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런 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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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어런 플러리는 캐나다 출신의 전 아이스하키 선수로, 1989년 캘거리 플레임스에서 스탠리 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1990-91 시즌에 51골을 기록하며 팀의 공격을 이끌었고, NHL 올스타로도 선정되었다. 플러리는 캘거리 플레임스에서 주장을 역임했으며, 1991년 캐나다 컵에서 캐나다 대표팀으로 우승했다.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과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에 출전하여 2002년 금메달을 획득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자서전을 통해 과거 하키 코치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음을 고백하고, 약물 및 알코올 중독,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음모론과 정치적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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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어런 플러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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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 라이트 윙 |
| 잡는 손 | 오른손 |
| 신장 | 168cm |
| 체중 | 82kg |
| 출생일 | 1968년 6월 29일 |
| 출생지 | 캐나다 서스캐처원주 옥스보 |
| 드래프트 | 166번째 전체 |
| 드래프트 연도 | 1987년 |
| 드래프트 팀 | 캘거리 플레임스 |
| 커리어 시작 | 1988년 |
| 커리어 종료 | 2006년 |
| 클럽 경력 | |
| 선수 경력 | 캘거리 플레임스 (1988년 ~ 1999년) 타파라 (1995년) 콜로라도 애벌랜치 (1999년) 뉴욕 레인저스 (1999년 ~ 2002년) 시카고 블랙호크스 (2002년 ~ 2003년) 벨파스트 자이언츠 (2005년 ~ 2006년) |
| 국가대표 경력 | |
| 국가대표팀 | 캐나다 |
| 수상 내역 | |
| 메달 | 올림픽: 2002 솔트레이크시티 금메달 세계 선수권 대회: 1991 핀란드 은메달 월드컵: 1996 캐나다 은메달 캐나다컵: 1991 캐나다 금메달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 1988 소련 금메달 |
2. 어린 시절
시어런 플러리는 1968년 6월 29일 서스캐처원 주 옥스보우에서 왈리 플러리와 도나 플러리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4] 왈리는 하키 선수였지만, 1963년 여름 야구 경기 중 다리가 부러지면서 프로 선수로서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 부상은 음주 문제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4] 도나는 조용하고 종교적인 여성이었으며, 오랫동안 약물 중독과 싸웠다.[5] 플러리는 메티스 혈통이며, 그의 할머니 메리는 크리 출신이다.[5] 플러리는 선수 생활 내내 메티스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을 겪었다.[6] 플러리 가족은 4년 동안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윌리엄스 레이크에서 살다가, 매니토바 주 러셀에 정착했다.[7] 왈리는 러셀의 경기장에서 트럭 운전사 겸 유지 보수 작업자로 일했다.[8] 플러리와 그의 가족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다. 그가 어렸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할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플러리의 아버지는 피아노와 기타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열정은 테오렌과 그의 가족에게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주었는데, 그들의 메티스 유산의 일부였기 때문이다.[9]
늘 반에서 가장 작은 아이 중 한 명이었고 집에서 안정적인 감독을 받지 못했던 플러리는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고, 나중에는 스스로를 괴롭힘 가해자라고 묘사했다.[10] 그는 다섯 살 때 낡은 스케이트 한 켤레와 부러진 스틱을 빌려 처음으로 경기를 하면서 하키를 출구로 삼았다.[11] 그의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이었지만, 플러리는 가톨릭교회에서 자랐다. 그는 6세부터 12세까지 가톨릭 미사에 참석했으며, 교회의 사제가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제단 보조를 했다. 이 사건은 플러리에게 초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를 빼앗아 갔다.[12]
늘 돈이 부족하고 안정적인 가정 생활을 하지 못했던 플러리는 하키 커뮤니티, 특히 러셀의 펠츠 가족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필요할 때 새 옷을 사주었다.[13] 1982년 1월, 플러리의 NHL 진출에 대한 꿈은 13세 때 경기 중 팔 아래 깊은 상처를 입어 상완 동맥이 절단되면서 거의 끝날 뻔했다. 그 결과 그는 거의 1년 동안 격렬한 하키를 할 수 없었다.[14] 이 사건이 발생한 지 5개월 후, 지역 사회는 그를 매니토바 주 브랜던에 있는 앤디 머레이 하키 학교에 보내기 위해 기금을 모금했다.[15] 그곳에서 플러리는 서부 하키 리그의 위니펙 워리어스의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던 그레이엄 제임스를 만났다. 제임스는 플러리에게 그의 체격에도 불구하고 NHL에서 뛸 만한 기량이 있다고 말했고, 그가 충분히 나이가 들면 워리어스에서 주니어 하키를 하도록 영입하겠다고 약속했다.[13]
2. 1. 가정 환경 및 초기 성장
시어런 플러리는 1968년 6월 29일 서스캐처원 주 옥스보우(Oxbow, Saskatchewan)에서 왈리 플러리와 도나 플러리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4] 왈리는 하키 선수였지만, 1963년 여름 야구 경기 중 다리가 부러지면서 프로 선수로서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 부상은 음주 문제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4] 도나는 조용하고 종교적인 여성이었으며, 오랫동안 약물 중독과 싸웠다.[5] 플러리는 메티스 혈통이며, 그의 할머니 메리는 크리 출신이다.[5] 플러리는 선수 생활 내내 메티스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을 겪었다.[6] 플러리 가족은 4년 동안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윌리엄스 레이크(Williams Lake, British Columbia)에서 살다가, 매니토바 주 러셀(Russell, Manitoba)에 정착했다.[7] 왈리는 러셀의 경기장에서 트럭 운전사 겸 유지 보수 작업자로 일했다.[8] 플러리와 그의 가족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다. 그가 어렸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할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플러리의 아버지는 피아노와 기타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열정은 테오렌과 그의 가족에게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주었는데, 그들의 메티스 유산의 일부였기 때문이다.[9]늘 반에서 가장 작은 아이 중 한 명이었고 집에서 안정적인 감독을 받지 못했던 플러리는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고, 나중에는 스스로를 괴롭힘 가해자라고 묘사했다.[10] 그는 다섯 살 때 낡은 스케이트 한 켤레와 부러진 스틱을 빌려 처음으로 경기를 하면서 하키를 출구로 삼았다.[11] 그의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이었지만, 플러리는 가톨릭교회에서 자랐다. 그는 6세부터 12세까지 가톨릭 미사에 참석했으며, 교회의 사제가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제단 보조를 했다. 이 사건은 플러리에게 초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를 빼앗아 갔다.[12]
