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서울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은 서울 불암산 학도암 뒤편 바위에 새겨진 관세음보살 좌상으로, 1870년 명성황후의 발원으로 조성되었다. 조선 시대 왕실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으며, 마애불임에도 불구하고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지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명성황후가 고종의 사랑을 얻고 왕자를 낳기 위해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후 사랑, 자녀, 자녀의 성공과 같은 세 가지 가피를 주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세기 조각 작품 - 취옥백채
취옥백채는 흰색과 녹색 비취 원석으로 배추의 색감과 형태를 살려내고 다산의 상징인 메뚜기와 여치를 잎 위에 표현한 청나라 시대의 정교한 예술품으로, 현재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의 주요 소장품이다. - 서울 노원구의 문화유산 -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조선 중종 시대에 세워진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는 묘비 훼손을 막기 위한 경계문이 한글로 새겨진 비석으로, 국어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으로 평가받으며 보물로 지정되었다. - 서울 노원구의 문화유산 - 태강릉
태릉은 조선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단릉으로, 원래 중종의 정릉 옆에 묻히길 원했으나 침수 문제로 현재 위치에 안장되었으며, 제향은 태릉봉향회에서 주관하고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 인근에 강릉과 태릉선수촌이 있고 2014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 관세음보살 - 천수경
천수경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중심으로 여러 진언과 게송을 모아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강조하는 불교 경전으로, 불교 의식에서 널리 사용되며 대중매체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다. - 관세음보살 - 성관음
성관음은 1면 2비의 형상을 한 관음보살로, 육관음 중 하나로서 대자(大慈)의 관음으로 여겨지며 지옥을 교화하는 역할을 하고, 머리 위의 아미타여래 화불로 식별된다.
서울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한자 표기 | 鶴到庵 磨崖觀音菩薩坐像 |
위치 |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로14다길 89 |
문화재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서울특별시 |
유형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 124 |
지정일 | 2000년 7월 15일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대한불교조계종 학도암 |
면적 | 토지 25m² |
수량 | 마애불 암반 1기 |
참고 | 서울 학도암 |
좌표 | |
웹사이트 및 문화재청 | |
문화재청 ID | 21,01240000,11 |
2. 역사
1624년(인조 2년) 무공 화상이 학도암을 창건하였고, 1878년(고종 16년) 벽운 화상이 중창하였다.[1] 1819년(순조 19년)에는 보기 드문 형태의 마애부도 2기가 조성되었는데, 왼쪽부터 청신녀월영영주지탑과 환ㅇ당선사취근지탑이 있다. 이 중 청신녀월영영주지탑에는 가경 24년(1819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 1870년(고종 7년)에는 명성황후가 마애관음보살좌상을 조성하게 하였으며, 1885년(고종 22년) 백운 화상이 경선 화상을 불러 불상 1구를 개금하고 불화 6점을 그려 봉안하였다. 이 시기 불사에 관한 내용은 천보산학도암개금태화주록기에 전한다.[1]
1966년 주지 명호 스님이 법당을 중건한 이후 여러 불사가 이루어졌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사역 정비와 중창이 계속되었다.[1]
2. 1. 창건과 중창
1624년(인조 2년) 無空중국어 화상이 학도암을 창건하였다.[1] 1878년(고종 16년) 벽운 화상이 학도암을 중창하였다.[1]2. 2. 조선 왕실과의 인연
1870년(고종 7년), 명성황후는 고종의 사랑을 얻고 왕자를 얻기 위해 금어 장엽과 왕실 석수 김흥연, 이운철 등에게 마애관음보살좌상을 조성하게 하였다.[1] 이는 조선 왕실의 후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회화적 기법이 사용된 조선 후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1] 1878년(고종 15년)에는 한씨 일가의 시주로 경선 화상이 마애관음보살좌상을 보수하였다.2. 3. 근현대
1966년 주지 명호 스님이 법당을 중건하였고, 1970년에 영산회상도를 봉안하였으며, 1972년에는 삼성각에 칠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하였다.[1] 1989년 전통사찰 제77호로 지정되었다.[1] 2000년에는 자연동굴을 넓히고 약사불삼존을 봉안하는 등 사역을 정비하였고, 2006년 법보 스님 주지 취임 후 삼성각, 대웅전을 중창하여 사격을 일신하였으며, 2019년 묘장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였다.[1]3. 문화재
학도암에는 다음과 같은 문화재가 있다.
- '''마애관음보살좌상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4호])'''[1]: 1870년(고종 7년)에 조성된 마애불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단을 참조.
- '''마애부도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62호])'''[1]: 1819년(순조 19년)에 조성된 청신녀월영영주지탑과 1791년(정조 15년)에 조성된 환ㅇ당선사취근지탑 2기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단을 참조.
