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시비드니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시비드니차는 폴란드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1070년에 처음 기록되었다. 1250년경 도시 지위를 얻었으며, 1291년부터 1392년까지 시비드니차-야보르 공국의 수도였다. 14세기 말에는 6,000명가량의 주민이 거주하는 실레시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이후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을 거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주요 명소로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인 평화 교회, 성 스타니슬라우스 및 성 웬체슬라우스 대성당, 구시가지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돌니실롱스크주의 도시 - 브로츠와프
    브로츠와프는 폴란드 남서부 실레시아 주에 위치한 오데르 강변의 도시로,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중세 시대 학술, 예술,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로 환원되어 현재는 폴란드의 중요한 경제 및 문화 중심지이다.
  • 돌니실롱스크주의 도시 - 그워구프
    그워구프는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서슬라브족 요새에서 기원하여 폴란드,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지배를 거쳐 제2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에 귀속, 재건되었으며 구리 제련소를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있다.
  • 폴란드의 도시 - 크라쿠프
    크라쿠프는 폴란드 남부 비스와 강 유역에 위치한 마워폴스카주의 주도로, 7세기부터 존재했으며 폴란드 왕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였고, 몽골 침략 후 재건되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폴란드의 아테네'로 불리며 번성했으며, 폴란드 분할과 나치 독일 점령의 비극을 겪었지만 역사적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현재는 폴란드의 주요 관광지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역사 유적과 문화 시설을 보유한 학술 및 경제 중심지이다.
  • 폴란드의 도시 - 브로츠와프
    브로츠와프는 폴란드 남서부 실레시아 주에 위치한 오데르 강변의 도시로,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중세 시대 학술, 예술,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로 환원되어 현재는 폴란드의 중요한 경제 및 문화 중심지이다.
시비드니차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시비드니차 시장 광장
시비드니차 시장 광장
국가폴란드
보이보드샤돌니실롱스크주
포비아트시비드니차
gminy시비드니차 (도시 gminy)
시장베아타 모스칼-스와니에프스카 (L.)
최초 언급1070년
도시 권리1267년
면적21.76 km²
고도250 m
시간대CET
여름 시간대CEST
우편 번호58-100 및 58-105
지역 번호+48 74
자동차 번호판DSW
인구 통계
2021년 12월 31일 기준55,413명
인구 밀도자동 계산
언어별 명칭
폴란드어Świdnica
체코어Svídnice (스비드니체)
독일어Schweidnitz (슈바이트니츠)
실레시아어Świdńica
웹사이트
공식 웹사이트시비드니차 공식 웹사이트

2. 역사

시비드니차는 1070년 피아스트가 통치하던 폴란드 왕국의 일부였을 때 ''시비드니차''(Svidnica)로 처음 기록되었다.[3] 1250년경 도시 지위를 얻었으며,[3] 1290년에는 성벽과 6개의 문을 갖춘 도시로 성장하여 수공예와 무역이 번성했다.[3] 13세기 말에는 제빵사, 직조공, 도공, 구두 제조공, 모피상, 재단사 길드가 있었고,[3] 맥주 생산으로 유명했다.[3] 브로츠와프, 오레시니차, 브제크 등의 도시와 크라쿠프, 토룬, 프라하, 피사 등의 유럽 도시에는 시비드니차 맥주를 제공하는 "시비드니차 셀러" 레스토랑이 있었다.[4] 브로츠와프의 ''피브니차 시비드니츠카''(Piwnica Świdnicka)는 오늘날까지 폴란드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 중 하나이다. 시비드니차에는 조폐국도 있었으며,[5]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각각 1287년과 1291년에 이 도시에 정착했다.[5]

성 스타니슬라우스 및 성 웬체슬라우스 대성당, 역사 기념물


1291년부터 1392년까지 피아스트가 통치하는 시비드니차-야보르 공국의 수도였다. 1368년 마지막 폴란드 피아스트 공작 볼코 2세 시비드니츠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내가 1392년까지 공국을 소유하다 보헤미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14세기 말 시비드니차는 실레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으며, 약 6,000명의 주민이 있었다.[3] 1429년 후스파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3] 1469년부터 1490년까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야기에우워가 통치하는 보헤미아의 일부가 되었다. 15세기에는 여러 제분소가 운영되었고,[3] 큰 소와 홉 시장이 열렸다.[3] 1493년 하르트만 셰델의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슈베드니츠''(Schwednitz)로 기록되었다.[6]

