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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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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동학에 입도하고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안악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경무국장, 내무총장, 주석 등을 역임하며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했다. 광복 후에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1949년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통일운동가로 평가받지만, 정치적 노선과 암살 사건 연루 의혹 등 논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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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존칭The Right Honourable
이름김구
로마자 표기Gim Gu
한자 표기金九
별칭백범
로마자 표기 (별칭)Baekbeom
본명김창암
로마자 표기 (본명)Gim Changam
연하
로마자 표기 (자)Yeonha
출생일1876년 8월 29일
출생지조선 황해도 해주 백운방 톳골 마을
사망일1949년 6월 26일
사망 장소서울특별시 종로구 경교장
사망 원인총격 암살
종교감리교 (이전: 천도교, 불교)
자녀김인 (독립운동가)
김신 (장군)
안장 장소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정당한국독립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정보
직책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임시정부 주석 임기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1940년 3월 ~ 1947년 3월
임시정부 국무총리 임기1930년 10월 ~ 1933년 10월
전임 주석홍진, 이동녕
후임 주석이동녕, 이승만
전임 국무총리노백린
후임 국무총리양기탁
부통령김규식
기타 정보
서훈건국훈장 대한민국장

2. 생애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김구는, 1896년 치하포 사건을 일으켜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 없는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하고 체포되었다.[69][70][71] 김구는 재판 과정에서 쓰치다가 일본 육군 중위라고 주장했지만, 일본 측 기록에는 상인으로 기록되어 있어 논란이 있다.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고, 이후 탈옥하여 1899년부터 황해도 각지에서 학교 설립 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주석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75] 1921년에는 소련의 정치 자금이 임시정부에 상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인 공산주의자 암살을 지시했고, 1922년에는 김구가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한국인 공산주의자가 살해되기도 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사쿠라다몬 사건, 윤봉길의 상하이 천장절 폭탄 사건 등 의열 투쟁을 지휘했다.[326]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대일 선전포고를 했으나, 일본 정부와 연합국에 의해 무시되었다.[72]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75] 1948년 김규식과 함께 남북 협상을 추진했지만, 김일성에게 거절당하고 남북 양측 모두에게 외면받는 결과를 초래했다.[296]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313]

2. 1. 생애 초기 (1876~1892)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99][100][101][102] 아홉 살 무렵 향교에 들어가 과거 시험을 준비했으나, 낮은 신분 때문에 여러 학교에서 거절당했다. 열두 살에 사숙 선생을 찾아 공부를 시작했다.[2]

1888년, 아버지 김순영중풍으로 쓰러지자, 김구의 어머니는 가재도구를 팔아 치료비를 마련했고, 김구는 친척집에 맡겨졌다. 이 기간 동안 김구는 나무를 패고 나르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김구의 아버지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가족들은 김구의 학용품 값을 마련하기 위해 어려움을 겪었고, 어머니는 베 짜는 일로 학비를 마련했다.[2][4]

1892년, 17세(만 16세)에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는 고위급 응시자들의 매관매직과 부정행위를 목격하고 좌절하여 향교에서의 공부를 그만두었다.[2][3] 이후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며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를 하고, 그 외 서적들을 두루 탐독하며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을 하기도 했다.[323]

2. 1. 1. 출생과 가계 (1876~1879)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구)안동 김씨 김순영(당시 24세)과 현풍 곽씨 곽낙원(당시 17세) 사이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99][100][101][102] 7대 독자로 알려졌으나, 아버지 김순영은 4남 1녀 중 차남이었고, 할아버지 김만묵, 증조부 김영원에게도 각각 형제가 있었다.

김구의 가계는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 시대 무신 김방경의 25대손이자, 김사형의 21대손이다. 조선 시대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 당시 11대조 김대충(司果)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해주로 피신했다. 해주군 서쪽 80리에 있는 백운방 텃골, 팔봉산 양가봉 아래에 정착하였다.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며 연명해왔다. 생계를 위해 군역전(軍役田)을 짓게 되었고, 김구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부터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한다.

이로 인해 김구는 텃골 근방의 양반이던 덕수 이씨진주 강씨 일족에게 천대를 받았다. 특히 대귀족 신 안동 김씨 일족에게는 더더욱 천대를 받았다. 김구의 회고에 의하면 '우리 집안의 처녀가 강씨, 이씨 문중으로 출가하는 것은 영광이지만 두 문중의 처녀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103]'라 하였다. 그러나 김구의 7대조 할아버지인 김언함의 부인이 진주 강씨인 경우도 있었다. 상민이었던 가계는 김구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 소년기의 김창수로 하여금 과거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광복 이후 김구의 가계를 소개할 때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했는데, 1947년 도왜실기한국어 번역판 서문을 쓴 이승만은 그가 명문의 후손임을 강조했고, 안재홍도 김구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백범김구선생약사(白凡金九先生略史)의 서두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예라고 기술하였다.

