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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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종교는 1909년 나철이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한 것을 시작으로, 1910년 대종교로 교명을 변경한 민족 종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단체로 활동하며,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 나철의 순교 이후 김교헌 등이 종교를 이끌었으며, 3.1 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간 동포들의 항일 운동을 지원했다. 대종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 활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교육 이념인 홍익인간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광복 후에는 정부 수립에 기여하고, 개천절을 공휴일로 제정하는 등 민족 정체성 확립에 기여했다. 주요 경전으로는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등이 있으며, 삼신일체 사상을 핵심 교리로 한다. 최근에는 단월드와의 연관성, 친일 논란, 역사 왜곡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주요 관련 인물로는 창시자 나철, 김교헌, 윤세복 등이 있으며, 김좌진, 홍범도, 신채호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와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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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교 - 개천절
개천절은 대한민국과 북한의 국경일로,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을 기념하며, 대종교에서는 환웅이 하늘을 연 날로 여겨 다양한 행사가 열리지만 단군신화의 역사성에 대한 논란도 있다. - 대종교 - 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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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서 기원한 천도교는 인내천 사상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 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신종교로, 일제강점기 3·1 운동을 주도하며 민족 운동에 기여했으며 현재 남북한에 교단이 존재하고 북한에서는 천도교청우당을 통해 정치적으로 대표된다. - 민족종교 - 민족 종교
민족 종교는 특정 민족 집단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문화, 언어, 관습을 규정하는 종교로, 민족의 정체성 유지 수단으로 기능하며, 대종교, 신토, 도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유대교 등이 대표적이다.
대종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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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한글 | 대종교 |
한자 | 大倧敎 |
로마자 표기 | Daejonggyo |
다른 이름 | 단군교 (檀君敎) |
창립일 | 음력 1909년 1월 15일 |
창시자 | 나철 |
신자 수 | 교직자 22명, 신도 약 3,766명 |
주요 지도자 | 총전교 |
발상지 | 한성부 재동 |
본거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제1동 홍은중앙로3가 89 |
교의 | 삼일신 사상 |
성전 | 삼일신고 천부경 참전계경 신사기 신리대전 회삼경 삼법회통 신단실기 |
상세 정보 | |
특징 | 도본사 22개의 시교당 만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전개 |
2. 연혁
대종교는 1909년 1월 15일 나철이 단군을 모시는 단군교를 창시하면서 시작되었다. 1910년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고 만주로 본사를 옮겨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혹독한 탄압을 받았지만,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하며 민족 종교로서의 위상을 확립했다.
대종교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시기 | 주요 내용 |
---|---|
1909년 ~ 1910년대 | 나철의 단군교 창시(1909년), 대종교로 개칭(1910년), 북간도 지사 설치, 만주로 본사 이전(1914년) |
1910년대 ~ 1945년 | 일제 탄압, 만주로 총본사 이전, 민족 교육 및 독립운동가 양성, 무오독립선언 발표(1918년), 임오교변(1942년) |
1945년 ~ 현재 | 광복 후 국내 귀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여, 개천절 공휴일 제정(1948년), 단기 연호 폐지(1962년), 총전교 선출, 학술대회 개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 표명 |
대종교의 주요 기념일은 다음과 같다.
- 중광절(重光節): 음력 1월 15일
- 어천절(御天節): 음력 3월 15일
- 가경절(嘉慶節): 음력 8월 15일
- 개천절(開天節): 음력 10월 3일
2024년 4월 23일, 총본사 천궁에서 4264주년 제천 의식 '어천절·단의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최근 사건은 다음과 같다.
- 2019년 4월 9일, 대종교는 영화 '사바하'에서 나철의 사진을 사이비 종교 교주 사진으로 합성 사용한 것에 대해 영화사 '외유내강'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 2020년 4월 4일, 조선중앙통신은 백두산 장군봉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연구 그룹이 대종교 유물을 발굴했다고 보도했다.