1526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6세기에는 재세례파의 지역 중심지 중 하나였다.[5] 30년 전쟁 (1618–48) 동안 포위, 화재, 전염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3] 제1 실레지아 전쟁 (1740–42) 동안 ''슈바이드니츠''(Schweidnitz)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었고, 1866년까지 유지된 요새로 변모했다.[3]

유제프 비비츠키를 기리는 현판, 1803년 그의 체류를 기념


제3 실레지아 전쟁 (7년 전쟁) 동안 1761년 10월 오스트리아에 점령되었지만, 프로이센은 1년 후에 다시 탈환했다. 1803년 유제프 비비츠키가 방문했으며,[7] 1807년 나폴레옹 전쟁 동안 프랑스군에 점령되었다. 1871년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독일에 속했다. 1905년 프로이센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인구는 30,540명이었으며 대부분 독일인이었지만 약 3%의 폴란드 소수 민족도 있었다.[8] 제1차 세계 대전의 에이스 로타르 폰 릭트호펜이 슈바이드니츠에 묻혔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에 속하게 되면서 묘지는 평탄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군은 연합군 장교 및 일반 포로를 위한 강제 노동 수용소를 운영했다.[9] 나치 독일 치하에서 나치 감옥이 있었고,[10]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군은 그로스-로젠 강제 수용소의 하위 수용소, Stalag VIII-A 수용소의 3개 전쟁 포로 노동 부대 및 강제 노동 수용소를 설립했다.[5] 수감자 중에는 레슬라프 바르텔스키가 있었다.[11] 1945년 1월, Stalag Luft 7에서 출발한 연합군 전쟁 포로들의 사망 행진이 이 도시를 통과했다.[12]

1945년 독일 패배 후, 포츠담 회담에서 합의된 국경 변경에 따라 다시 폴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전쟁 중 도망치거나 살해되지 않은 독일인들은 포츠담 협정에 따라 독일로 추방되었고, 폴란드인으로 재정착되었으며, 이들 중 많은 수는 소련에 합병된 폴란드 지역에서 추방되었다. 그리스인 난민들도 1950년대에 정착했다.[13] 1975년부터 1998년까지 바우브르지흐 주에 속했으며, 2004년 시비드니차 로마 가톨릭 교구의 소재지가 되었다.

2. 1. 중세

시비드니차는 1070년 피아스트 왕조가 통치하던 폴란드 왕국의 일부였을 때 ''시비드니차''(Svidnica)로 처음 기록되었다.[3] 1250년경 도시가 되었지만, 설립 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3] 당시 브로츠와프 공국에 속해 있었으며, 1290년까지 성벽과 6개의 문을 갖추고 수공예와 무역이 번성했다.[3] 13세기 말에는 제빵사, 직조공, 도공, 구두 제조공, 모피상, 재단사 길드가 있었고,[3] 맥주 생산으로 유명했다.[3] 15세기 말에는 거의 300채의 집이 맥주 양조 권리를 가졌으며,[3] 브로츠와프, 오레시니차, 브제크 등의 도시와 유럽의 여러 도시에는 시비드니차 맥주를 제공하는 "시비드니차 셀러" 레스토랑이 있었다.[4] 브로츠와프의 ''피브니차 시비드니츠카''(Piwnica Świdnicka)는 오늘날까지 폴란드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 중 하나이다. 시비드니차에는 조폐국도 있었고,[5]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각각 1287년과 1291년에 이 도시에 정착했다.[5]

1291년부터 1392년까지 시비드니차는 피아스트가 통치하는 시비드니차-야보르 공국의 수도였다. 마지막 폴란드 피아스트 공작은 볼코 2세 시비드니츠키였고, 1368년 그의 사망 이후 공국은 1392년까지 그의 아내가 소유했으며, 이후 보헤미아 왕국에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우스 4세에 의해 합병되었다. 14세기 말 시비드니차는 실레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으며, 약 6,000명의 주민이 있었다.[3]

1429년, 이 도시는 후스파의 공격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방어했다.[3] 1469년부터 1490년까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야기에우워가 통치하는 보헤미아의 일부였다. 15세기에는 여러 제분소가 운영되었고,[3] 큰 소와 홉 시장이 열렸다.[3] 1493년, 이 도시는 하르트만 셰델의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슈베드니츠''(Schwednitz)로 기록되었다.[6]