24세의 미혼이었던 아버지 김순영은 그의 누이동생의 시누이(매제의 자매)가 되는 장연군 목감방 문산촌 출신 현풍 곽씨의 딸을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김구가 태어날 무렵 난산이었던 탓에 일가의 권유로, 김구가 태어나던 날 밤 그의 아버지는 지붕 위로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흉내 낸 끝에 순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태어나던 날은 그의 조모 장씨가 사망한 날이었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아버지 김순영은 학식은 없었으나 이씨, 강씨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혔기에 해주감영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그를 두려워한 양반들은 그를 존위로 천거했다가 도존위로 승진시켰으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잘하고 양반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다. 하위 감투를 썼음에도 양반들에게 굴하지 않자 양반들은 아버지 김순영에게 공금흠포죄(公金欠逋罪)를 씌워 바로 해고해 버렸다.

2. 1. 2. 유년기 및 청소년기 (1880~1892)

김구(金九)는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구)안동 김씨 김순영과 현풍 곽씨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99][100][101][102] 그는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 당시 화를 피해 해주로 피신해 와 상민으로 행세하며 살았다. 이로 인해 김구는 주변 양반들에게 천대를 받았고, 이는 소년 김구가 과거 시험에 응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얽은 자국(흉터)이 생겼다.[104][105] 4세 때 백부 김백영의 상을 당하였고, 5세 때 강령으로 이사했다가 7세 때 본향으로 돌아왔다. 9세 때부터 한글한문을 배웠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통감, 사략, 병서 등을 익혔다.[106] 그의 학문 실력은 어머니 곽낙원이 베를 짜서 번 돈으로 뒷바라지한 덕분이었다.[107]

1888년 조부 김만묵이 사망하고, 부친 김순영이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가세가 더욱 기울었다. 김구는 양반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양반집 아들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108]

1892년, 17세(만 16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매관매직과 시험 부정에 환멸을 느껴 벼슬길을 단념했다.[323] 이후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며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를 하고, 그 외 서적들을 두루 탐독하며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을 하기도 했다.[323]

2. 2. 청년기 (1893~1910)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이 사망했다. 이 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으로 지체 장애인이 되었다. 김구의 부모는 아버지의 병 치료를 위해 전국을 떠돌았고, 김구는 친척 집을 전전하며 목동 노릇을 하면서도 학업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되어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자, 부모는 귀향했고 김구는 큰어머니 정씨의 친정 6촌인 정문재의 서당에서 무료로 글을 배울 수 있었다.[104]

17세에 정문재의 권유로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107] 김구는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김순영의 이름으로 응시했는데, 이는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상민 신분을 벗어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시험에서 양반과 부자들이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시험을 보게 하는 부정을 목격하고 벼슬길을 단념했다.

과거 시험의 매관매직과 관리들의 비리에 분노한 김구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간 관상 공부에 몰두했다. 그는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107] 이후 병서를 탐독하며 동네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 노릇도 했다.[107]

1896년, 김구는 치하포 사건을 일으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譲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었다.[69] 김구는 쓰치다를 일본군 중위로 여겼으나, 실제로는 상인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있다.[70][71]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체포 후 해주 감옥을 거쳐 인천 감옥으로 이감된 김구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1]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고, 이후 탈옥하여 승려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00년대 초, 김구는 황해도 일대에서 학교 설립 운동을 전개했다.[69]

2. 2. 1. 동학 농민 운동 참여 (1893~1895)

1893년 1월 초, 김구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이름을 김창암에서 김창수(金昌洙)로 바꾸고, 입도 수개월 만에 신도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104] 입도한 지 1년도 안 돼 수백 명의 연비(신도)를 포덕하여 접주로 추천되었으나, 중상모략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1894년 초, 김구가 거느리던 연비 조직이 커지면서 18세의 나이로 수백 명을 거느리는 팔봉 접주가 되었다. 황해도 동학 대표로 선발되어 충청북도 보은에서 최시형을 만나 접주 첩지를 받았다. 귀향길에 한성에서 동학 농민 운동 소식을 접하고,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동학군을 지휘했다.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했으나 관군에게 패퇴했다.[107] 일본 제국 군대가 쏘는 소총 소리에 부하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108]

이후 김창수의 부대는 동학군 내부 권력 투쟁에서 이동엽에게 공격받았다. 12월, 홍역을 앓던 중 이동엽 일파의 기습으로 패하고 몽금포로 피신하여 하은당 스님의 치료를 받으며 3개월간 잠적했다.[104] 한편, 이동엽은 김창수의 측근 영장 이종선을 잡아 처형했다. 그는 이종선을 묻어주고 안태훈(안중근의 부친)을 찾아갔다.