늘 돈이 부족하고 안정적인 가정 생활을 하지 못했던 플러리는 하키 커뮤니티, 특히 러셀의 펠츠 가족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필요할 때 새 옷을 사주었다.[13] 1982년 1월, 플러리의 NHL 진출에 대한 꿈은 13세 때 경기 중 팔 아래 깊은 상처를 입어 상완 동맥이 절단되면서 거의 끝날 뻔했다. 그 결과 그는 거의 1년 동안 격렬한 하키를 할 수 없었다.[14] 이 사건이 발생한 지 5개월 후, 지역 사회는 그를 매니토바 주 브랜던(Brandon, Manitoba)에 있는 앤디 머레이 하키 학교에 보내기 위해 기금을 모금했다.[15] 그곳에서 플러리는 서부 하키 리그(WHL)의 위니펙 워리어스의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던 그레이엄 제임스를 만났다. 제임스는 플러리에게 그의 체격에도 불구하고 NHL에서 뛸 만한 기량이 있다고 말했고, 그가 충분히 나이가 들면 워리어스에서 주니어 하키를 하도록 영입하겠다고 약속했다.[13]
2. 2. 가톨릭 신앙과 유년기
2. 3. 펠츠 가족의 지원
2. 4. 부상과 그레이엄 제임스와의 만남
3. 선수 경력
3. 1. 주니어 시절
플러리는 1983-84 시즌에 15세의 나이로 매니토바 주니어 하키 리그의 세인트 제임스 캐나디언스에서 주니어 경력을 시작하여 22경기에서 33 골과 64 포인트를 기록하며 경기당 거의 3포인트에 육박하는 놀라운 페이스를 보였다.[16] 1984-85 시즌에는 위니펙에서 막 이전한 무스 조 워리어스로 이적하여 16세의 나이로 71경기에서 29골과 75포인트를 기록했다. 그는 WHL에서 4년 동안 매년 기록을 향상시켰고, 1987-88 시즌에는 68골, 92 어시스트 시즌을 기록했다.[16] 플러리의 160포인트는 조 새키치와 리그 공동 선두를 기록했고, 두 선수는 WHL 최고 득점자에게 수여되는 밥 클라크 트로피를 공동 수상했다.[17] 플러리의 92어시스트와 160포인트는 팀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골(201), 어시스트(271), 포인트(472)에서도 워리어스 통산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8] 현재 그는 WHL 역대 득점 순위 10위에 올라 있다.[19]항상 경기에서 가장 작은 선수 중 한 명이었던 플러리[20]는 자신보다 훨씬 큰 선수들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예측 불가능한 스타일의 경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욱하는 성질의 거친 경기를 펼쳐 상대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21] 이는 많은 보복성 페널티와 코치와의 여러 논쟁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22] 그는 주니어 마지막 해에 235분간 페널티를 기록했는데, 이는 WHL 상위 10위 득점자 중 다른 선수들보다 거의 100분이나 더 많은 시간이었다.[23] 플러리는 하키 선수 생활 내내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을 유지하며, 자신의 체격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끊임없이 놀라게 했다.[24]
플러리는 캐나다를 대표하여 두 번 세계 주니어 하키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처음으로 1987년 대회에 체코슬로바키아 피에슈타니에서 팀에 합류했다. 이 대회는 1987년 1월 4일에 있었던 캐나다와 소련 간의 악명 높은 벤치 클리어링 난투극인 "피에슈타니 난투극"으로 가장 잘 기억된다. 플러리는 경기 첫 골을 넣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스틱으로 소련 벤치를 향해 기관총을 쏘는 흉내를 냈는데, 이는 캐나다 관계자들의 비판을 받았다.[26] 난투극은 캐나다가 4-2로 앞서던 2피리어드 초반에 파벨 코스티치킨이 플러리를 가격하면서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두 선수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이는 곧 얼음판 위의 모든 스케이터가 연루된 라인 난투극으로 확대되었고, 이후 소련 선수들이 벤치를 떠나고 캐나다 선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27] 양 팀은 대회에서 실격되었고, 플러리와 캐나다는 메달(잠재적으로 금메달)을 놓치게 되었다.[28]
국제 아이스하키 연맹은 난투극에 연루된 모든 선수들의 국제 대회 출전을 18개월 동안 정지시켰지만, 항소 후 징계는 6개월로 감축되었다. 이 징계 감면으로 플러리는 1988년 대회에 모스크바에서 참가할 수 있었다.[29] 그는 주장을 맡았고,[19] 7경기에서 8포인트를 기록하며 팀 내 득점 2위를 차지했으며, 캐나다가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대회 올스타로 선정되었다.[30]
1986-87 시즌에 워리어스에서 129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16] 플러리의 작은 체구 때문에 많은 팀들이 그가 NHL에서 뛸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31] 캘거리 플레임스는 1987 NHL 드래프트 8라운드 전체 166순위로 그를 지명했다.[32] 1988년 주니어 시즌을 마친 플러리는 41만 5천 CAD 상당의 첫 프로 계약을 체결하고 플레임스의 인터내셔널 하키 리그 (IHL) 제휴팀인 솔트레이크 골든 이글스에 합류했다.[19] 그는 정규 시즌 2경기에서 7포인트를 기록했고, 이글스가 터너 컵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플레이오프 8경기에서 16점을 추가했다.[16]
3. 1. 1. 피에슈타니 난투극
플러리는 캐나다를 대표하여 두 번 세계 주니어 하키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1987년 대회에 체코슬로바키아 피에슈타니에서 팀에 합류했다. 이 대회는 1987년 1월 4일에 있었던 캐나다와 소련 간의 악명 높은 벤치 클리어링 난투극인 "피에슈타니 난투극"으로 가장 잘 기억된다.[26] 플러리는 경기 첫 골을 넣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스틱으로 소련 벤치를 향해 기관총을 쏘는 흉내를 냈는데, 이는 캐나다 관계자들의 비판을 받았다.[26] 난투극은 캐나다가 4-2로 앞서던 2피리어드 초반에 파벨 코스티치킨이 플러리를 가격하면서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두 선수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이는 곧 얼음판 위의 모든 스케이터가 연루된 라인 난투극으로 확대되었고, 이후 소련 선수들이 벤치를 떠나고 캐나다 선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27] 양 팀은 대회에서 실격되었고, 플러리와 캐나다는 메달(잠재적으로 금메달)을 놓치게 되었다.[28]국제 아이스하키 연맹은 난투극에 연루된 모든 선수들의 국제 대회 출전을 18개월 동안 정지시켰지만, 항소 후 징계는 6개월로 감축되었다. 이 징계 감면으로 플러리는 1988년 대회에 모스크바에서 참가할 수 있었다.[29]
