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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알피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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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토리오 알피에리는 사르데냐 왕국의 아스티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유럽 여행과 문학 활동을 병행하며, 1772년 연극적 명성에 대한 열망으로 비극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알피에리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영향을 받아 엄격한 형식과 간결한 문체를 사용했고, 폭정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통해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 드라마에 새로운 학파를 창시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이탈리아 자유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리메이슨 활동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피렌체에서 사망하여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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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알피에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랑수아자비에 파브르가 그린 비토리오 알피에리의 초상화, 1793년
프랑수아자비에 파브르가 그린 초상화, 1793년
본명비토리오 아메데오 알피에리
출생1749년 1월 16일
출생지아스티, 사르데냐 왕국
사망1803년 10월 8일
사망지피렌체, 에트루리아 왕국
묘소산타 크로체 성당 (피렌체)
직업극작가, 시인
장르비극
알피에리 서명
알피에리 서명

2. 생애

이탈리아의 비극 작가이자 시인인 비토리오 알피에리는 1749년 피에몬테주 아스티(당시 사르데냐 왕국)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토리노의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정규 학업보다는 자유로운 활동과 문학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14세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경제적 독립을 이룬 그는 젊은 시절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특히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읽고 자유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게 되었으며, 이는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알피에리는 여러 차례 열정적인 연애를 경험했으며, 그중 스톨베르크-게데른의 루이즈 공주(올버니 백작 부인)와의 관계는 그의 생애 후반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1774년 작 《클레오파트라》의 성공을 시작으로 다수의 비극 작품을 발표하며 18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극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작품은 고전적인 형식미와 함께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특히 폭정에 대한 저항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제로 다루었다.

정치적으로 알피에리는 공화주의 이상을 지지하고 전제 군주정을 비판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혁명의 이상에 공감하여 지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으나, 혁명이 점차 폭력적으로 변모하자 이에 실망하여 강력한 비판자로 돌아섰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견해는 『참주론』(Della Tiranideit, 1777년) 등의 저술에 잘 나타나 있다.

말년에는 피렌체에 정착하여 루이세와 함께 생활하며 그리스어 연구와 희극 집필에 몰두했다. 1803년 피렌체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장되었다. 알피에리의 작품과 자유를 향한 열정은 후대의 리소르지멘토 운동을 비롯한 이탈리아 민족주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알피에리는 현재 피에몬테주에 속하는 아스티(당시 사르데냐 왕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매우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 재혼한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10세가 되자 토리노의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에 다닌 지 1년 후, 그는 코니의 친척 집을 방문했을 때 아리오스토와 메타스타시오의 시구를 모방하여 첫 소네트를 지었다.

13세에는 민법과 교회법 공부를 시작했지만, 이러한 학문보다는 프랑스 로망스를 비롯한 문학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14세가 되던 해, 그의 교육과 재산을 관리하던 삼촌이 사망하면서 아버지의 유산에 더해 삼촌의 재산까지 물려받아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이 시기에 그는 승마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이는 평생에 걸친 말과 승마에 대한 깊은 열정으로 이어졌다.

2. 2. 유럽 여행과 방랑

1766년, 알피에리는 국왕의 허가를 받아 영국인 가정교사와 함께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프랑스 극장에 대해 배우고자 파리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본 모든 것에 실망했으며 프랑스인들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네덜란드에서는 한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으나, 그녀가 남편과 함께 스위스로 떠나자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잠시 집으로 돌아와 문학 공부에 다시 몰두했다. 이때 읽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은 그에게 자유와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을 심어주었다.

다시 여행을 시작한 그는 자유가 없는 유럽 대륙 국가들에 실망감을 느꼈고, 오히려 스웨덴 북부의 황량하고 거친 자연 속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곳의 어두운 숲과 호수, 절벽은 그의 숭고하면서도 우울한 사색을 자극했다. 이상적인 세계를 찾아 여러 나라를 빠르게 여행하던 중, 런던에서는 상류층 유부녀인 레이디 페넬로페 리고니어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이 사건은 큰 스캔들로 번졌고, 결국 레이디 리고니어는 이혼하게 되었으며 알피에리 역시 영국을 떠나야 했다.