동학군 장수 시절 안태훈으로부터 귀순 권유 편지를 받았다. 1895년, 동학 농민 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를 세워 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도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동학군을 진압하던 안태훈에게 의탁한다. 안태훈은 김구의 인품을 아껴 동학이 패멸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해 밀사를 보내 불가침 협정과 공동 원조 계획을 세웠고,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하자 김구는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되었다.[109]

2. 2. 2. 은신과 학문 수련 (1895~1896)

안태훈의 집에 은거하면서 김구는 성리학자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았다. 고능선은 이항로의 제자인 유중교의 문인이자 의병장 유인석의 동문으로 화서학파에 속했다. 高能善|고능선중국어공자맹자의 학문,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 사상을 가르쳤고, 김구는 춘추대의와 의리에 눈뜨게 되었다.[109]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김구에게 청나라행을 권유했다.

20세에 김구는 청나라행을 결심했다. 청나라로 가기 전 안태훈의 사랑채에서 만난 전라도 남원 출신 김형진과 함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다. 김형진을 길동무 삼아 백두산을 거쳐 만주를 돌아서 북경으로 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만주에서 의병 활동에 실패하고 귀국하였다.[109]

2. 2. 3. 치하포 사건과 수감 생활 (1896~1898)

1896년 2월,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 사건에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譲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었다.[69] 김구는 쓰치다를 일본군 중위로 여겼으나, 실제로는 상인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있다.[70][71]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체포 후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인천 감옥으로 이감된 김구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1] 그러나 1896년 9월 12일, 일본 영사관원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김구에게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하여 참수형을 권고했다. 1896년 10월 2일, 영사관의 압력을 받은 감옥장은 인천 법원에 김구를 즉시 처형할 것을 제안했으나, 법원은 고종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1896년 10월 22일, 고종은 김구의 행동 동기를 살펴보고 김구를 포함한 10명의 사형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로써 김구는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1]

인천 감옥에서 김구는 서구 학문을 접하며 개화 사상에 눈을 뜨게 된다. 그는 감옥에서 서구에서 새로 출판된 역사와 과학 서적의 번역본을 읽었다.[5] 그는 동학 운동 시절과 고재규(Ko)로부터 받았던 폐쇄적인 사상에도 불구하고 읽은 내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서구인들이 야만인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한국을 혁신할 것이라고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많은 동료 수감자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는데, 처음에는 호의를 얻기 위해 그렇게 했지만,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는 감옥 안에서 그의 지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고, 간수들조차 그에게 읽고 쓰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2. 2. 4. 탈옥과 승려 생활 (1898~1899)

1896년 9월 12일, 일본 영사관원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김구를 과실치사 혐의로 유죄 판결하고 참수형을 권고했다. 그러나 1896년 10월 22일, 고종은 김구의 행동 동기를 살펴보고 김구를 포함한 10명의 사형을 승인하지 않아 사형을 면했다.[1]

감옥에서 김구는 서구에서 새로 출판된 역사와 과학 서적의 번역본을 읽었다. 동학 운동 시절과 고재규(Ko)로부터 받았던 폐쇄적인 사상에도 불구하고 읽은 내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서구인들이 야만인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한국을 혁신할 것이라고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많은 동료 수감자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는데, 처음에는 호의를 얻기 위해 그렇게 했지만,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는 감옥 안에서 그의 지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고, 간수들조차 그에게 읽고 쓰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후 김구는 마곡사로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하였다.

2. 2. 5. 계몽 운동과 교육 활동 (1900~1910)

1900년대 초 김구는 황해도 일대에서 학교 설립 운동을 전개했다.[69]

2. 3.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1911~1945)

1896년 치하포 사건을 일으켰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土田壤亮)를 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69] 그러나 일본 측 기록에는 쓰치다가 상인으로 기록되어 있어 논란이 있다.[70][71] 김구는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후 특사로 감형되었고 탈옥하였다.[70][71]

1899년부터 황해도 각지에서 학교 설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4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에서 경무국장, 내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소련의 정치 자금이 임시정부에 상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년들에게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의 암살을 지시하였다. 1922년 10월 여운형, 이유필, 손정도 등과 함께 한국노농병회를 조직하였고, 1922년 11월에는 김구가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한국인 공산주의자가 상하이에서 저격 살해되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고, 1931년 10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1932년에는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쇼와 천황 암살을 노린 사쿠라다몬 사건, 윤봉길의 상하이 천장절 폭탄 사건 등의 테러를 지휘하였다.

