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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흠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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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흠황후는 회흘 출신으로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황후이다. 아보기 사후 섭정을 맡아 거란의 군사와 국정을 장악했으며, 칭제하기도 했다. 2실위 격파, 인재 등용, 발해 정벌 등에 기여하며 요나라 건국에 영향을 미쳤다. 태종 사후 아들 야율이호를 옹립하려다 실패하고, 손자 세종과 대립하다가 조주에서 사망했다. 1052년 순흠황후로 개시되었으며, 75세에 사망하여 조릉에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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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흠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술률 평(述律 平)
별호월리타(月里朵)
존호광덕지인소렬숭간응천황태후(廣德至仁昭烈崇簡應天皇太后)
시호순흠황후(淳欽皇后)
능호조릉(祖陵)
출생일879년 10월 19일
사망일953년 8월 1일
아버지술률 파고
어머니야율씨
작위 정보
요나라 황후 즉위일907년 2월 27일
요나라 황후 퇴위일928년 12월 29일
요나라 황태후 즉위일928년 12월 29일
요나라 황태후 퇴위일953년 8월 1일
전임 황후없음
후임 황후유정황후(柔貞皇后), 예지황후(睿智皇后)
배우자요 태조
자녀야율돌욕, 요 태종, 야율이호
생애 및 업적
다른 이름지황후(地皇后), 응천황후(應天皇后), 춘흠황후(淳欽皇后)
아버지술률 파고(述律婆姑)
어머니야율균덕실(耶律勻徳実)의 딸

2. 생애

술률평은 회흘 출신으로, 야율윤덕실의 딸이다. 907년 야율아보기가 즉위하여 천황제가 되자 지황후(地皇后)에 책봉되었다.[1] 916년 아보기가 대성대명천황제로 존칭되자 응천대명지황후(應天大明地皇后)의 존호를 받았다.

아보기가 당항 원정 시 실위가 거란 본부를 습격해오자, 술률평은 병사를 이끌고 격파하여 명성을 떨쳤다.[1] 진왕 이존욱은 술률평을 숙모라 칭하며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3] 유주유수광이 구원을 요청했을 때, 사신 한연휘가 배례하지 않자 아보기는 노했지만, 술률평은 한연휘의 절개를 칭찬하며 예우할 것을 권했다.[3] 의 서지고가 맹화유(猛火油)를 바치자, 아보기는 유주 공격을 계획했으나, 술률평은 "기름을 시험하기 위해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간언하여 중단시켰다.[3] 아보기가 발해를 공격할 때에도 술률평은 계략을 헌납했다.

926년 아보기가 사망하자, 술률평은 칭제하고 거란의 군사와 국정을 장악했다. 장례식에서 순사하려 했으나, 친척과 백관들의 간언으로 오른팔을 잘라 관에 넣었다.[5] 태종이 즉위하자 황태후로 추대되었고, 938년 광덕지인소렬숭간응천황태후(廣德至仁昭烈崇簡應天皇太后)의 존호를 받았다.[5]

아보기가 "요골(태종)이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고, 술률평은 황태자야율돌욕을 꺼렸기에, 아보기는 돌욕을 동단왕으로 책립했다.[5] 아보기가 사망하고 태종이 즉위하자, 동단왕 돌욕은 후당으로 망명했다. 태후는 막내아들 야율이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947년 태종이 사망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태후는 이호에게 군사를 이끌고 맞서 싸우게 했다. 이호는 패하고, 태후는 직접 군사를 이끌었으나 야율옥질의 간언으로 철수했다.

953년 75세로 사망하여 조릉에 합장되었고, 시호는 정렬(貞烈)이었다. 1052년 순흠황후(淳欽皇后)로 개시되었다.[1]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술률평은 879년 회골 출신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1] 그녀의 아버지 술율파고(述律婆姑)는 월완(月碗)이라고도 불렸으며, 거란 야오롄(遙輦) 씨족 밑에서 일했다.[1] 그녀의 어머니는 야율아보기의 할아버지인 야율윤덕실(耶律勻德實)의 딸이었으며, 술률평과 야율아보기는 사촌 관계였다.[1]

술률평은 야율아보기와 결혼하여 야율배, 야율덕광, 야율이호 세 아들을 낳았다.[2]

2. 2. 황후 재위 시기 (916년 ~ 926년)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 부족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건국하면서, 술률평은 황후에 책봉되었다.[3] 술률평은 황후로서 남편의 군사적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조언했다.[3]

921년, 후량과 대립하던 후당의 전신인 진(晉)나라와의 전쟁에 대해 술률평은 반대했으나, 야율아보기는 출병을 강행했고, 결국 거란군은 진군에게 패배하여 철수해야 했다.[4] 발해 정벌 등 주요 군사 작전에서 술률평의 계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1]