이후 스페인포르투갈을 여행하며 아베 칼루소를 만나 평생 동안 가장 가깝고 존경하는 친구가 되었다. 1772년, 알피에리는 다시 토리노로 돌아왔다. 여행 중 그의 애독서는 몽테뉴의 『수상록』과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었다. 그는 영국을 가장 좋아했으며, 네덜란드덴마크에도 호감을 보였다. 반면, 전제 군주 체제 아래 서구화를 추진하던 프로이센 왕국러시아 제국에 대해서는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2. 3. 문학 활동과 사랑

1772년 토리노로 돌아온 알피에리는 투리네티 디 프리에 후작 부인과 교제했다. 그녀가 병들었을 때 간호하며 시간을 보냈고, 이때 드라마의 일부를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은 나중에 수정되고 확장되어 1775년 토리노에서 비극 《클레오파트라》(1774년 작)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 이후 알피에리는 연극적 명성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의 초기 비극인 《필리포》와 《폴리니체》는 원래 프랑스어 산문으로 쓰였는데, 이를 이탈리아어 운문으로 옮기려 할 때 외국 생활의 영향으로 이탈리아어 표현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탈리아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는 토스카나로 이주하여 피렌체시에나를 오가며 거주했다. 이곳에서 그는 《필리포》와 《폴리니체》를 완성하고 다른 희곡들을 구상했다.

1776년 피렌체에서 그는 남편 보니 프린스 찰리와 함께 살고 있던 스톨베르크-게데른의 루이즈 공주(올버니 백작 부인으로도 알려짐)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

알피에리의 '작품' 전면부, 1809년 판


피렌체에 머물고자 했던 알피에리는 피에몬테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여동생 쿠미아나 백작 부인에게 양도하고, 대신 원래 수입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연금을 받기로 했다. 한편, 루이즈 공주는 남편의 학대를 피해 로마로 피신했고, 교황으로부터 남편과의 별거를 허가받았다. 알피에리는 그녀를 따라 로마로 가서 14편의 비극을 완성했으며, 그중 4편은 시에나에서 출판되었다.

루이즈의 평판을 고려하여 알피에리는 1783년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6편의 비극을 추가로 출판했다.

2. 4. 프랑스 혁명과 알피에리

알피에리의 정치 저술은 프랑스 혁명 전후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에세이 '델라 티란니데'(1777년)는 절대주의를 비판하고 보편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옹호했다.[6] 또한 '델 프린치페 에 델레 레테레'에서는 시인을 자유와 인간 존엄성의 전령이자 폭군의 자연적인 적으로 규정했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지하며 'L’America libera'라는 제목의 송시집을 출판했고, 고대 로마를 다룬 희곡을 조지 워싱턴에게 헌정하기도 했다.[6]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때, 알피에리는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혁명 초기의 자유주의적 단계를 지지하며, 민중의 힘에 감격하여 송시 《바스티유 없는 프랑스》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이 급진화되고 공포 정치의 폭력이 심화되자, 그는 혁명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급진적인 자코뱅에 강하게 반대하게 되었다.[6] 결국 1792년 알피에리는 올버니 백작 부인 루이세와 함께 파리를 떠나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피렌체로 돌아왔다. 피렌체에서 그는 Misogallo|미소갈로it(프랑스 혐오한국어)를 저술하여 혁명 정부의 과도함을 비판했다.

알피에리의 반 프랑스적 감정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여전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나폴레옹은 직접 알피에리의 희곡 '버지니아' 공연에 참석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고대 로마 시민들이 자유를 요구하며 폭군을 타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6] 알피에리의 사상은 이후 리소르지멘토 운동과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피에로 고베티와 같은 이탈리아의 자유주의자 및 공화주의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7]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알피에리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정치관이 귀족적 한계를 지닌 자코뱅주의에 가깝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2. 5. 말년과 죽음

루이즈 공주를 따라 로마로 갔으나, 이후 1783년 이탈리아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루이즈가 알자스콜마르로 이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 합류했으며, 이후 남은 생애를 함께 보냈다. 두 사람은 주로 알자스와 파리에서 시간을 보냈고, 결국 파리에 정착하여 알피에리는 자신의 비극 작품 출판을 준비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혼란이 심화되면서 파리를 떠나야 했다. 그는 혁명 초기의 자유주의적 단계를 지지하여 송시 《바스티유 없는 프랑스》를 쓰기도 했으나, 공포 정치의 폭력성을 목격한 후 혁명에 대한 기대를 접고 급진적인 자코뱅에 강하게 반대하게 되었다.[6] 1792년 알피에리는 루이즈 공주와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피렌체로 돌아와 정착했다. 피렌체에서 보낸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은 비교적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다만 1799년 프랑스 혁명군이 피렌체로 진입했을 때는 잠시 혼란을 겪기도 했다.

