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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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례 예술은 인간의 유해를 보관하는 무덤과 그 안의 부장품, 그리고 죽은 자를 기리는 다양한 형태의 예술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국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독특한 장례 의식과 예술 양식이 발달했으며, 건축, 조각, 회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선사 시대의 거석 문화부터 현대의 전쟁 기념관에 이르기까지, 장례 예술은 시대와 사회의 가치관, 종교적 신념을 반영하며 변화해 왔다. 특히, 종교는 장례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쳐 힌두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각 종교의 특색 있는 무덤과 기념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물뿐 아니라 전쟁과 같은 사회적 비극을 기억하는 대규모 기념물 건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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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 예술 - 병마용
병마용은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진시황의 장례를 위해 제작된 테라코타 군상으로, 진나라 군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지닌 유물이다.
장례 예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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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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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조각, 건축, 회화 |
문화적 의미 |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 망자에 대한 존경, 사회적 지위 표현 |
정의 | |
정의 | 죽은 자의 유해를 담는 장소를 기념하고 장식하는 데 사용되는 예술의 한 형태 |
역사 및 발전 | |
기원 | 고대 문명 (예: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
주요 사례 | 투탕카멘의 무덤 진시황릉 할리카르나소스 영묘 |
중세 유럽 | 성직자와 귀족을 위한 정교한 무덤 조각상과 기념물 제작 |
르네상스 시대 | 고전적 이상과 인본주의적 가치를 반영한 무덤 예술 발전 |
바로크 시대 | 극적인 표현과 웅장한 규모를 특징으로 하는 무덤 예술 유행 |
현대 | 다양한 재료와 스타일을 사용한 무덤 예술의 지속적인 발전 |
주요 특징 및 요소 | |
건축적 요소 | 무덤, 영묘, 기념비 등 |
조각적 요소 | 무덤 조각상 (tomb effigies) 부조 장식 조각 |
회화적 요소 | 프레스코, 패널화, 기타 장식 그림 |
상징주의 | 종교적 상징 신화적 상징 개인적 상징 |
비문 | 고인의 이름, 생애, 업적 등을 기록 |
지역별 특징 | |
고대 이집트 | 피라미드 스핑크스 사자의 서 (Book of the Dead) 삽화 |
그리스 | 석비 (steles) 조각된 무덤 항아리 |
로마 | 영묘 석관 카타콤 |
중세 유럽 | 교회와 성당 내부의 무덤 플루런트 (pleurants) 묘비 묘비 |
아시아 | 중국의 명릉 인도의 타지마할 한국의 고분 |
이슬람 세계 | 튀르베 (türbes) 모스크 정원 |
사회적 및 종교적 의미 | |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 | 사후 세계에 대한 다양한 문화적 믿음을 반영 |
망자에 대한 존경 | 고인을 기리고 존경하는 방법 |
사회적 지위 표현 |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 |
가족 및 공동체의 유대 강화 | 장례 의식과 기념을 통해 공동체 의식 강화 |
영향 | |
건축 | 기념비적 건축물 설계에 영향 |
조각 | 인물 묘사와 상징주의 발전에 기여 |
회화 | 종교적 및 세속적 예술에 영향 |
문학 |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탐구에 영감 |
문화 | 장례 의식과 기념 문화 형성에 기여 |
2. 용어
무덤은 인간의 유해를 보관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며, 무덤 내에 배치된 물건들도 의미한다.[146] 이러한 물건에는 고인의 개인 소유물, 매장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물건, 사후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의 축소판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문자가 없는 많은 문화에 대한 지식은 주로 이러한 출처에서 나온다.
고대에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국 등 다양한 문명에서 각기 독특한 장례 예술이 발달했다.
고분, 쿠르간, Long barrow|긴 무덤영어은 많은 문화권에서 중요한 매장지를 덮고 있으며, 시체는 일반적으로 돌로 된 석관이나 관에 안치될 수 있고, 관은 일반적으로 나무로 만들어졌다. 마우솔레움은 주로 무덤으로 건립된 건물을 말하며, 할리카르나소스에 있는 마우솔로스의 무덤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비석은 현재 묘비라고 불리는 직립형 돌을 가리키는 용어다. Ship burial|선박 매장영어은 대부분 유럽 해안에서 발견되는 반면, Chariot burial|전차 매장영어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널리 발견된다. 카타콤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카타콤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로 터널 통로로 연결된 지하 묘지다. 땅 위에 흔적이 남아 있는 대규모 매장지는 네크로폴리스라고 부른다. 눈에 보이는 구조가 없으면 무덤이다. 기념비는 매장지가 없는 기념관이다.[147]
장례식이라는 단어는 엄밀히 말하면 "장례식 또는 매장과 관련된 것"[148]을 의미하지만, 영어에는 장례 의식과 직접 관련된 관습과 유물 뿐만 아니라 더 넓은 범위의 죽은 사람들에 대한 영구적인 기념물에도 적용하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무덤 기념물과 비명이라는 주제를 다룬 최초의 장편 책인 John Weever|존 위버영어의 고대 장례식 기념물(1631)이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그 사용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예를 들어 필립 린들리는 "나는 장례식 기념물이라는 용어 사용을 피했다"고 말하며 Effigy|장례식 모형영어을 언급했다.[149] 폴 코커햄은 이러한 구별이 다소 현학적이라고 생각했다.
죽은 자들을 위한 기념 예술의 관련 장르는 이스터 섬의 ''모아이'' 형상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조각된 조상 초상화의 한 종류이다. 이는 고대 로마와 중국처럼 다양한 문화권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둘 다 매장되지 않고 후손의 집에 보관된다.[150] 그리스 헤르메스와 에트루리아 차룬과 같은 많은 문화권에는 죽은 자의 영혼을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그리스인 헤르메스와 에트루리아인 Charun|차룬영어과 같은 Psychopomp|영혼 인도자영어가 있다.
