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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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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요한은 평양 출신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가, 사업가이다. 1919년 김동인, 전영택 등과 함께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서구적 형태의 근대시로 평가받는 〈불놀이〉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해방 후에는 언론인과 정치인,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으나, 197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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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주요한 작가
한글 이름주요한
한자 이름朱耀翰
로마자 표기Ju Yohan
일본어 이름松村紘一 (마쓰무라 고이치)
아호송아(頌兒), 송아지, 목신(牧神), 벌꽃, 낙양(落陽)
출생일1900년 12월 5일
출생지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부 (현재의 북한)
사망일1979년 11월 17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거주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교개신교(장로회) → 무종교
학력
학교평양 숭덕소학교
학교明治学院 중학부
학교제일고등학교
학교후장대학 공업화학과 학사
경력
직업시인
직책제15대 상공부 장관
임기1960년 9월 12일 ~ 1961년 5월 3일
대통령윤보선
총리장면
차관김재곤
경력대한해운공사 사장
가족 관계
아버지주진우
형제주요섭(맏아우), 주영섭(막내아우)
작품 활동
활동 기간1919년 – 1979년
장르
대표 작품불놀이
데뷔 작품불놀이
기타 정보
한국문학번역원 작가 데이터베이스작가 데이터베이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주요한(朱耀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주영섭(朱永燮)

2. 생애

주요한은 평안남도 평양에서 개신교 목사인 주공삼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2] 소설가 주요섭, 극작가 주영섭이 주요한의 친동생이다.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한 뒤, 1912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메이지 학원 재학 중에는 문학에 뜻을 두고 학우들과 회람지를 발행했으며, 일본어로 쓴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입문하였다.[3][4] 1919년에는 춘사 김동인, 추호 전영택 등과 함께 발간한 동인지 《창조》 창간호에 대표작 〈불놀이〉를 발표했다. 〈불놀이〉는 서유럽적인 형태의 최초의 근대시로 평가받는다.[12]

1919년 5월, 상하이로 건너가 그해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의 편집을 맡았다. 1920년 2월에는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1925년 6월, 상하이 후장 대학교 공업화학과를 졸업하고[2] 난징 동명학원에서 1년간 영어 교사로 일했다.[10]

1918년 일본 유학 시절, 주요한은 문학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동인, 전영택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인 《창조》의 동인으로 참여하여, 한국 근대 문학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14] 주요한은 《창조》 창간호에 한국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받는 〈불놀이〉(火遊び)를 발표하여 한국 근대시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4]

이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인국민회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안창호수양동우회를 결성하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다. 1925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기자 및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언론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1926년 5월 발간된 수양동우회(흥사단 계열) 기관지 『동광』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역임한 후, 1927년 7월 동아일보 학예부장, 평양지국장,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고 1932년 11월 퇴사했다.[10] 1932년 9월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전무이사를 역임하고, 1933년 11월부터 1934년 8월까지는 잡지부장을 역임했다.[10]

주요한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이듬해 이광수 등과 함께 전향하였다.[16] 이후 일제 강점기에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언론보국회 등 여러 친일 단체에 가담하여 징병제를 선전하는 등 태평양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16] 창씨개명한 이름도 일본의 팔굉일우(八紘一宇) 이념에서 따온 것이었다.

주요한은 〈불놀이〉를 지어 한국근대시 형성에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겼으나,[15]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로 변절하여 일제 전시체제때 총독부의 내선일체 체제에 순응하여 적극적인 협력활동을 한 친일파이다.[15]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15년 8월 15일 부천시청 광장에 게시한 선전물에서 주요한을 가리켜 "죽음과 삶을 초월한 황국정신"이라고 묘사했다. 주요한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가실 때에는 빨간 댕기를 드리겠어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댕기〉(국민문학, 1941년),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지원병 이인석에게 줌〉(1941년 3월호 신시대) 등의 글을 써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애국'이라며 선전했다.[15]

1944년 종로의 인사들이 학도병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한 종로익찬위원회의 회원이 되었고,[17] 1945년 초 조선언론보국회에 가입하였다.