1940년 충칭으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정부 아래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서명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으나,[72] 일본 정부에 전달되지 않았고 연합국에도 무시되었다.

2. 3. 1. 안악 사건과 투옥 (1911~1915)

1911년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3] 체포되어 수감된 후, 옥중에서 김구(金九)로 개명하였다. 이는 '나라를 되찾는 데 힘쓰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서대문형무소와 인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 김구는 옥중 동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2]

2. 3. 2.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활동 (1919~1945)

1919년 3·1 운동 직후, 김구는 전국적인 비폭력 시위에 참여했고, 일제는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천 명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체포자가 발생했다. 김구를 비롯한 많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당국의 박해를 피해 국외로 망명했다.[8] 김구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75]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1919년 8월 1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1926년 12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등의 거듭된 권고로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되었다.[122] 김구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제도를 고치고 주석을 맡았다. 1927년 4월 10일 후계내각 발표로 국무령에서 총사퇴하고, 국무위원회의 초대 주석에 선임되었다.[138] 1927년 8월 19일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임명되었다.[138]

1930년 1월,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당무이사에 선출되었다.[139] 1931년 10월에는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무력활동을 시작하였다.[326] 1932년 1월 일본 쇼와 천황 살해를 노린 사쿠라다몬(ja) 폭탄투척 사건,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 쇼와 천황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을 지휘하였다.[326] 1932년 5월에는 이덕주·유진식, 유상근, 최흥식 등을 국내와 만주로 파견하여 조선총독과 관동군 사령관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326]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고, 1940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전하면서,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갖고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되었다.[72] 1945년에는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광복군 침투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였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72]

2. 4. 광복 이후 정치 활동과 암살 (1945~1949)

1945년 광복 이후, 김구는 임시정부를 이끌고 귀국했으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 자격이 아닌 일반인 신분으로 귀국해야 했다.[75]

이후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총재를 맡는 등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한민당 당수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이승만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266][280]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김구는 남북 협상을 통해 통일 정부 수립을 시도했다. 김규식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과 회담했으나, 결국 남북한 모두에게 외면받는 결과를 초래했다.[296]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격으로 암살당했다.[313] 그의 죽음은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김구 암살의 배후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315]

2. 4. 1. 광복과 귀국 (1945)

1945년 8월 15일 광복(8.15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김구는 임시정부를 정부 자격으로 귀국시키려 하였지만 미군정의 반대로 좌절되었다.[328] 결국 임시정부 요인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1945년 11월 23일 미군 수송기 편으로 귀국하였다.[75]

귀국 후,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삼상회의 결정서를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285] 1945년 12월 27일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주제의 방송 담화(엄항섭 대독)에서 강력한 국방군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330]

1946년 1월 18일, 반탁전국학생연맹(반탁학련) 데모대가 김구에게 반탁학생대회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가 있는 서대문 서교장으로 향하던 중, 신문로에서 좌익 성향의 학병동맹원들과 충돌하였다. 김구는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249][331]

1947년 1월, 전국반탁학련 반탁 궐기대회 1주년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반탁 데모를 계획하였으나 이승만의 만류와 존 하지의 경고로 보류하였다.[334] 1947년 1월 24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7년 3월 12일 미국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김구는 '트루먼이 전 세계 자유애호 인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285]

2. 4. 2. 정치 활동과 좌우 갈등 (1946~1948)

1946년 김구는 비상국민회의 의장,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부의장 등을 역임하며 우익 진영의 통합을 추진했다.[332] 삼상회의 결정서에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했으며, 미소공동위원회에는 불참했다.[285]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자택에서 피살되자, 김구는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266] 현직 경찰관 박광옥과 초등학교 교사 배희범 등 5명이 암살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었다.[266] 대한학생총연맹은 김구를 총재, 조소앙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266] 장덕수 암살의 동기로는 장덕수가 정권 장악을 위해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하려 한 것, 일제시대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점, 일본 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의 학병 지원을 장려한 친일 행위 등이 지목되었다.[275][276]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김구는 이승만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280] 김구는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승만은 하지에게 "만약 김구를 체포한다면 거족적으로 군정에 대항하겠다"고 선언했다.[282] 그러나 이승만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며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이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고 한다.[275]

1948년 3월,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의 증인 자격으로 미군정청 재판정에 출두하였다.[337]

