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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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덕성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나 복싱 선수로 활동하다가 당수도를 배우고 청도관 1세대 수련생이 되었다. 1955년 태권도 명칭 제정에 참여했으며, 청도관을 민간 및 군사 양 측면에서 발전시켰으나, 최홍희 등 제자들과의 갈등으로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태권도를 보급하고, 월드 태권도 협회(WTA)를 설립하여 미국 최대 태권도 단체로 성장시켰다. 1999년 WTA가 분열된 이후에도 제자들을 통해 태권도 보급에 기여했으며, 2011년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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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덕성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인물 정보 | |
한글 이름 | 손덕성 |
한자 이름 | 孫德成 |
무술 정보 | |
격투 기반 | 태권도, 청도관 |
트레이너 | 이원국 |
2. 초기 생애와 무술 입문
손덕성은 16세에 복싱을 시작해 국가대표가 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나, 잦은 부상으로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그만두게 되었다. 1942년, 일본에서 귀국한 이원국에게서 당수도(청도관)를 배우기 시작했다.[4] 그는 청도관의 분위기가 복싱 체육관과 달리 동료애와 우정이 넘쳤다고 회상했다.[4] 수년간 훈련한 끝에 초단 검은 띠를 땄고, 엄운규, 정영택 등과 함께 청도관 1세대 수련생이 되었다.[3]
2. 1. 출생과 성장 배경
손덕성은 1922년 6월 1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 한국은 일제강점기로, 그는 유년 시절을 일제 치하에서 보냈다. 16세에 복싱을 시작하여 혹독한 훈련 끝에 자신의 체급에서 국가대표가 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매일 밤 멍들고 찢어진 얼굴로 귀가하여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자, 결국 그의 부모는 복싱을 금지했다.1942년, 손덕성은 일본에서 막 돌아온 이원국에게서 당수도 (청도관)를 배우기 시작했다. 훗날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싱 체육관은 신발이나 수건을 훔쳐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지저분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청도관은 달랐습니다. 모두가 친절했고, 동료애와 우정으로 함께 훈련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비접촉식 훈련이었기에 누구도 맞거나 다칠 일이 없었습니다."[4]
수년간의 훈련 끝에 손덕성은 초단 검은 띠를 획득했고, 엄운규, 정영택, 강서종, 면현종 등과 함께 청도관 1세대 수련생이 되었다.[3]
2. 2. 복싱 선수 시절
손덕성은 16세에 복싱을 시작하여 국가대표로 활동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4] 그러나 잦은 부상으로 멍들고 찢어진 얼굴로 귀가하여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고, 결국 부모님의 반대로 복싱을 그만두게 되었다.[4]2. 3. 당수도 입문
손덕성은 1922년 6월 1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6세에 복싱을 시작하여 국가대표가 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복싱을 그만두게 되었다. 1942년, 일본에서 귀국한 이원국에게 당수도 (청도관)를 배우기 시작했다.[4]그는 "청도관 학교에서는 모두가 친절했고, 동료애와 우정의 분위기가 있었으며, 우리 모두 함께 훈련했다."라고 회상하며 복싱 체육관과 다른 청도관의 분위기를 언급했다.[4]
수년간의 훈련 끝에 초단 검은 띠를 획득했으며, 엄운규, 정영택 등과 함께 청도관 1세대 수련생으로 성장했다.[3]
3. 청도관 계승과 발전
이원국의 뒤를 이어 청도관을 이끌게 된 손덕성은 청도관을 민간 및 군사 양 측면에서 국내 최대 규모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초기 멤버들은 더 적극적인 참여를 원했고, 그 결과 자신들의 이름으로 새로운 학교를 독립적으로 개설하고자 했다.[7]
최홍희는 1954년 대한민국 육군 고위 장교로서 군사 학교 설립 명령을 받고, 청도관 출신 고위 제자들을 포함한 50명의 군 관계자를 모아 오도관을 설립했다. 강서종은 국무관을 창설했고, 다른 교관들은 손덕성에 대한 학교 관계자로서의 인정을 줄였다.
1959년 6월 16일, 손덕성은 청도관의 철학적 원칙을 우려하여 최홍희, 남태희, 엄운규 등을 포함한 고급 제자 그룹을 해임하는 내용의 편지를 서울신문에 발표했다. 이로 인해 손덕성은 한국 내 모든 스포츠 단체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배제되었다.
