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순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순체는 전한 무제 때 활약한 장군으로, 말을 잘 몰아 시중이 되었으며 여러 차례 위청을 따라 출정했다. 원봉 3년 좌장군이 되어 위만조선을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원봉 2년 양복과 함께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왕검성을 포위했으나, 우거가 항복하지 않자 위산이 파견되었으나 실패했다. 순체는 위만조선을 급히 공격하려 했고, 누선장군 양복과 갈등을 겪었다. 공손수를 통해 양복을 체포하고, 조선상 노인 등의 항복을 받아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이후 공을 다투고 양복을 질투했다는 죄목으로 기시되었다. 2017년 KBS 드라마 《한국사기》에서 배우 하이석이 순체 역을 연기했다.

2. 생애

순체는 말을 뛰어나게 잘 몰았던 덕분에 천자를 알현하고 시중(侍中)이 되었다. 교위(校尉)가 되어 여러 차례 대장군 위청을 따라갔다.[2][3] 원봉 3년(기원전 108년) 좌장군이 되어 조선을 쳤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을 체포한 죄로 법에 따라 죽임을 당했다.[2][3]

원봉 2년(기원전 109년), 무제는 죄인을 뽑아 조선을 치기로 하고, 그 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보냈다. 양복은 옛 제나라 땅에서 보하이 해를 건너는 5만 군사를 이끌었고, 순체는 요동에서 출발했다. 우거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방종(放縱)하다가 패하여 흩어지고, 다는 달려서 되돌아오니, 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순체는 조선 패수의 서쪽 군을 공격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했다.[4]

한 무제의 사자 위산(衛山)의 화친 제의가 실패한 후, 좌장군은 패수 상류의 군을 격파하고 왕검성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도 왕검성 남쪽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우거가 수개월을 견고하게 지켜내어 함락시키지 못했다.[5]

한 무제는 두 장수로는 전황이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위산을 보내 우거를 타일렀다. 우거는 항복을 원했으나, 두 장수가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했다. 태자(太子)를 보내 입조(入朝)하여 사죄하고, 말 오천 필과 군량(軍糧)을 바쳤다. 그러나 만여 명의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패수를 건너려 하자, 위산과 좌장군은 변고를 의심하여 무기를 소지하지 말라고 했다. 태자 역시 의심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한 무제는 위산의 목을 베었다.[6]

좌장군은 패수 상류의 위만조선군을 격파하고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도 왕검성 남쪽에 자리잡았다. 우거가 수개월을 견고하게 지켜내어 함락시키지 못했다.[7]

좌장군은 원래 시중(侍中)이었고, 천자의 총애를 받았으며, 연나라대나라의 병졸을 거느렸고, 사나웠으며, 승세를 타고 있었고, 그의 군사들은 많이 교만했다.[8] 반면, 누선장군 양복은 우거와의 전쟁에 소극적으로 임하였다. 순체가 위만조선을 급하게 치니, 위만조선의 대신(大臣)은 몰래 양복에게 항복을 약속하였으나, 긍정적으로 결정하지 못하였다. 좌장군은 누선장군과 여러 차례 전쟁을 기약하였으나, 누선장군은 위만조선 대신과의 약속을 성취하려 하였으므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좌장군 역시 위만조선을 물리치고 항복시키려 했으나, 위만조선은 수긍하지 않았고, 위만조선 대신의 마음은 누선장군을 따랐다. 이 때문에 두 장수는 서로 협력이 불가능했다. 좌장군은 누선장군이 예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고, 지금 조선과 사사로이 친하며, 위만조선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배반하려는 계획이 있는지 의심했으나, 감히 드러내지는 않았다. 한 무제는 장수들이 능력이 없고, 위산이 우거를 항복시키는 데 실패했으며, 두 장수가 서로 맞지 않아 오래되도록 결정이 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9]