이존욱(후당 장종)은 야율아보기와 술률평에게 각각 숙부, 숙모라 칭하며 신하의 예를 갖추기도 했다.[3] 한연휘 등 유능한 인재 등용에 있어 야율아보기에 조언하여, 요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2. 3. 섭정과 권력 장악 (926년 ~ 947년)

926년 야율아보기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술률평은 섭정을 맡아 조정을 장악했다.[5] 술률평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을 잔혹하게 숙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장수들과 그 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5] 조사온(趙思溫)은 술률평에게 "황후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황후께서 가신다면, 신도 그 다음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기지를 발휘하여 목숨을 구했다.[5] 술률평은 자신의 한쪽 팔을 잘라 야율아보기의 무덤에 함께 묻게 했다.[5]

926년 9월, 술률평은 장남 야율돌욕(耶律突欲) 대신 차남 야율요골(耶律堯骨, 요 태종)을 후계자로 세웠다. 추장들은 술률평의 마음이 야율요골에게 있는 것을 눈치채고 야율요골의 말고삐를 잡았고, 야율요골은 요나라의 2대 황제가 되었다.[5] 술률평은 신하들에게 광덕지인소열숭간응천황태후(廣德至仁昭烈崇簡應天皇太后)라는 존호를 받았다.[5]

후진과의 외교 관계에서 술률평은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후진의 2대 출제(出帝) 석중귀(石重貴)는 요나라의 신하로 칭하는 것을 거부했고, 945년 야율요골이 직접 공격에 나섰으나 후진군에 패했다.[10] 술률평은 화친을 맺자고 했지만 야율요골은 따르지 않았다.[10] 946년 후진이 공격해오자 야율요골은 이를 격파하고 개봉을 점령했지만, 점차 중국인들의 반격이 거세지자 개봉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던 중 병으로 죽었다.[11] 술률평은 아들의 시신을 보고도 화친을 하지 않고 정벌에 몰두한 것을 책망하였다.[12]

2. 4. 요 세종과의 대립과 죽음 (947년 ~ 953년)

耶律李胡중국어를 황제로 세우려 했던 술률평은 거란 귀족들이 야율돌욕의 아들 야율올욕을 지지하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맞섰으나 패배했다.[1] 耶律兀欲중국어이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요나라 세종으로 등극한 것은 술률평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5] 분노한 술률평은 군사를 동원하여 석교(石橋)에서 싸웠으나 야율올욕에게 대패하였고, 결국 손자에 의해 야율아보기의 능묘에 갇히게 되었다.[1]

947년 야율요골이 사망한 후, 술률평은 막내아들 야율이호를 황제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거란 귀족들은 야율돌욕의 아들 야율올욕(요 세종)을 지지했고, 내전이 벌어졌다. 대동 원년(947년) 4월, 태종이 사망하고, 세종이 진양에서 즉위하자, 태후는 노하여 이호에게 군사를 이끌고 맞서 싸우게 했다. 6월, 이호는 세종의 군대에 패했다. 7월, 태후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황하의 나루터에서 세종의 군대와 대치했지만, 야율옥질의 간언을 받아들여 철수했다. 이후 조주로 신변을 옮겼다.

953년 유폐된 상태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응력 3년 6월 정묘(953년8월 1일)에 사망했다. 조릉에 합장되었으며, 시호는 정렬(貞烈)이었다. 중희 21년(1052년), 순흠황후(淳欽皇后)로 개시되었다. 세종과 요 목종 모두 이호를 지지한 그녀를 원망했기에, 그녀의 연금을 풀지도 않았고, 태황태후로 존경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태조와 함께 묻혔다.[1]

3. 평가

순흠황후는 요나라 초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단순한 황후의 지위를 넘어 실질적인 통치자에 가까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보기 사후 섭정을 맡아 국정을 운영했으며, 태종 즉위 후에도 황태후로서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1]

그러나 순흠황후는 권력 유지를 위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등 강압적이고 잔혹한 통치 방식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편 사후 순사(殉死)를 강요받았을 때 자신의 오른팔을 잘라 대신한 일화는 그녀의 극단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러한 순흠황후의 잔혹성은 비판받기도 하지만, 당시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과 유목 사회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3. 1. 현대적 재평가

순흠황후는 전통적인 거란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던 희생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결단력과 정치적 감각을 발휘하여 거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과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여, 거란 상류층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10세기 거란 여성들은 한족 여성들보다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순흠황후는 남편과 아들의 궁정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1]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최근에는 순흠황후에 대한 현대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녀는 유목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유목 제국의 건국 과정에서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야율윤덕실(耶律勻德實)
어머니파고매리(婆姑梅里)
남편아보기(阿保機)요나라 태조
아들야율돌욕(耶律突欲)동단국 왕, 후당으로 망명
아들야율덕광(耶律德光)요 태종
아들야율이호(耶律李胡)


참조

[1] 서적 History of Liao https://zh.wikisourc[...]
[2] 서적 History of Liao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서적 History of Liao
[7]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8]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9]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0]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4] 서적 History of Liao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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