말년에는 그리스어 문학 연구와 일련의 희극 작품 집필에 몰두했다. 이러한 활동에 힘을 쏟으면서 건강이 점차 악화되었다. 그는 의사의 처방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방식을 고집했고, 이는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803년 10월 8일 피렌체에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내 손을 잡아주세요, 나의 친애하는 친구, 나는 죽습니다!"였다고 전해진다.[8]

그의 유해는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장되었으며, 마키아벨리의 묘 옆에 자리 잡았다.

안토니오 카노바가 제작한 비토리오 알피에리의 기념 묘,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 1810


루이즈 공주는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에게 의뢰하여 알피에리를 기리는 기념비를 제작하게 했고, 이 기념비는 6년간의 작업 끝에 1810년 가을 산타 크로체 성당에 설치되었다.[11]

3. 작품 세계



젊은 시절 유럽 각지를 여행한 비토리오 알피에리는 연극적 명성을 갈망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첫 비극 작품인 《필리포》와 《폴리니체》는 원래 프랑스어로 쓰였으나, 이탈리아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언어적 한계를 느껴 토스카나에서 이탈리아어를 연마했다. 이 시기 피렌체에서 만난 스톨베르크-게데른의 루이즈 공주(올버니 백작 부인)와의 관계는 그의 삶과 창작에 큰 영향을 주었고, 그녀를 따라 로마로 이주한 뒤 많은 비극을 완성했다.

알피에리의 작품 세계는 주로 비극에 집중되었으며, 그의 등장은 18세기 이탈리아 연극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희곡은 고대 그리스 모델을 따르면서도 자유, 독립, 폭정 저항이라는 주제를 강렬하게 다룬다. 주인공은 이상을 추구하며 고독과 고뇌를 겪는 비극적 영웅으로 자주 그려진다. 초기 문체는 다소 거칠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점차 엄격하고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스타일로 발전하여 후대 이탈리아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비극 외에도 알피에리는 소네트, 송시, 정치 에세이 등 다양한 글을 남겼다. 그의 정치 저술인 《델라 티란니데》(Della Tirannide|폭군론it)와 《델 프린치페 에 델레 레테레》(Del Principe e delle Lettere|군주와 문학에 관하여it)에서는 절대주의를 비판하고 공화주의적 이상과 자유의 가치를 역설했다.[6] 그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지하며 관련 송시를 썼고,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지지했으나 공포 정치의 잔혹함에 실망하여 비판적으로 돌아섰다.[6] 그의 사상은 이후 리소르지멘토를 비롯한 이탈리아 자유주의 및 공화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7]

말년에는 피렌체에 정착하여 그리스어 문학 연구와 희극 집필에 몰두하다 1803년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되었다. 알피에리의 작품과 사상은 이탈리아 문학과 정치사상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그의 자서전은 파란만장했던 삶과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3. 1. 비극 작품의 특징

비토리오 알피에리가 높은 명성을 얻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그의 비극 희곡이다. 그의 시대 이전 이탈리아 연극은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나 단테의 『신곡』과 같은 조화나 정력적인 면모와 달리, 극적인 대화에서 힘이 없고 산문적인 경향이 있었다. 16세기 학문적이지만 생명력 없는 비극 이후에는 과장된 감정과 개연성 부족을 특징으로 하는 희곡들이 주를 이루었다. 18세기 초 마페이의 『메로페』가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두드러졌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알피에리의 비극 등장은 18세기 이탈리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6][7]

알피에리의 비극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은데, 작품을 출판하는 세 시기를 거치며 그의 취향과 체계가 상당한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초기 네 편의 비극인 《필리포》, 《폴리니체》, 《안티고네》, 《버지니아》는 지나치게 거친 문체, 격렬한 감정, 시적 장식의 부재가 특징이다. 이러한 점들은 이후 작품들, 특히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울》 등에서는 어느 정도 수정되었다.

작품들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줄거리는 대부분 신화역사에 기반하며, 직접 창작한 것이 아니다. 많은 주제가 이미 고대 그리스 극작가나 세네카에 의해 다뤄진 바 있다. 유일하게 독창적인 작품으로 여겨지는 《로스문다》조차 반델로의 소설과 프레보의 『어떤 신분의 남자의 회고록』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모든 비극에 나타나는 핵심 특징은 주인공이 폭정에 맞서 싸우는 비극적인 '자유의 영웅'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억압에 저항하며, 종종 폭군을 살해한 뒤 죽음을 맞는 급진적인 길을 택한다. 자유에 대한 열망은 영웅을 고독, 비관주의, 내적 고뇌로 이끌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개념은 Titanismus|티타니즘de (Titanism)이라고도 불린다.