한 무제는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바로잡게 하였다. 공손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은 조선이 항복하지 않는 데에는 어떤 정황이 있다고 말했다. 순체는 누선장군과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던 점을 말하며, 누선장군이 조선과 함께 자신들의 군을 멸할 것이라고 했다. 공손수는 이를 그렇다고 여기고 누선장군을 좌장군 진영에 들어오도록 소환하여 체포했다. 이를 한 무제에게 보고하자, 한 무제는 공손수를 죽였다.[9]

좌장군은 그 후 양군(兩軍)을 아울러 위만조선을 급히 쳤다. 조선상 노인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한 사이, 왕검성에서는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가 병권을 장악했으나,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항과 노인의 아들 를 시켜 백성을 타일러 성기를 죽이니, 위만조선이 평정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다.[10]

그 뒤, 좌장군 순체는 전쟁에서 공(功)을 다투고 누선장군 양복과 서로 질투하였다는 죄목으로 기시되었다.

3. 위만조선과의 전쟁

원봉 2년(기원전 109년), 무제는 죄인을 징발하여 위만조선을 공격하기로 하고, 그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파견했다. 양복은 옛 제나라 지역에서 보하이 해를 건너는 5만 군사를 이끌었고, 순체는 요동에서 출발했다. 조선우거는 험한 지형에 군사를 배치하여 저항했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 병사를 이끌고 경솔하게 행동하다 패배하고 도주하여 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순체는 조선 패수 서쪽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격파하지 못했다.[4]

한나라 무제의 사신 위산의 화친 제의가 실패한 후, 순체는 패수 상류의 군대를 격파하고 왕검성 서북쪽을 포위했다. 양복도 합류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했다. 그러나 우거가 수개월 동안 굳게 지키자 함락시키지 못했다.[5]

무제는 두 장수만으로는 전황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위산을 보내 우거를 설득하게 했다. 우거는 위산에게 사죄하며 항복 의사를 밝혔으나, 두 장수가 자신을 속여 죽일 것을 두려워했다. 우거는 태자를 보내 사죄하고 말 5천 필과 군량을 바쳤다. 그러나 태자가 만여 명의 무장 병력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려 하자, 위산과 순체는 변고를 의심하여 무장을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태자 역시 이들을 의심하여 군사를 돌렸다. 위산은 무제에게 보고했고, 무제는 위산을 처형했다.[6]

순체는 위만조선군을 격파하고 왕검성 서북쪽을 포위했다. 양복도 합류하여 왕검성 남쪽에 주둔했으나, 우거가 수개월 동안 성을 지켜 함락시키지 못했다.[7]

순체는 원래 시중(侍中)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았고, 연나라대나라 병사들을 지휘하여 사납고 교만했다.[8] 반면, 양복은 소극적으로 전쟁에 임했다. 순체가 조선을 급히 공격하자, 조선의 대신들은 몰래 양복에게 항복을 약속하고 교섭했으나, 결정되지는 않았다. 순체는 양복과 여러 차례 작전을 협의했으나, 양복은 조선 대신과의 약속을 성사시키려 하여 의견이 맞지 않았다. 순체는 조선을 회유하려 했으나, 조선은 응하지 않고 양복에게 기우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두 장수는 협력하지 못했다. 순체는 양복이 과거 군사를 잃은 죄가 있고, 조선과 내통하며 항복을 받지 않는 것에 의심을 품었으나, 드러내지는 않았다.

무제는 “장수들이 무능하여 위산을 보내 우거를 회유했으나, 위산은 독단적이지 못했고 순체와 일을 그르쳐 약속을 깨뜨렸다. 두 장수가 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서로 맞지 않아 오래도록 결정이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무제는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 상황을 정리하게 했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순체는 “조선이 항복하지 않는 데에는 다른 사정이 있다.”라며 양복이 조선과 함께 아군을 멸하려 한다고 모함했다. 공손수는 순체의 말을 믿고 부절(符節)을 사용하여 양복을 좌장군 진영으로 소환하여 체포하고, 그의 군사를 지휘하에 넣었다. 무제는 이 보고를 받고 공손수를 처형했다.[9]