3. 역사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미라 제작과 카노픽 항아리에 장기를 보존하는 풍습이 있었다. 마스타바 무덤에는 세르답이라는 공간에 고인의 카 조각상을 안치하고, 무덤 벽에는 종교적 장면이나 고인의 초상화 등을 새겼다.[159][160] 기자의 대피라미드와 왕들의 계곡은 왕족과 엘리트를 위한 무덤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기 시대에 카론에게 지불하는 동전과 도자기를 제외하고는 정교한 부장품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장례 연설과 동물 희생이 중요하게 여겨졌다.[166]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석조 기념물을 세웠고, 헬레니즘 미술 시대에는 고인의 사실적인 초상화가 도입되었다.[166] 라르낙스는 장식된 테라코타로 만든 작은 관이었고, 루트로포로스는 결혼식과 미혼자의 무덤에 사용되었다.[27] 레키토스는 가정과 무덤 장식에 사용되었으며, 저승으로의 하강 장면이 그려지기도 했다.[28]
중국의 장례 예술은 진 시 황제의 병마용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상나라 시대에는 청동 의례 용기가 매장용으로 제작되었고, 한나라 시대에는 옥제 예복이 사용되었다.[54] 당나라 묘 인물은 ''삼채'' 유약이나 오버글레이즈 페인트로 칠해진 다양한 인물상으로, 지하 묘실로 이어지는 경사진 접근로에 배열되었다. 중국 황실 무덤은 영로를 통해 접근하며, 수호자 조각상과 비시의 돌 조각으로 장식되었다.[55] 고구려 고분 벽화는 삼국 시대 한국 회화의 예시로, 다양한 별자리와 매장된 왕족, 귀족의 삶을 묘사했다.[67] 조선왕릉은 중국과 일본의 전통이 결합된 양식을 보여주며, 조상 숭배 의식의 중심지였다.[71]
3. 1. 선사 시대
인류 최초의 무덤은 대부분 거석 기념물로, 신석기 시대 초기에 만들어졌다. 이베리아 반도의 무덤은 기원전 4510년경, 브루타뉴의 카르낙 돌은 기원전 5천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52] 이 무덤들은 단순한 구덩이에 시신을 안치하고 도랑과 배수 시설로 둘러싸는 형태였으며, 지상 추모는 집단 기억과 조상 숭배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53]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는 고분, 거석, 옹관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나타났다. 유라시아의 고인돌은 흙으로 덮여 있던 묘실을 드러낸 돌 구조물이며, 돌에는 암각화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154] 입석은 무덤을 표시하거나 기념물 역할을 했으며,[154] 세네감비아 석원은 후기 아프리카 형태의 무덤 표지로 볼 수 있다.[155]
3. 2. 고대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음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장례 예술이 발달했다. 이러한 믿음은 미라 제작과 카노픽 항아리에 내부 장기를 보존하는 관습으로 이어졌다. 초기 마스타바 무덤에는 지하 묘실과 함께 지상에 공양실이 있었고, 고인의 카 조각상이 안치된 세르답이 있었다.[159] 무덤 벽에는 종교적 장면, 고인의 초상화, 사후 세계를 묘사한 그림들이 새겨졌다. 특히, 죽은 자의 영혼만이 통과할 수 있는 거짓 문이 중요한 요소였다.[160] 기자의 대피라미드와 왕들의 계곡의 무덤은 왕족과 엘리트를 위해 건설되었으며, 테베 네크로폴리스는 장안 사원과 마스타바 무덤으로 유명했다. 쿠시 왕들은 이집트 장례 관습의 영향을 받아 누비아 피라미드를 건설했는데, 이는 멤피스 근처의 고대 왕국 피라미드보다 테베의 작은 제17왕조 피라미드와 더 유사했다.[163]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기 시대에 카론에게 지불하는 동전과 도자기를 제외하고는 정교한 부장품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 연설과 동물 희생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석조 기념물을 세웠고, 헬레니즘 미술 시대에는 고인의 사실적인 초상화가 도입되었다.[166] 무덤 방 벽은 프레스코로 칠해졌지만, 잠수부의 무덤이나 베르기나의 무덤처럼 잘 보존된 경우는 드물다.[24] 초기 그리스 매장지는 큰 도자기 조각으로 표시되었고, 유해는 항아리에 묻혔다. 라르낙스는 장식된 테라코타로 만든 작은 관이었고, 루트로포로스는 결혼식과 미혼자의 무덤에 사용되었다.[27] 레키토스는 가정과 무덤 장식에 사용되었으며, 저승으로의 하강 장면이 그려지기도 했다.[28]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다양한 무덤 만들기 전통이 헬레니즘 영역으로 유입되면서 그리스 스타일의 예술에 새로운 형식이 나타났다.[32]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은 그리스 신전 디자인과 유사하지만, 사각형 기단과 피라미드형 지붕을 가진 독특한 구조였다.[33]
중국의 장례 예술은 초기 통치자들의 무덤에서부터 진 시 황제의 병마용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상나라 시대에는 청동 의례 용기가 매장용으로 제작되었고, 한나라 시대에는 옥제 예복이 사용되었다. 한나라 황제 묘는 봉인된 묘총 아래 "지하 궁전"과 숭배 의식을 위한 건물들로 구성되었다.[54] 당나라 묘 인물은 ''삼채'' 유약이나 오버글레이즈 페인트로 칠해진 다양한 인물상으로, 지하 묘실로 이어지는 경사진 접근로에 배열되었다. 중국 황실 무덤은 영로를 통해 접근하며, 수호자 조각상과 비시의 돌 조각으로 장식되었다.[55] 고구려 고분 벽화는 삼국 시대 한국 회화의 예시로, 다양한 별자리와 매장된 왕족, 귀족의 삶을 묘사했다.[67] 조선왕릉은 중국과 일본의 전통이 결합된 양식을 보여주며, 조상 숭배 의식의 중심지였다.[71]
3. 2. 1. 고대 이집트와 누비아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신념은 무덤을 포함한 장례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덤 안에는 고인의 개인 소유물, 매장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물건, 사후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의 축소판 등이 배치되었다.[146] 이러한 유물들은 고대 이집트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3. 2. 2.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철기 시대에 Charon's obol영어인 카론에게 바치는 오볼과 도자기를 제외하고는 정교한 무덤 물품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비문이나 Funeral oration (ancient Greece)영어인 장례 연설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동물 희생이 이루어졌다.[166]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석조 기념물을 세웠는데, 이는 기원전 500년경 이전 고대 시대에 Kouros영어인 쿠로스 조각상의 기능 중 하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고인의 사실적인 초상화가 도입되었고, 가족 집단은 일반적으로 건축 틀로 둘러싸인 기념비에 옅은 돋을 새김으로 자주 묘사되었다.[166] 무덤 방의 벽은 종종 프레스코로 칠해졌지만, 이탈리아 남부의 Tomb of the Diver영어인 잠수부의 무덤이나 마케도니아의 베르기나에 있는 무덤만큼 잘 보존된 사례는 거의 없다. 고전 그리스 전통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초상화는 그리스가 아닌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이윰 미라 초상화인데, 이는 고전 시대 말기부터 미라에 부착된 Greco-Roman world영어 스타일의 초상화 얼굴이었다.[167]