3. 1. 청도관 지도자 승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이원국의 일본 이주로 인해 손덕성은 청도관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았다.[7] 손덕성의 노력으로 청도관은 민간 및 군사 양 측면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학교로 성장했다. 그러나 초창기 멤버들은 더 적극적인 참여를 원했고, 그 결과 자신들의 이름으로 새로운 학교를 독립적으로 개설하고자 했다.[7]1959년 9월 3일, 최홍희는 다른 주요 학교의 모든 멤버들을 모아 청도관의 리더십을 장악하고, 한국태권도협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같은 해 엄운규를 새로운 청도관 관장으로 임명했다. 최홍희는 당시 군사 정권 하에 있던 대한민국의 육군 장군으로서의 지위와 다른 관장들에게 태권도를 발전시키겠다는 약속 때문에 회장으로 선출되었다.[7]
3. 2. 한국전쟁 시기 활동
한국전쟁 중에도 청도관 회원들을 모아 훈련을 지속하고, 시합, 시범 등을 통해 태권도를 알렸다.[7]3. 3. 주요 제자 양성
손덕성은 엄운규, 남태희 등 뛰어난 제자들을 양성했다.[7]4. 태권도 명칭 탄생과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1955년 12월 19일, 청도관 고문단 회의에서 당수도, 공수도, 택견, 권법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무술의 통일된 명칭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회의에는 대한민국 정부, 언론, 정치인, 군부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청도관 수장이었던 손덕성은 최홍희, 남태희와 함께 군사 부문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한국 무술의 공식 명칭을 "태권도"로 결정했다.[6]
이후 손덕성의 노력으로 청도관은 크게 성장했지만, 초기 멤버들이 독립하면서 1959년 9월 3일 최홍희를 중심으로 대한태권도협회가 창설되었고, 최홍희가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7]
4. 1. 태권도 명칭 제정 회의
1955년 12월 19일, 청도관 고문단 회의에서 당수도, 공수도, 택견, 권법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중국이나 일본 문화와 연관되기도 했던 무술의 새로운 통일 명칭에 대해 논의했다.[6] 이 회의에는 대한민국 정부, 언론, 정치인, 군부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청도관의 수장이었던 손덕성과 최홍희, 남태희가 군사 부문을 대표하여 참석했다.[6] 이 회의에서 한국 무술의 공식 명칭을 다른 모든 이름을 대체하는 "태권도"로 결정했다.[6]4. 2. 대한태권도협회 창립과 갈등
손덕성의 노력으로 청도관은 민간 및 군사 양 측면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무술 단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초창기 멤버들은 더 적극적인 참여를 원했고, 그 결과 자신들의 이름으로 새로운 학교를 독립적으로 개설하고자 했다.최홍희는 1954년 대한민국 육군 고위 장교로서 군사 학교를 설립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50명의 군 관계자를 모집했는데, 그 중 일부는 현종명, 남태희, 한차교, 우종림, 고재천, 김석규, 곽근석과 같이 청도관 출신의 고위 제자들이었다. 이 학교는 오도관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손덕성의 허가 없이 베트남에 교관을 파견하여 한국군을 훈련시켰다. 강서종은 국무관을 창설했고, 다른 교관들은 손덕성에 대한 학교 관계자로서의 인정을 줄였다. 최홍희의 영향력과 리더십이 커지기 시작했다.
1959년 6월 16일, 손덕성은 청도관의 철학적 원칙을 지키는 것에 대해 우려하여 최홍희, 남태희, 엄운규 등을 포함한 고급 제자 그룹을 해임하는 내용의 편지를 한국 신문 서울신문에 발표했다. 이로 인해 한국 내 모든 스포츠 단체에서 손덕성이 완전히 분리되고 배제되었다.[7]
최홍희는 신속하게 행동하여 다른 주요 학교의 모든 멤버들을 모아 청도관의 리더십을 장악했다.
