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칼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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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티브 칼턴은 1965년부터 1988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한 투수이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등 여러 팀에서 뛰었으며, 통산 329승을 기록하여 통산 승리 순위 11위에 올랐다. 4번의 사이 영 상, 1번의 골드글러브 상을 수상했으며, 10번의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1972년에는 투수 삼관왕을 달성하기도 했다. 필리스 시절 등번호 32번은 영구 결번되었고, 1994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선수 시절 언론과의 잦은 갈등, 은퇴 후 음모론 주장 등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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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 칼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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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 투수 |
| 투구/타석 | 좌투/좌타 |
| 출생일 | 1944년 12월 22일 |
| 출생지 | 미국 플로리다주마이애미 |
| 선수 경력 | |
| 데뷔 리그 | MLB |
| 데뷔 일자 | 1965년 4월 12일 |
| 데뷔 팀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최종 리그 | MLB |
| 최종 일자 | 1988년 4월 23일 |
| 최종 팀 | 미네소타 트윈스 |
| 선수 경력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65년–1971년) 필라델피아 필리스 (1972년–1986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86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198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87년) 미네소타 트윈스 (1987년–1988년) |
| 통계 (MLB) | |
| 승패 기록 | 329승 244패 |
| 평균자책점 | 3.22 |
| 탈삼진 | 4,136 |
| 수상 및 업적 | |
| 올스타 선정 | 10회 (1968년, 1969년, 1971년, 1972년, 1974년, 1977년, 1979년–1982년) |
| 월드 시리즈 우승 | 2회 (1967년, 1980년) |
| 사이 영 상 | 4회 (1972년, 1977년, 1980년, 1982년) |
| 트리플 크라운 | 1972년 |
| 골드 글러브 상 | 1981년 |
| 내셔널 리그 승리 1위 | 4회 (1972년, 1977년, 1980년, 1982년) |
| 내셔널 리그 평균자책점 1위 | 1972년 |
| 내셔널 리그 탈삼진 1위 | 5회 (1972년, 1974년, 1980년, 1982년, 1983년) |
| 영구 결번 | 필라델피아 필리스 No. 32 |
| 필라델피아 야구 명예의 전당 | 필라델피아 야구 명예의 전당 |
| 명예의 전당 | |
| 종류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
| 입성 년도 | 1994년 |
| 득표율 | 95.6% (첫 번째 투표) |
2. 선수 경력
스티브 칼턴은 1964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팀을 거치며 빠르게 성장했고, 1965년에는 곧바로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1966년에는 클래스 AAA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툴사 오일러즈에서 뛰었다.
1965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1988년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24시즌 동안 활약했다. 1966년 마이너 리그를 거쳐 메이저 리그로 승격, 뉴욕 메츠와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완투승과 완봉승을 거두었다.
1967년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1968년에는 첫 올스타전에 선출되었다. 시즌 후 미일 야구에 참가, 도쿄 오리온스 나리타 후미오의 슬라이더를 습득했다. 1969년 9월 15일 메츠전에서 MLB 기록인 19탈삼진을 기록했다.
1972년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한 후 투수 3관왕과 함께 첫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1980년 팀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세 번째 사이 영 상을, 1982년에는 네 번째 사이 영 상을 받았다. 1980년에 기록한 304이닝은 현재 MLB 마지막 300이닝 기록이다.[28] 1983년 9월 23일, 통산 300승을 달성했다.
1986년 8월 5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으로 신시내티 레즈 에릭 데이비스를 상대로 통산 4,000번째 탈삼진을 기록했다.[32]
1987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필 니크로와 함께 뛰어, 같은 경기에 출전한 최초의 300승 투수 팀 동료가 되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영구 결번으로 1989년 지정.