3. 1. 2. 1988년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
플러리는 캐나다를 대표하여 두 번 세계 주니어 하키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1987년 대회에 체코슬로바키아 피에슈타니에서 처음으로 팀에 합류했다. 이 대회는 1987년 1월 4일에 있었던 캐나다와 소련 간의 악명 높은 벤치 클리어링 난투극인 "피에슈타니 난투극"으로 가장 잘 기억된다. 플러리는 경기 첫 골을 넣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스틱으로 소련 벤치를 향해 기관총을 쏘는 흉내를 냈는데, 이는 캐나다 관계자들의 비판을 받았다.[26] 난투극은 캐나다가 4-2로 앞서던 2피리어드 초반에 파벨 코스티치킨이 플러리를 가격하면서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두 선수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이는 곧 얼음판 위의 모든 스케이터가 연루된 라인 난투극으로 확대되었고, 이후 소련 선수들이 벤치를 떠나고 캐나다 선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27] 양 팀은 대회에서 실격되었고, 플러리와 캐나다는 메달(잠재적으로 금메달)을 놓치게 되었다.[28]국제 아이스하키 연맹은 난투극에 연루된 모든 선수들의 국제 대회 출전을 18개월 동안 정지시켰지만, 항소 후 징계는 6개월로 감축되었다. 이 징계 감면으로 플러리는 1988년 대회에 모스크바에서 참가할 수 있었다.[29] 그는 주장을 맡았고,[19] 7경기에서 8포인트를 기록하며 팀 내 득점 2위를 차지했으며, 캐나다가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대회 올스타로 선정되었다.[30]
3. 2. 캘거리 플레임스 (1989-1999)
wikitext시어런 플러리는 1988년 플레임스 훈련 캠프에 초과 체중으로 도착했고, 1988-89 시즌을 시작하기 위해 솔트레이크로 다시 배정되었다.[33] 그는 경기당 거의 2점을 기록하며 40경기를 치른 후 IHL 득점 선두를 차지하기 위해 37골과 37어시스트를 기록했다.[34] 슬럼프에 빠진 플레임스는 1989년 1월 1일에 플러리를 소환하여 그가 팀 공격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35] 그는 이틀 후 퀘벡 노르디크를 상대로 첫 NHL 경기를 치렀고, 1월 5일 로스앤젤레스 킹스를 상대로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첫 포인트를 기록했다.[33] 그는 1월 7일 에드먼턴 오일러스를 7-2로 이긴 경기에서 첫 두 골을 넣었다.[36] 플러리는 계속 득점을 기록했고, NHL 루키 시즌에 36경기에서 34포인트를 기록했다.[16] 그는 플레이오프에서 11점을 추가하며 플레임스가 구단 역사상 첫 스탠리 컵 챔피언십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33]
첫 풀 시즌에 33골을 기록한 시어런 플러리는 1990-91 시즌에 51골과 51골과 104포인트를 기록하며 캘거리 플레임스의 공격을 이끌었다.[37] 그는 1991 올스타전에 출전하여[38] 캠벨 컨퍼런스가 웨일스 컨퍼런스를 11-5로 이긴 경기에서 골을 넣었다. 시즌 말에 플러리는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3개의 쇼트핸디드 골을 기록하며 리그 기록을 세웠다.[33] 그는 NHL 플러스-마이너스 어워드를 마티 맥소리와 함께 수상했으며, 그는 +48로 리그 선두를 기록했다.[39]
플러리는 1991 스탠리 컵 플레이오프에서 단 두 골을 넣었지만, 에드먼턴 오일러스를 상대로 한 6차전 연장 결승골을 넣은 후, 팀 동료들이 그를 따라잡으려고 하는 동안 그는 기뻐하며 얼음판 전체를 미끄러져 보드에 부딪혔다.[33][40][41][42][43] CBC ''캐나다 하키 나이트''의 플레이-바이-플레이 해설자 크리스 커버트는 플러리의 골을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묘사했다.
불행히도 플레임스는 7차전 연장 골로 에사 티카넨에게 패하며 시즌을 마감했다.[44]
1995-96 시즌을 앞두고 플러리는 계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훈련 캠프에 불참했다. 그러나 플레임스와 5년 1,200만 달러 계약을 맺었는데, 그는 NHL 기회를 준 구단에 대한 충성심으로 공개 시장에서 받을 수 있는 것보다 적은 돈을 받기로 동의했다.[48] 그는 위장 질환으로 프리 시즌의 대부분을 놓쳤지만 시즌 개막전에 팀에 합류했다.[49] 1995년 12월, 플러리는 크론병 진단을 받았으며 의사들이 마침내 이를 통제할 올바른 약을 찾았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누군가가 "5분마다 [그의] 배에 칼을 찌르는 것 같았다"고 표현할 정도의 고통 속에서도 플레임스를 위해 모든 경기를 뛰었다.[50] 질병에도 불구하고 플러리는 팀 득점, 어시스트, 포인트에서 선두를 차지했고,[51] 세 번째 올스타 게임에 캘거리의 유일한 대표로 출전했다.[38]
조 뉴웬디크가 1995–96 시즌 전에 플레임스에 보고하지 않자, 플레임스는 플러리를 임시 주장으로 임명했다. 뉴웬디크가 12월에 트레이드되면서 임시 주장이 아닌 정식 주장이 되었다.[33] 플러리는 주장을 맡는 것을 꺼려했지만, 팀에 대한 충성심과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52] 그는 2시즌 후, 주장이 자신의 플레이에 해를 끼치고 팀 동료 및 코치 피에르 파게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결정한 후 주장을 포기했다.[53]
플레임스는 1996–97 시즌에 고전하여 퍼시픽 디비전에서 최하위를 기록하고 1980년 캘거리로 이적한 이후 두 번째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54] 플러리는 다시 팀 득점 선두를 차지했지만, 그의 29골은 NHL에서 풀 시즌에 기록한 최저 득점이었다.[16] 그는 1997 올스타 게임에서 플레임스의 유일한 대표였다.[38]
플러리는 1999년 2월 19일에 통산 823번째 포인트를 기록하며 알 매키니스를 제치고 구단 득점 선두에 올랐다. 이 기록은 2009년 자롬 이기글라에게 넘어갈 때까지 10년 동안 유지되었다.[58][59]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캘거리 플레임스는 플러리와 새로운 계약을 맺을 수 없었고, 플러리가 자유 계약 선수로 이적할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기록을 깬 지 2주도 안 돼 그를 트레이드하기로 결정했다.[60] 1999년 2월 28일, 플러리는 르네 코르베, 웨이드 벨라크, 로빈 레게르를 대가로 콜로라도 애벌랜치로 트레이드되었다.[57] 예상된 일이었지만, 이 트레이드는 캘거리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61]
이 트레이드는 소규모 캐나다 팀이 더 이상 NHL에서 경쟁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징표로 여겨졌다.[63] 하키의 경제 상황이 바뀌면서 플레임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불과 2점 앞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선수를 처리해야 한다고 느꼈다.[60] 그러나 플러리가 시즌 말에 무제한 자유 계약 선수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플레임스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를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64] 트레이드 후 플러리는 그를 새로운 계약으로 영입하려는 모든 팀은 연간 7백만 달러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63] 자서전 ''Playing with Fire''에서 플러리는 트레이드 전에 플레임스로부터 4년 동안 1,600만 달러를 제안받았고, 5년 동안 2,500만 달러를 제안했다고 주장했다.[65]
3. 2. 1. 1989년 스탠리 컵 우승