이러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주요한은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13]

해방 후 주요한은 흥사단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1945년 9월 한민당 창당 당시 영입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10] 그 해 조선상공회의소(대한상공회의소의 전신) 특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6년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에 취임했다.[10] 1948년에는 대한무역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국제문제연구소 소장에 피선되었다.[10] 1949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다.

1949년 영풍그룹의 모체인 영풍기업사를 장병희, 최기호와 함께 공동 설립했으나,[10] 제2공화국에서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후에는 주요한을 제외한 2인 체제로 운영되었다.[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618018004]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한 후 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했다.[10] 1958년 5월 서울 중구에서 대한국민당의 윤치영을 누르고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며,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치러진 그해 5월 민의원 선거에서 재선되었다.[10] 1960년 8월 장면 내각이 출범하면서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입각했다.[10] 1961년 초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0]

1950년 한국 전쟁 당시에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창설된 조선민주당의 선전부장과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10] 5·16 군사정변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사업가로 복귀, 대한일보와 해운회사를 경영했다.[10] 1966년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 1970년 대한해운공사 사장, 1973년 한국특허협회 회장, 1975년 한국능률협회 회장, 1978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했다.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공직을 사퇴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대한일보》 사장과 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18] 1963년 정치정화법에서 해금되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나 박순천장면, 정일형 등의 재건 민주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18] 이를 두고 야당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타협한 것이라며 비난을 가했다.

1964년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10] 1965년부터 73년까지 대한일보사 회장을 지냈다.[18] 이후 문필 활동에 전력하다가 1979년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경기도 고양군(현 고양시) 벽제면에 안장되었다.[19]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주요한은 평안남도 평양에서 개신교 목사인 주공삼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2] 소설가 주요섭, 극작가 주영섭이 주요한의 친동생이다.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한 뒤, 1912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메이지 학원 재학 중에는 문학에 뜻을 두고 학우들과 회람지를 발행했으며, 일본어로 쓴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입문하였다.[3][4] 1919년에는 춘사 김동인, 추호 전영택 등과 함께 발간한 동인지 《창조》 창간호에 대표작 〈불놀이〉를 발표했다. 〈불놀이〉는 서유럽적인 형태의 최초의 근대시로 평가받는다.[12]

1919년 5월, 상하이로 건너가 그해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의 편집을 맡았다. 1920년 2월에는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1925년 6월, 상하이 후장 대학교 공업화학과를 졸업하고[2] 난징 동명학원에서 1년간 영어 교사로 일했다.[10]

2. 2. 문학 활동 및 독립 운동

1918년 일본 유학 시절, 주요한은 문학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동인, 전영택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인 《창조》의 동인으로 참여하여, 한국 근대 문학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14] 주요한은 《창조》 창간호에 한국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받는 〈불놀이〉(火遊び)를 발표하여 한국 근대시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4]

이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인국민회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안창호수양동우회를 결성하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다. 1925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기자 및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언론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2. 3. 일제 강점기 활동 및 친일 논란

주요한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이듬해 이광수 등과 함께 전향하였다.[16] 이후 일제 강점기에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언론보국회 등 여러 친일 단체에 가담하여 징병제를 선전하는 등 태평양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16] 창씨개명한 이름도 일본의 팔굉일우(八紘一宇) 이념에서 따온 것이었다.

주요한은 〈불놀이〉를 지어 한국근대시 형성에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겼으나,[15]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로 변절하여 일제 전시체제때 총독부의 내선일체 체제에 순응하여 적극적인 협력활동을 한 친일파이다.[15]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15년 8월 15일 부천시청 광장에 게시한 선전물에서 주요한을 가리켜 "죽음과 삶을 초월한 황국정신"이라고 묘사했다. 주요한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가실 때에는 빨간 댕기를 드리겠어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댕기〉(국민문학, 1941년),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지원병 이인석에게 줌〉(1941년 3월호 신시대) 등의 글을 써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애국'이라며 선전했다.[15]

1944년 종로의 인사들이 학도병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한 종로익찬위원회의 회원이 되었고,[17] 1945년 초 조선언론보국회에 가입하였다.