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11월 30일 이승만을 방문해 한 시간 정도 요담한 후,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269] 그러나 김구는 통일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평양 행을 제안했고, 이승만은 헛된 걸음일 것이라 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고 남북 공동 결의문을 발표하고 돌아온 김구는 5.10 총선거에 참여를 거부하였으며, 이승만은 "독립의 영웅이, 애국에 불타는 그가 왜 지금 돌이키지 못할 오판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며 오열하였다.[388]

2. 4. 3. 남북 협상과 좌절 (1948)

1948년 1월 초, 김구는 단독 정부 수립과 남북 통일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러한 노선 차이로 이승만과 사이가 멀어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김구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없지만, 통일 독립 정부 수립에 대한 신념 역시 변함없다고 밝혔다.[290] 이승만은 김구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290]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 협상에 참여할 뜻을 굳히자, 신익희, 조소앙, 이철승 등이 만류했지만 김구는 듣지 않았다. 당시 김구는 장덕수 암살 사건에 관한 군율 재판으로 곤욕을 치러야 할 상황이었다.[289] 김구가 남북협상으로 노선을 바꾸자 측근 김학규도 반대했다.[291] 김학규는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하고[291], 한국독립당에 입당시켰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는 김구를 "제국주의자의 앞잡이"라고 비판했다.[292] 한민당은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는 것 같다며 비난했다.[292]

1948년 4월,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고,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김구의 북행 소식에 수백 명의 청년들이 경교장 앞에서 만류했지만, 김구는 학생들에게 호통을 치고 담을 넘어 출발했다. 김구의 출발 소식에 김규식도 북행을 결심했다. 이철승을 비롯한 전국학련 일행들은 김구의 북행을 저지하려 했으나, 김구 일행은 이들을 피해 경교장을 나섰다.[294]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도착하자 장건상은 놀랐다고 회고했다.[295]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285] 그러나 이는 소련 군정청의 각본대로 진행된 것이었고, 이를 눈치챈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형식적인 인사말만 했다.[296]

1948년 4월 30일, 김구는 평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 중단을 부탁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8년 5월,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려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김일성은 권한이 없다며 거절했다.[299] 장건상은 연석회의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은 김일성 만세를 불렀지만, 김구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295]

1948년 10월 9일, 김구는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10월 중순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배후를 김구로 지목했다.[304] 이범석은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305] 김구는 극우정객이 반란에 참여했다는 근거가 없다며 반박했다.[304][395]

2. 4. 4. 암살 (1949)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1가에 위치한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安斗熙중국어에게 총격을 당했다.[313]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313] 김구는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313]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314]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고 한다.[314] 김구는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314]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김구의 묘


김구 암살 배후는 미궁이다. 한때 백의사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315]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에 의하면 염동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김구 암살에 백의사의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316][317][318]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한편 안두희는 초기 진술에서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고 진술하였다.[308] 한편 안두희가 자신의 군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는 정보를 접한 것은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경찰은 암살자가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찰은 암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외부에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308] 6월 27일, 이승만은 김구의 죽음이 그의 한국독립당 내에서의 의견 분열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308] 그러나 정부의 한 고위 인사는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발설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라고 보도했다.[308]

김구의 장례는 국장이 결정되었으나 한독당 측에서는 민족장을 고집했다. 정부에서 이범석신성모, 허정 등을 경교장에 파견하자 조완구, 조소앙 등은 너희가 죽여놓고 너희가 국장을 하느냐며 흥분했고 실랑이와 몸싸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측이 보낸 사절단과 한독당 인사 간에 마찰이 빚어졌고, 김규식의 중재로 국가와 민족을 합한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김구의 국민장은 10일간 거행되었다.[319]

김구의 국민장은 19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이었고, 조가(弔歌)는 시인 이은상이 지었다. 행진곡은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다단조로 연주하였다. 같은 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3.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는 《백범일지》, 《도왜실기》 등이 있다.[183]

김구가 암살당한 지 정확하게 1년 후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의 사후에도 둘째 아들 김신은 계속 대한민국 공군으로 복무하였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공군 중장으로 퇴역했다. 한편 미국으로 떠난 맏며느리 안미생은 미국인과 재혼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 행방은 미상이다. 안미생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한 손녀딸 김효자 역시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범김구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60년 고정훈 등에 의해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에 의한 암살 의혹이 제기되었다.[184] 김창숙 등에 의해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암살범 안두희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1963년 서울특별시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320] 1998년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어 2002년 10월 22일에 건립되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집권 후 이승만이 또 다른 후보로 등록되어 논란이 일어나자 10만원권 지폐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321][322]

4. 논란과 의혹


  • 치하포 사건 관련 논란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111] 민간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있다. 당시 일본과 조선의 기록에는 쓰치다 조스케가 군인이라는 내용은 없다.