2. 2. 근세

시비드니차는 1070년 피아스트 왕조가 통치하던 폴란드 왕국의 일부로 처음 ''시비드니차''(Svidnica)로 기록되었다.[3] 1250년경 도시 지위를 얻었으며, 당시 브로츠와프 공국에 속했다.[3] 1290년까지 성벽과 6개의 문을 갖춘 도시로 성장했고, 수공예와 무역이 번성했다.[3] 13세기 말에는 제빵사, 직조공 등 다양한 길드가 존재했으며,[3] 맥주 생산으로 유명했다.[3] 15세기 말에는 거의 300채의 집이 맥주 양조 권리를 가졌고,[3] 브로츠와프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시비드니차 셀러"라는 시비드니차 맥주를 제공하는 레스토랑이 있었다.[4] 브로츠와프의 ''피브니차 시비드니츠카''(Piwnica Świdnicka)는 현재까지도 운영되는 오래된 레스토랑 중 하나다. 시비드니차에는 조폐국도 있었다.[5]

1291년부터 1392년까지 시비드니차는 시비드니차-야보르 공국의 수도였다.[3] 마지막 폴란드 피아스트 공작 볼코 2세 시비드니츠키 사후 공국은 그의 아내에게 넘어갔다가 1392년 보헤미아 왕국에 합병되었다.[3] 14세기 말 시비드니차는 실레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3] 1429년 후스파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3] 1469년부터 1490년까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야기에우워 왕조가 통치하는 보헤미아의 일부였다.[3] 1493년 하르트만 셰델의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슈베드니츠''(Schwednitz)로 기록되었다.[6] 15세기에는 여러 제분소가 운영되었고, 큰 소와 홉 시장이 열렸다.[3]

1526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6세기에는 재세례파의 지역 중심지 중 하나였다.[5] 30년 전쟁 동안 큰 피해를 입었다.[3] 제1 실레지아 전쟁 동안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어 요새로 변모했다.[3]

제3 실레지아 전쟁 또는 7년 전쟁 동안 오스트리아에 점령되었다가 프로이센이 다시 탈환했다.[3] 1803년 유제프 비비츠키가 방문했고,[7] 1807년 나폴레옹 전쟁 동안 프랑스군에 점령되었다. 1871년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독일에 속했다. 1905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 독일인이었지만, 약 3%의 폴란드인 소수 민족도 있었다.[8] 제1차 세계 대전의 에이스 로타르 폰 릭트호펜이 슈바이드니츠에 묻혔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묘지는 평탄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군은 연합군 장교 및 일반 포로를 위한 강제 노동 수용소를 운영했다.[9] 나치 독일 치하에서 나치 감옥이 있었고,[10]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군은 그로스-로젠 강제 수용소의 하위 수용소, Stalag VIII-A 수용소의 3개 전쟁 포로 노동 부대 및 강제 노동 수용소를 설립했다.[5] 레슬라프 바르텔스키 등이 수감되었고,[11] 1945년 1월 Stalag Luft 7에서 출발한 연합군 전쟁 포로들의 사망 행진이 이 도시를 통과했다.[12]

1945년 독일 패배 후, 포츠담 회담에서 합의된 국경 변경에 따라 다시 폴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전쟁 중 도망치거나 살해되지 않은 독일인들은 독일로 추방되었고, 폴란드인으로 재정착되었으며, 이들 중 다수는 소련에 합병된 폴란드 지역에서 추방된 사람들이었다. 그리스인 난민들도 1950년대에 시비드니차에 정착했다.[13] 1975년부터 1998년까지 바우브르지흐 주에 속했다. 2004년 시비드니차 로마 가톨릭 교구의 소재지가 되었다.