2. 1. 창시와 초기 발전 (1909년 ~ 1910년대)
1909년 1월 15일, 나철은 대한제국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했다.[37] 김윤식, 이기, 유근 등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했다.[37] 나철은 이 종교가 고대 한국에서 숭배되었던 삼위일체 신에 대한 믿음인 ''고신도''(古神道, "조상신의 길")의 부활이라고 말했다. 일부 학자들은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제시했지만, 종교의 윤리적 기초는 유교와 유사하다.[1]
단군교는 시교(始敎) 1년 만인 1910년 1월 15일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고, 같은 해 만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했다.[37] 1910년 7월 30일, 독립운동 성향의 단군교에서 서울의 정훈모(鄭薰模)가 친일 행위로 변절하자,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정훈모는 ‘단군교’라는 이름을 유지하며 분파해 나갔다.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를 만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37]
나철은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4차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구국 운동이 몇 사람의 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았다.[37]

2. 2.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 (1910년대 ~ 1945년)
1910년 일제는 1915년 10월 8일 《총독부령 83호 종교통제안》을 발표하여 대종교를 종교 단체로 위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이에 대종교는 만주 지린성 허룽 현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기고 서일, 박찬익 등과 함께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가를 양성했으며, 《단조사고》, 《신단실기》, 《신단민사》 등의 책을 편찬했다.[39]1916년 나철은 구월산에서 자신의 실패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종교, 하느님, 그리고 국민을 위해 순교한다며 자살했고,[21] 이후 김교헌이 2대 교주로 취임했다.[2] 김교헌은 3·1 운동 이후 만주로 가는 동포들을 포섭하여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서게 했다. 1920년대 대종교는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인도주의와 평등성을 바탕으로 민족해방을 위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청산리 대첩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39][37]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독립전쟁사에 기록된 봉오동, 청산리 대첩의 실질적인 지휘부는 대종교였다고 한다.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이상용, 김동삼, 이범석 등이 대표적인 대종교 출신 애국지사였다.[41][42][43]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3대 교주 윤세복 취임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었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등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대종교에서는 '''임오교변'''이라고 부름). 체포되어 옥사한 권상익, 이정, 안희제, 나정련, 김서종, 강철구, 오근태, 나정문, 이창언, 이재유 등 10인은 '순교십현' 또는 '임오십현'이라고 불린다. 1932년 만주국 탄생과 함께 대종교는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1937년 시교당의 수가 52개로 증가했다. 이러한 포교활동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으므로 교세 확장은 바로 독립운동의 확대이기도 하였다. 1923년 김교헌이 죽을 무렵에는 한국·만주·노령(露量)·중국 본토 등에 48개의 시교당을 가지고 있었다.[37]
1918년 11월 서일은 김좌진, 계화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무력 항쟁을 표방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하고 무력으로 일본에 저항했다.[40]
2. 3. 광복 이후 (1945년 ~ 현재)
1945년 광복 이후 대종교는 민족 종교의 적통으로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41] 초대 정부에 대종교 출신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41]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은 교육이념에 홍익인간을 채택하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하며, 단기 연호를 사용하는 등 대종교의 가르침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고자 노력했다.[41]1948년 대한민국 정부는 개천절을 공휴일로 정식 제정하였고, 1949년에는 개천절을 양력 10월 3일로 변경하였다.[41] 그러나 1962년 1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단기 연호 사용을 폐지하였다.
1960년대 대종교는 '무속교화원'을 설치하고 5000명의 무녀를 육성하는 등 교세 확장을 꾀했으나, 내부적인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서울 남산에 단군신전을 건립하려 했으나 개신교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91년 9월 1일,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용성향 청호촌 청호종산의 구릉에 있는 나철, 서일, 김교헌 3인의 묘가 화룡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최근 대종교는 총전교 선출, 학술대회 개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 표명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012년 제19대 총전교로 원영진이 선임되었고, 2018년 6월 21일에는 사상 최초의 여성 총전교로 나철의 종손부인 박민자(朴敏子)가 선임되었다.[41] 2021년 11월 8일, 박민자는 제22대 총전교로 재임명되었다.
2017년 8월 14일, 대종교 총본사는 만주에서 감옥 생활을 경험한 독립운동가의 국내 귀환 71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하였다.