초기 그리스의 매장지는 흔히 큰 도자기 조각으로 땅 위에 표시되었으며, 유해는 항아리에 묻혔다. 도자기는 고전 시대 내내 무덤과 무덤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168] 살아남은 Pottery of ancient Greece영어인 고대 그리스 도자기의 대부분은 무덤에서 회수되었다. 일부는 분명히 생활에 사용되는 품목이었지만, 대부분은 무덤에 넣기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으며, 두 가지 원래 목적 사이의 균형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Larnax영어인 라낙스는 일반적으로 테라코타로 장식된 작은 관 또는 재 상자였다. 손잡이가 두 개인 Loutrophoros영어인 루트로포르스는 결혼식 목욕을 위해 물을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주로 결혼식과 관련이 있었다. 또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놓친 것을 어떤 식으로든 보충하기 위해 미혼자들의 무덤에도 놓여졌다.[169] 손잡이가 하나인 레키토스는 가정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가정 밖에서는 주로 무덤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다.[170] 하데스의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장면이 종종 그려졌는데, 헤르메스, 카론 또는 둘 다 옆에 죽은 사람이 묘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카론만 나타났다.[171] 작은 도자기 조각상이 종종 발견되지만, 이것들이 무덤에 놓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기는 어렵다. 헬레니즘 Tanagra figurine영어인 타나그라 인형의 경우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172] 그러나 은제품은 베르기나의 마케도니아 왕족 무덤이나 트라키아 또는 스키타이족과 같은 이웃 문화와 그리스 세계의 변두리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173]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그리스 세계가 확장되면서 다양한 무덤 만들기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헬레니즘 영역으로 유입되었고, 그 결과 그리스 스타일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형식이 탄생했다.[174]
3. 2. 3. 에트루리아인
에트루리아인의 초기 매장지는 흔히 큰 도자기 조각으로 땅 위에 표시되었으며, 유해는 항아리에 묻혔다. 도자기는 고전 시대 내내 무덤과 무덤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168] 살아남은 고대 그리스 도자기|Pottery of ancient Greecegrc의 대부분은 무덤에서 회수되었다. 일부는 분명히 생활에 사용되는 품목이었지만 대부분은 무덤에 넣기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으며 두 가지 원래 목적 사이의 균형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라낙스|larnaxgrc는 일반적으로 테라코타로 장식된 작은 관 또는 재 상자다.
3. 2. 4. 고대 로마
고대 로마의 장례 예술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장례용 도자기와 석관, 그리고 에트루리아의 사이코팜(죽은 자의 영혼을 인도하는 존재) 개념을 받아들였다.
초기 로마의 무덤은 단순한 형태였으나, 점차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부유층은 석조 기념물을 세우거나, 벽면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기도 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고인의 사실적인 초상화가 도입되었고, 가족 집단이 묘사된 부조가 유행했다.
로마 시대의 석관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석관처럼 전투 장면이나 사냥 장면을 묘사한 화려한 석관이 있는가 하면, 디오니소스 숭배와 관련된 평화로운 신화적 장면을 담은 작은 석관도 있었다. 이러한 석관들은 18세기 신고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176]
로마의 장례 예술은 죽은 자를 기리고, 그들의 삶과 업적을 후대에 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3. 2. 5. 중국
중국의 장례 예술은 역사 전반에 걸쳐 매우 다양하게 발전했다. 초기 통치자들의 무덤은 고대 이집트의 무덤과 견줄 만큼 복잡하고 값비싼 부장품들로 가득 차 있었으나, 수 세기에 걸쳐 도굴꾼들에게 약탈당했다. 오랫동안 옥제 예복에 대한 문헌 기록은 허황된 신화로 여겨졌지만, 20세기에 여러 유물이 발굴되면서 초기 통치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흔하게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산싱두이를 비롯한 여러 유적지에서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지면서, 왕조 시대 이전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 매우 큰 묘총이 세워졌으며, 이후에는 능이 건설되었다. 상나라 시대의 특별하고 거대한 청동 의례 용기 중 일부는 매장만을 위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수의 청동 의례 용기가 엘리트 계층의 무덤에 묻혔고, 다른 유물들은 가족들이 조상 숭배 의례에서 제물을 바칠 때 사용하도록 지상에 남겨졌다. 부호 묘(기원전 약 1200년)는 발굴된 이 시대의 몇 안 되는 훼손되지 않은 왕실 무덤 중 하나다. 대부분의 장례 예술품은 고고학적 맥락 없이 미술 시장에 등장했다.[54]
1974년 병마용의 발견으로 진 시황제(기원전 210년 사망)의 묘가 발견되었지만, 문헌에 묘사된 주요 묘총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한나라의 여러 황제 묘에서 지상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황실 통치 마지막까지 유지되었던 전통을 보여준다. 무덤 자체는 봉인된 묘총 아래의 "지하 궁전"으로, 숭배 의식을 지내고 영구적인 직원과 의례를 수행하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한 여러 건물들이 멀리 떨어진 거리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문, 탑, 그리고 다른 건물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당나라 묘 인물은 "삼색" ''삼채'' 유약 또는 오버글레이즈 페인트로, 약 12~120cm 높이의 다양한 하인, 연예인, 동물 및 험악한 묘 수호자를 보여주며, 종종 지하 묘실로 이어지는 경사진 접근로를 따라 틈새에 배열되었다.