2004년 7월 검찰은 김구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가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350]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김완섭을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기소했다.[351] 서울고검 검사 정현태는 국사편찬위원회와 국가보훈처 자료를 검토 후 기소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351]

그러나 199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일본 외무성 자료를 근거로 쓰치다 조스케가 계림장업단 소속 상인이었다고 주장했다.[114] 하지만 2002년 도진순은 이 주장을 철회하고 계림장업단 부분을 삭제했다.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 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en|Syngman Rhee and Kim Ku한국어》 신판에서 쓰치다가 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이었다는 의견을 냈다.[352]

  • 암살 배후 의혹


김구는 여러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1922년 2월 11일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은 상하이에서 김립을 사살했다.[342]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김립이 레닌에게서 받은 금괴를 유용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지급하고, 광동 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했다고 주장했다.[343] 그러나 김립이 횡령했다는 것은 정적이 유포한 소문이며, 축첩에 대한 근거도 없다. 레닌이 한형권, 김립 등에게 준 자금은 한인사회당사회주의 정당 건설 자금이었고, 이들은 임정 측에는 자금을 주지 않았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학 교수 박노자는 김립 암살을 ‘동족 테러’라고 비판했다.[342]

1939년 실종, 암살된 안공근 살해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안공근은 김구의 측근이었으나, 일본군 점령지 난징에서 안중근의 처를 모셔오지 못하고, 임정 자금 일부를 개인적으로 쓰거나 도박으로 탕진하여 김구에게 질책받았다. 이후 안공근은 독자 활동 중 상하이에서 실종되었고, 독립운동가 후손들 사이에서는 김구 측근 인사가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의혹[341]이 제기되었다.

1947년 12월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임정과 한독당, 민주의원 간부였던 김석황, 조상항이 체포되면서 김구도 법정에 섰다. 허정은 장덕수 암살이 임정의 소행이라고 확신하고 조소앙에게 항의했으나, 조소앙은 웃음으로 넘겼다.[344] 장택상은 김구 관련 혐의를 포착하고 경교장 수색 영장을 내려 했으나, 하지 중장이 저지했다.[273]

송진우, 장덕수 암살 의혹 외에도 김성수 암살 미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 보고서[346]에 따르면 김구는 김성수 암살을 기도[347]했다. 한민당은 임정을 증오하게 되었다.

장덕수 사건 이후 김구는 이승만 암살을 시도했다는 의혹도 있다. 안두희 공판기에 따르면, 김학규는 안두희에게 한국독립당 입당을 권유했고, 김구 암살 약 1달 전까지 만났다. 김학규는 경교장에서 "나는 미 제국주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안두희의 혈서를 보좌진에게 보이고 불태웠다.[349]

  • 이승만과의 관계 악화


김구와 이승만은 서로 친밀했지만,[275]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관계가 악화되었다.[353][354] 김구는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승만은 김구를 옹호했지만, 김구는 이승만이 하지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오해했다.

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가 국토 양분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11월 30일 이승만을 만나고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혔다.[269] 김구는 통일을 위해 남북협상에 참여했지만, 이승만은 헛된 걸음이라고 했다. 김구는 5.10 총선거에 불참했고, 이승만은 오열했다.[388]

  • 쿠데타 모의 의혹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김구는 이승만 정권 전복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범석은 김구가 극좌파와 손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주장했다.[304] 여순 사건 배후로도 지목되었다.[305]

미국 첩보기관 CIC는 1949년 김구가 염동진과 손잡고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338]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염동진이 김구를 추종하는 우익 장교들의 동향을 CIC에 제공했다고 보았다.[317]

대한민국 국군 창군 주역 중 제4연대 장교들은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 수립을 계획했다.[338] 염동진은 김구에게 군 내부 우익 반대파의 통신을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을 했다.[338] 염동진은 우익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하려 했지만, 미군은 반대로 활용했다.[339]

김구 암살 직후 대한민국 정부는 암살 배경을 함구했지만, 정부 고위층이 외국 언론에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발설했다.[308]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 김구의 죽음이 군사쿠데타 음모 발각 결과[308]라고 보도했다.

  • 만주 폭격 계획


해방 직후 김구는 만주 폭격 계획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김구와 염동진은 만주 폭격을 계획했고, 이청천, 이범석[345] 등은 북한 폭격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동아시아 반공 군사 동맹 체제 수립[345]을 구상했다. 그러나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 인력 및 장비 부족, 김구 암살로 계획은 실패했다.