2021년 4월 21일, 대종교는 더불어민주당 의원 12명이 발의한 교육기본법 개정안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개정안은 교육 이념에서 '홍익인간'을 삭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대종교는 "개천절 기념행사에 대통령이 불참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교육 이념에서 홍익인간을 없애기 위해 법안을 발의하다니, 도대체 그들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또한 "청산리 대첩을 이룬 북로군정서의 지도자와 병사들도 모두 단군 사상으로 무장한 대종교도들이었다", "단군 사상의 핵심이 홍익인간이며, 홍익인간을 실현하려는 이상 세계가 이화세계다", "홍익인간은 초종교적인 개념으로서 대한민국의 근원에 있는 정신"이라고 주장하며 홍익인간 이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 주요 교리 및 사상
대종교의 핵심 교리는 창조주(하느님/환인), 스승(한웅/환웅), 통치자(단군/한배검)로 대표되는 한국 문화의 삼신에 대한 믿음이다.[1][12] 단군은 한국 민족의 지도자이자 하느님("하늘의 신")의 세 번째 화신으로 여겨지며, 그의 어머니는 곰에서 여인으로 변한 웅녀였다.[13]
단군은 지상에서의 통치를 마치고 하늘로 승천했는데, 여기서 하늘은 세 신, 즉 우주의 창조자(하느님-아버지), 보편적 본성의 스승(하느님-선생), 창조의 통치자(하느님-왕)를 의미한다.[14]
대종교의 경전으로는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이 있다. 신자들은 이 경전들이 단군 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다고 주장하지만, 학자들은 나철(1863–1916)이 받은 계시를 바탕으로 20세기 초에 편찬되었다고 본다.[15][16][17]
대종교는 도교의 내단과 유사한 호흡법으로도 알려져 있다. '단전' 또는 '금단'이라 불리는 에너지 중심부에 집중하여 기(氣)를 순환시키는 수련법은 1970년대 기천문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적 관심을 받았다.[18]
3. 1. 삼신일체 사상
대종교의 핵심 교리는 한국 문화의 삼신, 즉 창조주(환인), 스승(환웅), 통치자(단군)에 대한 믿음이다.[1] 이 셋은 삼신일체(三神一體)로 여겨진다.[12] 한국 민족의 지도자인 단군은 하느님("하늘의 신") 또는 하늘의 세 번째이자 인간적인 화신으로 여겨진다. 그의 어머니는 곰에서 여인으로 변한 웅녀였다.[13]단군은 지상에서의 통치를 마치고 하늘로 승천했다. 여기서 하늘은 세 신, 즉 우주의 창조자(하느님-아버지), 보편적 본성의 스승(하느님-선생), 창조의 통치자(하느님-왕)를 함축한다.[14]
대종교는 세 개의 성전(聖典)을 가지고 있다. 신자들은 이 경전이 단군 시대 또는 그보다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며, 학자들은 이 주장에 이견을 제시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15] 세 경전은 세계의 기원을 서술한 『천부경』, 신학적 진술인 『삼일신고』, 윤리의 지침서인 『참전계경』이다.[16] 많은 학자들은 이 책들이 나철(1863–1916)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환상과 계시에 근거하여 20세기 초 20년 동안 편찬되었다고 믿는다.[17]
대종교는 서양에서 내단(도교)으로 알려진 호흡법 가르침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종교의 기술은 종종 단전 또는 금단(丹田)으로도 불리는 '에너지의 바다'에 집중한다. 단전은 생명 에너지 기(氣)가 풍부한 영역이며, 이 종교는 이 영역을 활용하여 에너지를 인체 내로 순환시키는 기술을 제공한다. 이러한 기술들은 1970년대에 매우 인기를 얻었으며, 기천문으로 알려진 대종교와 그 내단 수련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18]
3. 2. 경전
대종교의 주요 경전은 다음과 같다.이 중에서도 핵심적인 세 경전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이다.[16] 《천부경》은 세계의 기원을, 《삼일신고》는 신학적 진술을, 《참전계경》은 윤리 지침을 담고 있다.[16] 대종교 신자들은 이 경전들이 단군 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다고 믿지만, 학자들은 이 경전들이 20세기 초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철(1863~1916)이 받은 계시를 바탕으로 편찬되었다고 본다.[17]
4. 조직 및 활동
대종교는 단군을 신봉하는 종교이다. 삼신 신앙은 단군교의 한 종파이다.[19]
4. 1. 조직 구성
총본사는 평창군에 있다.[19] 현재 지도자는 배선문이며, 한반도 통일을 옹호한다.4. 2. 주요 활동
대종교는 정기적으로 다음과 같은 제천 의식을 진행한다.절기 | 날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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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광절(重光節) | 음력 1월 15일 |
어천절(御天節) | 음력 3월 15일 |
가경절(嘉慶節) | 음력 8월 15일 |
개천절 | 음력 10월 3일 |