중국 황실 무덤은 일반적으로 인간과 동물을 기반으로 한 수호자 조각상들이 늘어선 "영로"를 통해 접근하며, 때로는 그 길이가 수 킬로미터에 달하기도 한다. 망자의 미덕을 칭송하는 비문은 종종 비시의 돌 조각으로 조각된 거북의 형태로 이 앙상블의 중심을 이룬다. 한나라 무덤에서 수호자 조각상은 주로 "사자"와 "키메라"이며, 후기 시대에는 훨씬 더 다양했다.[55] 훌륭한 그림이 있는 약탈된 무덤으로는 5세기의 문명 태후 묘가 있으며, 7세기 당나라 건릉 묘군은 일반적으로 잘 보존된 앙상블의 초기 예이다.[56]
현대 대한민국을 포함하는 5~7세기 왕국이었던 고구려 고분은 특히 벽화가 풍부하다. 명나라와 청나라 황실 묘(명릉) 중 단 하나만이 1956년에 발굴되었는데, 발견된 수천 개의 유물 보존에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하여, 그 이후 정책은 무덤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다.[57]
홍콩의 레이청욱 한나라 묘 박물관은 훨씬 더 검소한 중산층 한나라 무덤을 전시하고 있으며, 산둥성 자샹 현의 2세기 중반 오씨 가족 무덤은 평민 무덤의 가장 중요한 석조물이다.[58] 한나라 시대 평민의 무덤에서 제물과 매장 묘실의 벽은 매우 얕은 부조로 새겨지거나 조각된 빽빽하고 다양한 장면으로 장식될 수 있으며, 이는 현재 이 시대의 잃어버린 궁전 프레스코 양식의 주요 지표이다. 더 저렴한 옵션은 소성 전에 조각하거나 각인된 대형 점토 타일을 사용하는 것이었다.[59] 불교가 도입된 후, 조각된 "장례용 침상"은 유사한 장면을 특징으로 했으며, 현재는 대부분 종교적이다.[60] 한나라 시대에는 건물의 소형 세라믹 모형이 종종 무덤에 묻힌 사람과 함께 만들어졌다. 고대 중국 건축에 대해 알려진 많은 부분이 이 모델에서 유래되었다. 나중에는 육조 시대에, 건물, 기념물, 사람 및 동물을 묘사한 조각 소형품이 ''혼평'' 장례 용기의 상단을 장식했다.[61] 무덤의 외부에는 종종 기념비적인 벽돌 또는 돌 조각 기둥 문(궐 闕)이 있었다. 기원후 121년의 예는 지상에 서 있는 가장 오래된 중국 건축 구조로 보인다.[62] 당나라(618–907)의 무덤은 말, 하인 및 기타 주제의 유약 도기 조각상으로 풍부하며, 그 강하고 자유로운 스타일은 오늘날 크게 존경받고 있다. 무덤 예술은 송나라와 금나라 시대에 절정에 달했으며, 가장 화려한 무덤은 부유한 평민들이 지었다.[63]
초기 매장 관습은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과 그것을 용이하게 해야 할 영혼의 길을 보여준다. 장례식과 기념식은 또한 효와 "어른에 대한 명예와 존경, 연소자에 대한 의무"[64]와 같은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문 앞에 있는 여성의 일반적인 중국 장례 상징은 "제한이 없는 엘리시안 내세에 대한 기본적인 남성적 환상"을 나타낼 수 있다. 집의 모든 문에는 새로운 사람들을 자신의 방으로 환영하기 위해 기다리는 여성이 서 있다"[65] 한나라 비문은 종종 그들의 대상에 대한 효도하는 슬픔을 묘사한다.[66]
3. 2. 6. 한국
고구려 고분군 벽에 그려진 벽화는 삼국 시대 한국 회화의 예시이다. 수천 개의 고분이 발견되었지만, 벽화가 있는 고분은 약 100개에 불과하다.[67] 이 고분들은 벽화의 지배적인 주제를 따라 무용총, 수렵총, 사신총, 씨름총 등으로 이름 붙여졌다.[68] 벽화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로 표현된 해[69]와 사신(청룡, 주작, 백호, 현무)을 포함한 다양한 별자리가 자주 등장하며, 매장된 왕족과 귀족의 삶을 묘사하기도 한다.[70]
1408년부터 1966년 사이에 지어진 조선왕릉은 중국과 일본의 전통이 결합된 양식을 보여준다. 묘는 흙으로 덮여 있으며, 종종 석재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때로는 일본의 ''하니와''상과 유사하게 지상에 석조 동물상이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묘 앞에는 T자형 사당 건물이 하나 이상 있으며, 묘역은 넓은 부지에 자리 잡고 있고, 뒤에는 언덕이 있으며, 물과 멀리 떨어진 언덕을 향하고 있다. 조선왕릉은 여전히 조상 숭배 의식의 중심지이며, 15세기부터는 더 단순해졌지만 넓은 조경을 유지했다.[71]
3. 3. 아메리카
메소아메리카 문화에서는 파칼 대왕의 석관 등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석관이 부족하다. 대부분의 메소아메리카 장례 예술은 부장품 형태로 나타나며, 오아하카에서는 장례 항아리 형태로 나타난다. 메소아메리카 부장품의 잘 알려진 예로는 마야 문명 유적지인 하이니아 섬의 유물과 서부 멕시코 수갱 묘 전통 관련 유물이 있다. 마야 통치자들의 무덤은 부장품이 화려하며, 흙이 아닌 돌로 만든 그릇을 제외하고는 매장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물건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77]
하이니아 섬의 무덤은 풍부한 점토 조각상으로 유명하다. 섬에서 발굴된 약 1,000개의 무덤에서[78] 발견된 인간 유해는 유리, 슬레이트, 또는 도자기와 함께 하나 이상의 도자기 조각상과 함께 발견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가슴에 놓여 있거나 손에 들려 있었다. 이 조각상의 기능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성별과 연령의 불일치로 인해 무덤 거주자의 초상일 가능성은 낮다.[79]
서부 멕시코의 수갱 묘 전통은 부장품으로 거의 알려져 있으며, 여기에는 속이 빈 도자기 인물, 흑요석과 조개 장신구, 도자기 등이 포함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마을 장면을 포함한 다양한 도자기 조각상이다. 비록 이 조각상이 단순히 마을 생활을 묘사할 수도 있지만, 지하 세계를 묘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80] 도자기 개 또한 약탈된 무덤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일부는 영혼 인도자로 여겨지지만,[81] 개는 고대 메소아메리카에서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었다.[82]