"1959년 늦가을, 나는 4대 관장들을 모두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노병직은 송무관을, 윤쾌병은 지도관을, 이남석은 창무관을, 황기는 무덕관을 대표했고, 나는 오도관과 청도관을 대표했다."[7]
이 회의의 결과로, 1959년 9월 3일, 대한태권도협회가 창설되었고 최홍희가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같은 해 엄운규를 새로운 청도관 관장으로 임명했다. 최홍희는 당시 군사 정권 하에 있던 대한민국의 육군 장군으로서의 지위와 다른 관장들에게 태권도를 발전시키겠다는 약속 때문에 회장으로 선출되었다.[7]
5. 미국 진출과 월드 태권도 협회(WTA) 설립
1969년 루크 그란데는 베네수엘라에 최초의 청도관 태권도 도장을 설립했고, 1987년에는 로드 프레블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같은 일을 했다.
현재 월드 태권도 협회(World Tae Kwon Do Association)는 국기원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단체이며, 세계 태권도 연맹 또는 국제 태권도 연맹의 지침을 따르지 않고, 자체적으로 원래의 철학적이고 인간적인 원칙에 따라 전통적인 뿌리를 따르며 발전해 왔다. 현재 회장은 손예종이다.
손덕성은 자신의 미국인 지도자 6명에게 무술 "사범"의 지위를 수여했다. 6명의 미국인 사범은 다음과 같다.
- 리코 도스 안요스
- 제리 오렌스타인
- 랄프 루비노
- 잭 에멜
- 론 제프리온
- 짐 캐힐
5. 1. 미국 초기 활동
1963년 4월, 손덕성은 미국으로 건너가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한국 가라테"라고 불렸다. 그의 첫 수업은 뉴욕시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 야외와 시내에 있는 유대교 회당 지하실에서 열렸다. 1963년 말, 그는 뉴욕 21번가 7번가 코너에 위치한 자신의 첫 체육관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정규 수업을 열었다.[8]손덕성은 웨스트포인트, 프린스턴 대학교, 뉴욕 대학교, 브라운 대학교, 포드햄 대학교,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 뉴저지주 YMCA 등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1966년 세계 태권도 협회가 된 태한 가라테 협회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빠르게 성장했고, 1965년에는 손덕성의 한국 제자들을 포함한 한국인 사범들이 미국에 정착했다. 그들의 첫 번째 검은띠는 미국에서 이 무술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손덕성이 북미에서 승단시킨 최초의 11명의 검은띠는 다음과 같다.
# 마틴 로젠버그
# 토마스(톰) 카릴로
# 로버트 J. 클라크[9]
# 조 라 마르카
# 론 켈리
# 제임스 예르간
# 닐 깅골드
# 루크 그란데
# 제프 포터
# 도널드 잠밋
# 조 라마
루크 그란데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훈련은 매우 강렬했습니다. 센트럴 파크에서 달리고 각 다리로 나무를 최소 100번 이상 찼습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여름의 강렬한 더위 속에서도 훈련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후 6시에는 체육관에서 훈련을 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6번 이 루틴을 했습니다."[8]
5. 2. 월드 태권도 협회(WTA) 설립과 발전
1966년, 손덕성은 1962년 자신이 설립한 대한 가라테 협회를 대체하는 월드 태권도 협회(WTA)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정재복은 WTA의 명칭을 제안했다. WTA는 전성기에 미국, 베네수엘라, 호주에 495개 이상의 도장을 확보하여 미국 최대 태권도 단체가 되었다.[8]WTA의 주요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
부회장 | 정용택 |
이사 | J.B. 정 |
기술 이사 | K.H. 김 |
중서부 이사 | 최영식 |
서부 이사 | D.H. 김 |
동부 이사 | S.P. 창 |
남부 이사 | 고현수 |
토너먼트 기획자 | N.Y. 정 |
심사관 | 유기원 |
고문 | 한창규 |
주치의 | 로버트 섹스턴 박사 |
이사회 기타 구성원 | T.D. 김, T.Y. 김, Y.K. 창, N.Y. 조 |
5. 3. WTA 분열과 이후 활동
1999년, 차기 회장 선출과 관련하여 이사회와 WTA 지도부 간의 의견 차이로 인해, 이사회는 협회를 떠나 새로운 협회인 전국 태권도 협회(NTA)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1990년대 초부터 WTA 조직은 분열되었고, 전 멤버의 대부분은 미국과 베네수엘라에 26개 이상의 독립적인 태권도 단체로 흩어졌다.[8]손덕성의 제자들은 계속해서 태권도를 보급하고 발전시켰다.