5. 대종교와 독립운동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비밀 결사 조직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암살을 시도했고,[40] 일본 궁성 앞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40] 1909년 1월 15일, 나철은 서울 재동에서 동지들과 함께 단군교를 창시하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했다.[37]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기 7개월 전인 1월 15일, 나철은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만주로 교단을 이동했다.[44] 이는 친일 분자들의 교단 내분과[44]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종교 단체로 위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39] 1914년에는 만주, 상해, 러시아, 서울에 각각 동도본사, 서도본사, 북도본사, 남도본사를 설치하여 포교 영역을 확대했다.[37]
일제는 1915년 10월 8일 《총독부령 83호 종교통제안》을 발표해 대종교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했다.[39] 이에 대종교는 1917년 전 조직을 화룡현으로 옮기고, 1918년 11월에는 무력 항쟁을 표방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다.[39]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 등으로 철저한 탄압을 받았으며, 체포되어 옥사한 10인은 '순교십현' 또는 '임오십현'으로 불린다.[39]
해방 이후에도 대종교는 민족 종교로서의 역할을 이어갔다. 1946년 8월 15일 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 대종교 총본사에서 채화된 성화가 남산에 점화되었고, 개천절 행사에서도 성화가 마니산 참성단까지 봉송되었다.[41]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개천절이 공휴일로 제정되었고, 대종교는 제1호 종단으로 등록되었다.[41]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 대종교 출신 지식인들이 정부 요직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했다.[41] 교육이념에 홍익인간이 채택되었고 단군 연호, 개천절, 한글 전용 등이 시행되었다.[41]
5. 1. 독립운동가 양성
대종교는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썼다. 서일, 박찬익 등과 함께 《단조사고》, 《신단실기》, 《신단민사》 등의 책을 편찬하고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다.[39] 1920년대에는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인도주의와 평등성을 바탕으로 민족 해방을 위한 무장 투쟁을 벌였다.[39]1916년 나철이 사망한 후 김교헌이 2대 교주로 취임하여 3·1 운동 이후 만주로 가는 동포들을 포섭하여 항일 구국 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청산리 대첩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37]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독립전쟁사에 기록된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의 실질적인 지휘부는 대종교였다고 한다.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이상룡, 김동삼, 이범석 등 애국지사들이 그들이었다.[41][42]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된 후, 대종교는 만주로 전파되어 학교와 사회 센터를 설립하고 한국 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2]
5. 2. 무장 독립 투쟁
대종교는 일제강점기에 무장 독립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0년대 만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고, 1914년에는 본사를 만주로 옮겨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다.[37] 1915년 일제의 탄압으로 종교 단체로 위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되자, 만주 지린성 허룽 현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겨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썼다.[39]1918년 11월, 대종교는 무력 항쟁을 표방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서일은 김좌진 등과 함께 중광단을 조직하여 무력으로 일본에 저항했다.[39] 1920년대에는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인도주의와 평등성에 바탕을 둔 무장 투쟁을 벌였다.[39] 특히, 1920년 청산리 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둔 북로군정서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대종교의 독립운동 기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37]
2021년, 대종교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교육기본법 개정안에서 '홍익인간' 이념을 삭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청산리 대첩을 이룬 북로군정서의 지도자와 병사들도 모두 단군 사상으로 무장한 대종교도들이었다"라고 비판하며, 대종교의 독립운동 정신을 강조했다.