순체는 양군(兩軍)을 통합하여 조선을 급히 공격했다. 조선상(朝鮮相) 노인 등이 우거에게 등을 돌리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왕검성에서는 대신(大臣) 성기가 병권을 장악했으나, 순체가 우거의 아들 장항과 노인의 아들 를 시켜 백성을 설득하여 성기를 죽였다. 이로써 위만조선은 평정되고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었다.[10]

3. 1. 초기 전투와 한나라의 개입

순체는 말을 잘 몰아 천자의 눈에 띄어 시중(侍中)이 되었다. 교위(校尉)가 되어 여러 번 대장군 위청을 따라 종군했다. 원봉 3년(기원전 108년) 좌장군이 되어 위만조선을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이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을 체포한 죄로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2][3]

원봉 2년(기원전 109년), 무제는 죄수들을 징발하여 조선을 공격하기로 하고, 그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파견했다. 양복은 옛 제나라 지역에서 보하이 해를 건너는 5만 군사를 이끌었고, 순체는 요동에서 출발했다. 조선우거는 험한 지형에 군사를 배치하여 저항했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 병사를 이끌고 경솔하게 행동하다 패배하고 도주하여, 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순체는 조선 패수 서쪽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격파하지 못했다.[4]

한 무제의 사신 위산의 화친 제의가 실패한 후, 순체는 패수 상류의 군대를 격파하고 왕검성 서북쪽을 포위했다. 양복도 합류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했다. 그러나 우거가 수개월 동안 굳게 지키자 함락시키지 못했다.[5]

무제는 두 장수만으로는 전황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위산을 보내 우거를 설득하게 했다. 우거는 위산에게 사죄하며 항복 의사를 밝혔으나, 두 장수가 자신을 속여 죽일 것을 두려워했다. 우거는 태자를 보내 사죄하고 말 5천 필과 군량을 바쳤다. 그러나 태자가 만여 명의 무장 병력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려 하자, 위산과 순체는 변고를 의심하여 무장을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태자 역시 이들을 의심하여 군사를 돌렸다. 위산은 무제에게 보고했고, 무제는 위산을 처형했다.[6]

순체는 패수 상류의 조선군을 격파하고 왕검성 서북쪽을 포위했다. 양복도 합류하여 왕검성 남쪽에 주둔했으나, 우거가 수개월 동안 성을 지켜 함락시키지 못했다.[7]

순체는 원래 시중(侍中)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았고, 연나라대나라 병사들을 지휘하여 사납고 교만했다.[8] 반면, 양복은 소극적으로 전쟁에 임했다. 순체가 조선을 급히 공격하자, 조선의 대신들은 몰래 양복에게 항복을 약속하고 교섭했으나, 결정되지는 않았다. 순체는 양복과 여러 차례 작전을 협의했으나, 양복은 조선 대신과의 약속을 성사시키려 하여 의견이 맞지 않았다. 순체는 조선을 회유하려 했으나, 조선은 응하지 않고 양복에게 기우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두 장수는 협력하지 못했다. 순체는 양복이 과거 군사를 잃은 죄가 있고, 조선과 내통하며 항복을 받지 않는 것에 의심을 품었으나, 드러내지는 않았다. 무제는 “장수들이 무능하여 위산을 보내 우거를 회유했으나, 위산은 독단적이지 못했고 순체와 일을 그르쳐 약속을 깨뜨렸다. 두 장수가 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서로 맞지 않아 오래도록 결정이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무제는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 상황을 정리하게 했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순체는 “조선이 항복하지 않는 데에는 다른 사정이 있다.”라며 양복이 조선과 함께 아군을 멸하려 한다고 모함했다. 공손수는 순체의 말을 믿고 부절(符節)을 사용하여 양복을 좌장군 진영으로 소환하여 체포하고, 그의 군사를 지휘하에 넣었다. 무제는 이 보고를 받고 공손수를 처형했다.[9]

순체는 양군(兩軍)을 통합하여 조선을 급히 공격했다. 조선상(朝鮮相) 노인 등이 우거에게 등을 돌리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왕검성에서는 대신(大臣) 성기가 병권을 장악했으나, 순체가 우거의 아들 장항과 노인의 아들 를 시켜 백성을 설득하여 성기를 죽였다. 이로써 위만조선은 평정되고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었다.[10]

그 뒤, 순체는 전쟁에서 공을 다투고 양복과 서로 질투하였다는 죄목으로 기시되었다.