6. 주요 제자
손덕성은 6명의 미국인 사범에게 무술 "사범" 지위를 수여했다.[1] 세계 무술 협회 설립자 마이클 T. 딜리, 1970년 버팔로 대학교 태권도 클럽 설립자 제이크 폰틸로, 1970년 베네수엘라 태권도 설립자 루크 그란데 등도 손덕성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태권도를 발전시켰다.[3]
6. 1. 미국인 사범
손덕성은 자신의 미국인 지도자 6명에게 무술 "사범" 지위를 수여했다. 6명의 미국인 사범은 다음과 같다.[1]- 리코 도스 안요스
- 제리 오렌스타인
- 랄프 루비노
- 잭 에멜
- 론 제프리온
- 짐 캐힐
6. 2. 후기 제자
마이클 T. 딜리(세계 무술 협회(World Martial Arts Association) 설립자), 제이크 폰틸로(1970년 버팔로 대학교 태권도 클럽 설립자), 루크 그란데(1970년 베네수엘라 태권도 설립자)는 손덕성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태권도를 발전시킨 후기 제자들이다.[3]7. 사망
손덕성은 2011년 3월 29일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의 뉴포트 병원에서 사망했다.[1] 그는 딸 손예종과 그의 남편 스티븐 G. 컨디, 그리고 손녀 라나 손-컨디를 유족으로 남겼다.[1]
8. 유산
손덕성은 태권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6년, 그는 정재복이 제안한 월드 태권도 협회(WTA) 설립을 지지했으며, WTA는 미국, 베네수엘라, 호주 등지에 495개 이상의 도장을 확보하며 미국 최대 태권도 단체로 성장했다.[1] WTA는 국기원, 세계 태권도 연맹, 국제 태권도 연맹과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자체적인 철학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WTA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1]
직책 | 이름 |
---|---|
회장 | 손덕성 |
부회장 | 정용택 |
이사 | J.B. 정 |
기술 이사 | K.H. 김 |
중서부 이사 | 최영식 |
서부 이사 | D.H. 김 |
동부 이사 | S.P. 창 |
남부 이사 | 고현수 |
토너먼트 기획자 | N.Y. 정 |
심사관 | 유기원 |
고문 | 한창규 |
주치의 | 로버트 섹스턴 박사 |
이사회 구성원 | T.D. 김, T.Y. 김, Y.K. 창, N.Y. 조 |
1999년, WTA는 차기 회장 선출 문제로 분열되었고, 이사회는 전국 태권도 협회(NTA)를 설립했다.[1] 1990년대 초부터 WTA 조직은 미국과 베네수엘라 등지에 26개 이상의 독립적인 태권도 단체로 흩어졌다.[1]
손덕성은 6명의 미국인에게 '사범' 지위를 수여했다.[1]
- 리코 도스 안요스
- 제리 오렌스타인
- 랄프 루비노
- 잭 에멜
- 론 제프리온
- 짐 캐힐
손덕성은 2011년 3월 29일 사망했으며, 유족으로는 딸 손예종과 그의 남편 스티븐 G. 컨디, 손녀 라나 손-컨디가 있다.[1] 현재 WTA 회장은 손예종이다.
참조
[1]
서적
Korean Karate: The Art of Tae Kwon Do
Prentice-Hall
1968
[2]
서적
Black Belt Korean Karate
Prentice-Hall
1983
[3]
웹사이트
History of Taekwondo
http://www.sjkim-tae[...]
2007
[4]
간행물
Duk Sung Son the tradition continues
1992-12
[5]
뉴스
Letter in ''Seoul Shinmoon'' newspaper (16 June 1959)
http://www.hellers.w[...]
1959
[6]
서적
A killing art: the untold History of Tae Kwon Do
ECW press
2008
[7]
웹사이트
General Choi Interview
http://www.acropolis[...]
[8]
웹사이트
Luke Grande Biography
http://www.chungdokw[...]
[9]
웹사이트
The Legacy of Robert J. Clark
https://tkdlifemagaz[...]
KYPAUSA
2020-06-15
[10]
웹사이트
Son Duk-sung Obituary
http://www.tributes.[...]
[11]
서적
Korean Karate: The Art of Tae Kwon Do
Prentice-Hall
1968
[12]
서적
Black Belt Korean Karate
Prentice-Hall
1983
[13]
웹인용
History of Taekwondo
http://www.sjkim-tae[...]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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