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대한교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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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해대한교민단은 1920년 10월 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부령에 따라 상해 지역 한인 교민 단체로 개편되었다. 1918년 상해고려교민친목회로 시작하여, 상해대한인민단,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을 거쳐 상해대한교민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교민들의 생활 보호 및 임시정부의 기반 조직 역할을 수행하며, 교육, 위생, 치안 유지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와 함께 약화되었으며, 이봉창 의거 및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과 프랑스 관헌의 탄압으로 1935년 사실상 궤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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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대한교민단 | |
|---|---|
| 기본 정보 | |
| 설립 | 1919년 |
| 해산 | 1945년 |
| 위치 | 중국 상하이 |
| 주요 활동 | |
| 활동 | 교민 자치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애국 계몽 운동 |
| 조직 | |
| 주요 인물 | 단장: 김보연 간사: 이규갑 서기: 이유필 재무: 안태국 박찬익 조성환 윤기섭 나창헌 현정경 이춘숙 정의발 김사준 황진남 최창식 오영선 조경한 |
| 관련 단체 | |
| 관련 단체 | 대한민국 임시정부 |
2. 역사
1919년 3월 16일 교민친목회가 신헌민(申獻民)을 단장으로 선출하면서 상해대한교민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회원 수는 345명이었으며, 상하이 프랑스 조계 하비로(霞飛路) 강경리(康寧里) 제2호에 설치됐다.[3] 이후 여러 차례 명칭과 조직 개편을 거쳤다.
1919년 9월 22일 상해대한인민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여운형을 단장으로 선출했다. 1920년 1월 9일에는 상해대한인거류민단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고 단장에 여운형, 총무에 선우 혁을 선출했다. 1920년 3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원령으로 ‘임시거류민단제’를 공포하여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을 정식으로 승인하였다.[6] 1920년 10월 7일, 임시정부는 내무부령으로 '교민단제'를 공포하면서 '''상해대한교민단'''(上海大韓僑民團)으로 개편되었다.[7]
교민단은 거류민의 생활 보호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반 조직으로서, 교육, 위생, 직업 소개, 민적(民籍) 증명, 교민 보호와 치안 확보, 밀정 제거 등의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7] 또한, 각종 기념식, 강연회, 강습회, 추도회 등을 주최하며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고 교민 사회의 결속을 다졌다.[7] 특히, 1923년 말에는 교민단 산하에 경찰 조직인 의경대(義警隊)를 조직하여 운영하였다.[7]
1929년 8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장 김구가 교민단장이 되면서 세력이 일시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러나 김구는 1932년 1월 11일 교민단을 독립운동기관으로 개편하면서, 민단장직은 이유필이 맡고 김구는 의경대장직을 맡았다.[1][8] 1932년 이봉창 의거 및 윤봉길 의거 발생과 함께 일본과 프랑스 관헌의 탄압을 받으면서 간부 대부분이 도피하였다.[1]
1933년 가을 옥관빈 암살 관련자들이 검거되자 사무소 등이 일시 폐쇄되는 상황에 빠졌다.[1] 1935년 7월 5일 민족혁명당이 조직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속에 대한 논란과 함께 교민단은 사실상 궤멸 상태로 돌아갔다.[1]
2. 1. 설립 과정
1919년 3월 16일 교민친목회는 신헌민(申獻民)을 단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회원 수는 345명이었다.[3] 상하이 프랑스 조계 하비로(霞飛路) 강경리(康寧里) 제2호에 설치됐다. 이후 1919년 9월 22일 상해대한인민단, 1920년 1월 9일 상해대한인거류민단, 1920년 10월 7일 상해대한교민단으로 명칭 변경과 조직 개편을 거쳤다.2. 1. 1. 상해고려교민친목회 (1918년)
1918년 상해 지역 한인 교민 단체인 '''상해고려교민친목회'''(上海高麗僑民親睦會)가 설립되었다.[2]2. 1. 2. 상해대한인민단 (1919년)
1919년 9월 22일 교민친목회는 '''상해대한인민단'''(上海大韓人民團)으로 이름을 바꾸고, 여운형을 단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단원 수는 상해에 오랫동안 거주했거나, 가족이 있거나, 직업이 있는 사람으로 제한하여 72명이었다.[3][4]1919년 9월 23일 상해대한인민단은 총회를 열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5]
| 직책 | 이름 |
|---|---|
| 단장 | 여운형 |
| 부단장 | 유정근(兪政根) |
| 총무 | 옥성빈(玉成彬) |
| 평의원 | 김백련(金百鍊), 태희창(泰熙昌), 현석진(玄錫鎭), 신한균(申漢均), 민병덕(閔丙德), 하상린(河相麟), 한백원(韓百源), 선우훈(鮮于薰) |
2. 1. 3. 상해대한인거류민단 (1920년)
1920년 1월 9일 상해고려교민친목회는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으로 이름을 바꾸고, 단장 여운형, 총무 선우 혁, 간사 김보연, 임재호를 선출했다.[3]1920년 3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원령으로 ‘임시거류민단제’를 공포하여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을 정식으로 승인하였다.[6]
2. 1. 4. 상해대한교민단 (1920년)
1920년 1월 9일 상해대한인민단은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으로 이름을 바꾸고, 단장 여운형, 총무 선우 혁, 간사 김보연(金甫淵), 임재호(任在鎬)를 선출했다.[3]1920년 3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원령으로 ‘임시거류민단제’를 공포하여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을 정식으로 승인하였다.[6]