5. 3. 임시정부와의 관계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41]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의 실질적인 지휘부는 대종교였다고 한다.[41]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이상용, 김동삼, 이범석 등 애국지사들이 그들이었다.[41] 한국전쟁 때 납북된 정인보를 비롯해 김두봉, 이극로 등도 대종교인이었다.[41] 김두봉은 1916년 구월산에서 나철이 순교할 때 시봉하기도 했다.[41]서일은 대종교의 승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 활동에 영감을 주었으며,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의 총재가 되었다.[21]
6. 대종교와 한국 사회
나철은 을사오적 암살을 시도하고, 일본 궁성 앞에서 단식 투쟁을 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 운동을 펼쳤다. 1909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단군교를 새롭게 열고 이를 중광절(重光節)로 삼았다. 1910년에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40]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발족 당시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중 28명이 대종교 교도였으며,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실질적인 지휘부도 대종교였다고 한다.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대종교인이었다.[41]
환국 후 대종교는 민족 종교로서 초대 정부의 제1 교단으로 등록되었고,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 대종교 지식인들이 정부 고위관리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교육이념에 홍익인간이 채택되었고, 단군 연호, 개천절, 한글 전용 등이 시행되었다.[41] 1946년 광복 1주년 및 개천절 행사 등에서 대종교 주도로 민족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홍익대학교, 단국대학교, 경희대학교 등이 대종교 교인에 의해 설립되었다.[41][42][43]
대종교는 내단 수련법으로도 알려져 있다. 1970년대에는 기천문으로 알려진 대종교와 그 내단 수련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높아졌다.[18]
1910년 나철이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고 만주로 교단을 이동하자, 정훈모는 이에 반발하여 단군교라는 교명을 고수하며 교단을 분리, 독립하였다. 정훈모의 단군교는 단군을 신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했으며, 교단 수뇌부에는 친일파가 있었다.[44][45]
6. 1. 민족 정체성 확립
대종교는 환인, 환웅, 단군을 숭배하며, 이들을 한국 문화의 기원으로 여긴다.[1][12] 단군은 하늘의 신인 하느님의 세 번째 화신으로 여겨지며, 그의 어머니는 곰에서 여인으로 변한 웅녀이다.[13]대종교는 세 가지 성전(聖典)을 가지고 있다. 『천부경』은 세계의 기원을, 『삼일신고』는 신학적 진술을, 『참전계경』은 윤리 지침을 담고 있다.[16] 많은 학자들은 이 경전들이 20세기 초 대종교 창시자 나철(1863–1916)의 계시를 바탕으로 편찬되었다고 본다.[17]
대종교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받들고, 개천절을 통해 민족의 기원을 기념하며, '홍익인간' 이념을 통해 민족 정신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인의 민족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다.
1909년 1월 15일, 나철은 대종교를 중건(대종교에서는 '''기유중광'''이라고 부름)하고,[1] 1910년 7월 30일에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8년 11월에는 무력 항쟁을 주장하는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고, 서일은 김좌진 등과 함께 中光團|중광단중국어을 조직하여 무력으로 일본에 저항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는 개천절을 공휴일로 제정했고, 1949년에는 개천절을 양력 10월 3일로 변경했다.
2021년 4월 21일, 대종교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교육기본법 개정안에서 교육 이념인 '홍익인간'을 삭제하려는 것에 대해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대종교는 '청산리 대첩을 이룬 북로군정서의 지도자와 병사들도 모두 단군 사상으로 무장한 대종교도들이었다', '단군 사상의 핵심이 홍익인간이며, 홍익인간을 실현하려는 이상 세계가 이화세계다', '홍익인간은 초종교적인 개념으로서 대한민국의 근원에 있는 정신'이라고 주장했다.[1]
6. 2. 교육 이념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인 홍익인간은 대종교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환국 직후 대종교는 민족 종교의 적통으로 인정받아 초대 정부의 제1 교단으로 등록되었고, 당시 대종교 지식인들이 정부 고위관리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41]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이 중심이 되어 교육이념에 홍익인간을 채택하고, 단군 연호, 개천절, 한글 전용 등을 시행하였다.[41]1946년 8월 15일 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는 대종교 총본사에서 채화된 성화가 남산 꼭대기에 점화되었고, 그해 개천절 행사에서는 성화가 총본사에서 채화되어 마니산 참성단까지 봉송, 점화되는 등, 민간에서는 대종교를 중심으로 민족 행사들이 개최되었다.[41] 홍익대학교, 단국대학교, 경희대학교 등이 대종교 교인에 의해 설립되었다.[41][42][43]
2021년 4월 21일, 더불어민주당 의원 12명이 홍익인간을 삭제하는 교육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하자, 대종교는 성명문을 발표하여 "개천절 기념행사에 대통령이 불참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교육 이념에서 홍익인간을 없애기 위해 법안을 발의하다니, 도대체 그들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청산리 전투를 이룬 북로군정서의 지도자와 병사들도 모두 단군 사상으로 무장한 대종교도들이었다", "단군 사상의 핵심이 홍익인간이며, 홍익인간을 실현하려는 이상 세계가 이화세계다", "홍익인간은 초종교적인 개념으로서 대한민국의 근원에 있는 정신"이라고 비판했다.[41]
6. 3. 사회 문화 운동
평창군에 본부를 둔 삼신 신앙은 단군교의 한 종파로 한반도 통일을 옹호한다.[19] 현재 지도자는 배선문이다.7. 비판과 논란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종교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여러 비판과 논란에 직면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대종교가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과 유사성을 보이며, 초기 대종교가 기독교의 영향력 증가에 대항하려 했다고 주장한다.[1] 나철은 대종교가 고대 한국에서 숭배되었던 삼위일체 신에 대한 믿음인 ''고신도''(古神道, "조상신의 길")의 부활이라고 주장했다.