시어런 플러리는 1988년 플레임스 훈련 캠프에 초과 체중으로 도착했고, 1988-89 시즌을 시작하기 위해 솔트레이크로 다시 배정되었다.[33] 그는 경기당 거의 2점을 기록하며 40경기를 치른 후 IHL 득점 선두를 차지하기 위해 37골과 37어시스트를 기록했다.[34] 슬럼프에 빠진 플레임스는 1989년 1월 1일에 플러리를 소환하여 그가 팀 공격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35] 그는 이틀 후 퀘벡 노르디크를 상대로 첫 NHL 경기를 치렀고, 1월 5일 로스앤젤레스 킹스를 상대로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첫 포인트를 기록했다.[33] 그는 1월 7일 에드먼턴 오일러스를 7-2로 이긴 경기에서 첫 두 골을 넣었다.[36] 플러리는 계속 득점을 기록했고, NHL 루키 시즌에 36경기에서 34포인트를 기록했다.[16] 그는 플레이오프에서 11점을 추가하며 플레임스가 구단 역사상 첫 스탠리 컵 챔피언십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33]3. 2. 2. 1990-91 시즌: 51골, 104포인트
첫 풀 시즌에 33골을 기록한 시어런 플러리는 1990-91 시즌에 51골과 51골과 104포인트를 기록하며 캘거리 플레임스의 공격을 이끌었다.[37] 그는 1991 올스타전에 출전하여[38] 캠벨 컨퍼런스가 웨일스 컨퍼런스를 11-5로 이긴 경기에서 골을 넣었다. 시즌 말에 플러리는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3개의 쇼트핸디드 골을 기록하며 리그 기록을 세웠다.[33] 그는 NHL 플러스-마이너스 어워드를 마티 맥소리와 함께 수상했으며, 그는 +48로 리그 선두를 기록했다.[39]플러리는 1991 스탠리 컵 플레이오프에서 단 두 골을 넣었지만, 에드먼턴 오일러스를 상대로 한 6차전 연장 결승골을 넣은 후, 팀 동료들이 그를 따라잡으려고 하는 동안 그는 기뻐하며 얼음판 전체를 미끄러져 보드에 부딪혔다.[33][40][41][42][43] CBC ''캐나다 하키 나이트''의 플레이-바이-플레이 해설자 크리스 커버트는 플러리의 골을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묘사했다.
불행히도 플레임스는 7차전 연장 골로 에사 티카넨에게 패하며 시즌을 마감했다.[44]
3. 2. 3. 주장 시절 (1995-1997)
1995-96 시즌을 앞두고 플러리는 계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훈련 캠프에 불참했다. 그러나 플레임스와 5년 1,200만 달러 계약을 맺었는데, 그는 NHL 기회를 준 구단에 대한 충성심으로 공개 시장에서 받을 수 있는 것보다 적은 돈을 받기로 동의했다.[48] 그는 위장 질환으로 프리 시즌의 대부분을 놓쳤지만 시즌 개막전에 팀에 합류했다.[49] 1995년 12월, 플러리는 크론병 진단을 받았으며 의사들이 마침내 이를 통제할 올바른 약을 찾았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누군가가 "5분마다 [그의] 배에 칼을 찌르는 것 같았다"고 표현할 정도의 고통 속에서도 플레임스를 위해 모든 경기를 뛰었다.[50] 질병에도 불구하고 플러리는 팀 득점, 어시스트, 포인트에서 선두를 차지했고,[51] 세 번째 올스타 게임에 캘거리의 유일한 대표로 출전했다.[38]조 뉴웬디크가 1995–96 시즌 전에 플레임스에 보고하지 않자, 플레임스는 플러리를 임시 주장으로 임명했다. 뉴웬디크가 12월에 트레이드되면서 임시 주장이 아닌 정식 주장이 되었다.[33] 플러리는 주장을 맡는 것을 꺼려했지만, 팀에 대한 충성심과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52] 그는 2시즌 후, 주장이 자신의 플레이에 해를 끼치고 팀 동료 및 코치 피에르 파게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결정한 후 주장을 포기했다.[53]
플레임스는 1996–97 시즌에 고전하여 퍼시픽 디비전에서 최하위를 기록하고 1980년 캘거리로 이적한 이후 두 번째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54] 플러리는 다시 팀 득점 선두를 차지했지만, 그의 29골은 NHL에서 풀 시즌에 기록한 최저 득점이었다.[16] 그는 1997 올스타 게임에서 플레임스의 유일한 대표였다.[38]
3. 2. 4. 트레이드와 이적
플러리는 1999년 2월 19일에 통산 823번째 포인트를 기록하며 알 매키니스를 제치고 구단 득점 선두에 올랐다. 이 기록은 2009년 자롬 이기글라에게 넘어갈 때까지 10년 동안 유지되었다.[58][59]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캘거리 플레임스는 플러리와 새로운 계약을 맺을 수 없었고, 플러리가 자유 계약 선수로 이적할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기록을 깬 지 2주도 안 돼 그를 트레이드하기로 결정했다.[60] 1999년 2월 28일, 플러리는 르네 코르베, 웨이드 벨라크, 로빈 레게르를 대가로 콜로라도 애벌랜치로 트레이드되었다.[57] 예상된 일이었지만, 이 트레이드는 캘거리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61]이 트레이드는 소규모 캐나다 팀이 더 이상 NHL에서 경쟁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징표로 여겨졌다.[63] 하키의 경제 상황이 바뀌면서 플레임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불과 2점 앞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선수를 처리해야 한다고 느꼈다.[60] 그러나 플러리가 시즌 말에 무제한 자유 계약 선수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플레임스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를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64] 트레이드 후 플러리는 그를 새로운 계약으로 영입하려는 모든 팀은 연간 7백만 달러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63] 자서전 ''Playing with Fire''에서 플러리는 트레이드 전에 플레임스로부터 4년 동안 1,600만 달러를 제안받았고, 5년 동안 2,500만 달러를 제안했다고 주장했다.[65]
3. 3. 콜로라도 애벌랜치, 뉴욕 레인저스, 시카고 블랙호크스 (1999-2003)
플러리는 트레이드 다음 날 덴버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콜로라도 애벌랜치에서 데뷔했다.[66] 그는 에드먼턴과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했지만 무릎 부상으로 다음 2주 동안 결장했다. 그는 캘거리에서 11년 동안 단 7경기에만 결장했었다.[67] 애벌랜치에서 정규 시즌 15경기에 출전하여 10골 14도움을 기록했고, 플레이오프 18경기에서 5골 12도움을 추가했지만, 애벌랜치는 1999년 스탠리 컵 플레이오프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댈러스 스타스에게 패했다.[68]애벌랜치는 플러리와 재계약하지 않았고, 그는 4년째 700만 달러의 구단 옵션이 포함된 3년, 2,100만 달러 계약으로 뉴욕 레인저스에 합류했다.[69] 그는 캘거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레인저스와 계약했지만, 나중에 이 발언이 팀 팬이 아닌 플레임스 구단주를 향한 것이라고 밝혔다.[70] 맨해튼에서의 첫 해는 실망스러웠는데, 1999–2000년 NHL 시즌에 15골만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로 이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시즌 후, 그는 물질 남용 및 정서적 문제 치료를 위한 리그 운영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71]
2000–01년 NHL 시즌에 30골을 기록하며 반등했고, 51번째 내셔널 하키 리그 올스타전에 참가했다.[72] 2000년 11월 4일 몬트리올 캐나디언스와의 경기에서 NHL 통산 400번째 골을 기록했다.[73] 그는 62경기에서 74포인트로 리그 4위를 기록했지만, 레인저스는 그가 다시 리그의 물질 남용 프로그램에 들어갔다고 발표하며 시즌을 마감했다.[72]