1920년 10월 7일 임시정부는 내무부령으로 '교민단제'를 공포하면서 '''상해대한교민단'''(上海大韓僑民團)으로 개편되었다.[7]
2. 2. 기능과 역할
교민단의 기본 업무는 거류민의 생활을 보호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반 조직으로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거류민의 교육, 위생, 소방, 교통, 병원(兵員) 모집, 빈민 구제, 민적 사무, 교민 보호와 치안 확보, 밀정 제거 등의 업무였다. 특히 주된 것은 교육, 위생, 직업 소개, 민적(民籍) 증명 등이었고, 중국인이나 기타 외국인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비와 분규를 해결하는 일도 하였다. 교민단은 이러한 업무를 추진하기 위해 임시정부와의 협조 아래 거류민의 호구와 자산 조사 활동을 벌였다.[7]그 외에도 교민단은 많은 행사를 치렀다. 교민단이 주최한 행사에는 각종 기념식과 환영회, 강연회, 강습회, 추도회 등이 있었는데, 임시정부의 직할 조직이었기 때문에 맡은 행사도 많았다. 기념식에는 신년 축하식, 3·1독립선언식, 어천절(御天節) 기념식, 건국 기념식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어천절은 단군의 승천(昇天) 기념일로서 음력 3월 15일에 행해졌다. 이 행사는 대종교의 행사이기도 했으나, 교민단이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주최하였다. 음력 10월 3일에는 개천절 행사의 일환으로 건국 기념식을 개최하였다.[7]
교민단은 다양한 강연회와 강습회를 개최했다. 임시정부 시책에 대한 강연회가 시국 강연회의 형식으로 여러 차례 열렸는데, 시국 강연회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들이 교민들에게 국정을 보고하는 자리이자 그들의 지지를 구하는 기회였다. 또 교민단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하이에 도착할 경우 열렬한 환영회를 개최했다.[7]
이와 함께 교민단은 교민을 위한 계몽적인 강연회도 많이 개최하였다. 한국어 장려에 대한 연설회와 강습회, 위생에 대한 강연회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외에도 교민단은 국내외에서 순국한 독립운동 지사들의 추도회도 개최했으며, 정세 변화에 따라 그에 대응하는 많은 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국내외 동포 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7]
또한 교민단은 상해 동포 사회의 치안 유지 활동도 전개하였다. 교민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확보해야 하는 교민단은 외부 세력의 침투를 방지하는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1923년 말 교민단 산하에 일종의 경찰 조직인 의경대(義警隊)를 조직하여 운영하였다.[7]
교민단은 교민에 대한 호구조사, 자산조사 등을 실시하였으며 아울러 공산주의 세력을 배척하고, 자파의 세력 신장에 주력했다. 특히 교민단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공동국에 청원하여 매년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7]
2. 3. 쇠퇴
1929년 8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장 김구가 교민단장이 되면서 세력이 일시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러나 김구는 이봉창 의거 등을 위해 1932년 1월 11일 교민단을 독립운동기관으로 개편하면서, 민단장직은 이유필이 맡고 김구는 의경대장직을 맡았다. 김구가 교민단을 자치단체가 아닌 독립운동기관으로 활용하자 일반 교민들이 비난했었다고 한다.[1][8]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거 및 4월 29일 윤봉길 의거 발생과 함께 일본·프랑스 관헌의 탄압을 받고 간부 대부분은 어디론가 도피하였다.[1]
상해대한교민단 의경대는 1933년 8월 1일 옥관빈 암살, 8월 17일 석현구(石鉉九) 암살, 8월 31일 신생 친일단체로 알려진 상해한국인친우회의 유인발(柳寅發) 암살미수 등 친일파 숙청을 계속하였다.[9]
1933년 가을 옥관빈 암살 관련자인 이수봉(李秀峯), 김철 등이 검거되자 사무소 등도 일시 폐쇄되는 상황에 빠졌다.[1]
1934년 1월 김홍서(金弘敍)가 정무위원장에 취임하고 3월 1일 교민단정무위원회 명의의 삼일절기념선언, 8월 29일 동 단 명의의 국치기념선언을 발행하는 등 양기탁, 문일민(文逸民) 등과 함께 그 강화에 분주하였다.[1]
1935년 7월 5일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속에 대해서조차 폐지를 주장하는 자가 많이 나와서 교민단은 그 존재가 망각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김홍서, 문일민 등이 잇달아 항주, 남경 방면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교민단은 사실상 궤멸 상태로 돌아갔다.[1]
3. 역대 단장
참조
[1]
웹인용
73) 大韓僑民團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웹인용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7 27권 내무부 · 교통부 · 재무부 · 문화부 > 해제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
웹인용
14) 上海大韓人居留民團의 過去 및 現在 狀況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
웹인용
2) 僑民親睦會 總會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웹인용
4) 上海大韓人民團 任員 選擧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6]
웹인용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第13號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7]
웹인용
상해대한교민단(上海大韓僑民團)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웹인용
25. 재 上海 불령 조선인 교민단 일파의 불온계획에 관한 건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9]
웹인용
100. 최근 불령선인의 흉폭 행위 개요
http://db.history.go[...]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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