이러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주요한은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13]

2. 4. 해방 이후 활동

해방 후 주요한은 흥사단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1945년 9월 한민당 창당 당시 영입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10] 그 해 조선상공회의소(대한상공회의소의 전신) 특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6년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에 취임했다.[10] 1948년에는 대한무역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국제문제연구소 소장에 피선되었다.[10] 1949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다.

1949년 영풍그룹의 모체인 영풍기업사를 장병희, 최기호와 함께 공동 설립했으나,[10] 제2공화국에서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후에는 주요한을 제외한 2인 체제로 운영되었다.[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618018004]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한 후 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했다.[10] 1958년 5월 서울 중구에서 대한국민당의 윤치영을 누르고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며,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치러진 그해 5월 민의원 선거에서 재선되었다.[10] 1960년 8월 장면 내각이 출범하면서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입각했다.[10] 1961년 초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0]

1950년 한국 전쟁 당시에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창설된 조선민주당의 선전부장과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10] 5·16 군사정변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사업가로 복귀, 대한일보와 해운회사를 경영했다.[10] 1966년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 1970년 대한해운공사 사장, 1973년 한국특허협회 회장, 1975년 한국능률협회 회장, 1978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했다.

2. 5. 정계 은퇴 이후와 죽음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공직을 사퇴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대한일보》 사장과 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18] 1963년 정치정화법에서 해금되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나 박순천장면, 정일형 등의 재건 민주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18] 이를 두고 야당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타협한 것이라며 비난을 가했다.

1964년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10] 1965년부터 73년까지 대한일보사 회장을 지냈다.[18] 이후 문필 활동에 전력하다가 1979년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경기도 고양군(현 고양시) 벽제면에 안장되었다.[19] 1966년 경제과학심의회(經濟科學審議會) 상임위원, 1970년 대한해운공사(大韓海運公社) 사장, 1973년 한국특허협회(韓國特許協會) 회장, 1975년 한국능률협회(韓國能率協會) 회장, 1978년 전국경제인연합회(全國經濟人聯合會) 수석부회장을 역임했다.[10]

3. 작품 세계

주요한은 1920년대와 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5] 그의 작품은 상하이 망명 전후로 나뉘는데, 일본 유학 시절에 쓴 초기 시들은 서구와 일본 현대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포르(Paul Fort)의 영향은 불놀이(火遊び)(Bullori)와 같은 작품에서 두드러진다.[6] 그는 맑고 투명한 문체로 미세한 인상까지 포착하여 감각적인 생생함을 부여했다.[7]

한국 현대시의 시대를 연 시로 평가받는 불놀이(火遊び)(1918)의 두 연은 그러한 섬세한 인상을 잘 보여준다.[8]

:아, 어두워지고 있다. 서쪽 하늘은 핑크빛 불빛으로 타오르며 외로운 강 위로 사라진다. 아, 해가 진 저녁, 살구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을 때 다시 밤이 찾아올 것이다. 오늘은 4월 8일(부처님 오신 날)로 거리에는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넘실거린다. 왜 나는 혼자 마음속 눈물을 삼켜야 하는가?