2001–02년 NHL 시즌 전에 플러리는 물질 남용으로 계속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맨해튼에서의 삶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74] 그는 82경기를 모두 뛰었지만, 경기장 밖에서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 12월 28일 산호세 샤크스와의 경기에서 S.J. 샤키와 대립하여 마스코트 연기자의 갈비뼈를 부러뜨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플러리는 이를 축소하며 샤키를 "건드렸을" 뿐이라고 말했다.[75][76] 2002년 1월 피츠버그 펭귄스와의 경기에서 페널티를 받은 후 경기장을 떠났고, 나중에 팀 동료들에게 사과하며 가족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주장했다.[77] 2주 후, 그는 뉴욕 아일랜더스 팬들에게 외설적인 제스처를 한 혐의로 벌금을 부과받았다.[78] 2월 말, 그는 리그 심판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은퇴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리그는 그의 불만을 일축했다.[79] 그러나 그는 2001년 10월 27일, 마이크 요크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NHL 통산 1,000번째 포인트를 기록했고, 레인저스는 은색 스틱을 선물했다.[80]
시즌 후, 레인저스는 옵션을 행사하지 않았고, 플러리의 선수 권리를 산호세 샤크스로 트레이드했는데, 이는 플러리가 다른 곳에서 계약할 경우 샤크스가 보상 드래프트 지명권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81] 그는 시카고 블랙호크스와 2년, 850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82] 2002–03년 NHL 시즌 개막 이틀 전, 그는 리그의 물질 남용 프로그램 약관을 위반하여 NHL로부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83] 블랙호크스는 플러리의 친구 중 한 명인 회복 중인 알코올 중독자를 고용하여 플러리가 알코올 중독자 익명회 모임에 참석하고 NHL의 사후 관리 프로그램을 준수하도록 했다.[84]
플러리는 시즌 초 2개월을 결장한 후 복귀했다.[85] 2003년 1월 팀 동료들과 함께 외출했을 때,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스트립 클럽에서 싸움에 휘말렸고, 피를 흘렸다. 그는 그날 밤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낮은 시기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86] 그는 출장 정지를 받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블랙호크스의 순위 하락에 기여했고, 그들은 3월에 그를 웨이버에 올렸다.[87] 그를 영입하는 팀은 없었고, 플러리는 블랙호크스에서 시즌을 마감하며 54경기에서 12골과 21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16] 시즌 후, 2003년 4월, 그는 리그의 물질 남용 프로그램 위반으로 다시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88] 이 출장 정지로 그의 NHL 경력은 끝났다.
3. 4. 시니어 하키 및 벨파스트 자이언츠 (2004-2009)
2005년 1월, 플러리는 사촌 토드 홀트와 전 NHL 선수 지노 오지크, 사샤 라코비치, 도디 우드와 함께 앨런 컵을 목표로 노스 피스 하키 리그의 호스 레이크 썬더에서 뛰게 되었다고 발표했다.[89] 그는 또한 호스 레이크 퍼스트 네이션의 아이들의 역할 모델이 되기를 희망했다.[90] 하키 앨버타는 2003-04 시즌 동안 프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2004-05 시즌에 그가 시니어 하키에 출전하는 것을 처음에는 금지했다. 하키 앨버타는 2004-05 NHL 록아웃 기간 동안 NHL 선수들이 시니어 팀에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행한 새로운 정책을 이유로 항소를 거부했다.[91] NHL과 전미 하키 리그 선수 협회가 모두 플러리가 록아웃된 선수가 아닌 자유 계약 선수라는 데 동의한 후, 두 번째 항소에서 결정을 번복했다. 플러리는 2005년 1월 22일 썬더에서 첫 경기를 치렀고, 골 하나와 어시스트 두 개를 기록했다.[92]플러리는 2005년 앨런 컵 토너먼트에서 계속 논란에 휩싸였다. 썬더는 아마추어 팀임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에게 돈을 지불했다는 비난을 반복적으로 받았고,[90][93] 플러리는 그가 비밀리에 10만 달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을 격렬히 부인했다.[94] 토너먼트 팬들은 썬더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이었고, 준결승에서 탈락한 후 플러리는 그들이 인종차별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2002년 올림픽 금메달을 돌려주겠다고 위협했다. "이 모든 일에서 저를 정말 괴롭혔던 한 가지는 원주민에 대한 이 나라의 편견이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들어가는 모든 경기장에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대우받는지 직접 목격했고, 캐나다인으로서 그런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정말 당혹스러운 일입니다."[95]
플러리는 친구의 설득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2005-06 EIHL 시즌에 엘리트 아이스 하키 리그 (EIHL)의 벨파스트 자이언츠에서 뛰게 되었다.[96] 그는 에든버러 캐피털스와의 첫 경기에서 해트트릭 3골을 넣고 4개의 어시스트와 싸움을 벌였다.[97] 그는 34경기에서 22골과 52어시스트를 기록했고,[98] 벨파스트는 정규 시즌 리그 타이틀을 획득했다.[99] 영국에서 뛴 "가장 재능 있는" 선수로 묘사된 플러리는 EIHL의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퍼스트 팀 올스타로 영국 아이스 하키 기자 협회에 의해 선정되었다.[100] 플러리는 방문 팬들과[101] 임원들과도 언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2006-07년에 벨파스트로 돌아가지 못했다.[102]
2008년 말, 플러리는 형 테드와 함께 스타인바흐 노스 스타스에 합류하여 앨런 컵 우승에 두 번째로 도전했다.[103] 그는 13번의 리그 경기에 출전하여 8골과 19어시스트를 기록했다.[104] 2009년 앨런 컵 토너먼트에서 그는 골 하나와 어시스트 하나를 기록하여 홈팀 노스 스타스가 첫 경기에서 5-0으로 승리하도록 이끌었고,[105] 토너먼트 득점 선두와 7점으로 동률을 이루었다.[106] 노스 스타스는 준결승에서 사우스 이스트 프레리 썬더에게 4-2로 패했다.[107]
3. 5. NHL 복귀 시도 (2009)

NHL에서의 선수 생활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불만을 품은 플러리는 2009년 2월에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하고 NHL 복귀를 시도했다. 8월까지 그는 게리 베트먼 커미셔너에게 출장 정지 해제를 청원했다.[20] 그는 베트먼, 부 커미셔너 빌 데일리 및 리그 의사와의 회의 후 9월 10일에 복귀가 허가되었다.[108] 플러리는 그 후 플레임스로부터 트라이아웃 제안을 받아들였다.[109] 그는 NHL 수준에서 여전히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의 회의론자들은 그의 자녀 양육비 지급, 콘크리트 사업의 실패, 그리고 자서전 출판 계획을 지적하며 플러리의 복귀가 재정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110]