2. 3. 근대

시비드니차는 1070년 피아스트 왕조가 통치하던 폴란드 왕국의 일부였을 때 ''시비드니차''(Svidnica)로 처음 기록되었다.[3] 1250년경 도시 지위를 얻었으며,[3] 1290년까지 성벽과 6개의 문을 갖춘 도시로 성장하여 수공예와 무역이 번성했다.[3] 13세기 말에는 제빵사, 직조공, 도공, 구두 제조공, 모피상, 재단사 길드가 있었고,[3] 맥주 생산으로 유명했다.[3][4] 15세기 말에는 거의 300채의 집이 맥주 양조 권리를 가졌으며,[3] 브로츠와프, 오레시니차, 브제크 등의 도시와 크라쿠프, 토룬, 프라하, 피사 등 유럽 여러 도시에 "시비드니차 셀러"라는 시비드니차 맥주를 제공하는 레스토랑이 있었다.[4] 브로츠와프의 ''피브니차 시비드니츠카''(Piwnica Świdnicka)는 오늘날까지 폴란드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 중 하나이다. 시비드니차에는 조폐국도 있었다.[5]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각각 1287년과 1291년에 이 도시에 정착했다.[5]

1291년부터 1392년까지 시비드니차는 피아스트가 통치하는 시비드니차-야보르 공국의 수도였다. 1368년 마지막 폴란드 피아스트 공작 볼코 2세 시비드니츠키가 사망한 후 공국은 1392년까지 그의 아내가 소유했으며, 이후 보헤미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14세기 말 시비드니차는 실레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으며, 약 6,000명의 주민이 있었다.[3]

1429년, 후스파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3] 1469년부터 1490년까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야기에우워 왕조가 통치하는 보헤미아 왕국의 일부였다. 15세기에는 여러 제분소가 운영되었고,[3] 큰 소와 홉 시장이 열렸다.[3] 1493년, 하르트만 셰델의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슈베드니츠''(Schwednitz)로 기록되었다.[6]

1526년, 시비드니차는 주변 슈바이드니츠(시비드니차) 공국과 함께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세기에는 재세례파의 지역 중심지 중 하나였다.[5] 30년 전쟁 동안 포위, 화재, 전염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3] 실레지아 전쟁 (1740–42) 동안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어 요새로 변모했다.[3]

제3 실레지아 전쟁 또는 7년 전쟁 동안 1761년 오스트리아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지만, 프로이센은 1년 후에 다시 탈환했다. 1803년, 유제프 비비츠키가 방문했다.[7] 1807년에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프랑스군에 점령되었다. 1871년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에 속했다. 1905년 프로이센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인구는 30,540명이었으며, 대부분 독일인이었지만 약 3%의 폴란드 소수 민족도 포함되어 있었다.[8]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군은 이 도시에서 연합군 장교 및 일반 포로를 위한 강제 노동 수용소를 운영했다.[9] 나치 독일 치하에서 나치 감옥이 있었고,[10]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군은 그로스-로젠 강제 수용소의 하위 수용소, Stalag VIII-A 수용소의 3개 전쟁 포로 노동 부대 및 강제 노동 수용소를 설립했다.[5] 수감자 중에는 레슬라프 바르텔스키가 있었다.[11] 1945년 1월, Stalag Luft 7에서 출발한 연합군 전쟁 포로들의 사망 행진이 이 도시를 통과했다.[12]

1945년 독일의 패배 이후, 포츠담 회담에서 합의된 국경 변경에 따라 다시 폴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전쟁 중 도망치거나 살해되지 않은 독일인들은 포츠담 협정에 따라 독일로 추방되었고, 도시는 폴란드인으로 재정착되었으며, 이들 중 많은 수는 소련에 합병된 폴란드 지역에서 추방되었다. 그리스인 난민들도 1950년대에 시비드니차에 정착했다.[13] 1975년부터 1998년까지 바우브르지흐 주에 속했다.

2004년, 시비드니차 로마 가톨릭 교구의 소재지가 되었다.

2. 4. 현대

시비드니차는 1070년 피아스트가 통치하던 폴란드 왕국의 일부였을 때 ''시비드니차''(Svidnica)로 처음 기록되었다.[3] 1250년경 도시 지위를 얻었으며,[3] 1290년에는 성벽과 6개의 문을 갖춘 도시로 성장하여 수공예와 무역이 번성했다.[3] 13세기 말에는 제빵사, 직조공, 도공, 구두 제조공, 모피상, 재단사 길드가 있었고,[3] 맥주 생산으로 유명했다.[3] 브로츠와프, 오레시니차, 브제크 등의 도시와 크라쿠프, 토룬, 프라하, 피사 등의 유럽 도시에는 시비드니차 맥주를 제공하는 "시비드니차 셀러" 레스토랑이 있었다.[4] 브로츠와프의 ''피브니차 시비드니츠카''(Piwnica Świdnicka)는 오늘날까지 폴란드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 중 하나이다. 시비드니차에는 조폐국도 있었으며,[5]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각각 1287년과 1291년에 이 도시에 정착했다.[5]

