다.[6]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여러 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과정에서 우고 프로차치(Ugo Procacci)는 바디아 다폭화가 교회에서 반출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이것이 나폴레옹 점령 기간 동안 피렌체 바디아에서 제거되어 산타 크로체에 실수로 재설치된 것이라고 추론했다.[7]
1966년 아르노 강이 범람하여 피렌체의 많은 지역을 침수시켰는데, 산타 크로체 성당도 포함되었다. 물이 성당으로 들어와 진흙, 오염 물질, 난방유를 가져왔다. 건물과 예술품의 피해는 심각했으며 복구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2. 3. 중세 이후
산타 크로체 성당은 이탈리아 민간보호청의 지원을 받아 수년간 복원 작업을 진행 중이다.[9] 2017년 10월 20일, 성당에서 떨어진 벽돌에 맞아 스페인 관광객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성당은 폐쇄되었다.[10][11] 성당의 안정성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성당은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12][13] 이탈리아 문화부는 "이 비극적인 사건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리고 유지 보수에 대한 책임이 있는지 여부를 이해하기 위해 사법 당국의 조사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23]
프란치스코회 창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1211년 카시아 가도를 따라 피렌체를 방문했고, 1226년부터 1228년까지 수 명의 신자들과 함께 피렌체의 아르노 강 중류에 정착했다. 이들은 현재의 베카리아 광장 부근에 예배당을 건설했고, 신자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을 증축, 1252년에 완전히 개축했다.
1294년에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참여하여 재건축이 결정되었다. 조반니 빌라니는 1294년 5월 3일에 성대한 의식과 함께 기초석이 놓였다고 기록했다. 건축 비용은 피렌체 공화국 시민들이 제공했으며, 아르놀포가 1302년에 사망했을 때는 내진과 측랑이 완성된 상태였다. 1320년에는 성당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나, 14세기의 위기, 홍수, 페스트 등 여러 재난으로 완공이 지연되었다. 1385년경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되며, 1443년 1월 6일 주현절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참석한 가운데 베사리오네 추기경에 의해 성당이 성별되었다.
성당과 동시기에 탄생한 수도원은 성구실, 기숙사, 병실, 손님 숙박실, 식당, 도서관으로 구성되었다. 성당은 성별된 후에도 7세기에 걸쳐 증축 및 개수를 계속해 왔다. 16세기 후반 조르조 바사리의 개축과 19세기 산타 크로체 성당을 이탈리아 역사의 위대한 묘소로 만들기 위한 개축은 역사적, 정치적 변천의 결과였다.
1966년 피렌체를 덮친 대홍수는 산타 크로체 성당과 수도원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이때 치마부에의 ≪십자가≫가 크게 파손되었다.
2. 4. 1966년 대홍수와 복구
산타 크로체 성당은 1966년 피렌체를 덮친 대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치마부에의 ≪십자가≫가 크게 파손되었다. 성당은 이탈리아 민간보호청의 지원을 받아 수년간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21][9]2017년 10월 20일, 성당에서 떨어진 석조 파편에 맞아 스페인 관광객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22][10][11] 이 사고로 성당은 안정성 조사를 위해 일시적으로 폐쇄되었으며,[12][13] 이탈리아 문화부는 이 사건의 발생 원인과 유지 보수 책임 소재를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23]
3. 건축
산타 크로체 성당은 세계에서 제일 큰 프란치스코회 성당이다.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은 조토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6개의 예배당, 무덤과 세노타프이다. 전설에서는 산타 크로체 성당이 성 프란치스코가 세웠다고 한다. 옛 건물을 대체한 현재 교회의 건설은 아마 아르놀포 디 캄비오에 의해 1294년 5월 12일에 시작되었고, 피렌체의 부유한 가문들의 일부가 비용을 지불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축성을 해주었다. 건물의 디자인은 프란치스코회의 소박함을 추구하는 방식을 반영했다. 평면도는 115 미터 길이의 회랑과 2 개의 통로가있는 팔각형의 줄로 구분 된 이집트 또는 티 십자가 (성 프란치스코의 상징)이다. 성당의 남쪽은 수녀원이였고 현재도 일부 남아있다.
파치 채플이 있는 주 회랑인 프리모 키오스트로 (Primo Chiostro)는 사제단 회의장으로 지어져, 1470년대에 완공됐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두오모의 돔 디자인을 해내고 시행함)는 이 건물의 엄격하게 단순하면서 아무런 장식이 없는 디자인에 관여했다.