알피에리는 어떤 주제를 선택하든 그리스 비극 모델을 따르며, 아테네의 시인들처럼 자유와 독립 정신을 작품에 불어넣으려 했다. 실제로 《아지데》(Agideit)와 《브루토》 같은 작품은 단순한 비극이라기보다 자유에 대한 수사적 연설이나 대화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다. 시간과 장소의 통일성은 고대 작가들만큼 엄격하게 지키지 않았으나, 행동과 관심(주제)의 통일성은 철저히 고수했다. 각 작품마다 하나의 위대한 행동과 지배적인 열정을 설정하고, 부수적인 사건이나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오히려 복잡한 감정들 간의 관계에서 오는 조화나 매력을 해치고, 작품을 단조롭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그는 극적 구성의 핵심이라 여긴 엄격하고 단순한 방식을 위해, 극적인 장면 전환 효과(coup de théâtre|쿠 드 테아트르프랑스어), 철학적 성찰, 이전 작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화려한 수사나 장식적 운율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불필요한 장식을 피하려는 노력 속에서 상상력의 풍부함마저 덜어냈다는 지적도 있다. 시적인 언어의 조화와 흐름 대신, 정확하고 순수하지만 때로는 거칠고 정교하며 갑작스러운 느낌을 주는 문체를 사용했다. 이는 종종 부자연스러운 에너지로 긴장되거나 인위적인 간결함으로 압축되기도 한다.

알피에리의 가장 큰 장점은 극적 인물을 강력하게 묘사하는 데 있다. 《필리포》에서는 마치 타키투스처럼 현대의 티베리우스를 연상시키는 인물의 어둡고 비밀스러운 성격과 모호한 언행을 그려냈다. 《폴리니체》에서는 경쟁 관계인 형제들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대비시켰다. 《마리아 스투아르다》에서는 메리 스튜어트를 의심 없고, 반대에 참을성 없으며, 애정에 격정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미라》에서는 아버지이자 왕으로서 완벽한 시니로와 아내이자 어머니의 모델인 체크리를 그렸다. 특히 판단력이 흐려졌음에도 성격의 흔적이 남은 정신 이상 상태를 묘사하는 데 탁월했는데, 《사울》의 광기나, 실수로 어머니를 죽인 후 광기에 휩싸이는 《오레스테》의 아기스투스 살해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장단점에도 불구하고, 알피에리는 이탈리아 드라마의 새로운 학파를 창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당대 이탈리아에서는 그를 유일한 비극 시인으로 여겼으며, 후대의 작가들은 그의 대담하고 엄격하며 빠른 전개 방식을 진정한 비극 구성의 모델로 삼았다. 그의 비극은 강한 정치적 색채, 단순한 줄거리, 웅장하고 힘 있는 문체를 특징으로 한다.

3. 2. 주요 작품



알피에리는 남은 생애 동안 연극적 명성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었다. 그의 초기 비극 작품인 《필리포》(Filippo)와 《폴리니체》(Polinice)는 원래 프랑스 산문으로 쓰였으나, 이탈리아어로 운문화하는 과정에서 언어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탈리아어 실력 향상을 위해 토스카나로 이주하여 피렌체시에나를 오가며 두 작품을 완성하고 다른 희곡 구상을 이어갔다. 이 시기 피렌체에서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아내인 스톨베르크-게데른의 루이즈 공주(올버니 백작 부인)를 만나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는 그가 피렌체에 머무르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그는 피에몬테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재산을 여동생에게 양도하고 연금만 받기로 했다. 루이즈 공주가 남편의 학대를 피해 로마로 가 교황의 허가를 받아 별거하게 되자, 알피에리도 로마로 따라가 그곳에서 14편의 비극을 완성했다.

