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불사 (황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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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불사(황해도)는 후삼국 시대인 898년에 도선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나옹 선사가 증보수하고, 야운 선사가 중창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중수되었고, 한국 전쟁으로 극락전이 파괴되었으나 복구되었다. 현재 응진전과 오층석탑 등 여러 건물이 남아 있으며, 특히 고려 시대 양식으로 추정되는 오층석탑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성불사 응진전은 고려 시대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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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사 (황해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사찰 정보 | |
![]() | |
한글 | 성불사 |
한자 | 成佛寺 |
로마자 표기 | Seongbulsa |
문화관광부 표기 | Sŏngbulsa |
위치 | 사리원시 정방리동 |
상세 정보 | |
국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유형 | 국보 |
지정 번호 | 87 |
시대 | 통일신라 |
전각 | |
주요 전각 | 극락전 웅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
2. 역사
후삼국 시대인 898년 (신라 효공왕 1년)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으며,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에 지어진 응진전과 여러 건물, 오층석탑, 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3]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 나옹 혜근 왕사가 증보수하였고, 1375년(고려 우왕 1년) 나옹 혜근 왕사의 제자 야운 선사가 중창했다.[3]
1569년 (선조 2년) 설숭 대사가 중수했으나,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3] 1632년 (인조 9년) 정방산성 축조와 함께 지역 중심 사찰이 되었고, 1751년 (영조 27년) 찬훈 대사가 다시 중수했다.[3]
1924년 일제강점기에는 당시 주지였던 보담 선사의 지도로 여러 건물을 중수 및 수리했고, 1928년에도 31본산으로서 여러 말사를 관할했다.[3] 1950년 한국 전쟁으로 극락전이 파괴되었다가 1955년에 복구되었다.[3]
2. 1. 고려 시대
898년(신라 효공왕 1년)에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다.[3] 고려 시대인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에 응진전을 건립하였고, 극락전·명부전·청풍루·운하당·산신각 등 6채의 건물과 오층석탑, 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3]사적비에 따르면,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 나옹 혜근 왕사가 증보수(증창 및 중건)하였고, 1375년(고려 우왕 1년)에는 나옹 혜근 왕사의 제자였던 야운 선사가 중창(중건)하면서 석탑을 비롯한 많은 석물을 조성했다.[3]
성불사와 고려 시대 양식으로 추정되는 성불사 오층석탑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2. 2. 조선 시대
1569년 (선조 2년) 설숭 대사가 중수했으나,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3] 1632년 (인조 9년) 정방산성 축조와 함께 지역 중심 사찰이 되었고,[3] 1751년 (영조 27년) 찬훈 대사가 다시 중수했다.[3]2. 3. 일제강점기
1924년 일제강점기에는 당시의 주지(주지스님)인 보담(寶潭) 선사의 지도로 명부전·향로전·청풍루·극락전·응진전 등을 중수 및 수리(증보수)했다. 이후 1928년 일제강점기에도 31본산으로서 여러 말사를 관할했다.[3]2. 4. 현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극락전이 파괴되었다가 1955년에 복구되었고, 목조 건물인 응진전은 고려 충숙왕 때 세워진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앞뜰을 중심으로 전각이 주위를 사방에서 둘러싸는 형식이다.[3]성불사와 고려 시대 양식으로 추정되는 성불사 오층석탑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3. 건축
성불사는 고려 시대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사찰이다. 특히 응진전은 고려와 조선 시대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나타난다.[4]
3. 1. 성불사 응진전

성불사 응진전(成佛寺 應眞殿)은 정면 7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을 올린 다포(多包) 양식의 건물로, 성불사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 황해북도 연탄 심원사 보광전, 평안북도 박천 심원사 보광전 등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중 하나로 고려 시대를 대표한다.[4]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에 다시 지은 응진전은 내부는 고려 양식이지만 조선 시대에 수리를 거쳐 고려와 조선 양식이 모두 남아 있다. 극락전과 함께 고려 후기의 건물이고, 그 밖의 건물들은 조선 시대에 세워졌다.[4]
앞면이 20m나 되는 긴 건물이면서도 균형이 잘 짜여 있을 뿐 아니라 줄지어 선 기둥들과 처마 밑 장식, 아름다운 두공의 짜임으로 전체 건물이 부드러우면서도 웅건하다. 건물은 앞면 7칸(22.75m), 옆면 3칸(6.7m)이며 기둥은 배부르고 3포 두공을 얹어(다포 양식) 남북으로 긴 배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두공은 직선적이고 간결한 소혀 모양의 산미와 첨차가 정밀하게 맞물려 가볍게 도리를 떠받들게 하였으며 제공과 첨차, 첨차와 첨차, 첨차와 장여 사이에는 접시받침이 있는 소로를 받쳐 건물을 단정하고도 아름답게 하였다. 또한 장여 윗면에 오목하게 홈을 파고 둥근 도리를 맞추어 놓았으며, 대공 좌우에는 보기 좋게 휜 활개를 받쳐 놓았고 박공은 길게 뽑고 풍판을 달았으며, 천장은 통천장이다.[4]
이러한 건축 양식은 고려 건축의 특징으로서, 처음 지은 이래 여러 차례 개축과 증수가 있었음에도 응진전의 고려적 성격은 그대로 남아있다. 응진전은 현존하는 한국의 옛 건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뛰어난 건축술과 높은 예술적 기교로 한국 건축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4]
참조
[1]
뉴스
Songbul Temple in DPRK
http://www.kcna.co.j[...]
KCNA
2005-08-03
[2]
뉴스
성불사 풍경소리
https://web.archive.[...]
민족21
2003-06-23
[3]
글로벌2
황해도 - 사리원시 - 성불사
[4]
글로벌2
황해도 - 사리원시 - 성불사 응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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