대종교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으며, 1994년 한창범은 성경의 하느님이 "질투심이 많고 폭력적"이며 본질적으로 "부도덕하다"고 주장했다.[20] 또한, 기독교인들이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협력했다고 비난했다.[20]
7. 1. 친일 논란
나철이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된 이후 만주로 전파하여 한국 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대종교는[2], 일부 분파에서 친일 행적이 나타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특히, 일지 이승헌이 창시한 단월드(단학 또는 단요가)가 대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22] 단월드는 대종교와의 연관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대종교의 가르침과 수련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22] 미국 학자 돈 베이커는 단월드가 단군의 가르침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며, 대종교의 경전을 정통 경전으로 선포했다고 지적한다.[22]
7. 2. 역사 왜곡 논란
대종교는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으로 하는 핵심 교리를 가지고 있다.[1] 이 종교는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3대 경전으로 삼고 있으며, 이 경전들이 단군 시대 또는 그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15]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 경전들이 20세기 초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철(1863–1916)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환상과 계시에 근거하여 편찬되었다고 믿는다.[17]이러한 대종교의 역사관은 환단고기와 관련된 논란과 함께 비판을 받기도 한다.
7. 3. 기타 논란
대종교는 도교의 내단과 유사한 호흡법으로도 알려져 있다. 대종교의 수련법은 종종 단전(丹田) 또는 금단(金丹)이라고 불리는 '에너지의 바다'에 집중한다. 단전은 생명 에너지인 기(氣)가 풍부한 영역이며, 대종교는 이 영역을 활용하여 에너지를 인체 내로 순환시키는 기술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술들은 1970년대에 큰 인기를 얻었으며, 기천문으로 알려진 대종교와 그 내단 수련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18]8. 대종교 관련 인물
대종교는 나철을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했다.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나철''': 대종교의 창시자로,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 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 1909년 대종교를 창시하고 '대도사'로 불렸다.
- '''김교헌''': 나철의 뒤를 이은 제2대 교주로, 단군의 가르침을 '신교'라고 칭했다.
- '''윤세복''': 제3대 도사교이자 초대 총전교로, '단애종사'로 불렸다.
- '''안호상''':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 '''서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 활동에 영감을 주었으며, 북간도 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의 총재가 되었다.
이 외에도 지석영, 신채호, 박은식, 이동휘, 김좌진, 홍명희, 최남선, 이범석, 이시영, 이극로, 안재홍, 명제세, 윤기섭, 김두봉, 신성모, 정인보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대종교와 관련을 맺었다.
특히, 일지 이승헌이 창시한 단월드는 대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논란이 있다. 단월드는 대종교와의 연관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대종교의 수련법과 경전을 차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22]
8. 1. 창시자 및 지도자
나철은 일제 치하에서 한국 독립 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09년 종교를 창시하여 "대도사"(''tosagyo'')[21]로 불렸고, 처음에는 "단군교"(''단군교'', 단군 종교)로, 1년 후에는 "대종교"(''대종교'')로 이름을 변경했다.[1][2]
그는 이것이 고대 한국에서 숭배되었던 삼위일체 신에 대한 믿음인 ''고신도'' (古神道, "조상신의 길")의 부활이라고 말했다. 일부 학자들은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제시했지만, 종교의 윤리적 기초는 유교와 유사하다.[1] 다른 사람들은 초기 대종교가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한국의 삼위일체로 대체하여 기독교의 영향력 증가에 대항하려 했다고 믿는다.
단군의 중요성은 신채호의 《조선사》에 영향을 받았으며, 단군은 한국 기원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또 다른 전설적인 인물인 기자보다 강조되었다.[2] 나철은 ''고신도'' 종교가 약 4300년이나 되었으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라고 주장했다.