알피에리의 작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비극이다. 그의 시대 이전 이탈리아 연극은 페트라르카나 단테의 문학과는 달리 활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6세기 이후 이탈리아 비극은 과장된 감정과 개연성 부족이 특징이었으나, 알피에리의 등장은 18세기 이탈리아 문학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비극은 세 번의 출판 시기를 거치며 작가의 스타일과 구성 방식에 변화를 보였다. 초기 네 작품인 《필리포》, 《폴리니체》, 《안티고네》, 《버지니아》는 다소 거친 문체와 격렬한 감정 표현, 시적 장식의 부족이 특징이다. 이후 발표된 작품들, 특히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사울》에서는 이러한 점들이 다소 완화되었다. 《사울》의 인기는 알피에리 특유의 엄격하고 꾸밈없는 스타일이 당시의 시대정신과 부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알피에리 비극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주제: 대부분 신화나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하며, 주인공은 주로 폭정에 맞서 싸우는 비극적인 "자유의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 영웅은 종종 고독과 내적 고뇌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며, 때로는 폭군을 타도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경향은 티탄주의(titanism)라고도 불린다.
  • 형식: 고대 그리스 비극 모델을 따르며 자유와 독립 정신을 강조한다. 특히 《아지데》(Agide)와 《브루토》 시리즈는 자유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시간과 장소의 통일성은 고대만큼 엄격하지 않지만, 행동과 주제의 통일성은 철저히 지킨다. 각 작품은 하나의 중심 사건과 지배적인 감정에 집중하며, 부수적인 요소는 최대한 배제한다.
  • 문체: 극적인 효과(coup de théâtre)나 철학적 성찰, 화려한 수사를 배제하고 엄격하고 단순한 방식을 추구했다. 이로 인해 때로는 상상력의 여지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받지만, 그의 언어는 정확하고 순수하며 강렬한 에너지를 전달한다.
  • 인물 묘사: 가장 큰 장점은 강력하고 입체적인 인물 묘사에 있다. 《필리포》에서는 타키투스에 비견될 만큼 티베리우스와 같은 폭군의 어둡고 복잡한 내면을 잘 표현했으며, 《폴리니체》에서는 경쟁 관계인 형제들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대비시켰다. 《마리아 스투아르다》에서는 메리 스튜어트의 복잡한 심리를, 《미라》에서는 이상적인 아버지와 어머니상을 그려냈다. 특히 《사울》에서 광기에 빠진 인물의 심리 묘사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피에리는 이탈리아 드라마의 새로운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대담하고 엄격한 스타일을 비극의 모범으로 삼았다.

비극 외에도 알피에리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 시: 생전에 다수의 소네트미국 독립에 관한 다섯 편의 송시를 출판했다. 《아벨레》(Abéle)라는 제목의 트라멜로게디아(trameogedia, 비극과 음악극의 혼합 형식)와 피렌체 공작 알렉산더 암살을 다룬 《에트루리아》라는 시도 썼다.
  • 산문: 소플리니우스의 파네기리쿠스(찬사)에 대한 비판으로 쓰인 《트라야누스 찬양》은 생동감과 웅변으로 유명하다. 정치 저술인 《폭정론》(Della Tirannide)과 《군주와 문학에 관하여》(Del Principe e delle Lettere)는 마키아벨리의 영향을 보여주면서도 독창적인 문체와 활력을 지녔다. 《폭정론》에서는 절대주의를 비판하고 자유를 보편적 권리로 옹호했으며, 《군주와 문학에 관하여》에서는 시인을 자유와 인간 존엄성의 수호자이자 폭군의 적으로 규정했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지하며 송시집 《자유로운 아메리카》(L’America libera)를 썼고, 고대 로마를 다룬 희곡을 조지 워싱턴에게 헌정하기도 했다.[6]
  • 기타: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자유주의적 단계를 지지했으나 공포 정치의 폭력성에 반발하여 급진 자코뱅에 강하게 반대했다.[6] 이러한 반 프랑스 감정을 담아 《프랑스 혐오》(Misogallo)를 썼다. 그의 사상은 피에로 고베티와 같은 이탈리아 자유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20세기까지 이어졌다.[7]
  • 사후 출판: 사후에는 풍자 작품, 여섯 편의 정치 희극, 그리고 자서전인 《그의 생애 회고록》(Vita di Vittorio Alfieri da Asti scritta da esso)이 출판되었다. 회고록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열정을 담담하게 서술하여 흥미롭게 읽힌다.


다음은 알피에리의 주요 비극 작품 목록이다.