그는 9월 17일 뉴욕 아일랜더스와의 캘거리에서의 시범 경기에서 데이먼 랭코 및 나이젤 도스와 함께 라인업에 합류하여 NHL에 복귀했다.[111] 플러리는 경기 내내 뜨거운 환호를 받았고, 승부샷에서 유일한 골을 넣어 플레임스에게 5–4 승리를 안겨주었다. 경기 후 그는 팬들이 "테오! 테오! 테오!"를 연호하자 관중들에게 경례했다.[112] 사흘 후, 그는 플로리다 팬서스와의 5–2 승리 경기에서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했다.[113]
플러리는 플레임스에서 방출되기 전 4번의 시범 경기에 출전하여 4득점을 기록했다. 단장 대릴 서터는 플러리의 시도에 자부심을 표현하고 그의 노력을 칭찬했지만, 그가 캠프에서 6명의 최고 윙어 중 한 명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서터와 플러리는 트라이아웃 지속 조건에 동의했었다.[114] 2009년 9월 28일, 플러리는 펭그로스 새들돔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복귀를 시도할 수 있도록 해준 플레임스에 감사를 표하며 선수 생활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플러리는 다른 팀으로부터 제안을 받지 않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나는 캘거리 플레임으로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캘거리 플레임으로 은퇴해야 했습니다. 긴 여정이었어요. 뿌리를 내릴 때입니다. 그리고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115]
3. 6. 국제 대회 경력
플러리는 1990년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에서 캐나다 시니어팀 소속으로 데뷔하여 9경기에서 11점을 기록하며 캐나다 팀을 4위로 이끌었다.[16] 그는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복귀하여 1991년 대회에서 캐나다가 은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116] 1990-91 시즌에 51골을 기록한 플러리는 1991년 캐나다컵에도 출전하여 7경기에서 1골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117] 5년 후, 그는 캐나다컵의 후속 대회인 1996년 아이스하키 월드컵에 참가했다. 그는 4골을 기록하며 대회 4위를 기록했지만,[118] 캐나다는 결승전에서 미국 팀에 마지막 4분 동안 4골을 내주며 준우승에 머물렀다.[119]1998년 동계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NHL 선수들이 올림픽 아이스하키 토너먼트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캐나다의 "드림팀"에 합류하라는 초대를 받은 플러리는 자신의 선발을 인생의 하이라이트라고 묘사했다.[120] 그는 캐나다를 위해 골을 넣었지만, 준결승전에서 체코에게 승부샷 끝에 패배하여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121] 4년 후, 플러리는 단장 웨인 그레츠키의 초청으로 2002년 올림픽 캐나다 대표팀 선발 캠프에 참가했다. 그의 행동 문제와 약물 남용 문제가 이전 몇 달 동안 점점 더 공개적으로 알려지면서 이 초청은 논란이 되었다.[122] 플러리는 그레츠키의 지지를 정당화하고 싶었고, 실패하면 고려 대상에서 제외될 것을 알고 2001–02 NHL 시즌 동안 술을 마시거나 약물을 복용하지 않으며, 나중에 자신을 "술을 끊은 알코올 중독자"라고 묘사했다.[123] 그는 팀에 합류하여 6경기에서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캐나다 아이스하키팀이 50년 만에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124] 플러리는 이 챔피언십을 자신의 경력의 정점으로 생각한다.[125]
3. 6. 1. 1991년 캐나다 컵 우승
1990-91 시즌에 51골을 기록한 플러리는 1991년 캐나다컵에 출전하여 7경기에서 1골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캐나다의 우승에 기여했다.[117]3. 6. 2.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
1998년 동계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NHL 선수들이 올림픽 아이스하키 토너먼트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캐나다의 "드림팀"에 합류하라는 초대를 받은 플러리는 자신의 선발을 인생의 하이라이트라고 묘사했다.[120] 그는 캐나다를 위해 골을 넣었지만, 준결승전에서 체코에게 승부샷 끝에 패배하여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121]3. 6. 3.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 금메달
2001–02 NHL 시즌 동안 플러리는 술을 마시거나 약물을 복용하지 않으며, 나중에 자신을 "술을 끊은 알코올 중독자"라고 묘사했다.[123] 그는 웨인 그레츠키 단장의 초청으로 2002년 동계 올림픽 캐나다 대표팀 선발 캠프에 참가했다. 그의 행동 문제와 약물 남용 문제가 이전 몇 달 동안 점점 더 공개적으로 알려지면서 이 초청은 논란이 되었다.[122] 플러리는 그레츠키의 지지를 정당화하고 싶었고, 실패하면 고려 대상에서 제외될 것을 알고 있었다. [123] 그는 팀에 합류하여 6경기에서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캐나다 아이스하키팀이 50년 만에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124] 플러리는 이 챔피언십을 자신의 경력의 정점으로 생각한다.[125]4. 성 학대 피해 고백 및 사회 운동
4. 1. 그레이엄 제임스 성 학대 폭로
키어스티 맥렐란 데이의 도움을 받아 플러리는 자신의 자서전인 ''불장난''을 썼고, 이 책은 2009년 10월 16일에 출간되었다. 그는 하키 코치 그레이엄 제임스에게 2년 동안 성적 학대를 받았다고 썼다. 그는 "제임스에게 학대당한 대표적인 인물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플러리는 자신의 발언이 다른 아동 성적 학대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도움을 받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126]이 책은 캐나다에서 가장 많이 팔린 논픽션 도서가 되었다. 플러리와 그의 아내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그들이 받는 우편물을 처리할 수 없었다.[127] 이 책은 1997년에 출간되어 당시 그가 겪고 있던 많은 문제들을 다루지 않았던 ''퓨리''에 이은 플러리의 인생에 관한 두 번째 책이다.[128]
''불장난''은 출간된 지 일주일 만에 아마존.ca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플러리는 자신의 책을 통해 도움을 받고자 연락을 취한 여러 성 학대 피해자가 있다고 말했다.[129]
그는 2009년 10월 CBC에 제임스를 상대로 형사 고소를 고려하고 있으며, 남성 성 학대 피해자를 돕는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130][129] 제임스의 또 다른 피해자인 셸던 케네디는 플러리에게 고소를 하라고 권했다.[131] 2010년 1월, 플러리가 고소장을 제출하기 위해 경찰관과 만난 후 위니펙 경찰의 수사관들이 조사를 시작했다.[132]
제임스는 플러리와 그의 사촌 토드 홀트를 학대한 혐의로 유죄를 인정했다.[133] 제임스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이 결정은 관대한 처벌이라는 이유로 캐나다 전역에서 분노를 자아냈다. 플러리는 캐나다인들의 반응을 칭찬하며 성범죄자에게 더 가혹한 처벌을 요구했다.[134] 플러리는 동기 부여 연사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해 왔다.[135]
맥렐란 데이는 이 자서전을 '불장난: 테오 플러리 이야기'라는 1인극으로 각색했으며, 이 연극은 2012년 캘거리의 앨버타 극장 프로젝트에서 제작되었다.[136] 플러리와 그의 자서전은 또한 2012년 HBO 캐나다의 다큐멘터리의 주제가 되었다.[137]