1291년부터 1392년까지 피아스트가 통치하는 시비드니차-야보르 공국의 수도였다. 1368년 마지막 폴란드 피아스트 공작 볼코 2세 시비드니츠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내가 1392년까지 공국을 소유하다 보헤미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14세기 말 시비드니차는 실레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으며, 약 6,000명의 주민이 있었다.[3] 1429년 후스파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3] 1469년부터 1490년까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야기에우워가 통치하는 보헤미아의 일부가 되었다. 15세기에는 여러 제분소가 운영되었고,[3] 큰 소와 홉 시장이 열렸다.[3] 1493년 하르트만 셰델의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슈베드니츠''(Schwednitz)로 기록되었다.[6]

1526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6세기에는 재세례파의 지역 중심지 중 하나였다.[5] 30년 전쟁 (1618–48) 동안 포위, 화재, 전염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3] 제1 실레지아 전쟁 (1740–42) 동안 ''슈바이드니츠''(Schweidnitz)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었고, 1866년까지 유지된 요새로 변모했다.[3]

제3 실레지아 전쟁 (7년 전쟁) 동안 1761년 10월 오스트리아에 점령되었지만, 프로이센은 1년 후에 다시 탈환했다. 1803년 유제프 비비츠키가 방문했으며,[7] 1807년 나폴레옹 전쟁 동안 프랑스군에 점령되었다. 1871년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독일에 속했다. 1905년 프로이센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인구는 30,540명이었으며 대부분 독일인이었지만 약 3%의 폴란드 소수 민족도 있었다.[8] 제1차 세계 대전의 에이스 로타르 폰 릭트호펜이 슈바이드니츠에 묻혔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에 속하게 되면서 묘지는 평탄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군은 연합군 장교 및 일반 포로를 위한 강제 노동 수용소를 운영했다.[9] 나치 독일 치하에서 나치 감옥이 있었고,[10]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군은 그로스-로젠 강제 수용소의 하위 수용소, Stalag VIII-A 수용소의 3개 전쟁 포로 노동 부대 및 강제 노동 수용소를 설립했다.[5] 수감자 중에는 레슬라프 바르텔스키가 있었다.[11] 1945년 1월, Stalag Luft 7에서 출발한 연합군 전쟁 포로들의 사망 행진이 이 도시를 통과했다.[12]

1945년 독일 패배 후, 포츠담 회담에서 합의된 국경 변경에 따라 다시 폴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전쟁 중 도망치거나 살해되지 않은 독일인들은 포츠담 협정에 따라 독일로 추방되었고, 폴란드인으로 재정착되었으며, 이들 중 많은 수는 소련에 합병된 폴란드 지역에서 추방되었다. 그리스인 난민들도 1950년대에 정착했다.[13] 1975년부터 1998년까지 바우브르지흐 주에 속했으며, 2004년 시비드니차 로마 가톨릭 교구의 소재지가 되었다.

3. 주요 명소

평화 교회, 유네스코 세계 유산


14세기 고딕 양식의 성 스타니슬라우스와 성 벤체슬라우스 대성당은 슐레지엔에서 가장 높은 103m 높이의 탑을 가지고 있으며, "병자의 건강을 위한 우리 주님"의 이미지를 소장하고 있다. 이 성당은 폴란드의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14]

개신교의 평화 교회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자 폴란드의 역사 기념물이며,[15] 1656-57년에 건설되었다.

구시가지의 마켓 광장


16세기 시청은 여러 번 개조되었으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건축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박물관이 시청에 위치해 있다. 성 요셉 교회와 성 크리스토퍼 교회는 같은 시대에 지어졌다. 이전 방어 시설의 남은 요소 중 하나는 성 바바라 예배당이다.

다른 주목할 만한 장소로는 구시가지와 스타리 리넥 광장, 고라 제르조니오프스카 성, 니엠차의 중세 도시, 폴란드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 보존된 필사본이 있는 헨리쿠프의 시토 수도원과 보이슬라비체 수목원이 있다.

스비드니차의 구시가지


3. 1. 평화 교회



개신교의 평화 교회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자 폴란드의 역사 기념물이며,[15] 1656-57년에 건설되었다.