:아, 춤추고 흔들린다. 밝은 빨간 불덩이가 춤을 춘다. 고요한 성문 위를 내려다보니 아래쪽 물과 모래 냄새가 났다. 밤과 하늘을 깨물던 횃불이 나중에는 마치 무언가 부족한 듯 스스로 꺼져 버리고, 낙담한 젊은이는 과거의 찬란했던 꿈을 차가운 강에 던져 버렸다. 차가운 강이 어찌 그러한 꿈의 그림자를 막을 수 있을까? ― 아, 잘린 꽃 중 시들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살아 있지만, 죽은 연인을 생각하면 마음은 죽어 간다. 젠장! 차라리 그 불에 마음을 태워 슬픔을 날려 버리리라. 고통스러운 발걸음으로 무덤을 찾았을 때, 겨우내 시들었던 꽃들이 피어 있었다. 사랑으로 가득 찬 봄이 다시 오기를 바란다. 차라리 그 물에서 죽고 싶다, 그러면 누군가 나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때, “탕”, “탁” 종이 폭죽이 터지며 불꽃을 사방으로 흩뿌린다. 정신을 차리니, 떠들썩한 구경꾼들이 나를 비웃거나 꾸짖는 것 같다. 아, 더 강렬한 열정으로 살고 싶다. 횃불 연기가 뒤엉키는 것을 본다. 숨 막히는 불 속의 고통 속에서, 갑자기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생각한다. 나는 더 열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

주요한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서구 시의 영향을 받은 문체와 형식에서 한국 전통시로 점차 멀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는 김억과 함께 서구 모방에서 벗어나 한국 문학의 뿌리로 나아가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의 비평 글 "노래를 지으실 분에게"(Noraereul jieusillyeoneun iege)에서 영감의 변화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며,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생명력 창조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시에 대한 완전한 이론을 전개한다. 1930년 이후 주요한은 시조(時調)를 집중적으로 썼지만, 다른 시도 계속 발표했으며, 다른 시인들과 함께 시집 3인 시가집(三人の詩集)과 시조집 봉사꽃(鳳仙花)을 편집했다.[2]

3. 1. 초기 시: 낭만주의와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

주요한은 1920년대와 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5] 그의 작품은 상하이 망명 전후로 나뉘는데, 일본 유학 시절에 쓴 초기 시들은 서구와 일본 현대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포르의 영향은 〈불놀이〉(Bullori)와 같은 작품에서 두드러진다.[6] 그는 맑고 투명한 문체로 미세한 인상까지 포착하여 감각적인 생생함을 부여했다.[7]

한국 현대시의 시대를 연 시로 평가받는 〈불놀이〉(1918)의 두 연은 그러한 섬세한 인상을 잘 보여준다.[8]

:아, 어두워지고 있다. 서쪽 하늘은 핑크빛 불빛으로 타오르며 외로운 강 위로 사라진다. 아, 해가 진 저녁, 살구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을 때 다시 밤이 찾아올 것이다. 오늘은 4월 8일(부처님 오신 날)로 거리에는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넘실거린다. 왜 나는 혼자 마음속 눈물을 삼켜야 하는가?

:아, 춤추고 흔들린다. 밝은 빨간 불덩이가 춤을 춘다. 고요한 성문 위를 내려다보니 아래쪽 물과 모래 냄새가 났다. 밤과 하늘을 깨물던 횃불이 나중에는 마치 무언가 부족한 듯 스스로 꺼져 버리고, 낙담한 젊은이는 과거의 찬란했던 꿈을 차가운 강에 던져 버렸다. 차가운 강이 어찌 그러한 꿈의 그림자를 막을 수 있을까? ― 아, 잘린 꽃 중 시들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살아 있지만, 죽은 연인을 생각하면 마음은 죽어 간다. 젠장! 차라리 그 불에 마음을 태워 슬픔을 날려 버리리라. 고통스러운 발걸음으로 무덤을 찾았을 때, 겨우내 시들었던 꽃들이 피어 있었다. 사랑으로 가득 찬 봄이 다시 오기를 바란다. 차라리 그 물에서 죽고 싶다, 그러면 누군가 나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때, “탕”, “탁” 종이 폭죽이 터지며 불꽃을 사방으로 흩뿌린다. 정신을 차리니, 떠들썩한 구경꾼들이 나를 비웃거나 꾸짖는 것 같다. 아, 더 강렬한 열정으로 살고 싶다. 횃불 연기가 뒤엉키는 것을 본다. 숨 막히는 불 속의 고통 속에서, 갑자기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생각한다. 나는 더 열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