4. 2. 사회 운동 참여
플러리는 약물 및 알코올 중독, 성 학대 경험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 왔다. 그는 성 학대 피해 청소년 옹호자이며, 외상 치료, 중독 프로그램, 정신 건강 서비스 접근성 개선을 지지한다.[138][139] 자서전에서 그는 성 학대가 자신을 "분노에 찬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었다고 비난했으며,[140] 2004년에는 장전된 총을 입에 넣고 자살을 생각했다고 주장했다.[141] 그는 소득 대부분을 알코올, 마약, 도박, 여성에게 썼다고 밝혔다.[142]플러리는 뉴욕 레인저스에서 뛰는 동안 13번 연속 약물 검사에 실패했지만, NHL은 그가 최고 득점자였기 때문에 출전 정지를 원치 않았다고 주장했다. 리그는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약물 남용 프로그램이 적절하게 작동했다고 밝혔다.[143]
플러리는 캘거리에서 하키 학교를 설립하여 수익금을 유소년 하키 협회에 기부했다.[144] 1995년 크론병 진단을 받은 후, 캐나다 크론병 및 궤양성 대장염 재단과 협력하여 캘거리에서 연례 골프 토너먼트를 개최, 1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했다.[145] 그는 플레임스 동문회 행사에 참여하고, 캘거리 드림 센터에서 자원 봉사한다.[147]
플러리는 캐나다 방송 공사의 Battle of the Blades에 참가하여 상금을 어린 시절 학대받은 남성을 지원하는 자선 단체인 The Men's Project에 기부했다.[148] 2004년 11월 캐나다 방송 공사와의 인터뷰에서, 1년 반 전에 NHL 경력을 끝낸 약물 및 알코올 중독과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149] 2005년 9월 18일, 그는 술을 끊었고, 두 번째 부인 제니퍼의 도움 덕분이라고 말했다. 플러리는 제니퍼가 자신의 중독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면 관계가 깨질까 두려웠고, 그녀의 도움으로 알코올과 마약 남용을 끊을 수 있었다.[150]
5. 논란
시어런 플러리는 제이미 살레와 함께 캘거리에 본사를 둔 보수 성향 미디어 매체 Canadians for Truth와 함께 온라인 프로그램인 ''The Theo & Jamie Show: Fire and Ice''를 진행한다.[154] 정치적으로 플러리는 보수주의자이지만, 과거 연방 선거에서 자유당에 투표한 적이 있다.[155][156]
플러리는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회의론자이다. 2019년 말에 바이러스에 대한 보고가 처음 나왔을 때 플러리는 이 바이러스가 "완전한 헛소리"라고 말했다.[139] 그는 마스크 및 백신 의무화를 지지하는 앨버타 주 총리 제이슨 케니와 저스틴 트뤼도 총리를 포함한 자유당 및 보수당 정치인을 비판했다.[139][157][158] 또한 그는 이버멕틴을 코로나19 치료제로 홍보했으며, 이에 대한 사용에 관해 주류 언론이 "완전한 허위 정보 캠페인"을 벌였다고 비판했다.[159]
그는 폭스 뉴스 진행자 터커 칼슨에게 캐나다가 "권위주의적" 국가이며 트뤼도가 "다섯 개의 단체"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말했다.[139] 2022년 1월 폭스 뉴스 진행자 로라 잉그래엄과의 별도 인터뷰에서 그는 트뤼도가 익명의 외국 단체에 의해 통제되고 있으며, 캐나다 호송 시위가 "혁명"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믿음을 반복했다.[160]
2021년 브랜든 대학교는 플러리가 트위터에서 코로나19 백신 여권이 소아성애자들이 아이들을 추적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이 발언을 "그의 유산에 오점"이라고 칭했다. 대학교는 이전에 2015년에 플러리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159][161] 플러리는 또한 "그레이트 리셋" 음모론을 홍보했다.[162]
2018년 플러리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진보보수당 기금 모금 행사에서 초청 연사로 참여했다.[163] 그는 연합 보수당의 회원이며, 2017년 연합 보수당 대표 선거에서 브라이언 진을 지지했다.[164] 그는 2022년 연합 보수당 대표 선거에서 다니엘 스미스를 지지했다.[139] 2022년 캐나다 보수당 대표 선거에서 플러리는 조셉 부르고를 지지하고 그의 캠페인에 참여했다.[165][166]
2023년 캐나다 산불 기간 동안 플러리는 진보주의자들이 산불을 무기화하여 대중에게 "기후 봉쇄"를 강요하려 한다고 주장했다.[167]
5. 1. 음모론 및 정치적 발언
시어런 플러리는 제이미 살레와 함께 캘거리에 본사를 둔 보수 성향 미디어 매체 Canadians for Truth와 함께 온라인 프로그램인 ''The Theo & Jamie Show: Fire and Ice''를 진행한다.[154] 정치적으로 플러리는 보수주의자이지만, 과거 연방 선거에서 자유당에 투표한 적이 있다.[155][156]플러리는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회의론자이다. 2019년 말에 바이러스에 대한 보고가 처음 나왔을 때 플러리는 이 바이러스가 "완전한 헛소리"라고 말했다.[139] 그는 마스크 및 백신 의무화를 지지하는 앨버타 주 총리 제이슨 케니와 저스틴 트뤼도 총리를 포함한 자유당 및 보수당 정치인을 비판했다.[139][157][158] 또한 그는 이버멕틴을 코로나19 치료제로 홍보했으며, 이에 대한 사용에 관해 주류 언론이 "완전한 허위 정보 캠페인"을 벌였다고 비판했다.[159]
그는 폭스 뉴스 진행자 터커 칼슨에게 캐나다가 "권위주의적" 국가이며 트뤼도가 "다섯 개의 단체"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말했다.[139] 2022년 1월 폭스 뉴스 진행자 로라 잉그래엄과의 별도 인터뷰에서 그는 트뤼도가 익명의 외국 단체에 의해 통제되고 있으며, 캐나다 호송 시위가 "혁명"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믿음을 반복했다.[160]
2021년 브랜든 대학교는 플러리가 트위터에서 코로나19 백신 여권이 소아성애자들이 아이들을 추적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이 발언을 "그의 유산에 오점"이라고 칭했다. 대학교는 이전에 2015년에 플러리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159][161] 플러리는 또한 "그레이트 리셋" 음모론을 홍보했다.[162]
2018년 플러리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진보보수당 기금 모금 행사에서 초청 연사로 참여했다.[163] 그는 연합 보수당의 회원이며, 2017년 연합 보수당 대표 선거에서 브라이언 진을 지지했다.[164] 그는 2022년 연합 보수당 대표 선거에서 다니엘 스미스를 지지했다.[139] 2022년 캐나다 보수당 대표 선거에서 플러리는 조셉 부르고를 지지하고 그의 캠페인에 참여했다.[165][166]
2023년 캐나다 산불 기간 동안 플러리는 진보주의자들이 산불을 무기화하여 대중에게 "기후 봉쇄"를 강요하려 한다고 주장했다.[167]
6. 기타 활동
1994년, 플러리는 전 주니어 코치였던 그레이엄 제임스, 동료 NHL 선수 조 사키치, 프로 레슬러 브렛 하트와 함께 웨스턴 하키 리그의 확장 팀인 캘거리 히트맨의 소수 지분을 소유한 그룹에 합류했다.[168] 그는 1997년 제임스가 셸던 케네디와 다른 선수를 성적으로 학대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팀 지분을 플레임스에 매각했다.[169]
영국에서 돌아온 후, 그는 아내 제니퍼와 형 트래비스와 함께 시작한 콘크리트 밀봉 사업인 플러리 콘크리트 코팅스를 운영했지만, 2009년에 문을 닫았다.[170] 그는 2007년에 자신의 콘크리트 사업을 기반으로 한 리얼리티 TV 시리즈인 "테오렌 플러리: 록 솔리드"의 파일럿 에피소드를 촬영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꿈이 있다면 약간의 야망만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라고 플러리는 이 쇼에 대해 말했다.[171] 이 쇼는 어떤 방송사에서도 채택되지 않았다.