2. 1. 유년 시절과 아마추어 경력
스티브 칼턴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어린 시절 리틀 리그와 아메리칸 레지언 야구에서 활동했다. 스티브는 조와 앤 칼턴의 외아들이었으며, 마이애미 144번가에서 여동생 조앤과 크리스티나와 함께 자랐다. 조 칼턴은 항공 정비사였다.[3][4]십 대 시절, 칼턴은 동양 철학과 명상을 통해 위대함을 추구한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가르침을 읽고 따르기 시작했다.[3]
그는 노스 마이애미 고등학교에 다니며 처음에는 야구와 농구를 했다. 칼턴은 고등학교 이후의 계획이 없었고 학업에 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칼턴은 투구에 집중하기 위해 농구를 그만두었다. 그는 커트 베바콰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그의 팀 동료 리치 멜리치는 찰리 호프를 플레이오프에서 1-0으로 꺾었다. 당시 코치는 잭 클라크였으며, 멜리치는 나중에 살해당했다.[3][5]
고등학교 졸업 후, 칼턴은 마이애미 데이드 칼리지 노스에서 야구를 했으며, 데미 메이니에리 코치 밑에서 강력한 팀의 구원 투수로 활약했다.[6]
1963년 마이애미-데이드 학생이던 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을 맺고 5000USD의 계약금을 받았다.[7][8][9]
2. 2. 마이너 리그 경력 (1964-1966)
칼턴은 1964년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산하 마이너 리그의 여러 팀에서 뛰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플로리다 이스트 코스트 교육 리그의 카디널스 팀에서 2승 3패, 평균자책점 2.89를 기록했고, 클래스 A 노던 리그의 위니펙 골드아이즈에서 4승 4패, 평균자책점 3.36을 기록했다. 클래스 A 웨스턴 캐롤라이나스 리그의 록힐 카디널스에서는 10승 1패, 평균자책점 1.03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클래스 AA 텍사스 리그의 툴사 오일러즈로 승격되었다. 툴사 오일러즈에서는 4경기에서 1승 1패, 평균자책점 2.63을 기록했다. 그해 칼턴은 총 15승 6패, 평균자책점 2.22, 191탈삼진을 기록하며 뛰어난 잠재력을 보였다.[10]1965년에는 플로리다 이스트 코스트 교육 리그의 카디널스 팀에서 1경기에 등판하여 5이닝 동안 1실점을 기록한 후 곧바로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다.[10]
1966년에는 클래스 AAA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툴사 오일러즈에서 19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9승 5패, 평균자책점 3.59를 기록했다.[10]
2. 3. 메이저 리그 경력 (1965-1988)
칼턴은 1965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1988년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24시즌 동안 활약했다.1966년 마이너 리그를 거쳐 메이저 리그로 승격, 뉴욕 메츠와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완투승과 완봉승을 거두며 3승을 기록했다.
1967년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1968년에는 첫 올스타전에 선출되었다. 시즌 후 미일 야구에 참가, 도쿄 오리온스 나리타 후미오의 슬라이더를 습득했다. 1969년 9월 15일 메츠전에서 MLB 기록인 19탈삼진을 기록했다.
1972년 필라델피아 필리스 이적 후 투수 3관왕과 함께 첫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1980년 팀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세 번째 사이 영 상을, 1982년에는 네 번째 사이 영 상을 받았다. 1980년 기록한 304이닝은 현재 MLB 마지막 300이닝 기록이다.[28] 1983년 9월 23일, 통산 300승을 달성했다.
1986년 8월 5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으로 신시내티 레즈 에릭 데이비스를 상대로 통산 4,000번째 탈삼진을 기록했다.[32]
1987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필 니크로와 함께 뛰어, 같은 경기에 출전한 최초의 300승 투수 팀 동료가 되었다.
1994년, 높은 득표율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 3. 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65-1971)
칼턴은 1965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11] 1966년까지는 주로 불펜 투수로 뛰었지만, 1967년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14승 9패, 평균자책점 2.98을 기록하며 팀의 내셔널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11] 1967년 월드 시리즈 5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6이닝 1실점(비자책 0)으로 호투했지만, 팀은 패배했다. 하지만 카디널스는 보스턴 레드삭스를 꺾고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12]1968년에는 13승 11패, 평균자책점 2.99를 기록하고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다.[11] 팀은 다시 한번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1968년 월드 시리즈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패했다.[3] 칼턴은 이 시리즈에서 2경기에 구원 등판하여 4이닝 3실점을 기록했다. 시즌 후 일본을 방문하여 도쿄 오리온스의 투수 나리타 후미오에게서 슬라이더를 배워 자신의 구종으로 추가했다.
1969년에는 17승 11패, 평균자책점 2.17, 210탈삼진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11] 특히 9월 15일 뉴욕 메츠와의 경기에서는 당시 메이저 리그 기록인 한 경기 19탈삼진을 기록했지만, 팀은 패배했다.
1970년에는 연봉 협상 문제로 스프링 트레이닝에 불참했고, 10승 19패, 평균자책점 3.73으로 부진했다. 칼턴은 5만 달러를 요구했지만 구단은 3만 1천 달러를 제시하며 이견을 보였다.