오아하카의 사포텍 문명은 특히 점토 장례 항아리로 유명하다. 수많은 종류의 항아리가 확인되었다.[84] 일부는 신과 초자연적인 존재를 보여주는 반면, 다른 일부는 초상화인 것으로 보인다. 미술사학자 조지 쿠블러는 이 전통의 솜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다른 어떤 아메리카 도공도 젖은 점토의 가소성을 그렇게 완벽하게 탐구하거나 소성 후 그 형태를 그렇게 완벽하게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젖고 연성이 있는 특성을 기본적인 기하학적 모델링에 사용하고 반쯤 마르면 재료를 잘라내 매끄러운 평면으로 만들었으며, 이는 비할 데 없는 훌륭함과 형태의 제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85]
마야의 나이 튜니치 동굴 무덤과 기타 유적지에는 그림, 조각된 석비, 그리고 옥과 금속으로 된 부장품이 있으며, 여기에는 사자 가면이 포함된다. 건조한 지역에서는 남미의 파라카스 문화의 무덤에서 많은 고대 섬유가 발견되었으며, 정교한 무늬의 천으로 여러 겹으로 묶여 있었다. 엘리트 모체 무덤은 인신 제사에도 사용된 대형 아도브 구조물에 통합되었다. 시칸 문화와 같은 안데스 문화는 종종 미라화를 행하고 투미 의식 칼과 금 장례 가면, 그리고 도자기를 포함하여 보석이 박힌 귀중한 금속으로 된 부장품을 남겼다. 모골론 문화의 밈브레스는 죽은 자를 머리 위에 그릇을 얹어 묻고 의식적으로 각 그릇에 작은 구멍을 내어 "파괴"하여 고인의 영혼이 다른 세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밈브레스 장례용 그릇은 사냥, 도박, 작물 심기, 낚시, 성행위 및 출생 장면을 보여준다.[86] 북미 마운드 중 일부인 웨스트버지니아의 그레이브 크릭 마운드 (기원전 250~150년경)는 매장지로 기능했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87]
초기 정착민 무덤은 표시가 없거나, 청교도 기원을 반영하여 매우 간단한 나무 머리 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640년경, 시각적 장례 예술의 전통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가장 초기에 알려진 머리 돌의 예술적 부재는 청교도의 엄격한 종교 교리를 반영한다. 17세기 후반의 예는 종종 죽음의 머리를 보여주며, 때로는 날개나 뼈가 교차된 양식화된 해골과 해골, 뼈, 먼지로 인간이 쇠퇴하는 것을 묘사한 다른 사실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스타일은 유니테리언주의와 감리교가 더 인기를 얻으면서 18세기 후반에 부드러워졌다.[88] 18세기 중반의 예는 종종 죽은 자가 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갈 것으로 보이는 날개에 의해 운반되는 것을 보여준다.[89]
4. 전통 사회
전 세계의 전통 사회에는 매우 다양한 장례 예술이 존재하며, 그 중 상당수는 부패하기 쉬운 재료로 만들어졌다. 일부는 이 문서의 다른 부분에서 다루고 있다.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회에서 가면은 종종 죽음과 특정한 연관성을 가지며, 일부 유형은 주로 또는 전적으로 장례식에 사용될 수 있다.[90] 서아프리카의 아칸족은 왕족의 기념 두상인 엔소디를 의뢰했다. 호주 원주민의 장례식은 일반적으로 바디 페인팅을 특징으로 하며, 욜구와 티위족은 철목 나무 줄기에서 조각된 ''푸쿠마니'' 매장 기둥을 만들고,[91] 정교하게 조각된 매장수는 호주 남동부에서 사용되었다.[92] 술라웨시 중부에 거주하는 토라자족은 그들의 매장 관습으로 유명하며, 여기에는 절벽에 죽은 자의 조상 조각상을 세우는 것이 포함된다.
2010년 화재로 파괴된 19세기와 20세기 왕족의 카수비 무덤은 생전에 이전 부가다의 카바카가 거주하던 것과 유사한 초가지붕 건물로 된 원형 단지였지만 특별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93]
여러 문화권에서 사후 세계에서 사용하기 위한 물품이 여전히 매장되거나 화장되는데, 예를 들어 동아시아 공동체의 지옥 은행권이 있다.[94] 가나에서는 주로 가족 사이에서 차, 보트 또는 동물의 모양을 한 정교한 형상 관을 나무로 만든다. 이것은 1950년대에 케인 퀘이에 의해 도입되었다.[95]
5. 장례 예술과 종교
장례 예술은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각 종교의 교리와 사후 세계관은 장례 문화와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하데스로 가는 뱃사공 카론에게 지불하는 동전을 제외하고는 정교한 부장품을 남기지 않았지만, 장례 연설과 동물 희생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석조 기념물을 세웠고, 헬레니즘 미술 시대에는 죽은 자의 현실적인 초상화가 도입되었다.[24] 파윰 미라 초상화는 그레코-로마 세계 양식으로 미라에 부착된 초상 얼굴로, 고대 그리스 전통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초상화이다.[25]
에트루리아 문명의 장례 예술은 연회 장면과 이별 장면을 묘사하며, 지하 세계 악마와 영혼 안내자들이 등장한다. 악수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작별을 의미하는 흔한 모티프였다.[41]
고대 로마의 매장 관습은 화장에서 매장으로 변화했으며, 부유층은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진 석관에 매장되었다. 로마 공화정 말기에는 부유한 로마인들이 무덤을 위한 최고의 장소를 놓고 경쟁했으며, 다양한 디자인의 무덤이 건설되었다.[49]