3. 2. 성 스타니슬라우스 및 성 벤체슬라우스 대성당



14세기 고딕 양식의 성 스타니슬라우스와 성 벤체슬라우스 대성당은 103m 높이의 슐레지엔에서 가장 높은 탑을 가지고 있으며, "병자의 건강을 위한 우리 주님"의 이미지를 소장하고 있다. 이 성당은 폴란드의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14]

3. 3. 구시가지



14세기 고딕 양식의 성 스타니슬라우스와 성 벤체슬라우스 대성당은 103m 높이의 슐레지엔에서 가장 높은 탑을 가지고 있으며, "병자의 건강을 위한 우리 주님"의 이미지를 소장하고 있다. 이 성당은 폴란드의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14]

개신교의 평화 교회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자 폴란드의 역사 기념물이며,[15] 1656-57년에 건설되었다.

16세기 시청은 여러 번 개조되었으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건축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박물관이 시청에 위치해 있다. 성 요셉 교회와 성 크리스토퍼 교회는 같은 시대에 지어졌다. 이전 방어 시설의 남은 요소 중 하나는 성 바바라 예배당이다.

다른 주목할 만한 장소로는 구시가지와 스타리 리넥 광장, 고라 제르조니오프스카 성, 니엠차의 중세 도시, 폴란드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 보존된 필사본이 있는 헨리쿠프의 시토 수도원과 보이슬라비체 수목원이 있다.

3. 4. 기타



14세기 고딕 양식의 성 스타니슬라우스와 성 벤체슬라우스 대성당은 103m 높이의 슐레지엔에서 가장 높은 탑을 가지고 있으며, "병자의 건강을 위한 우리 주님"의 이미지를 소장하고 있다. 이 성당은 폴란드의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14]

개신교의 평화 교회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자 폴란드의 역사 기념물이며,[15] 1656-57년에 건설되었다.

16세기 시청은 여러 번 개조되었으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건축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박물관이 시청에 위치해 있다. 성 요셉 교회와 성 크리스토퍼 교회는 같은 시대에 지어졌다. 이전 방어 시설의 남은 요소 중 하나는 성 바바라 예배당이다.

다른 주목할 만한 장소로는 구시가지와 스타리 리넥 광장, 고라 제르조니오프스카 성, 니엠차의 중세 도시, 폴란드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 보존된 필사본이 있는 헨리쿠프의 시토 수도원과 보이슬라비체 수목원이 있다.

4. 정치

바우브지흐 선거구에서 선출된 국회의원 (세임) 목록은 다음과 같다.

미하우 드보르치크법과 정의
마레크 디두흐민주 좌파 동맹
마르친 그보지법과 정의
이자벨라 므르지골로츠카시민 플랫폼
보이치에흐 무르제크합의
토마시 시에모니악시민 플랫폼
모니카 비엘리호프스카시민 플랫폼
이레네우슈 지스카법과 정의


5. 교육

시비드니차에는 데이터 통신 기술 대학(Wyższa Szkoła Technologii Teleinformatycznych)이 있다. 2003년 시비드니차는 바르샤바에 본부를 둔 미소 훈장 국제 지부의 회의를 개최했으며, 이때 어린이 우정 센터가 설립되었다. 시비드니차는 공식적으로 "어린이 꿈의 수도"라는 칭호를 받았다.

6. 스포츠

폴로니아 시비드니차(Polonia Świdnica)는 폴란드 하위 리그에서 활동하는 축구 클럽이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폴란드 2부 리그에서 경기를 하기도 했다. 야로스와프 라토 13 축구 아카데미(Akademia Piłkarska 13 Jarosława Lato)가 있다.