1971년에는 20승 9패, 평균자책점 3.56으로 반등에 성공했지만, 다시 연봉 협상에서 구단과 갈등을 겪었다.[14] 칼턴은 6만 5천 달러를 요구했지만, 구단은 5만 5천 달러를 제시했다. 결국 칼턴은 1972년 시즌 전 릭 와이즈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했다.[15] 이 트레이드는 현재 야구 역사상 가장 불균형적인 트레이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6]
칼턴은 카디널스에서 7시즌 동안 통산 77승 62패, 평균자책점 3.10을 기록했다. 1968년, 1969년, 1971년에는 내셔널 리그 올스타에 선정되었다.[11]
2. 3. 2. 필라델피아 필리스 (1972-1986)
1972년 2월 25일 릭 와이즈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했다. 필리스 이적 첫 해, 칼턴은 59승 97패로 최하위에 머문 팀에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27승(10패), 평균자책점 1.97, 310탈삼진, 30완투, 346.1이닝을 기록하며 다승, 최우수 평균자책점, 탈삼진에서 모두 리그 1위를 차지, 투수 3관왕을 달성했다.[54] 특히 팀 승리의 46%를 혼자 기록했는데, 이는 20세기 이후 MLB 최고 기록이다.[54]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칼턴은 첫 번째 사이 영 상을 수상했고, MVP 투표에서도 5위에 올랐으며, "최고의 스포츠 선수"에게 주어지는 히코크 벨트도 받았다. 그는 동양 무술을 훈련에 도입하는 등 독특한 신체 관리법으로도 유명했다.[19]1973년에는 리그 최다 이닝(293.1)과 완투(18)를 기록했지만, 20패, 293피안타, 127실점으로 부진했다. 그는 "이상한" 훈련법에 대한 언론의 질문에 불쾌감을 느껴 이후 언론 취재를 거부하게 된다. 1974년에는 16승 13패, 평균자책점 3.22, 240탈삼진으로 탈삼진왕을 차지했다.[54] 1976년에는 20승을 거두며 팀의 지구 우승에 기여했지만, 신시내티 레즈와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에서 패전 투수가 되었고, 팀도 3연패로 탈락했다.
1977년에는 23승 10패, 평균자책점 2.64로 다승왕을 차지하며 팀의 2년 연속 지구 우승을 이끌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부진하여 팀은 1승 3패로 탈락했지만, 오프 시즌에 두 번째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1978년에는 16승을 기록하며 팀의 3년 연속 지구 우승에 공헌했다. 다저스와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3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었지만, 팀은 1승 3패로 탈락했다.
1980년 칼턴은 24승 9패, 평균자책점 2.34, 286탈삼진으로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하며 팀을 2년 만의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3차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며 팀의 30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는 2차전과 6차전에서 승리하며 필리스의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세 번째 사이 영 상을 수상했고, MVP 투표에서 5위에 올랐다. 1980년에 기록한 304이닝은 현재 MLB 마지막 300이닝 기록이다.[28]
1981년에는 파업으로 단축된 시즌에서 13승을 거두며 팀의 전기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2패로 부진했지만, 첫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1982년에는 23승 11패, 평균자책점 3.10, 286탈삼진, 19완투, 6완봉으로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하며 사상 처음으로 4번째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1983년 9월 23일, 칼턴은 통산 300승을 달성했다. 15승 16패로 패가 더 많았지만, 리그 최다 이닝(283.2)과 275탈삼진으로 2년 연속 탈삼진왕을 차지했다. 팀은 3년 만에 지구 우승을 달성했고, 다저스와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2승, 평균자책점 0.66으로 활약하며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는 패전 투수가 되었고, 팀은 1승 4패로 패했다.
1984년에는 13승 7패, 평균자책점 3.58을 기록했다. 1985년에는 부상으로 1승 8패, 평균자책점 3.33에 그쳤다. 1986년 개막 후 부진이 이어지자, 통산 4000탈삼진을 18개 남겨둔 6월 24일에 필리스에서 방출되었다.