기독교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으며, 가톨릭 교회는 1963년에야 화장에 대한 반대를 완화했다.[238] 매장이 선호되는 기독교 전통이었으며, 교회 내부나 묘지에 매장되었다. 로마 카타콤에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기독교 예술이 남아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인물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피했지만, 나중에는 기독교 도상학을 보여주는 석관이 등장했다.[236] 개신교 종교 개혁 이후 영국 교회 기념물은 개신교 교회에 추가된 대규모 미술품의 대부분을 형성했다.[254]
이슬람교의 장례 예술은 건축이 중심이며, 부장품은 권장되지 않았다. 왕족이나 중요한 종교 인물들은 종교적 비문이 새겨진 평범한 석관에 안치되었다.[262] 12세기 메디나에 있는 알-마스지드 안-나바위 단지는 초기 이슬람 장례 건축의 모습을 보여준다.[264] 이슬람의 천국 개념을 반영하여 무덤 주변에 정원을 조성하는 전통이 발전했다.[265] 오스만 제국에서는 튀르베라고 불리는 작은 단일 방 형태의 무덤이 모스크 단지 내에 조성되었다.[271]
불교 무덤은 일반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사원 내에 세워지기도 한다. 부처의 시신은 화장 이후 사부로 나누어져 스투파에 안치되었으며, 스투파는 인도와 자바 등지에서 정교한 구조물로 발전했다. 중국과 일본의 탑은 인도 형태에서 진화되었다.[234]
힌두교는 환생을 믿기 때문에 장례 기념물의 전통이 적지만, 왕족 사이에는 기념 사원인 '삼매디 만디르'가 존재한다. 이들은 이슬람 관습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233]
5. 1. 힌두교
화장은 환생을 믿는 힌두교도들 사이에서 전통적이며, 다른 주요 종교에 비해 힌두교에는 장례 기념물의 전통이 훨씬 적다.[233] 그러나 왕족 사이에는 지역적이고 비교적 최근의 전통이 있으며, '삼매디 만디르'는 성인을 위한 기념 사원이다. 이 둘은 이슬람 관습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16세기 이후의 Orchha|오르차영어 왕들의 마우솔레움은 가장 잘 알려진 것 중 하나이다. 다른 지배자들은 다른 문화권의 유사한 건물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일반적인 형태의 기념 사원에 의해 기념되었지만 가장 장관인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는 이 기사의 범위를 벗어난다.5. 2. 불교
불교 무덤 자체는 일반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사원 내에 세워질 수도 있고, 때로는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로 목적을 위해 지어진 대규모 단지에 세워질 수도 있다. 전승에 따르면 화장 이후 부처의 시신은 전부 사부로 나누어져 초기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스투파는 기원전 3세기 평범한 반구형 둔덕에서 인도의 산치와 자바의 보로부두르와 같은 정교한 구조물까지 부처의 유물을 담은 기념물로 발전했다. 중국과 일본의 탑과 Candi of Indonesia|인도네시아의 칸디영어와 같은 지역적 변형은 인도 형태에서 진화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들 중 어느 것도 무덤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234] 일부 중요한 티베트 라마는 상대적으로 작은 ''티베트 사리탑''에 묻혀 있으며, 때로는 귀금속으로, 수도원 내부 또는 외부에서 묻혀 있고, 때로는 미라화한 후에 묻혀 있다. Zanskar|잔스카르영어의 Tashiding Monastery|타시딩 수도원영어와 시킴주의 Tashiding Monastery|타시딩 수도원영어, 라싸의 포탈라궁 및 기타 여러 수도원에 사례가 있다.[235] 그러나 대부분의 초르텐은 무덤 역할을 하지 않는다.5. 3. 기독교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육체적인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으며, 가톨릭 교회는 1963년에야 화장에 대한 반대를 완화했다.[238] 매장은 항상 선호되는 기독교 전통이었다. 공간이 있는 한, 일반적으로 교회에 인접한 묘지에 묘비나 수평 석판을 사용하거나 부유하거나 중요한 성직자를 위해 교회 안에 매장되었다. 교회 벽 무덤에는 시신 자체가 엄격하게 포함되어 있으며, 종종 석관에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시신은 지하실 또는 교회 바닥 아래에 묻혀 있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인물 중 군주는 독립된 석관에 묻혀 있을 수 있으며 금속 세공품과 조각품을 사용한 정교한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그중에서 가장 웅장했던 것은 성자들의 신사였으며 순례의 목적지가 되었다.로마 카타콤에는 주로 프레스코와 초기 기독교 석관 형태로 초기 기독교 시대의 현존하는 대부분의 기독교 예술이 포함되어 있다. 처음에는 로마의 대중적인 장식 예술에서 등장했지만 나중에는 공식적인 제국 및 이교도 모티프에서 차용한 기독교 도상학을 보여준다. 처음에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인물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피했고, 석관은 키 로(Chi Rho) 모노그램과 같은 기독교 상징물들과 나중에는 서술적인 종교 장면들로 장식되었다.[236]
초기 기독교인들의 박해가 끝난 후, 원래 조심스럽게 묻히거나 집단 무덤에 묻혔던 순교자의 매장지 위에 교회를 짓는 관습은 기독교 장례 예술, 교회 기념물 또는 교회 내부의 무덤이라는 가장 독특한 특징으로 이어졌을 것이다.[237]