주요한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서구 시의 영향을 받은 문체와 형식에서 한국 전통시로 점차 멀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는 김억과 함께 서구 모방에서 벗어나 한국 문학의 뿌리로 나아가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30년 이후 주요한은 시조(時調)를 집중적으로 썼지만, 다른 시도 계속 발표했으며, 다른 시인들과 함께 시집 《사민시가집》과 시조집 《봉사꽃》(Bongsa kkot, 鳳仙花)을 편집했다.[2]

3. 2. 중기 시: 민족의식과 현실 참여

주요한은 1920년대와 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그의 작품은 상하이 망명 전후로 나뉜다.[5] 초기 시는 서구와 일본 현대시의 영향을 받아, 폴 포르(Paul Fort)의 영향을 받은 "불꽃놀이"(Bullori)와 같이 맑고 투명한 문체로 미세한 인상을 포착하여 감각적인 생생함을 부여했다.[6][7] 한국 현대시의 시대를 연 시 불놀이(火遊び)는 그러한 섬세한 인상을 잘 보여준다.[8]

주요한의 작품은 서구 시의 영향을 받은 문체와 형식에서 점차 한국 전통시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김억(Kim Eok)과 함께 서구 모방에서 벗어나 자신의 문학적 뿌리로 나아가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2] 1930년 이후, 주요한은 한국 전통적인 시 형식인 시조(時調)를 집중적으로 썼지만, 다른 시도 계속 발표하며 시집 「사민시가집」(Poetry of Three People)과 시조집 「봉사꽃」(Bongsa kkot, 鳳仙花)을 편집했다.[2] 그는 자신의 비평 글 "노래를 지으실 분에게"(Noraereul jieusillyeoneun iege)에서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생명력 창조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시에 대한 이론을 전개했다.

3. 3. 후기 시: 친일 작품과 그 비판

주요한은 1920년대와 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작품은 상하이 망명 이전을 기준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5] 일본에서 보낸 시절에 쓴 초기 시들은 서구와 일본의 현대시의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포르의 영향은 "불꽃놀이"와 같은 작품에서 두드러진다.[6] 맑고 투명한 문체로 미세한 인상까지 예민하게 포착하여 감각적인 생생함을 부여했다.[7] 한국 현대시의 시대를 연 시 「불로리」[8]는 그러한 섬세한 인상을 보여준다.

주요한의 전반적인 작품은 서구 시의 영향을 받은 문체와 형식에서 한국 전통시로 점차 멀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김억과 마찬가지로 그는 서구 모방에서 벗어나 자신의 문학적 뿌리로 나아가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한국 문학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평 글 "노래를 지으실 분에게"에서 영감의 변화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며,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생명력 창조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시에 대한 완전한 이론을 전개한다. 1930년 이후 주요한은 한국 전통적인 시 형식인 시조를 집중적으로 썼지만, 다른 시도 계속해서 발표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집 「사민시가집」과 시조집 「봉사꽃」을 편집했다.[2]

4. 평가

〈불놀이〉는 한국 근대 자유시의 효시로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작품이며, 주요한은 김억과 함께 초기 시단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낭만적인 찬송가 작사도 하여 한국교회 음악발전에 공헌하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어 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와카 형식으로 쓴 일본어 시집 《손에 손을(手に手を일본어)》(1943) 등 총 43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20] 되어,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선정된 문인 가운데 이광수 다음으로 편수가 많았다.

197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21] 주요한의 한국 문학 및 산업 발전에 대한 헌신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는 1979년 그에게 사후에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9] 또한 그가 작곡한 여러 찬송가는 한국 교회 음악 발전에 기여하였다.

4. 1. 문학적 평가

주요한은 한국 근대 자유시의 효시로 여겨지며, 초기 시단을 개척한 낭만주의 시인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9] 대한민국 정부는 1979년 주요한에게 무궁화장을 추서하여 그의 한국 문학 및 산업 발전에 대한 헌신을 기렸다.[9]

4. 2.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

주요한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20]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20] 와카 형식으로 쓴 일본어 시집 《손에 손을(手に手を일본어)》(1943) 등 총 43편의 친일 작품이 공개되었는데,[20] 이는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선정된 문인 가운데 이광수 다음으로 많은 편수이다.