7. 유명 인물


  • 토마스 슈톨처(–1526), 작곡가
  • 마리아 쿠니츠 (1604–1664), 천문학자
  • 벤자민 슈몰크 (1672–1737), 작곡가, 시인
  • 요한 크리스토프 글라우비츠 (–1767) 건축가
  • 요한 고틀리브 야니치 (1708–1763), 작곡가
  • 로베르트 루터 (1822–1900), 천문학자
  • 알베르트 크레치머 (1825–1891), 교수, 화가, 의상 연구가
  • 클라라 야슈케 (1848 또는 1858–1912), 프로이센과 독일 최초의 여성 철도 노동자 중 한 명이자 여성 권리 운동가
  • 에밀 크레브스 (1867–1930), 중국학자
  • 페르디난트 프리덴부르크 (1886–1972), 정치인
  • 미하엘 그라프 폰 마투슈카 (1888–1944), 레지스탕스 운동가
  • 후베르트 슈문트 (1888–1984), 크리그스마리네 제독
  •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1892–1918), "붉은 남작"으로 알려진 제1차 세계 대전 에이스
  • 페터 아돌프 티센 (1899–1990), 물리학자
  • 하인츠 슈타르케 (1911–2001), 정치인, 1961–1962년 연방 재무 장관
  • 게오르크 게르트너 (1920–2013), "미국에 있던 히틀러의 마지막 병사"로 알려짐
  • 군터 게벨-윌리엄스 (1934–2001), 동물 조련사
  • 만프레트 칸터 (1939년 출생), 정치인
  • 헤닝 아이히베르크 (1942년 출생), 문화 사회학자
  • 도로타 시비에니에비치 (1972년 출생), 배구 선수, 폴란드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 선수
  • 바르토시 후자르스키 (1980년 출생), 사이클 선수
  • 안나 베르블린스카 (1984년 출생), 배구 선수, 폴란드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 선수
  • 야누시 골 (1985년 출생), 폴란드 프로 축구 선수
  • 아르카디우시 피에흐 (1985년 출생), 폴란드 프로 축구 선수
  • 파트리크 클리말라 (1998년 출생), 폴란드 프로 축구 선수
  • 알렉산데르 발체로프스키 (2000년 출생), 농구 선수

8. 자매 도시

시비드니차는 다음과 같은 도시들과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16]


  • 비베라흐안데어리스, 독일
  • 이바노프란키우스크, 우크라이나
  • 카진츠바르치카, 헝가리
  • 니진, 우크라이나
  • 폴리체나트메투이, 체코
  • 시벤초니스, 리투아니아
  • 트루트노프, 체코
  • 텐드링, 영국

참조

[1] 웹사이트 Local Data Bank https://bdl.stat.gov[...] Statistics Poland 2022-08-18
[2] 뉴스 Siedem nowych gmin w Aglomeracji Wałbrzyskiej. http://swidnica24.pl[...] Swidnica24.pl 2014-02-23
[3] 웹사이트 Historia Świdnicy http://um.swidnica.p[...] 2019-11-25
[4] 서적 Dolny Śląsk – przewodnik Sport i Turystyka
[5] 웹사이트 Świdnica https://encyklopedia[...] 2019-11-25
[6] 문서 Die Schedelsche Weltchronik
[7] 웹사이트 220 lat Mazurka Dąbrowskiego. Jak właściwie śpiewać Hymn Polski? https://swidnica24.p[...] 2017-07-20
[8] 서적 Sprachliche Minderheiten im preussischen Staat: 1815 - 1914; die preußische Sprachenstatistik in Bearbeitung und Kommentar https://opacplus.bsb[...] Herder-Inst. 1998
[9] 간행물 Pieniądz zastępczy w obozach jenieckich na terenie rejencji wrocławskiej w czasie I i II wojny światowej
[10] 웹사이트 Gefängnis Schweidnitz https://www.bundesar[...] 2020-11-01
[11] 간행물 Kronika życia literackiego w Polsce pod okupacją hitlerowską: próba przeglądu zdarzeń w układzie chronologicznym Wydawnictwo [[Pedagogical University of Cracow|Wyższej Szkoły Pedagogicznej]] w Krakowie
[12] 간행물 Stalag Luft 7 Bankau i jego ewakuacja na Zachód w styczniu 1945 r.
[13] 서적 Letnia Szkoła Historii Najnowszej 2012. Referaty Institute of National Remembrance|IPN
[14] 법률 Rozporządzenie Prezydenta Rzeczypospolitej Polskiej z dnia 15 marca 2017 r. w sprawie uznania za pomnik historii "Świdnica - katedra pod wezwaniem św. Stanisława Biskupa i Męczennika i św. Wacława Męczennika"
[15] 법률 Rozporządzenie Prezydenta Rzeczypospolitej Polskiej z dnia 15 marca 2017 r. w sprawie uznania za pomnik historii "Świdnica - zespół kościoła ewangelicko-augsburskiego pod wezwaniem Świętej Trójcy, zwany Kościołem Pokoju"
[16] 웹인용 Miasta partnerskie http://um.swidnica.p[...] Świdnica 2020-03-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