독립된 실물 크기 조각품에 대한 강한 편견 때문에 동방 정교회는 서방 교회와 같은 방식으로 무덤 기념물을 개발할 수 없었고, 부유하거나 중요한 개인의 매장은 고전적인 전통을 이어갔다. 단순한 종교적 상징만 남을 때까지 수세기에 걸쳐 조각의 풍부함이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 부조로 조각된 석관의 모습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 이후의 비잔틴 황제는 1028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의 사도 교회에 묻혔으며, 이 교회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파괴되었다.[241]

인스브루크에 있는 막시밀리안 1세 기념비를 완성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으며,[239] 볼로냐에 있는 성 도미니코 무덤은 최종 형태에 도달하는 데 수세기가 걸렸다.[240]
피렌체에 있는 대립교황 요한 23세의 무덤은 도나텔로와 미켈로초의 웅장한 초기 르네상스 벽 무덤이다. 로마네스크 시대부터 바로크 및 그 이후까지 흔히 볼 수 있는 석관 위에 누워 있는 기잔트라고도 알려진 실물 크기의 조각상이 있다.[242] 통치 왕조는 대개 수도원에 함께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발루아 부르고뉴 공작은 1383년 샹몰 수도원을 그 목적을 위해 설립했다. 베로나의 스칼리제 무덤은 웅장한 자립형 고딕 천개가 있는 무덤이다.[243]

중세 후기에는 흑사병과 경건한 작가들의 영향을 받아 ''메멘토 모리'' 이미지가 등장하거나 심지어는 벌레가 들끓는 부패한 시체를 묘사하는 것이 북유럽에서 흔해졌다. 죽음의 춤이나 아르스 모리엔디 ("죽음의 예술")와 같은 작품뿐만 아니라 일부 장례 예술에서도 발견될 수 있었다.[245] 베르니니의 교황 우르바노 8세 무덤(1628-1647)에서 이러한 이미지가 이탈리아에서 대중화되기까지는 바로크 시대가 되어서였다.[246]
교회는 권력자의 의복과 일상적인 장신구, 특히 반지를 제외한 부장품을 남기는 이교도 습관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왕은 홀로 매장되고 주교는 각각의 직무 상징인 크로지어로 매장된다.[247] 기사의 갑옷과 검은 흑태자 에드워드의 갑옷과 검이 캔터베리 대성당에 남아 있는 것처럼 그의 무덤 위에 걸릴 수도 있다. 초기 기독교 교회는 흰색 수의로 매장하는 것을 권장했다.[249]

13세기 초부터 16세기까지 알프스 북쪽에서 소규모 지주와 상인 계층에게 인기 있는 기념물 형태는 기념 황동으로, 기념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새겨진 황동판이다.[250]
카스트룸 돌로리스는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중요한 사람들의 국장(國葬)을 위해 관 주위에 세워진 임시 관대였다.[251] 폴란드의 특별한 특징은 관 초상화로, 이는 고인의 가슴 높이 초상화로 관에 부착되어 있지만 매장 전에 제거되어 종종 교회에 걸렸다. 장례 부착은 애도 기간 동안 고인의 집에 전시된 특별한 마름모 모양의 그림 문장으로, 일반적으로 교회에 걸어두기 전에 옮겨졌다.[252]

개신교 종교 개혁 이후 한동안 영국 교회 기념물은 개신교 교회에 추가된 대규모 미술품, 특히 조각품의 대부분을 형성했다. 루터교 국가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났으나 칼뱅주의자는 인물 조각을 더욱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다.[254]
큰 바로크 무덤 기념물에는 계속해서 고인의 초상화가 포함될 가능성이 높았으며 천사보다 죽음, 시간, 미덕 또는 기타 인물의 의인화 된 인물이 포함될 가능성이 더 컸다. 신고전주의는 안토니오 카노바가 이끄는 초상화나 의인화를 통해 고전적인 '스텔라'를 부활시켰다.[257]
19세기까지 많은 구세계 교회 마당과 교회 벽에는 새로운 기념물을 세울 공간이 완전히 부족했으며, 도시, 마을 또는 마을 외곽에 있는 묘지가 일반적인 매장 장소가 되었다.[258] 이탈리아 대도시의 묘지는 일반적으로 화려한 조각상 측면에서 다른 나라의 묘지를 능가하는 것으로 인정되며 특히 제노바의 스타리에노 기념 묘지, 밀라노 기념 묘지, 볼로냐의 체르토사가 인정된다.[259]

기념물은 19세기 동시대의 문체적 발전을 따라가며 상징주의를 열정적으로 수용했지만, 아르누보 이후 점차 전위 예술에서 분리되었다.[260] 전쟁기념관은 전투 현장을 제외하고는 19세기까지는 비교적 흔하지 않았으나 이후 점점 보편화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주요 전투국 마을에도 세워졌다.[261]
5. 4. 이슬람교
이슬람교의 장례 예술은 건축이 중심이다. 이슬람 문화에서 부장품은 권장되지 않으며, 왕족이나 중요한 종교 인물들은 종교적 비문이 새겨진 평범한 석관에 안치되는 경우가 많았다.[262] 그러나 장례 건축은 종종 고인의 지위, 신앙심, 그리고 무슬림 정체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263]12세기 메디나에 있는 알-마스지드 안-나바위 단지는 초기 이슬람 장례 건축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라크 사마라에서는 862년에 건설된 최초의 무슬림 기념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비잔틴 공주가 아들을 위해 의뢰한 것이다.[264] 이슬람의 천국 개념을 반영하여 무덤 주변에 정원을 조성하는 전통이 발전했으며, 이는 인도, 페르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널리 퍼져 차르바그 양식으로 나타났다.[265]
예루살렘의 바위의 돔은 중앙 집중식 기념 건물의 초기 이슬람 모델로,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266] 페르시아에서는 돔을 가진 작은 규모의 마우솔레움이 발전했으며, 이는 티무르 및 무굴 제국 시대에 더욱 발전하여 타지마할과 같은 웅장한 건축물로 이어졌다.[267] 무굴 제국의 무덤은 대부분 차르바그 정원 내에 위치하며, 미나렛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268] 자한기르 묘에는 돔이 없고,[269] 아크바르 대제의 무덤에는 작은 장식용 돔만 있다.