1560년에 루드 스크린이 반종교 개혁 발생으로 인한 변화의 일종으로서 사라졌고 조르조 바사리가 내부를 재건축하였다. 그 결과 교회의 장식에 손상이 생겼고 이전 루드 스크린에 있던 대부분의 제단이 소실되었다.
종탑은 과거 번개로 손상이 생긴 것을 대체한 1842년에 지어졌다. 신고딕 양식의 대리석 파사드는 1857년-18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안코나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 니콜로 마타스 (Niccolo Matas)가 성당의 파사드를 디자인했고, 파사드 구성에 다윗의 별이 들어갔다. 마타스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히길 원했으나, 그는 유대인이였기에 성당의 문턱에 비문과 함께 존중을 받으며 묻혔다.
1866년에 성당 단지는 대부분의 종교적 건물들에 대한 정부의 압박으로서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 전쟁 이후 공공 재산이 되었다.[18][19]
무세오 델로페라 디 산타 크로체 (Museo dell'Opera di Santa Croce)는 회랑 밖에 있는 수도원 식당에 위치해 있다. 그녀가 태어나고 이름이 붙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향한 기념비는 회랑에 서있다. 건물과 예술품에 대한 손상은 심각하여, 몇 십년간 수리를 거쳤다.
오늘날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옛 기숙사는 Scuola del Cuoio (피렌체 장인 가죽학교)이다.[20]
3. 1. 구조 및 특징
산타 크로체 성당은 세계에서 제일 큰 프란치스코회 성당이다. 조토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6개의 예배당, 무덤과 세노타프가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18][19] 전설에 따르면 산타 크로체 성당은 성 프란치스코가 세웠다고 한다. 옛 건물을 대체한 현재 교회의 건설은 아마 아르놀포 디 캄비오에 의해 1294년 5월 12일에 시작되었고, 피렌체의 부유한 가문들의 일부가 비용을 지불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축성을 해주었다. 건물의 디자인은 프란치스코회의 소박함을 추구하는 방식을 반영했다. 평면도는 115 미터 길이의 회랑과 2 개의 통로가있는 팔각형의 줄로 구분 된 이집트 또는 티 십자가 (성 프란치스코의 상징)이다.성당의 남쪽은 수녀원이였고 현재도 일부 남아있다. 파치 채플이 있는 주 회랑인 프리모 키오스트로 (Primo Chiostro)는 사제단 회의장으로 지어져, 1470년대에 완공됐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이 건물의 엄격하게 단순하면서 아무런 장식이 없는 디자인에 관여했다.
1560년에 루드 스크린이 반종교 개혁 발생으로 인한 변화의 일종으로서 사라졌고 조르조 바사리가 내부를 재건축하였다. 그 결과 교회의 장식에 손상이 생겼고 이전 루드 스크린에 있던 대부분의 제단이 소실되었다.
종탑은 과거 번개로 손상이 생긴 것을 대체하여 1842년에 지어졌다. 신고딕 양식의 대리석 파사드는 1857년-18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안코나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 니콜로 마타스 (Niccolo Matas)가 성당의 파사드를 디자인했고, 파사드 구성에 다윗의 별이 들어갔다. 마타스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히길 원했으나, 그는 유대인이였기에 성당의 문턱에 비문과 함께 존중을 받으며 묻혔다.
1866년에 성당 단지는 대부분의 종교적 건물들에 대한 정부의 압박으로서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 전쟁 이후 공공 재산이 되었다.[18][19] 무세오 델로페라 디 산타 크로체 (Museo dell'Opera di Santa Croce)는 회랑 밖에 있는 수도원 식당에 위치해 있다. 그녀가 태어나고 이름이 붙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향한 기념비는 회랑에 서있다. 건물과 예술품에 대한 손상은 심각하여, 몇 십년간 수리를 거쳤다. 오늘날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옛 기숙사는 Scuola del Cuoio (피렌체 장인 가죽학교)이다.[20]
3. 2. 파사드 (정면)
산타 크로체 성당은 8단의 계단으로 기초가 높여져 있다. 원래 파사드는 피렌체의 많은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미완성 상태였으며, 산 로렌초 성당과 유사했다.[15] 15세기에 쿠아라테지 가문이 파사드 건설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파사드 중앙에 가문의 문장을 넣는 것을 거부하여 무산되었다.[15]
오늘날의 파사드는 1853년부터 1863년에 걸쳐 안코나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 니콜로 마타스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시에나 대성당과 오르비에토 대성당에서 영감을 얻었다.[15] 신고딕 양식의 대리석 파사드는 1857년-1863년에 건축되었으며, 파사드 구성에는 다윗의 별이 들어갔다. 마타스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히길 원했으나, 유대인이였기에 성당의 문턱에 비문과 함께 존중을 받으며 묻혔다.