알피에리 비극 작품 목록
출판 연도작품명 (원제)비고
1783년《필리포》 (Filippo)펠리페 2세 관련
《폴리니체》 (Polinice)폴리네이케스 관련
《안티고네》 (Antigone)안티고네 관련
《버지니아》 (Virginia)베르기니아 관련
《아가멤논》 (Agaménnone)아가멤논 관련
《오레스테》 (Oreste)오레스테스 관련
《로스문다》 (Rosmunda)로사문다 관련
《오타비아》 (Ottavia)옥타비아 관련
《티몰레오네》 (Timoleone)티몰레온 관련
《메로페》 (Merope)메로페 관련
1788년《마리아 스투아르다》 (Maria Stuarda)메리 스튜어트 관련
《라 콩주라 데 파치》 (La Congiura De'Pazzi)파치 음모 사건 관련
《돈 가르치아》 (Don Garzia)
《사울》 (Saul)사울 관련
《아지데》 (Agide)아기스 관련
《소포니스바》 (Sofonisba)소포니스바 관련
1792년《브루토 프리모》 (Bruto Primo)첫 번째 브루투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관련
《미라》 (Mirra)미르라 관련
《브루토 세콘도》 (Bruto Secondo)두 번째 브루투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관련
1804년 (사후 출판)《아벨레》 (Abéle)아벨 관련, 트라멜로게디아
《알체스티 프리마》 (Alceste prima)알케스티스 관련 (첫 번째 버전)
《알체스티 세콘다》 (Alceste seconda)알케스티스 관련 (두 번째 버전)


3. 3. 정치적, 사회적 영향

알피에리의 정치 저술은 당대의 혁명적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에세이 '델라 티란니데' (Della Tirannide|폭군에 관하여ita)는 절대주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모든 인간의 권리로서 자유를 옹호했다.[6] 또한 '델 프린치페 에 델레 레테레' (Del principe e delle lettere|군주와 문학에 관하여ita)에서는 시인을 자유와 인간 존엄성의 전달자이자 폭군의 천적으로 규정했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지하며 'L’America libera' (L’America libera|자유로운 아메리카ita)라는 제목의 송시집을 출판했고, 고대 로마를 다룬 희곡을 조지 워싱턴에게 헌정하기도 했다.[6]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때, 알피에리는 초기 자유주의 단계를 지지했으나, 이후 공포 정치의 폭력성을 목격하고 급진적인 자코뱅파에 대해 강한 반대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6] 그는 파리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와 혁명 정부의 과격함을 비판하는 '프랑스 혐오' (Misogalloita)를 저술했다. 이러한 반 프랑스적 감정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에 진주했을 때 그는 여전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나폴레옹은 시민들이 자유를 요구하며 폭군에 맞서 일어서는 내용을 담은 알피에리의 희곡 '버지니아' (Virginiaita) 공연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6]

알피에리의 사상은 피에로 고베티와 같은 이탈리아의 자유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리소르지멘토와 20세기 초반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7]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알피에리를 이탈리아의 열정을 대표하는 천재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정치적 시야가 다소 좁다고 지적했다. 스탕달은 알피에리의 '참주론'에 나타난 정치관을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억압을 참지 못하는 피에몬테 귀족의 자코뱅주의로 해석하기도 했다.

4. 프리메이슨 활동

비토리오 알피에리의 이름은 피에몬테 프리메이슨의 공식 간행물에는 등록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1774년에서 1775년 사이에 나폴리의 정규 프리메이슨 로지 "비토리아"(Vittoriaita)에 입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로지는 당시 여왕 마리아 카롤리나와 가까웠던 귀족 프리메이슨들이 설립한 그란 로지아 나치오날레 "로 젤로"(Lo Zeloita) 산하 조직이었다.[13]

알피에리 주변에는 많은 프리메이슨 친구들이 있었으며, 이는 아스티의 연구 센터에 보관된 문서들을 통해 증명된다. 그의 첫 비극 판본(1763년 출판)은 여러 저명한 프리메이슨들에게 보내졌는데, 명단은 다음과 같다.[14]

수신자 이름 ! 지역 ! 비고 |
토리노 | |
베네치아 | |
베네치아 | |
밀라노 | 체사레 베카리아의 형제 |
밀라노 | |
밀라노 | |
파르마 | |
제노바 | |
볼로냐 | |
나폴리 | Venerable Mastereng |
주세페 구아스코 | 로마 | |



1782년 8월 27일, 알피에리의 이름은 Tableau des Membres de la Respectable Loge de la Victoire à l'Orient de Naples|나폴리 오리엔트의 존경할 만한 로지 "빅투아르"의 회원 명단fra에 Comte Alfieri, Gentilhomme de Turin|백작 알피에리, 토리노의 신사fra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몇 달 뒤, 사보이 왕가는 피에몬테에서의 모든 프리메이슨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베르네초의 그랜드 마스터 아시나리 백작은 그의 칭호를 나폴리의 디에고 나셀리 왕자에게 넘겨주어야 했고, 나폴리는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의례 프리메이슨의 공식적인 중심지가 되었다.[15]

알피에리의 시 "비타"(Vitaita, 1775년 출판)에는 프리메이슨과 관련된 내용이 나타난다.