  • 안준생 암살 지시


1945년 8월 귀국 직전 김구는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 암살을 부탁했다. 김구는 안준생이 이등박문에게 사죄하고, 미나미 지로 총독을 아버지라 칭했다며[340] 변절자로 여겼다. 그러나 미나미를 아버지라 칭했다는 근거는 불확실하다. 김구의 암살 부탁은 중국 관원에게 거절당했다.

  • 정치적 도덕성 논란


리처드 로빈슨은 김구가 정치적 도덕가는 아니라고 평가했다.[308] 브루스 커밍스는 김구가 송진우 암살범이며, 테러와 암살에 정통하다고 했다.[200][375]

  • 기타 논란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는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여 논란이 되었다. 신용하는 한인애국단을 테러리스트로 평가하는 시각에 대해 상황 이해 부족이라고 반박했다.[362]

백색 테러 의혹도 존재한다. 김구는 북한 지도자 및 관료 암살을 시도했고,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암살 의혹도 있다. 백의사의 강량욱 암살 시도는 민간인 희생을 초래했다.[374]

권위주의적 행동에 대한 비판도 있다. 박갑동은 김구가 비서에게 옷 시중을 받는 모습이 조선 왕 같았다고 주장했다.[373][376]

이범석은 김구가 대의명분론을 주장하며 국제정세를 외면했다고 비판했다.[378] 윤치영은 김구의 단정 수립 반대를 비판하며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다고 평가했다.[379] 노무현은 김구를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380]

5. 평가

김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로서,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수호하고, 한인애국단과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한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358][362]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한 통일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재조명되고 있다.[358] 그러나 정치적 노선과 방법론, 암살 사건 연루 의혹 등은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945년 10월부터 11월까지 선구회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김구는 뛰어난 지도자 3위(18%),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 2위(293표), 최고의 혁명가 4위(156표)로 기록되었다.[355]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 조사에서는 초대 대통령 적합도 10.5%(702표)를 얻었고,[355] 1948년 6월 조사에서는 568표로 2위를 차지했다.[355] 1999년 한겨레21 조사에서는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선정되었다.[359]

단국대 사학과 교수 한시준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많은 지도자가 있었고 군대 편성 계획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현시킨 이는 김구 뿐"이라며[362]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362] 중국 푸단대 교수 쑨커즈는 혼란스러웠던 중국에서 한인 사회를 유지하고 임시정부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갖춘 것은 김구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362] 2006년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30주년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 학자 12명은 김구를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362]

신용하 한양대학교 석좌교수는 윤봉길이봉창 의거를 주도한 한인애국단을 테러리스트로 평가하는 시각에 대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반박하며,[362]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임시정부의 지시가 있었으므로 테러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특공작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362]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백범은 민족의 독립만을 생각한 지도자”라며 청년시절부터 동학, 불교, 기독교에 차례대로 귀의한 것은 모두 독립을 위한 힘을 모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362] 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363] 리영희는 김구의 장례식때 울려 퍼진 추도곡을 반세기 넘게 기억하며 추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구의 정치적 도덕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308] 미국은 그를 파시스트로[356] 보고 있었고, 미군정은 무자비하고 파렴치한 인물이라고 비난했다.[357] 또한 미국은 그를 '''기회주의자'''로도 묘사하였다.[357]

미군정과 브루스 커밍스는 송진우 암살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고,[206][200] 1947년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도 의심받았다. 백의사를 통해 강량욱 등 북한 관료 암살을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죄없는 가족, 친구 등이 희생되어 백색테러라는 비판도 있다.[374]

전북대 교수 강준만과 창원대 교수 도진순은 김구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 정체감이 약하였으며, 유학·동학·불교·기독교 등을 두루 편력하는 사상적 방황을 경험했지만 전통적 가치인 유학적 또는 의병적 신의를 중시하는 완고함을 지닌 행동지향형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였다.[364][365] 강준만은 그가 무분별한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보았다.[367]

최상천은 김구가 점령국가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대책없이 반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허송세월을 했다고 비판하였다.[368] 뉴라이트 이영훈은 “김구는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겼지만 ‘민족’만 주창했을 뿐 건국에 대한 비전은 없었다”고 비판했다.[369]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김구가 박정희 정부에 의해 추앙되었으며, '해방 정국에서 미아가 된 저항 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370] 김영삼은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371]