3. 3. 종탑
3. 4. 내부
산타 크로체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프란치스코회 성당이다. 조토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6개의 예배당, 무덤과 세노타프가 이 성당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전설에 따르면 산타 크로체 성당은 성 프란치스코가 세웠다고 한다. 옛 건물을 대체한 현재 교회의 건설은 아마 아르놀포 디 캄비오에 의해 1294년 5월 12일에 시작되었고, 피렌체의 부유한 가문들의 일부가 비용을 지불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축성하였다. 건물의 디자인은 프란치스코회의 소박함을 추구하는 방식을 반영했다. 평면도는 115 미터 길이의 회랑과 2 개의 통로가있는 팔각형의 줄로 구분 된 이집트 또는 티 십자가 (성 프란치스코의 상징)이다. 성당의 남쪽은 수녀원이였고 현재도 일부 남아있다.파치 채플이 있는 주 회랑인 프리모 키오스트로 (Primo Chiostro)는 사제단 회의장으로 지어져, 1470년대에 완공됐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이 건물의 엄격하게 단순하면서 아무런 장식이 없는 디자인에 관여했다.
1560년에 루드 스크린이 반종교 개혁 발생으로 인한 변화의 일종으로서 사라졌고 조르조 바사리가 내부를 재건축하였다. 그 결과 교회의 장식에 손상이 생겼고 이전 루드 스크린에 있던 대부분의 제단이 소실되었다.
팔각형 기둥열이 늘어선 길이 115m의 삼랑식 본당과 73.54m의 측랑으로 이루어진 T자형 건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5번째 경간부터 측랑을 포함한 주제단까지의 구역은 성직자만 출입이 가능했고, 칸막이에 의해 신자 구역과 분리되어 있었지만,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의 명령에 따라 조르조 바사리의 지휘하에 종교 개혁에 따른 교회 개축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 칸막이는 철거되었다. 이 개축 공사에서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14세기 프레스코화는 회반죽으로 덮였고, 대형 제단이 벽면을 따라 설치되었다(최근 재발견된 14세기 프레스코화는 성당 부속 미술관에서 관람 가능하다).
3. 5. 주요 예배당
주 제단 중앙에 걸린 십자가는 무명의 「피렌체의 화가」의 작품이다. 다익 제단화는 여러 화가의 협작으로, 중앙 패널의 성모는 니콜로 게리니가, 좌우 패널에 그려진 교회 박사들은 조반니 델 비온도와 무명의 화가가 담당했다.주 제단을 장식하는 프레스코 벽화는 1380년경 아뇰로 가디가 그린 것으로, ≪성십자가의 발견≫을 묘사하고 있으며, 오른쪽 벽면 상부에서 하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 대천사 미카엘이 셋(Seth)에게 지식의 나무 가지를 준다.
- 셋이 아담의 무덤에 나무를 심는다.
- 자란 나무로 다리를 건설하고, 이 다리에서 시바의 여왕이 무릎을 꿇고, 솔로몬은 케타를 벗겨 물에 빠뜨린다.
-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나무를 발견하여 십자가를 만든다.
- 성녀 헬레나가 땅을 파게 하여 성스러운 십자가를 발견한다.
왼쪽 벽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에 성십자가를 가져온다.
- 페르시아 왕 호스로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십자가를 빼앗아 백성들에게 받든다.
-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의 꿈
-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호스로의 목을 베고 예루살렘에 성십자가를 가져온다.
스테인드글라스 또한 아뇰로 가디의 디자인이다.
주 제단 오른쪽에 있는 페루치 가족 예배당과 바르디 가족 예배당의 벽면을 장식하는 조토의 프레스코화 장식은 주 제단을 장식하는 프레스코화보다 더 중요하다.(1320~1325년) 페루치 가족 예배당에는 《세례자 요한의 생애》와 《복음 사가 요한의 생애》가, 바르디 가족 예배당에는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가 그려져 있다.
위의 예배당들 옆에는 주니 가족 예배당, 릭칼디 가족 예배당, 베르루티 가족 예배당 등 세 개의 예배당이 더 있다.