:Egli ti additi il murator primiero,

:Del grande Ordine infin l'origo estrema

:E se poi ti svelasse un tanto arcano,

:Avresti tu sì nobili concetti

:E ad inalzare il vol bastante mano?

:Ah, scusatela si, fratei diletti;

:Non ragiona l'insana, oppur delira

:Quando canta di voi con versi inetti.

해당 시의 장에서는 Venerabile|베네라빌레ita, primo Vigilante|프리모 비질란테ita, Oratore|오라토레ita, Segretario|세그레타리오ita 등 스코틀랜드 의례의 등급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5. 평가와 영향

알피에리의 비극은 정치적 색채가 강하고, 줄거리는 단순하며, 문체는 웅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1] 그는 단테, 페트라르카, 아리오스토, 타소 등 이탈리아 고전 작가들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마키아벨리,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등의 작품에서도 영향을 받았다.[1]

귀족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그는 자유분방하고 독립을 존중하는 기질을 지녔다.[1] 규칙적인 학업이나 군 복무에 얽매이지 않았고, 젊은 시절 유럽 전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했다.[1] 그는 공화주의 이상을 품고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에 공감했지만, 루이 15세 치하의 베르사유 체제에는 비판적이었다.[1] 전제 군주가 통치하는 프로이센 왕국러시아 제국을 싫어했으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를 선호했다.[1]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알피에리를 이탈리아의 강렬한 정열을 대표하는 천재로 높이 평가하며, "인간이라는 식물은 다른 곳보다 이탈리아에서 훨씬 튼튼하게 자란다"는 알피에리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1] 그러나 동시에 스탕달은 알피에리의 정치적 시야가 편협하며, 그의 저서 『참주론』(Della Tirannideita, 1777년)에 나타난 정치관은 특권 계층에 대한 반발심을 가진 피에몬테 귀족의 자코뱅주의적 한계를 보인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그를 바이런 경과 같은 불만을 품은 극우반동에 비유하기도 했다.[1]

5. 1. 이탈리아 문학에 끼친 영향

비토리오 알피에리가 높은 명성을 얻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그의 희곡이다. 그의 시대 이전에는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에서 조화롭고, 단테의 『신곡』에서 정력적이었던 이탈리아어가 극적인 대화에서는 변함없이 무기력하고 산문적이었다. 16세기의 박식하지만 생명력 없는 비극에 이어, 이탈리아 문학의 암흑기 동안에는 과장된 감정과 행동의 개연성 부족이 주요 특징인 희곡들이 나타났다. 18세기 초에 등장한 마페이의 『메로페』가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작품 자체의 장점보다는 당시 다른 작품들과의 비교 우위 때문일 수 있다. 이러한 비극적 취향의 퇴폐 속에서 알피에리 비극의 등장은 18세기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알피에리의 비극은 그가 작품을 출판한 세 번의 시기 동안 작가의 취향과 체계가 상당한 변화를 겪었기에 일률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의 초기 네 비극인 『필리포』, 『폴리니체』, 『안티고네』, 『버지니아』는 지나치게 거친 문체, 격렬한 감정 표현, 시적 장식의 부재가 특징이다. 이러한 점들은 몇 년 후 그가 쓴 여섯 편의 비극과 그의 작품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울』에서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사울』의 인기는 알피에리 특유의 엄격하고 장식 없는 스타일이 그 시대의 가부장적인 단순함과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기도 하다.

그의 희곡들은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몇 가지 공통적인 특성을 지닌다. 줄거리는 모두 그의 창작이 아니라 신화적인 우화나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대부분 그리스 극작가나 세네카가 이미 다루었던 소재들이다. 그 자신의 창작으로 여겨지는 유일한 작품 『로스문다』는 반델로의 소설과 아베 프레보의 『한 남자의 회고록』에 일부 기반하고 있지만, 그의 작품 중 가장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피에리 비극의 또 다른 공통된 특징은 주인공이 항상 폭정에 맞서 싸우는 비극적인 "자유의 영웅"이라는 점이다. 이 영웅은 억압에 저항하도록 이끄는 야망과 혁명의 필요성을 느끼며, 종종 폭군을 살해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급진적인 방식으로 행동한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영웅을 고독, 비관주의, 내적 고뇌로 이끌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나 투쟁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목표 달성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아간다. 이러한 개념은 티탄주의(Titanism)라고 불린다.