이러한 건축 전통에서 모스크 양식은 작은 방에 맞게 조정되었고, 타일, 상감 세공, 그림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석관은 방 내부에 안치되었고, 코란 낭독을 위한 기금이 마련되기도 했다. 테헤란에 건설 중인 호메이니 묘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는 현대적인 예시이다.[270]
오스만 제국에서는 튀르베라고 불리는 작은 단일 방 형태의 무덤이 모스크 단지 내에 조성되었다. 석관은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터번 형태로 묘비를 장식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스탄불의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와 부르사의 예실 튀르베가 대표적인 예시이다.[271]
이슬람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지역적 특색이 반영된 다양한 장례 건축이 나타났다. 말리의 아스키아의 무덤은 진흙 건축 기술을 활용한 피라미드 형태의 무덤이며,[272] 자바의 왕족 무덤은 코타 게데와 이모기리와 같은 왕실 묘지에 조성되었다. 술탄 카이트베이의 무덤 모스크는 카이로에 있는 많은 무덤 중 하나인 유명한 예이다.[273]
6. 현대
장례 예술은 스타일 면에서 보수적인 경향이 있지만, 모더니즘이나 다른 최근 스타일을 반영하는 경우도 있다. 특정 집단의 사망자를 위한 공공 기념물, 특히 전쟁 기념관은 개인 또는 가족 기념물 대신 대규모 기념물의 형태로 서구 세계에서 주로 건립되고 있다. 서구 정치 지도자들은 보통 단순한 묘를 선호한다.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 기념관, 야드 바쉠, 벨 드 이브 기념관(1994), 유럽 살해된 유대인 기념관(2004), 유덴플라츠 홀로코스트 기념관(2000) 등은 현대적인 스타일을 반영한 대표적인 기념물이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제2차 세계 대전 군인들을 기리는 대부분의 전쟁 기념관 스타일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제1차 세계 대전 전사자를 기리는 초기 모더니스트 기념물 중 일부는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철거되기도 했다.[139]
일부 비평가들은 1945년 이후 공공 기념물의 스타일에 위기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철의 장막 서쪽에서는 집단 학살과 관련하여 전통적인 인물 상징 언어와 민족주의적 가치 환기가 부적절하게 여겨졌다.[142] 동구권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스타일이 당국에 의해 적절하다고 여겨졌다.[143] 1990년대부터 서구에 세워진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전쟁 및 홀로코스트 기념관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144]
레닌 묘소, 아타튀르크 묘소, 진나 묘소, 김일성 묘소, 체 게바라 등 여러 정치 지도자를 위한 대형 묘소가 건설되었다. 미국의 대통령 기념관도 있지만, 최근 대통령들의 실제 매장은 매우 단순하며, 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이 가장 큰 기념관이다. 호메이니 영묘는 2만 석 규모의 주차장을 포함하는 거대한 모스크 단지이다.[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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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rier, 19–22; Benton throughout, especially p.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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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ton throughout, especially Chapter 1 on Soviet War Memorials (pp. 12–13 on Socialist Realism), but also noting deviations in the Warsaw Pact satellites, as on p. 194, and Chapter 7 on West Germany.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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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rier, throughout, especially Chapter 8. See also the copious literature on the Washington Vietnam Veterans Memorial.
[145]
문서
예를 들어 "무덤을 위한 무덤" 장을 참조하세요. 산 자와 죽은 자", Insoll 176–87.
[146]
문서
Hammond, 58–59는 [[해체]]를 특징으로 합니다. 인간의 유골은 시신낭에 포장되어 [[형성 단계|이전 고전]] [[메소아메리카|메소아메리카n]] [[대량 매장]](1차 유해 세트와 함께), [[벨리즈]]에 통합되었습니다. "인간 무덤 물품"으로 간주됩니다.
[147]
문서
"[[Gardner's'와 같은 [[미술사]] 또는 [[건축사|건축]]에 대한 잘 알려진 조사를 참조하세요. Art Through the Ages]]'' 또는 Sir [[Banister Fletcher]]의 'A History of Architecture''의 최신판입니다."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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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149]
서적
무덤 파괴와 장학금: 중세 근대 초기 영국의 기념물
Shaun Tyas
[150]
문서
Toynbee, 47–48, 고대 로마. Stewart와 Rawski의 책은 전적으로 중국 조상 초상화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1장 등을 참조하십시오.
[151]
문서
거석 구조물의 목적이 항상 명확하지는 않으며 가장 오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터키의 [[Nevali Cori]]에는 매장지가 포함되어 있지만 [[Göbekli Tepe]]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152]
문서
Mohen, 70
[153]
문서
Mohen, 87
[154]
문서
Kipfer, "Menhir", 348
[155]
웹사이트
세네감비아 스톤 서클 –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https://whc.unesco.o[...]
2010-04-28
[156]
문서
Groenewegen-Frankfort, 80
[157]
문서
Stone, 37
[158]
문서
Kampen et al, 31
[159]
문서
Maspero, 111–27, with serdabs 124–25
[160]
문서
Robins, 51–55, 66–71, 218 –19, 다른 기간은 색인을 참조하세요. 이집트 역사의 흐름에 따라 무덤 스타일은 상당히 변했습니다.
[161]
문서
Spanel, 23
[162]
문서
Atiya 및 El Shawahy, 73
[163]
문서
Boardman, Edwards et al, 688–89
[164]
문서
James, 122
[165]
문서
Robins, 74
[166]
문서
Boardman, 2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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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Oakes and Gahlin, 236
[168]
문서
Boardman, 26 및 passim
[169]
문서
Richter, 57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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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ght,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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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rdman, 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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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rdman, 149–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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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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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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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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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oy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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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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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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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oar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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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oar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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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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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Merri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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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kman and Soper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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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ickman and So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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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논문
망자의 가상 극장: 호마 무덤 1호의 배우 인형과 그들의 무대
201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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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rp & Vinog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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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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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wn
[206]
간행물
Preservation of the Koguryo Kingdom Tom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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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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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고구려왕릉 보존
UN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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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조선왕릉
https://whc.unesco.o[...]
유네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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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e and So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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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Paine and Soper
[213]
문서
Paine and Soper
[214]
문서
홀, 존 휘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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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Chase and Chase
[216]
문서
무렌
[217]
문서
Kubler
[218]
문서
토론은 Taylor를 참조하세요
[219]
문서
Coe
[220]
문서
Coe et al
[221]
문서
Kubler
[222]
문서
Kubler
[223]
문서
Giammattei와 Reichert
[224]
웹사이트
마운드 및 마운드 빌더
http://www.wvculture[...]
2010-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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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hlefsen; 디츠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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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 전통 사회의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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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원주민 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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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enham
[230]
웹인용
Kasubi 무덤 웹사이트
http://www.kasubit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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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할로윈과 망자의 추모
https://archive.org/[...]
Info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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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대영 박물관: 독수리 모양의 현대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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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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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secl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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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hu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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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포탈라의 경우 Dowman
[236]
문서
Syndicus
[237]
문서
Syndicus
[238]
문서
[239]
문서
인스브루크에 있는 The Hofkirche 이사회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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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h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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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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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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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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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이전에 Stonyhurst 복음으로 알려졌던 성 요한의 커스버트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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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sses, Monum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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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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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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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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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all
[257]
서적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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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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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erresford
[260]
서적
Berresford
[261]
서적
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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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Insoll
[263]
서적
Insoll
[264]
서적
Rugg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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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Ruggles
[26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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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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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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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kia의 무덤
https://whc.unesc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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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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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서적
Mosse
[275]
서적
Mosse
[275]
서적
Carr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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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한국, 중국과 대화를 원한다
http://www.scmp.com/[...]
South China Morning Post
201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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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벤튼
[278]
서적
캐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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