3. 2. 외교적 노력과 군사적 갈등

순체는 말을 뛰어나게 잘 몰아 천자를 알현하고 시중(侍中)이 되었다. 교위(校尉)가 되어 여러 번 대장군 위청을 따라 종군했다. 원봉 3년(기원전 108년) 좌장군이 되어 위만조선을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을 체포한 죄로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2][3]

원봉 2년(기원전 109년), 무제는 죄인을 뽑아 위만조선을 공격하게 하고, 그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파견했다. 양복은 옛 제나라 땅에서 발해를 건너는 5만 군사를 이끌었고, 순체는 요동에서 출발했다. 우거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방어했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 병사를 이끌고 먼저 방종하다가 패하여 흩어졌고, 다는 도주했다가 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순체는 조선 패수의 서쪽 군을 공격했으나 격파하지 못했다.[4]

한 무제의 사자 위산(衛山)의 화친 제의가 실패한 후, 순체는 패수 상류의 군을 격파하고 왕검성 서북쪽을 포위했다. 양복도 합류하여 성 남쪽에 주둔했으나, 우거가 수개월간 견고하게 방어하여 함락시키지 못했다.[5]

무제는 두 장수로는 전황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 위산을 보내 우거를 회유했다. 우거는 항복 의사를 밝히고 태자를 보내 사죄하며 말 오천 필과 군량을 바쳤다. 그러나 태자가 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패수를 건너려 할 때, 위산과 순체는 변고를 의심하여 무기를 소지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태자 역시 의심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위산은 무제에게 보고했고, 무제는 위산을 처형했다.[6]

순체는 패수 상류의 위만조선군을 격파하고 왕검성 서북쪽을 포위했다. 양복도 합류하여 왕검성 남쪽에 주둔했으나, 우거가 수개월을 견고하게 지켜 함락시키지 못했다.[7]

순체는 시중(侍中) 출신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았고, 연나라대나라 병졸을 거느려 사납고 교만했다.[8] 반면 양복은 소극적이었다. 순체가 위만조선을 급히 공격하자, 위만조선의 대신은 몰래 양복에게 항복을 약속하고 논의했으나, 결정되지 않았다. 순체는 여러 차례 양복과 함께 공격할 것을 제안했으나, 양복은 조선 대신과의 약속을 성취하려 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순체는 위만조선을 회유하려 했으나, 위만조선은 거부하고 양복을 따랐다. 이로 인해 두 장수는 협력하지 못했다. 순체는 양복이 과거 군사를 잃은 죄가 있고, 위만조선과 사사로이 친하며 항복하지 않는 것을 의심했으나 드러내지 않았다. 무제는 “장수들이 무능하여 위산을 보냈으나, 위산은 독단적이지 못하고 순체와 일을 그르쳐 약속을 깼다. 두 장수가 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서로 맞지 않아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는다.”라고 판단했다. 무제는 제남 태수 공손수(公孫遂)를 보내 상황을 바로잡게 했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순체는 “조선이 항복해야 하지만 항복하지 않는 데에는 다른 사정이 있다.”라며 양복과의 불화와, 양복이 위만조선과 함께 아군을 멸할 것을 우려했다. 공손수는 순체의 말을 옳게 여겨 부절(符節)로 양복을 좌장군 진영으로 소환, 체포하고 무제에게 보고했다. 무제는 공손수를 처형했다.[9]

순체는 양군(兩軍)을 통합하여 위만조선을 급히 공격했다. 조선상(朝鮮相) 노인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한 사이, 왕검성에서는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가 병권을 장악했다. 순체는 우거의 아들 장항과 노인의 아들 를 시켜 백성을 회유, 성기를 죽이고 위만조선을 평정하여 한사군이 설치되었다.[10]

이후 순체는 전쟁에서 공을 다투고 양복과 서로 질투했다는 죄목으로 기시되었다.

