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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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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당은 923년 이존욱이 건국한 오대 십국 시대의 국가이다. 당나라 말기 혼란기에 사타족 출신 이극용이 산서 지방에 세운 군벌을 전신으로 하며, 이존욱은 국호를 '당'으로 정하여 당나라의 계승을 자처했다. 이존욱은 후량을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를 점령했으나, 사치와 군대의 신뢰 상실로 인해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이후 이사원이 후당의 2대 황제가 되어 정치를 안정시켰으나, 만년에 왕위 다툼이 일어났다. 결국 후당 말제 이종가는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석경당이 후진을 건국하면서 937년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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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당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명후당
통칭
시대오대십국시대
위치오대십국시대
후당
후당
건국923년 5월, 다밍에서 건국
멸망937년 1월 11일, 거란과 석경당에 의해 멸망
이전 국가1
후량

전촉
다음 국가후진2
형남
후촉
현재 국가중국
수도다밍 (923년)
뤄양 (923년–936년)
공용어중국어
통화중국 주화, 엽전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역사
주요 사건다밍에서 건국 (923년 5월)
거란과 석경당에 의해 멸망 (937년 1월 11일)
역대 황제
제1대이존욱 (장종) (923–926)
제2대이사원 (명종) (926–933)
제3대이종후 (933–934)
제4대이종가 (934–936)
기타
비고"후당"은 당나라(618–907)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됨.
1. 후당의 전신은 이극용당나라 시기인 895년에 건국한 진(晋)나라였으며, 907–923년에는 독립적인 국가로 존재했다.
2. 요나라의 지원을 받았다.

2. 역사

말 혼란기에 돌궐 사타 부족 출신의 이극용이 하동절도사로서 진양(태원)에 주둔하여 산서 지방에 세운 군벌(진(晉)국, 후세에는 전진이라고도 불림)이 그 전신이다.[7]

이극용은 895년 의 조정으로부터 '''진왕'''의 지위를 받았지만, 주전충과의 세력 다툼에서 패했다.[8] 주전충을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자, 이극용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후량과 싸웠다.[8]

이극용 사후, 아들 이존욱이 진왕을 계승하자 후량의 내분도 겹쳐 진이 우세해졌다.[9] 힘을 얻은 이존욱923년 황제를 칭하고 "'''후당'''"을 건국했다.[3] 이때, 이존욱이 국호에 '''당'''을 사용한 것은, 조부 이국창(주야적심)이 과거 당의 조정(의종)으로부터 반란 진압의 공로로 국성 '''이'''를 하사받았기 때문이다.[8]

돌궐사타 부족 출신의 이극용은 하동절도사로서 진양(태원)에 주둔하여 산서 지방에 군벌('''진'''국, 후세에는 전진이라고도 불림)을 세웠다.[7] 895년 의 조정으로부터 '''진왕'''의 지위를 받았지만, 주전충과의 세력 다툼에서 패했다.[8] 주전충을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자, 이극용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후량과 싸웠다.[8]

이극용의 사후, 아들 이존욱이 진왕을 계승할 때쯤, 후량에서 내분이 일어나 서서히 진나라가 우세하게 되었다.[9] 힘을 얻은 이존욱923년 위주(魏州)에서 황제를 칭하면서 후당을 건국했다(장종).[3] 같은 해 후량을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화북 지방)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낙양에 수도를 정했다.[3]

이존욱이 국호에 '''당'''을 사용한 것은, 조부 이국창(주야적심)이 과거 당의 조정(의종)으로부터 반란 진압의 공로로 국성 '''이'''를 하사받았기 때문이다.[8] 이리하여, '''후당'''은 의 계승을 자처했다. 후량에 형식적으로 신종하여[10] 왕으로 봉해졌던 남방의 여러 국가(십국)는, 후량의 멸망으로 후당에 사자를 파견했다.[11] 이때 사자를 파견하지 않았던 사천 지방의 전촉[11] 925년이존욱(장종)에 의해 공격받아 멸망했다.[12]

사천 정복 후, '''후당'''의 초대 황제 이존욱(장종)은 차츰 교만해져 사치에 빠졌으며,[11] 주전충이 폐지한 의 유습, 군대에 환관의 감찰을 붙이는 제도를 부활시키는 등 장수들의 신뢰를 잃었다. 926년, 지방의 반란이 일어나, 황제 이존욱(장종)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3][11]

그 후, 이극용의 양자인 이사원(명종)은, 각지의 반란을 수습하고 스스로 '''후당'''의 2대 황제가 되었다. 이사원(명종)은 재상 풍도를 등용하여,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명종의 치세는 비교적 평온하게 흘러갔지만, 그 만년에 다시 황위를 둘러싼 혼란이 일어났다. 재상 풍도의 제안에 따라 경서의 목판 인쇄가 932년부터 시작되었다.[13] 이 사업은 당초 기존 왕조와 마찬가지로 석각으로 계획되었지만, 경비가 많이 들어 목판 인쇄로 바뀌었으며, 후주의 대 953년(광순 3년)에 완성되었다.[13]