- 필라델피아 필리스 통산 기록
| 기록 | 내용 |
|---|---|
| 승리 | 241승 (역대 1위) |
| 등판 | 499경기 (역대 2위) |
| 투구 이닝 | 3697.1이닝 (역대 2위) |
| 탈삼진 | 3031개 (역대 1위) |
| 선발 | 499경기 (역대 1위) |
| 완투 | 185경기 (역대 3위) |
| 완봉 | 39경기 (역대 2위) |
2. 3. 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86)
필리스에서 방출된 지 1주 후, 칼턴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을 맺었다. 1986년 8월 5일 자이언츠의 일원으로서 칼턴은 신시내티 레즈의 에릭 데이비스를 상대로 개인 통산 4,000번째 탈삼진을 기록하였다.[32] 그러나, 그는 이틀 후에 은퇴를 발표했다가 철회하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했다.2. 3. 4. 시카고 화이트삭스 (1986)
칼턴은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을 맺어 자신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아메리칸 리그에서 투수를 맡았다. 화이트삭스에서 칼턴은 4승 3패,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했다.[34]2. 3. 5.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87)
1987년, 칼턴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그는 동시대의 선수인 필 니크로와 한 팀이 되었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그들은 같은 경기에 출전한 최초의 300승 투수 팀 동료가 되었는데, 이 경기는 양키스의 10-6 승리로 끝났다. 칼턴은 인터리그 플레이가 시작되기 전 그의 경력의 대부분을 내셔널 리그에서 보냈기 때문에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유일한 투구였다. (그는 1977년 내셔널 리그 올스타 팀에 선발되었고, 경기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렸지만, 그는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4]| 연도 | 구단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타 | 수비율 |
|---|---|---|---|---|---|---|---|
| 1987 | CLE | 23 | 2 | 15 | 1 | 1 | .944 |
2. 3. 6. 미네소타 트윈스 (1987-1988)
칼턴은 1987년 7월 말에 미네소타 트윈스로 트레이드되었다.[37] 그는 인디언스와 트윈스에서 6승 14패, 평균자책점 5.74를 기록했다. 트윈스는 1987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지만, 칼턴은 포스트 시즌 로스터에 포함되지 않았다.[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턴은 트윈스 동료들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하여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다. 칼턴이 백악관에서 팀 동료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을 때, 신문은 칼턴을 제외한 팀의 모든 구성원을 명시했다. 대신, 칼턴은 "신원 미상의 비밀 경호국 요원"으로 표기되었다.[37]
그는 1988년에 트윈스 로스터에 포함되어 4경기에 출전하여 0승 1패, 평균자책점 16.76을 기록했다. 1988년 4월 23일, 그는 5이닝 동안 8실점을 기록한 후 트윈스에서 방출되었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의미 있는 출전이 되었다.[38] 1988년 시즌이 끝날 때까지 칼턴에게 계약을 제안하는 팀은 없었다.[38]
3. 은퇴 이후
1989년 7월 29일 필리스는 "스티브 칼턴의 밤" 행사에서 칼턴의 등번호 32번을 영구 결번시켰다. 칼턴은 329승과 통산 4136개의 탈삼진을 기록했으며, 1900년 이후[58] 데뷔한 투수 중 326선발승으로 통산 선발승 7위에 올라있다. 1994년에는 95.8%의 득표율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58]
1998년 칼턴은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100명의 위대한 야구 선수 중 30위에 올랐다. 그는 역사상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투수 중 한 명이며, 왼손 투수로서 메이저 리그 기록 몇 가지를 보유하고 있다.
칼턴은 1989년 시즌 후 계약을 맺지 못했다. 뉴욕 양키스가 훈련 시설 사용을 제안했지만, 스프링 트레이닝 참가는 보장하지 않았다. 결국 칼턴은 44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택했다.[39]
놀란 라이언은 1993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칼턴의 탈삼진 기록을 প্রায় 1,600개 차이로 넘어섰다. 이후 칼턴은 로저 클레멘스와 랜디 존슨에게 추월당해 통산 탈삼진 순위에서 4위로 밀려났다.[40]
4. 논란
스티브 칼턴은 선수 시절 언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으며, 은퇴 후에는 여러 음모론을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49]
4. 1. 언론과의 관계
칼턴은 선수 시절 언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1973년 13승 20패, 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자 언론은 그의 독특한 훈련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고, 이는 언론과 칼턴 사이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25] 1976년,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언론과의 모든 관계를 끊기로 결정하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언론의 질문에 답하는 것을 거부했다.[25]1981년, 멕시코 신인 페르난도 발렌수엘라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스타덤에 오르자, 한 기자는 "내셔널 리그 최고의 투수 두 명은 영어를 못 한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와 스티브 칼턴"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26]
필리스의 오랜 팀 동료 래리 보와는 칼턴의 언론 침묵에 대해 "필라델피아 팬들이 라커룸에서 우리가 보았던 스티브 칼턴과 같은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후회된다. 그는 기자들이 오면 가면을 썼다. 그는 그들과 전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라고 말했다.[14]