5. 기타

5. 1. 가족 관계

주공삼(1875년~1953년, 아명은 주진우(朱珍雨))은 개신교 목사로, 평안남도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동생은 주요섭(1902년 11월 24일~1972년 11월 14일)으로 소설가, 시인, 영문학자이며,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또 다른 동생 주영섭(1912년 ~ ?)은 연극배우, 극작가, 연극연출가로, 국립연극연구소 연구위원을 역임했다.

5. 2. 학력

평안남도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했다.[22] 일본 도쿄 메이지 학원 중학부를 전퇴하고, 도쿄 제1중학교를 졸업했다.[22] 중국 상하이 후장 대학교 물리학과를 전퇴하고, 공업화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22]

5. 3. 저서

주요한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14]

  • 시집
  • * 아름다운 새벽
  • * 3인시가집(三人詩歌集) (1929): 이광수, 김동환과 공저
  • * 봉사꽃 (1930)
  • * 자유의 구름다리 (1959)
  • 논저
  • * 부흥논의 (1963)
  • * 안도산전서 (1963)
  • 소설
  • * 불꽃놀이 (''Bullori'')
  • * 상하이 이야기 (''Sanghae iyagi'')
  • * 차이나 걸 (''Jina sonyeo'')
  • * 공원에서 (''Gongwoneseo'')
  • * 노래를 지으실 분에게 (''Noraereul jieusillyeoneun iege'')
  • * 불놀이 (1918)

5. 4. 상훈 경력

주요한은 한국 문학 및 산업 발전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아 197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9]

5. 5. 역대 선거 결과

주요한은 1954년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 갑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4,271표(14.57%)를 얻어 4위로 낙선했다. 1958년 총선에서는 서울 중구 갑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17,492표(68.45%)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총선에서는 같은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 18,781표(65.42%)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참조

[1] 일반텍스트
[2] 웹사이트 Author Database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klti.or.kr/ke[...] 2013-09-03
[3] 웹사이트 Korean Literature Savor Korea's Finest Writing http://www.koreanlit[...] 2012-04-06
[4] 서적 Korean Poetry Today 450 Poems Since the 1920s Hanshin
[5] 서적 Twentieth-Century Korean Literature EastBridge Signature Books Series
[6] 일반텍스트
[7] 웹사이트 주요한 https://terms.naver.[...] Kwon Young-min,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21-01-08
[8] 블로그 Park Whon-il's blog http://blog.daum.net[...]
[9] 뉴스 김덕련, 발굴/ 주요 친일명단 120명 중 34명 해방후 훈·포장·표창 서훈 - 김성수는 2등급, 유관순은 3등급 Ohmynews 2005-08-31
[10] 웹사이트 주요한(朱耀翰) http://encykorea.aks[...] 2022-01-19
[11] 웹사이트 주영섭(朱永燮) https://encykorea.ak[...] 2023-09-29
[12]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www.rokps.or[...] 2022-03-13
[13] 웹사이트 06년 12월6일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 명단 확정 공개 https://m.hankookilb[...] 2021-12-06
[14] 웹사이트 아름다운새벽 http://encykorea.aks[...] 2022-01-19
[15] 웹사이트 http://enc.daum.net/[...]
[16] 일반텍스트
[17] 서적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라 한길사 2004
[18] 일반텍스트
[19] 일반텍스트
[20] 논문 친일문학 작품목록 http://www.artnstudy[...] 2007-09-03
[21] 뉴스 {발굴} 주요 친일명단 120명 중 34명 해방후 훈·포장·표창 서훈 - 김성수는 2등급, 유관순은 3등급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8-31
[22] 저널 주요한의 상해시절 시와 이중적 글쓰기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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