명종은 즉위 후 재상 풍도를 등용하여 정치를 바로잡고 열심히 다스렸기에 상당한 치적을 쌓았고, 조정 안팎은 매우 안정되었다.[11] 다만 군인에게 많은 권한이 주어지게 된 것이 불안 요소였다. 치세는 비교적 평온하게 보냈으나, 만년에 이르러 제위를 둘러싼 혼란이 일어났다.[11] 933년, 명종이 병으로 쓰러지자, 진왕(秦王) 이종영이 찬탈을 노리고 명종을 살해하려 병사를 이끌고 궁전에 들어왔으나, 결과적으로 찬탈은 실패하고 이종영은 살해되었다.[11] 명종은 아들이 자신을 살해하려는 사실을 알고 놀라 사망하였고, 대신들은 상의 끝에 송왕(宋王) 이종후(민제)가 뒤를 잇게 하였다.

민제가 즉위하고 나서 채용한 삭번(削藩) 정책은 군인들의 불만을 폭발시켜, 명종의 양자 노왕(潞王) 이종가가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거느리고 수도에 쳐들어와 제위를 빼앗았다. 민제는 부인을 데리고 하북으로 도망쳤으나, 이종가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이종가가 제위에 오르니, 그가 말제이다.

말제가 즉위하였지만, 이번엔 그와 함께 명종의 오랜 심복이면서 명종의 사위였던 석경당과 불화가 일어나 석경당이 진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말제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태원을 공격하자, 석경당은 북쪽의 거란(요나라)에게 항복하여 원군을 요청하였고, 요 태종 야율덕광(야율요골)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당군을 격파했다.

석경당거란의 힘을 빌려 스스로 제위에 올라 936년 후진을 건국하였다. 937년 1월, 거란과 합세한 석경당의 대군이 낙양을 공격하자, 말제는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고, 후당은 멸망하였다.

2. 1. 건국 이전

말 혼란기에 돌궐 사타 부족 출신의 이극용이 하동절도사로서 진양(태원)에 주둔하여 산서 지방에 세운 군벌(진(晉)국, 후세에는 전진이라고도 불림)이 그 전신이다.[7]

이극용은 895년 의 조정으로부터 '''진왕'''의 지위를 받았지만, 주전충과의 세력 다툼에서 패했다.[8] 주전충을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자, 이극용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후량과 싸웠다.[8]

이극용 사후, 아들 이존욱이 진왕을 계승하자 후량의 내분도 겹쳐 진이 우세해졌다.[9] 힘을 얻은 이존욱923년 황제를 칭하고 "'''후당'''"을 건국했다.[3] 이때, 이존욱이 국호에 '''당'''을 사용한 것은, 조부 이국창(주야적심)이 과거 당의 조정(의종)으로부터 반란 진압의 공로로 국성 '''이'''를 하사받았기 때문이다.[8]

2. 2. 건국과 발전

돌궐사타 부족 출신의 이극용은 하동절도사로서 진양(태원)에 주둔하여 산서 지방에 군벌('''진'''국, 후세에는 전진이라고도 불림)을 세웠다.[7] 895년 의 조정으로부터 '''진왕'''의 지위를 받았지만, 주전충과의 세력 다툼에서 패했다.[8] 주전충을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자, 이극용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후량과 싸웠다.[8]

이극용의 사후, 아들 이존욱이 진왕을 계승할 때쯤, 후량에서 내분이 일어나 서서히 진나라가 우세하게 되었다.[9] 힘을 얻은 이존욱923년 위주(魏州)에서 황제를 칭하면서 후당을 건국했다(장종).[3] 같은 해 후량을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화북 지방)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낙양에 수도를 정했다.[3]

이존욱이 국호에 '''당'''을 사용한 것은, 조부 이국창(주야적심)이 과거 당의 조정(의종)으로부터 반란 진압의 공로로 국성 '''이'''를 하사받았기 때문이다.[8] 이리하여, '''후당'''은 의 계승을 자처했다. 후량에 형식적으로 신종하여[10] 왕으로 봉해졌던 남방의 여러 국가(십국)는, 후량의 멸망으로 후당에 사자를 파견했다.[11] 이때 사자를 파견하지 않았던 사천 지방의 전촉[11] 925년이존욱(장종)에 의해 공격받아 멸망했다.[12]

사천 정복 후, '''후당'''의 초대 황제 이존욱(장종)은 차츰 교만해져 사치에 빠졌으며,[11] 주전충이 폐지한 의 유습, 군대에 환관의 감찰을 붙이는 제도를 부활시키는 등 장수들의 신뢰를 잃었다. 926년, 지방의 반란이 일어나, 황제 이존욱(장종)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3][11]