조선시대에 조성된 마애불은 열 점을 넘지 않는데, 이는 핍박받았던 조선 불교의 어려웠던 상황을 보여준다.[1]
3. 1. 마애관음보살좌상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4호)
조선 고종 7년(1870년) 명성황후(18세)가 고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금어 장엽과 왕실 석수 김흥연, 이운철 등에게 명하여 대웅전 뒷편 큰 바위에 관음보살좌상을 조성하게 하였다. 조선 왕실의 후원으로 조성된 마애관음보살좌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4호)은 회화적 기법이 사용된 조선 후기 빼어난 수작이다.[1]마애관음보살좌상은 학도암 뒤쪽의 커다란 바위 면에 13.4미터에 이르는 크기로 새겨져 있다. 양각의 융기된 선묘로 새겨진 이 관음보살상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좌상으로, 화불이 있는 보관 장식이나 칠보문, 옷 주름 표현 등에서 불화의 도상을 그대로 바위에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보관 양쪽으로 뻗어나온 관대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 장식이 양 어깨 위에 늘어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1]
이 관음보살상의 얼굴은 가늘고 긴 눈과 뭉툭한 코, 작은 입술 등으로 인해 새침한 인상을 준다. 짧은 목에 표현된 형식적인 삼도는 가슴 아래쪽으로 내려가 있다. 양쪽 어깨에는 대의를 걸치고 있으며 안쪽의 내의(內衣)는 가슴 위에 수평으로 입고 그 위에 띠 매듭을 표현하였다. 두 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사뿐히 얹어놓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서 들고 있다.[1]
이 보살상에서 특이한 점은 가슴 가운데에 있는 작은 사각형의 홈인데, 복장 감실의 흔적으로 짐작된다. 복장이란 불상을 조성할 때 불상 내부에 부처를 상징하는 사리와 불경 등을 넣는 것으로, 부조상인 마애불에 그러한 예가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와 같이 마애불의 가슴 부분에 구멍이 있는 예는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에서 볼 수 있다.[1]
마애불 왼쪽 벽면에 새겨진 명문에는 불화의 화기와 같이 증명비구 혜묵을 비롯하여 축문을 염불한 통주, 마애불을 조각한 금어의 이름이 보이는데, 마애불의 조각가를 불화가인 금어와 동일하게 여긴 점이 흥미롭다. 50여 글자가 되는 명문에 의하면, 1870년에 명성황후가 불심으로 발원하여 조성했다는 내용과 함께 1878년에 학도암을 중창하면서 한씨 일가의 시주로 장선화상 등이 마애불상을 보수했다고 되어 있다. 이 마애관음보살상은 조선 말기의 불상이지만 왕실에서 후원하여 조성된 만큼 조선 말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불교조각의 전통을 볼 수 있으며, 조성 명문이 남아 있어서 자료적인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1]

3. 2. 마애부도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62호)
1819년(순조 19년) 10월 청신녀 월영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조성된 마애부도와[1] 1791년(정조 15년)에 조성된 환ㅇ당선사취근지탑[1]이 있다. 이 마애부도들은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1]
4. 명성황후와 학도암
명성황후는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어 고종과 가례를 올렸으나, 고종은 이미 후궁 영보당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1] 가례 첫날 밤부터 고종에게 외면받은 명성황후는 2년 뒤 귀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더욱 소외되었다.[1] 18세의 어린 황후는 궁녀의 권유로 불사를 통해 고종의 사랑을 얻고자 학도암에 관음보살 조성을 명하게 된다.[1]
4. 1. 명성황후의 불심과 발원
명성황후(18세)는 고종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후궁에게 아들을 빼앗긴 상황에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1] 고종이 영보당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귀인 이씨가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을 낳자, 명성황후는 더욱 소외감을 느꼈다.[1]이때 한 궁녀가 부처님을 조성하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권했고, 그날 밤 명성황후는 큰 바위 위에 앉았던 학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1] 꿈에 나온 학과 큰 바위가 있는 사찰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학도암이었다.[1]
명성황후는 고종의 사랑을 얻고 왕자를 낳아 왕통을 잇기를 발원하며 학도암 큰 바위에 관세음보살을 조성하는 불사를 시작했다.[1] 당시 최고의 불모였던 장엽을 금어로 임명하고, 경복궁을 복원하던 왕실 석공 김흥연, 이운철, 원승천, 박천, 황원석에게 관세음보살 조성을 명했다.[1]
관세음보살 조성 시작 후,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사랑을 얻게 되었고, 조성 완료(1870년) 후 몇 년 되지 않아 훗날 순종이 되는 왕자 이척을 낳았다.[1] 이후 학도암 관세음보살좌상은 사랑, 자녀, 자녀의 성공이라는 세 가지 가피를 주는 것으로 유명해졌다.[1]
4. 2. 마애관음보살좌상의 조성과 가피
명성황후는 고종의 사랑을 얻고 왕자를 낳아 왕통을 잇기를 바라며 당대 최고의 불모(佛母) 장엽을 금어로 임명하고, 경복궁을 복원하던 왕실 석공 김흥연, 이운철, 원승천, 박천, 황원석에게 명해 마애관음보살좌상을 조성하게 하였다.[1]마애관음보살좌상 조성 이후 명성황후는 고종의 사랑을 얻고 왕자(순종)을 낳았다.[1] 이후 학도암 관세음보살좌상은 사랑을 얻고, 자녀를 얻으며, 자녀가 성공하는 세 가지 가피를 주는 것으로 유명해졌다.[1]
4. 3. 시해 이후 고종의 슬픔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 후 1년 뒤 덕수궁에서 홍릉까지 전화를 연결해 매일 아침 명성황후의 무덤에 답변 없는 안부 전화를 걸었다. 고종은 ‘양인들이 만든 이 전어기(전화기의 옛말)라는 것은 멀리 있는 사람의 소식도 전해준다 하더니 하늘까지는 닿지 않는가 보오.’라며 슬퍼하였다.[1] 사랑을 얻길 기원하며 서울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을 조성하였는데 그 사랑은 죽음 이후까지도 이어졌다.[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