오른쪽 측면에 있는 바론첼리 가족 예배당은 조토의 제자 타데오 가디의 작품인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보여주는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1332~1338년). 같은 오른쪽 측면에 있는 카스텔라니 가족 예배당은 타데오의 아들 아뇰로 가디와 조수들에 의해, 《성 안토니오, 세례자 요한, 복음 사가 요한, 바리의 성 니콜라의 생애》를 보여주는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주 제대 왼쪽에 있는 스피넬리 가족 예배당은 1837년에 개조되었다. 이어서 카포니 가족 예배당은 1926년 제1차 세계 대전 전몰자들의 어머니들에게 봉헌되었다. 리카졸리 가족 예배당은 19세기 초 루이지 사바텔리와 그의 두 아들에 의해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의 생애》를 묘사하는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풀치-베랄디 가족 예배당은 베르나르도 다디의 프레스코화 《성 로렌조와 성 스테파노의 순교》(1330년)로 장식되어 있으며, 제단에는 조반니 델라 로비아의 테라코타가 있다. 발디 디 베르니오 가족 예배당은 마소 디 반코의 프레스코화 《성 실베스트로의 생애》로 장식되어 있다.
왼쪽 측면에 있는 예배당 또한 발디 디 베르니오 가족 예배당이라고 불리며, 도나텔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보관되어 있다. 같은 왼쪽 측면에는 1584년 조반니 안토니오 도시오에 의해 건립된 니콜리니 가족 예배당이 있으며, 천장 장식은 볼테라노가, 조각은 피에트로 프랑카빌라가, 두 점의 제단화는 알레산드로 알로리가 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익랑 왼쪽 서쪽에 위치한 마키아벨리-살비아티 가족 예배당에는 야코포 리고치의 제단화 《성 로렌조의 순교》가 있다.
4. 예술
산타 크로체 성당에는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는 설교단을 제작하고, 그의 형제 줄리아노 다 마이아노와 함께 파치 예배당 문을 만들었다. 안토니오 카노바는 비토리오 알피에리의 기념비를 제작했다. 치마부에의 십자가는 1966년 홍수로 인해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현재 수도원 식당에 보관되어 있다.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는 메디치 예배당의 제단화를 제작했고, 루카 델라 로비아는 파치 예배당을 장식했다. 데시데리오 다 세티냐노는 마르수피니의 무덤과 파치 예배당 내 프리즈를 제작했다.
도나텔로는 남쪽 벽에 수태고지 부조를, 바르디 예배당 왼쪽에 십자가상을 제작했다. 또한 수도원 식당에는 본래 오르산미켈레를 위해 만들어진 ''툴루즈의 성 루이''가 있다. 아뇰로 가디는 카스텔라니 예배당과 성단소에 프레스코화와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작했다. 타데오 가디는 바론첼리 예배당의 프레스코화, 성구실의 십자가상, 그리고 그의 최고 걸작으로 여겨지는 수도원 식당의 ''최후의 만찬''을 제작했다. 조토는 페루치 예배당과 바르디 예배당 오른쪽에 프레스코화를 그렸으며, 바론첼리 예배당의 제단화 ''성모의 대관'' 역시 그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조반니 다 밀라노는 리누치니 예배당에 성모 마리아의 생애와 막달라 마리아의 장면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를 제작했다. 마소 디 방코는 바르디 디 브리니오 예배당에 ''성 실베스테르 1세의 생애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1335–1338년 작)를 남겼다. 주 회랑에는 헨리 무어의 전사 조각상이 있다. 안드레아 오르카냐의 프레스코화는 조르조 바사리의 리모델링 중에 대부분 사라졌지만, 수도원 식당에 일부가 남아있다.
안토니오 로셀리노는 남쪽 측랑에 ''Madonna del Latte''(1478년 작) 부조를 제작했고, 베르나르도 로셀리노는 브루니의 무덤을 만들었다. 산티 디 티토는 북쪽 측랑에 제단화 ''엠마오의 저녁식사''와 ''부활''을 제작했다. 조르조 바사리는 미켈란젤로 무덤의 조각상을 만들었으며(발레리오 치올리, 조반니 반디니, 바티스타 로렌치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그렸다.[24] 도메니코 베네치아노는 수도원 식당에 ''성 요한과 프란치시코''를 그렸다.