그가 어떤 주제를 선택하든, 그의 희곡은 항상 그리스 모델을 따르며 고대 아테네 시인에 걸맞은 자유와 독립 정신을 담고 있다. 실제로 그의 ''Agide''와 『브루토』는 비극이라기보다는 자유에 대한 수사적 연설이나 대화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다. 시간과 장소의 통일성은 고대 극작가들만큼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았지만, 행동과 관심의 통일성은 철저히 고수했다. 그는 각 작품에 하나의 위대한 행동과 하나의 지배적인 열정을 담고, 다른 모든 사건이나 감정을 배제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통일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는 때때로 통일성의 매력이 복잡한 감정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는 점을 간과한 듯하다. 그는 극적 구성의 핵심이라 생각한 엄격하고 단순한 방식을 위해, 극적인 반전(coup de théâtre), 철학적 성찰, 화려한 운율 등 이전 작가들이 공들였던 요소들을 배제했다. 불필요한 장식을 피하려다 보니 상상력의 장식마저 제거되었고, 시적인 언어의 조화와 흐름 대신 정확하고 순수하지만 거칠고 갑작스러우며 때로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긴장되거나 인위적으로 압축된 스타일을 사용했다.

알피에리의 주요 강점은 극적 인물의 강력한 묘사에 있다. 그의 『필리포』에서 그는 거의 타키투스의 솜씨 있는 터치로 현대의 티베리우스의 어두운 성격, 어두운 미스터리한 조언, "항상 중단되고 모호한 말"을 표현했다. 『폴리니체』에서, 라이벌 형제의 성격은 아름답게 대비된다. 『마리아 스투아르다』(『메리 스튜어트』)에서, 불행한 여왕은 의심하지 않고, 반대에 참을성이 없고, 그녀의 애착에 폭력적으로 묘사된다. 『미라』에서, 시니로의 성격은 아버지이자 왕으로서 완벽하며, 체크리는 아내이자 어머니의 모델이다. 판단력이 사라졌지만 성격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정신적 이상 현상의 묘사에서, 그는 특히 행복하다. 사울의 광기는 솜씨 있게 처리되었고, 아기스투스를 죽이는 오레스테스의 끔찍한 기쁨은 그가 실수로 그의 어머니를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광기로 치솟는다.

알피에리의 장점이나 결점이 무엇이든, 그는 이탈리아 드라마의 새로운 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질 수 있다. 그의 조국은 그를 유일한 비극 시인으로 환영했고, 같은 문학 분야의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대담하고, 엄격하며, 빠른 방식을 진정한 비극 구성의 모델로 여겼다.

참조

[1] 사전 Alfieri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2019-06-25
[2] 웹사이트 Alfieri https://www.collinsd[...] HarperCollins 2019-06-25
[3] 사전 Alfieri Merriam-Webster 2019-06-25
[4] 웹사이트 Alfieri
[5] 서적 Oxford Illustrated Encyclopedia Of The Arts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6] 서적 Italy in the Nineteenth Century: 1796-1900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7] 서적 Piero Gobetti and the Politics of Liberal Revolution Springer 2008
[8] 서적 The Last Words (Real and Traditional) of Distinguished Men and Women https://books.google[...] Good Press
[9] 학술지 Memoirs of the life and writings of Victor Alfieri; written by himself. Translated from the Italian https://catalog.hath[...] Henry Colburn
[10] 학술지 Review of ''Vita di Vittorio Alfieri, &c.'' ''Memoirs of the Life and Writings of Victor Alfieri, written by himself'' and ''The Tragedies of Vittorio Altieri'', translated by Charles Lloyd https://babel.hathit[...] 1816-01
[11] 문서 Vaughan
[12] 문서 Vaughan
[13] 서적 L'Italia dei Liberi Muratori. Brevi biografie di Massoni famosi Erasmo Edizioni-Mimesis
[14] 웹사이트 Vittorio Alfieri, fratel massone http://www.studiaste[...]
[15] 문서 Primi sintomi di carattere appassionato
[16] 웹사이트 Vittorio, Count Alfieri Italian author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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