3. 3. 순체의 강경책과 위만조선 멸망

순체는 말을 뛰어나게 모는 재능으로 천자를 알현하고 시중(侍中)이 되었다. 교위(校尉)가 되어 여러 번 대장군 위청을 따라 종군했다. 원봉 3년(기원전 108년) 좌장군이 되어 위만조선을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이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을 체포한 죄로 법에 따라 처형당했다.[2][3]

원봉 2년(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죄인을 징발하여 위만조선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파견했다. 양복은 옛 제나라 땅에서 발해를 건너는 5만 군사를 이끌었고, 순체는 요동에서 출발했다. 우거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저항했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방종하다가 패하여 흩어졌고, 다는 도주하여 돌아와 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순체는 위만조선 패수 서쪽 군을 공격했으나 격파하지 못했다.[4]

한 무제의 사자 위산(衛山)의 화친 제의가 실패한 후, 순체는 패수 상류의 군을 격파하고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양복도 합류하여 성 남쪽에 주둔했다. 그러나 우거가 수개월 동안 견고하게 방어하여 함락시키지 못했다.[5]

한 무제는 두 장수로는 전황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위산을 보내 우거를 회유했다. 우거는 항복 의사를 밝히고 태자를 보내 사죄하며 말 오천 필과 군량을 바쳤다. 그러나 태자가 만여 명의 무장 병력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려 하자, 위산과 순체는 변고를 의심하여 무장을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태자는 의심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위산은 한 무제에게 보고했고, 한 무제는 위산을 처형했다.[6]

순체는 패수 상류의 위만조선군을 격파하고 왕검성 서북쪽을 포위했다. 양복도 합류하여 왕검성 남쪽에 주둔했다. 그러나 우거가 수개월 동안 견고하게 방어하여 함락시키지 못했다.[7]

순체는 원래 시중(侍中)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았고, 연나라대나라 병졸을 거느려 사납고 교만했다.[8] 반면, 양복은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순체가 위만조선을 급히 공격하자, 위만조선의 대신(大臣)은 몰래 양복에게 항복을 약속하고 협상했으나, 결정되지 않았다. 순체는 여러 차례 양복과 함께 공격할 것을 제안했으나, 양복은 위만조선과의 약속을 성취하려 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순체는 양복이 위만조선과 내통한다고 의심했다. 한 무제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를 파견했다. 공손수는 순체의 의견에 동조하여 양복을 체포하고 한 무제에게 보고했다. 한 무제는 공손수를 처형했다.[9]

순체는 양군(兩軍)을 통합하여 위만조선을 공격했다. 조선상(朝鮮相) 노인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한 사이, 왕검성에서는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가 병권을 장악했다. 순체는 우거의 아들 장항과 노인의 아들 를 시켜 백성을 회유하고 성기를 죽였다. 이로써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10]

그 후, 순체는 전쟁에서 공을 다투고 양복과 서로 질투하였다는 죄목으로 기시되었다.

4. 등장 매체

KBS의 팩츄얼 드라마 《한국사기》에서 하이석이 순체한국어를 연기하였다.[1]

참조

[1] 지명 지금의 山西 代縣 서남방
[2] 사서 사기 권111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기원전 1세기
[3] 사서 사기 권115
[4] 사서 사기 권115
[5] 사서 사기 권115
[6] 사서 사기 권115
[7] 사서 사기 권115
[8] 사서 사기 권115
[9] 사서 사기 권115
[10] 사서 사기 권1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