한때 산타 크로체 성당 내 메디치 예배당에 있었던 로렌초 디 니콜로의 폴립티크는 현재 분리되어 피렌체의 미술관들과 밀라노의 바가티 발세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 1. 프레스코화
산타 크로체 성당에는 여러 예술가들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조토는 페루치 예배당과 바르디 예배당 오른쪽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바론첼리 예배당의 제단화 ''성모의 대관'' 역시도 조토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으며, 타데오 가디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타데오 가디는 바론첼리 예배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성구실의 십자가상과 그의 최고 걸작이라 여겨지는 수도원 식당의 ''최후의 만찬''을 제작했다.조반니 다 밀라노는 리누치니 예배당에 성모 마리아의 생애와 막달라 마리아의 장면을 프레스코화로 남겼다. 마소 디 방코는 바르디 디 브리니오 예배당에 성 실베스테르 1세의 생애 장면을 프레스코화로 그렸다(1335–1338년). 아뇰로 가디는 카스텔라니 예배당과 성단소에 프레스코화를 제작하고, 카스텔라니 성단소의 스테인드 글라스도 제작했다. 안드레아 오르카냐의 프레스코화는 조르조 바사리의 리모델링 중에 크게 사라졌지만, 수도원 식당에 일부가 남아있다.
4. 2. 기타 작품
산타 크로체 성당에는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는 설교단을 제작하고, 그의 형제 줄리아노 다 마이아노와 함께 파치 예배당 문을 만들었다. 안토니오 카노바는 비토리오 알피에리의 기념비를 제작했다. 치마부에의 십자가 책형은 1966년 홍수로 인해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현재 수도원 식당에 보관되어 있다.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는 메디치 예배당의 제단화를 제작했고, 루카 델라 로비아는 파치 예배당을 장식했다. 데시데리오 다 세티냐노는 마르수피니의 무덤과 파치 예배당 내 프리즈를 제작했다.도나텔로는 남쪽 벽에 수태고지 부조를, 바르디 예배당 왼쪽에 십자가상을 제작했다. 또한 수도원 식당에는 본래 오르산미켈레를 위해 만들어진 ''툴루즈의 성 루이''가 있다. 아뇰로 가디는 카스텔라니 예배당과 성단소에 프레스코화와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작했다. 타데오 가디는 바론첼리 예배당의 프레스코화, 성구실의 십자가상, 그리고 그의 최고 걸작으로 여겨지는 수도원 식당의 ''최후의 만찬''을 제작했다. 조토는 페루치 예배당과 바르디 예배당 오른쪽에 프레스코화를 그렸으며, 바론첼리 예배당의 제단화 ''성모의 대관'' 역시 그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조반니 다 밀라노는 리누치니 예배당에 성모 마리아의 생애와 막달라 마리아의 장면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를 제작했다. 마소 디 방코는 바르디 디 브리니오 예배당에 ''성 실베스테르 1세의 생애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1335–1338년 작)를 남겼다. 주 회랑에는 헨리 무어의 전사 조각상이 있다. 안드레아 오르카냐의 프레스코화는 조르조 바사리의 리모델링 중에 대부분 사라졌지만, 수도원 식당에 일부가 남아있다.
안토니오 로셀리노는 남쪽 측랑에 ''Madonna del Latte''(1478년 작) 부조를 제작했고, 베르나르도 로셀리노는 브루니의 무덤을 만들었다. 산티 디 티토는 북쪽 측랑에 제단화 ''엠마오의 저녁식사''와 ''부활''을 제작했다. 조르조 바사리는 미켈란젤로 무덤의 조각상을 만들었으며(발레리오 치올리, 조반니 반디니, 바티스타 로렌치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그렸다.[24] 도메니코 베네치아노는 수도원 식당에 ''성 요한과 프란치시코''를 그렸다.