칼턴은 오랜 언론 침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74년부터 선수 생활이 끝날 때까지 언론과 대화하지 않은 것은 당시 나에게 완벽했다. 마음을 정하는 데 2년이 걸렸다. 나는 비난받는 것에 지쳤다. 나에게 그것은 모욕이었다. 하지만 그것(그의 침묵)은 내가 더 집중하게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나의 인용구 없이 더 나은 글을 썼다. 어쨌든 모든 것이 인용구이고, 나에게는 모두 똑같이 들린다. 그 후 그들은 더 좋고 더 흥미로운 내용을 썼다. 나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꽤 많이 비난받았다. 신문을 들고 자신에 대한 비난 기사를 읽는 것은 하루를 제대로 시작하게 해주지 않습니다."[25]
4. 2. 음모론 및 반유대주의 논란
은퇴 후 칼턴은 여러 음모론을 주장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49]1994년, 팻 조던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칼턴은 세상을 "스위스에서 만나는 12명의 유대인 은행가" 등이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에이즈 바이러스가 게이와 흑인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등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49]
전 동료 팀 맥카버는 칼턴을 변호하면서도, 그가 급진적인 자료를 읽고 혼란스러워한다고 인정했다.[50]
5. 수상 및 영예
스티브 칼턴은 여러 차례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야구 역사에 남을 업적을 이룩했다.
- 사이 영 상 4회 수상 (1972, 1977, 1980, 1982)[58]
- 투수 3관왕 1회 (1972)
- 골드 글러브 상 1회 (1981)
- 메이저 리그 올스타 10회 선정
- 필라델피아 필리스 영구 결번 (32번)[58]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94)[58]
1972년에는 만장일치로 사이 영 상을 받았고, 내셔널 리그 MVP 투표에서 5위를 차지했다.[58] 1980년에는 내셔널 리그에서 승리(24승), 탈삼진(286개), 이닝 (304이닝)에서 1위를 차지하며 필리스가 구단 첫 1980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27][11][28]
1983년 9월 23일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통산 300승을 달성했다.[31] 칼턴은 통산 4,136개의 삼진을 기록하여 왼손 투수 최다 기록을 세웠으며(이후 랜디 존슨에 의해 경신),[41] 통산 329승은 야구 역사상 11번째로 많은 승리이다.[41]
1994년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95.82%의 득표율로 헌액되었으며, 이는 역대 최고 득표율 중 하나이다.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1989년에 칼턴의 등번호 32번을 영구 결번했다.[45] 2004년에는 시티즌스 뱅크 파크 밖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45] 1998년, ''The Sporting News''는 칼턴을 100명의 위대한 야구 선수 목록에서 30위로 선정했다. 1999년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 후보로 지명되었다.[46]
칼턴은 통산 90번의 보크를 기록했는데, 이는 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이다.[11][44]
| 연도 | 수상 및 영예 |
|---|---|
| 1968 |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정 |
| 1969 |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정 |
| 1971 |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정 |
| 1972 |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정, 사이 영 상 수상, 투수 삼관왕, 다승 1위, 최우수 평균자책점 1위, 최다 탈삼진 1위 |
| 1974 |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정, 최다 탈삼진 1위 |
| 1977 |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정, 사이 영 상 수상, 다승 1위 |
| 1979 |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정 |
| 1980 |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정, 사이 영 상 수상, 다승 1위, 최다 탈삼진 1위 |
| 1981 |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정, 골드글러브상(투수 부문) 수상 |
| 1982 |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정, 사이 영 상 수상, 다승 1위, 최다 탈삼진 1위 |
| 1983 | 최다 탈삼진 1위 |
| 1989 | 필라델피아 필리스 영구 결번 (32번), 플로리다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52] |
| 1994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 2004 |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시티즌스 뱅크 파크 외부에 칼턴의 동상 건립[45] |
6. 개인 생활
칼턴은 33년 동안 베벌리와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 1998년에 이혼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3][14] 그의 오랜 팀 동료이자 개인 포수였던 팀 맥카버는 "스티브(칼턴)와 내가 죽으면, 우리는 같은 묘지에 60피트 6인치 간격을 두고 묻힐 것이다"라고 농담했다.[25] 맥카버는 2023년에 먼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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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톤의 은퇴 당시, 아직 현역으로 그 후 1993년까지 현역 생활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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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Randy Johnson의 4875탈삼진에 이어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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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26연패·NPB 18연패…프로야구 최다연패 35년 만에 깨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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