그 후, 이극용의 양자인 이사원(명종)은, 각지의 반란을 수습하고 스스로 '''후당'''의 2대 황제가 되었다. 이사원(명종)은 재상 풍도를 등용하여,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명종의 치세는 비교적 평온하게 흘러갔지만, 그 만년에 다시 황위를 둘러싼 혼란이 일어났다. 재상 풍도의 제안에 따라 경서의 목판 인쇄가 932년부터 시작되었다.[13] 이 사업은 당초 기존 왕조와 마찬가지로 석각으로 계획되었지만, 경비가 많이 들어 목판 인쇄로 바뀌었으며, 후주의 대 953년(광순 3년)에 완성되었다.[13]

2. 3. 쇠퇴와 멸망

명종은 즉위 후 재상 풍도를 등용하여 정치를 바로잡고 열심히 다스렸기에 상당한 치적을 쌓았고, 조정 안팎은 매우 안정되었다.[11] 다만 군인에게 많은 권한이 주어지게 된 것이 불안 요소였다. 치세는 비교적 평온하게 보냈으나, 만년에 이르러 제위를 둘러싼 혼란이 일어났다.[11] 933년, 명종이 병으로 쓰러지자, 진왕(秦王) 이종영이 찬탈을 노리고 명종을 살해하려 병사를 이끌고 궁전에 들어왔으나, 결과적으로 찬탈은 실패하고 이종영은 살해되었다.[11] 명종은 아들이 자신을 살해하려는 사실을 알고 놀라 사망하였고, 대신들은 상의 끝에 송왕(宋王) 이종후(민제)가 뒤를 잇게 하였다.

민제가 즉위하고 나서 채용한 삭번(削藩) 정책은 군인들의 불만을 폭발시켜, 명종의 양자 노왕(潞王) 이종가가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거느리고 수도에 쳐들어와 제위를 빼앗았다. 민제는 부인을 데리고 하북으로 도망쳤으나, 이종가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이종가가 제위에 오르니, 그가 말제이다.

말제가 즉위하였지만, 이번엔 그와 함께 명종의 오랜 심복이면서 명종의 사위였던 석경당과 불화가 일어나 석경당이 진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말제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태원을 공격하자, 석경당은 북쪽의 거란(요나라)에게 항복하여 원군을 요청하였고, 요 태종 야율덕광(야율요골)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당군을 격파했다.

석경당거란의 힘을 빌려 스스로 제위에 올라 936년 후진을 건국하였다. 937년 1월, 거란과 합세한 석경당의 대군이 낙양을 공격하자, 말제는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고, 후당은 멸망하였다.

3. 정치

3. 1. 군사

3. 2. 문화

4. 역대 황제

너무 장황하여 군주를 지칭할 때 사용되지 않음이존욱(李存勗)성과 이름923년~926년동광(同光) 923년~926년명종(明宗)화무(和武)이사원(李嗣源) 또는 이단(李亶)성과 이름926년~933년천성(天成) 926년~930년
장흥(長興) 930년~933년없음민(閔)이종후(李從厚)성과 이름933년~934년응순(應順) 933년~934년없음말제(末帝)이종가(李從珂)성과 이름934년~937년청태(清泰) 934년~937년



대수묘호(시호)이름재위비고
1장종이존욱923년 - 926년이극용의 아들
2명종이사원926년 - 933년이극용의 양자
3민제이종후933년 - 934년이사원의 아들
4말제[2]이종가934년 - 936년이사원의 양자


5. 주요 인물

장승업, 주덕위, 풍도는 후당의 주요 인물이다.

6. 후당 황제 가계도

(태조)장종 이존욱1rowspan="11" |rowspan="11" |영왕 이존패옹왕 이존미위왕 이계급설왕 이존례수왕 이계동신왕 이존옥광왕 이계숭육왕 이존예진왕 이계점통왕 이존확천왕 이계요이예(덕종)명종 이사원2이종심진왕 이종영이종찬허왕 이종익민제 이종후3
(송왕)영녕공주
(이황후)선헌황후고조 석경당
(후진)말제 이종가4
(폐제)이중길(왕모)옹왕 이중미

참조

[1] 서적 War in words transformations of war from antiquity to Clausewitz De Gruyter
[2] 문서 廟号も諡号もなし
[3] 서적 愛宕他 (1997)
[4] 서적 愛宕他 (1997)
[5] 서적 愛宕他 (1997)
[6] 서적 愛宕他 (1997)
[7] 서적 愛宕他 (1997)
[8] 서적 愛宕他 (1997)
[9] 서적 愛宕他 (1997)
[10] 서적 愛宕他 (1997)
[11] 서적 周藤、中嶋 (2004)
[12] 서적 愛宕他 (1997)
[13] 서적 愛宕他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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