한때 산타 크로체 성당 내 메디치 예배당에 있었던 로렌초 디 니콜로의 폴립티크는 현재 분리되어 피렌체의 미술관들과 밀라노의 바가티 발세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 3. 무덤과 기념비
산타 크로체 성당은 피렌체 사람들에게 예배와 후원의 장소로 인기 있었고, 피렌체 출신 인사들에게는 그곳에 묻히거나 기념되는 것이 큰 영광이었다. 바르디 가와 페루치 가 같은 부유한 가문들이 "소유한" 몇몇 예배당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다른 지역 출신의 유명 이탈리아인들에게도 공간이 주어졌다. 500년간 이 성당에 설립된 기념비의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15세기 건축가이자 미술 이론가)
- 비토리오 알피에리 (18세기 시인이자 극작가), 안토니오 카노바 작
- 에우제니오 바르산티 (내연 기관 공동 발명가)
- 로렌초 바르톨리니 (19세기 조각가)
- 줄리 클라리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아내이며, 샤를로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들의 딸이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기념 명판, 프랑스의 앙부아즈 성에 묻힘)
- 레오나르도 브루니 (15세기 피렌체 공화국의 수상이자, 학자, 역사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 작
- 단테 (라벤나에 묻힘)
- 우고 포스콜로 (19세기 시인)
- 갈릴레오 갈릴레이
- 조반니 젠틸레 (20세기 철학자)
- 로렌초 기베르티 (예술가이자 청동 세공사)
- 니콜로 마키아벨리 (인노첸초 스피나치가 제작)
- 카를로 마르수피니 (15세기 피렌체 공화국의 수상), 데시데리오 다 세티냐뇨 작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조르조 바사리 작, 발레리오 치올리, 요반니 반디니, 바티스타 로렌치의 조각 작품 포함.[14]
- 라파엘로 모르겐 (19세기 판화가)
- 조아키노 로시니 (주세페 카시올리가 제작)
- 슈톨베르크-게데른의 공녀 루이제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부인)
- 굴리엘모 마르코니 (볼로냐 인근 그가 태어난 사소마르코니에 묻힘)
- 엔리코 페르미 (핵 물리학자,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묻힘)

- 조반 빈첸초 알베르티 (피렌체 상원의원이자 최초의 두 명의 로렌느 대공의 장관)
- 조반니 라미
- 조반니 바티스타 니콜리니 (시인)
- 주세페 라 파리나(Giuseppe La Farina)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 비토리오 포솜브로니(1754-1844)
5. 기타 시설
주 회랑에는 파치 가문 예배당이 있다. 이것은 1442년부터 1446년에 걸쳐 참사회 회의장으로 지어졌고, 1470년대에 최종 완성되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만든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정밀한 단순함과 간소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디자인에 유의했다.
종탑은 최초의 것이 낙뢰로 인해 손상되었기 때문에 1842년에 재건되었다. 고딕 리바이벌 건축 양식의 대리석 파사드는 1857년부터 1863년에 걸쳐 니콜로 마타스가 제작했다.
부속 미술관은 옛 식당을 개조하여 사용하며, 회랑과는 분리되어 있다. 그 회랑에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나이팅게일은 이 도시 출신으로, 이름 또한 도시의 이름에서 따왔다. 브루넬레스키는 내부 회랑도 맡아 1453년에 완성했다.
옛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기숙사는 현재 가죽 제품 학교가 되어 있다.[16] 방문객은 전통 공예품인 지갑이나 서류 가방 등의 가죽 제품을 볼 수 있으며, 인접한 상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옛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기숙사는 현재 가죽 제품 학교로 쓰이고 있다.[16] 방문객은 전통 공예품인 지갑이나 서류 가방 등의 가죽 제품을 볼 수 있으며, 인접한 상점에서 판매되고 있다.[16]
5. 1. 수도원과 회랑
주 회랑에는 파치 가문 예배당이 있다. 이것은 1442년부터 1446년에 걸쳐 참사회 회의장으로 지어졌고, 1470년대에 최종 완성되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만든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정밀한 단순함과 간소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디자인에 유의했다.종탑은 최초의 것이 낙뢰로 인해 손상되었기 때문에 1842년에 재건되었다. 고딕 리바이벌 건축 양식의 대리석 파사드는 1857년부터 1863년에 걸쳐 니콜로 마타스가 제작했다.
부속 미술관은 옛 식당을 개조하여 사용하며, 회랑과는 분리되어 있다. 그 회랑에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나이팅게일은 이 도시 출신으로, 이름 또한 도시의 이름에서 따왔다. 브루넬레스키는 내부 회랑도 맡아 1453년에 완성했다.
옛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기숙사는 현재 가죽 제품 학교가 되어 있다.[16] 방문객은 전통 공예품인 지갑이나 서류 가방 등의 가죽 제품을 볼 수 있으며, 인접한 상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5. 2. 피렌체 장인 가죽 학교 (Scuola del Cuoio)
옛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기숙사는 현재 가죽 제품 학교로 쓰이고 있다.[16] 방문객은 전통 공예품인 지갑이나 서류 가방 등의 가죽 제품을 볼 수 있으며, 인접한 상점에서 판매되고 있다.[16]6.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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