1948년 남북협상 참여는 통일과 조국애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지만,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새로운 정국 반전을 노린 정치적 전술이라는 시각도 있다.[372]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오해하고 격렬한 반탁투쟁을 선도해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백의사 등을 통해 대북 타격정책을 수행하여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었다는 비판도 있다.[372]

이범석은 김구가 '끝까지 대의명분론을 주장하면서 민족통일을 관철하고자 하여 국제정세를 외면하다시피 오직 소신대로 나간 분'이라며, 이승만이 현실의 정치가로 일어선 반면 김구는 이상의 정치가로 주저앉게 됐다고 비판했다.[378] 윤치영은 김구가 단정 수립 반대는 망언이며,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다고 비판했다.[379] 노무현은 김구를 '실패한 정치인'이라 비판하였다.[380]

이승만이 국제관계와 열강들의 파워 게임을 정확히 인식하는 현실주의자였다면, 김구는 민족 통일이라는 대의 명분을 앞세운 이상주의자였다. 김구는 '민족'과 '통일'을 우선시한 반면, 이승만은 '자유'와 기본권을 보장하는 '국가' 자체를 우선시했다. 강준만미국의 패권 강화와 중화민국의 몰락을 이승만의 승리와 김구의 패배 요인으로 보았다는 주장이 있다.[382]

김구는 공산주의를 독재체제로 이해하고 극단적으로 비판했다.[372] 1922년 김립을 레닌 지원금을 유용했다는 이유로 사살했고,[342] 여순 사건을 반란, 테러로 규정했다.[395][397]

외교 문제에 소홀했다는 평가도 있다.[362] 그러나 신용하는 중국국민당과 군사 협력 관계에서 공산당과 공식 관계를 모색하기 어려웠고, 장제스를 설득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명문화한 것은 김구 외교의 진가라고 반박했다.[362] 한시준은 김구가 한국광복군의 OSS부대 참가를 주도한 것은 승전 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려 한 것이라고 반론했다.[362]

뉴라이트는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여 물의를 빚었다.

6.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증조부김영원1806년?[398]
증조모희천 김씨1801년?
외조부곽양식??
조부김만묵1824년1888년 4월
조모결성 장씨1824년1876년
큰아버지김백영1844년1880년
큰어머니정씨?1888년 이후
아버지김순영1852년1901년 2월
어머니곽낙원1859년 2월 26일1939년 4월 26일아들 김구의 독립운동 지원
부인최준례1889년1924년 1월 1일
장남김인1917년 11월 12일1945년 3월 29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장교, 중화민국 육군 소령
자부안미생1914년2007년안중근의 조카
손녀김효자1941년장남 김인의 딸
차남김신1922년 9월 21일2016년 5월 19일6대 공군참모총장, 교통부장관, 주중국 대사, 국회의원, 前 백범기념관 관장 역임
자부임윤연1929년1971년 12월 11일독립운동가 임학규 (1897년)의 딸, 위암으로 사망
손자김진1949년 10월 30일대한주택공사 사장 역임
손자김양1953년 2월 24일주상하이 총영사, 국가보훈처장 역임
손부이정희1959년
증손자김용만1986년정치인 - 제22대 국회의원
손자김휘1955년나라기획 이사 역임[399]
손녀김미김호연과 결혼
손녀사위김호연1955년정치인 - 제18대 국회의원
손자김윤
장녀김씨1906년1907년
차녀김화경1910년1915년
삼녀김은경1916년1917년 2월
작은아버지김준영 외 2명



김구의 가족. 9년 만에 재회하였다. 윗가운데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구, 그의 차남 김신, 그의 어머니 곽낙원, 그리고 그의 장남 김인 (난징, 1934년).

7. 저서



백범일지는 이광수가 교열과 윤문을 맡았다.[389] 1945년 11월 김구가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출간할 때 이광수가 윤문을 자청했다고 전해진다.[391] 백범일지의 윤문을 김구가 직접 허락했는지, 아니면 비서 등 주변 인물이 허락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392]

이광수가 백범일지 편찬에 참여한 것을 김구가 알았다는 주장도 있다. “(친일파 이광수가) 속죄하는 심정으로 맡겠다고 하니 시켜보라고 주위에서 백범께 말했다. 김구는 그의 행실(일제 후반에 변절한 것) 때문에 망설였다”[391] 고 한다. 그러나 곧 이광수에게 백범일지 윤문을 맡긴다. 둘째 아들 김신은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건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는 의문입니다.”(김신 씨의 대담, <신동아>, 1986년 8월, 347쪽.[391])라고 회고했다.

백범일지는 춘원 이광수가 윤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나의 소원〉은 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있는 글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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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 뉴스 한성일보 194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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