2008년 의류 브랜드 "FAKE"(플러리의 예술적 맞춤 기업)를 출시하면서, 그는 골든 베이스볼 리그의 캘거리 바이퍼스에 접근하여 자신의 연습 유니폼 브랜드를 사용하도록 설득하려 했다.[172] 이 대화는 홍보 차원에서 플러리가 바이퍼스에서 경기를 뛰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172]
그는 2008년 8월 9일, 40세의 나이로 프로 야구 데뷔를 하여, 유마 스콜피온스와의 대타 출전에서 안타를 쳤다.[173] 그는 두 번째 경기에서 좌익수로 선발 출전하여 두 번의 삼진 아웃을 당한 후 교체되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이미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제가 한 일들, 이룬 일들에 가끔 스스로 놀라곤 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그런 날이었습니다."라고 플러리는 바이퍼스에서의 출전에 대해 말했다.[173]
6. 1. 사업
1994년, 플러리는 전 주니어 코치였던 그레이엄 제임스, 동료 NHL 선수 조 사키치, 프로 레슬러 브렛 하트와 함께 웨스턴 하키 리그의 확장 팀인 캘거리 히트맨의 소수 지분을 소유한 그룹에 합류했다.[168] 그는 1997년 제임스가 셸던 케네디와 다른 선수를 성적으로 학대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팀 지분을 플레임스에 매각했다.[169]영국에서 돌아온 후, 그는 아내 제니퍼와 형 트래비스와 함께 시작한 콘크리트 밀봉 사업인 플러리 콘크리트 코팅스를 운영했지만, 2009년에 문을 닫았다.[170] 그는 2007년에 자신의 콘크리트 사업을 기반으로 한 리얼리티 TV 시리즈인 "테오렌 플러리: 록 솔리드"의 파일럿 에피소드를 촬영했다.[171] 플러리는 이 쇼에 대해 "우리는 사람들에게 꿈이 있다면 약간의 야망만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171] 이 쇼는 어떤 방송사에서도 채택되지 않았다.
2008년 의류 브랜드 "FAKE"(플러리의 예술적 맞춤 기업)를 출시하면서, 그는 골든 베이스볼 리그의 캘거리 바이퍼스에 접근하여 자신의 연습 유니폼 브랜드를 사용하도록 설득하려 했다.[172] 이 대화는 홍보 차원에서 플러리가 바이퍼스에서 경기를 뛰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172]
그는 2008년 8월 9일, 40세의 나이로 프로 야구 데뷔를 하여, 유마 스콜피온스와의 대타 출전에서 안타를 쳤다.[173] 그는 두 번째 경기에서 좌익수로 선발 출전하여 두 번의 삼진 아웃을 당한 후 교체되었다. 플러리는 바이퍼스에서의 출전에 대해 "저는 제 인생에서 이미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제가 한 일들, 이룬 일들에 가끔 스스로 놀라곤 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그런 날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173]
6. 2. 컨트리 음악
2015년 9월, 플러리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2015년 가을에 발매될 컨트리 음악 음반 작업을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174] 그는 "My Life's Been a Country Song"이라는 제목의 첫 싱글을 발표했고, 이 싱글은 공개된 지 24시간 만에 SoundCloud에서 2만 회 이상 재생되었다.[174] 그의 데뷔 음반인 ''I Am Who I Am''은 2015년 10월 16일, eOne Music 캐나다를 통해 발매되었다.[174]플러리는 자신의 컨트리 음악 야망이 6년의 과정이었다고 말했으며, 음악 업계 전문가로부터 보컬 및 공연 훈련을 받았다.[175] 그는 오랜 친구인 필 데샹보와 패디 맥칼리온과 협력하여 30곡이 넘는 분량의 곡을 함께 작곡했으며, 이 중 10곡이 앨범에 수록되었다.[176]
2017년, 플러리는 Madden NFL 18 스토리 모드를 위해 "Longshot"이라는 곡을 작곡했다.[177]
7. 수상 및 영예
| 상 | 연도 | |
|---|---|---|
| 주니어 | ||
| WHL 동부 올스타 퍼스트 팀 | 1987 | |
| WHL 동부 올스타 세컨드 팀 | 1988 | [178] |
| 밥 클라크 트로피 | 1988 (공동 수상) | [179] |
| IIHF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 토너먼트 올스타 | 1988 | [180] |
| NHL | ||
| 스탠리 컵 챔피언 | 1989 | |
| NHL 플러스-마이너스 상 | 1991 (공동 수상) | [39] |
| NHL 세컨드 팀 올스타 | 1995 | [38] |
| 캘거리 플레임스 | ||
| 몰슨 컵 | 1991, 1993, 1996, 1998 | [181] |
| 엘리트 아이스 하키 리그 | ||
| 올해의 선수 | 2006 | [100] |
| 퍼스트 팀 올스타 | 2006 | [100] |
플러리는 하키 업적 외에도 캐나다 인도주의 상과 퀸스 주빌리 메달을 수상했다.[182] 이 메달은 캐나다에 상당한 공헌을 한 개인에게 수여된다.[183] 이 상과 함께 플러리는 애보리지널 인스파이어 상도 받았다. 또한 플러리는 캐나다 국민의 정신 건강에 뛰어난 공헌을 하여 명예 시크시카 네이션 추장과 궬프-험버 대학교에서 명예 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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