1916년 나철이 죽자 김교헌이 2대 교주로 취임하였다.[37] 나철 이후 종교의 지도자로는 김교헌[2]과 안호상이 있다.[1] 김교헌은 그의 저서 《신단민사》에서 단군의 가르침을 ''신교'' 또는 "신의 가르침"이라고 말했으며, 왕건과 같은 다양한 한국 종교가 ''신교''의 연속이라고 말했지만, 이러한 믿음은 몽골 제국, 불교, 그리고 유교 아래에서 억압되었다고 말했다.[2][12]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이상용, 김동삼, 이범석 등 애국지사들이 그들이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정인보를 비롯해 김두봉, 이극로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김두봉은 1916년 구월산에서 나철이 순교할 때 시봉하기도 했다.
3대 교주 윤세복이 취임한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었다.[37]
대종교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주요 활동 |
---|---|
池錫永|지석영중국어 | 종두법을 연구. 한국 근대 의학의 아버지. |
신채호 | 역사학자 |
박은식 |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
이동휘 | 독립운동가 |
김좌진 | 1889년 충청남도 양반 출신. 1930년 암살당함. |
홍명희 | 작가 |
최남선 |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
이범석 | 1898년 서울 출신. 1915년 중국으로 건너가 운남강무학교 기병과에 입학. 3·1 운동 이후 간도로 이주하여 군정서 사관학교 교관을 지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으나 1961년 실각함. |
이시영 |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경복궁에 대종교 총본사를 두는 구상을 품고 있었다. |
尹世復|윤세복한국어 | 1881년~1960년, 제3대 도사교, 초대 총전교. 단애종사라고 불렸다. |
李克魯|이극로한국어 | 1893년~1978년, 한글 학자, 독립운동가 |
김교헌 | 1867년~1923년, 제2대 교주 |
안재홍 | 독립운동가, 정치가 |
明済世|명제세한국어 | 독립운동가 |
尹琦燮|윤기섭한국어 | 독립운동가, 정치가 |
김두봉 | 독립운동가, 정치가 |
安浩相|안호상한국어 | 정치가, 한국 초대 문교부 장관 |
신성모 | 독립운동가, 정치가, 한국 국방부 장관 |
정인보 | 정치가, 학자, 한국 초대 감사위원장 |
8. 2. 독립운동가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은 대종교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으며, 독립전쟁사에 기록된 봉오동, 청산리 대첩의 실질적인 지휘부도 대종교였다고 한다.[41]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이상용, 김동삼, 이범석 등의 애국지사들이 대종교인이었다.[41]청산리 대첩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37] 1918년 11월에는 무력 항쟁을 표방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고, 서일은 김좌진, 계화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중광단을 조직하고 무력으로 일본에 저항했다. 1920년대에는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인도주의와 평등성을 바탕으로 민족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벌였다.[39]
8. 3. 학자 및 사상가
신채호는 저서 《조선사》에서 단군을 강조하여 대종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2] 박은식, 정인보 등도 대종교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학자들이다.9. 대종교 관련 유적 및 유물
10. 다른 종교와의 관계
대종교는 서양에서 내단으로 알려진 호흡법(내단 in 도교) 수련을 가르치기도 한다. 대종교에서 말하는 단전(丹田)은 생명 에너지 기(氣)가 풍부한 영역으로, '에너지의 바다'라고도 불린다. 대종교는 이 영역을 활용하여 에너지를 인체 내로 순환시키는 기술을 제공한다. 이러한 기술들은 1970년대에 큰 인기를 얻었으며, 기천문이라는 이름으로 대종교와 그 내단 수련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18]
10. 1. 개신교
대종교는 한국 문화의 삼신, 즉 창조주(환인), 스승(환웅), 통치자(단군)에 대한 믿음을 핵심 교리로 삼는다.[1] 단군은 하늘의 세 번째이자 인간적인 화신으로 여겨진다. 대종교에는 세 가지 성전(聖典)이 있는데, 세계의 기원을 서술한 『천부경』, 신학적 진술인 『삼일신고』, 윤리의 지침서인 『참전계경』이다.[16] 많은 학자들은 이 책들이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철(1863–1916)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환상과 계시에 근거하여 20세기 초 20년 동안 편찬되었다고 믿는다.[17]11. 대중문화 속 대종교
김태영의 소설 선도체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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